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 (99)화 (100/227)

99화 정착기 (49)

나는 사람이 죽고 사는 것에는 다 때(운명)가 있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총탄이 빗발치고 사방팔방에서 폭발이 일어나는 전장에서 무려 5년이나 뒹군 나는 끝내 죽지 않았는데, 정작 우리 부모님은 인구 천만이나 있는 도시에서 폭격을 맞고 허무하게 돌아가실 운명이었단 말인가?

그래서 나는 같잖은 운명보다는 지극히 합리적이고 분명한 ‘이유’야말로 누군가의 인생 방향을 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선인이 보답을 받는 것은 선하기 때문이고, 악인이 처벌받는 것은 악인이기 때문이라는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확고부동한 이유야말로 이 사회를 바로잡기에 제격이니까.

나는 북한군을 상대로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던 그날처럼, 무심하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거점창을 조작했다.

거점 내 CCTV 화면 속에서 모습을 비춘 인간 형태의 금수 새끼들은 105mm 고폭탄 한 발을 얻어맞자마자 꽁지가 빠지게 역 안으로 숨어 들어갔다.

첫 포격으로 5명을 산산조각 내 버렸고, 그밖에도 자잘한 부상자를 발생시켰다.

놈들이 허둥지둥대며 부상자를 끌고 역 안으로 숨어 들어가는 모습은, 놈들 때문에 밀양 시내 한복판에서 개죽음당한 사람들에게 심심찮은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거기서 그칠 생각은 없었다.

포격을 가한 것은 어차피 놈들을 죄다 역 안으로 몰아넣기 위한 페이크(다소 과격한)였고, 진짜 선물은 역 내부에 잔뜩 준비해 두었으니까.

뉴 밀양역은 지금까지 내가 확보한 거점들 중에서 경희대 병원과 맞먹을 만큼 규모가 컸는데, 실질적으로 열차가 존재하는 플랫폼이나 선로까지 합치면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대놓고 중개역 역할군이 붙은 거점인데 과연 그곳을 지킬 방위 무기가 없을까?

놀랍게도 처음 거점창을 열어서 확인했을 때 뉴 밀양역만큼은 절대 붕괴하지 않겠구나 하는 자신감이 들 정도였다.

뉴 밀양역의 구조나 역할 특성상 앞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고 서비스를 이용하게 될 텐데, 고정형 자동 포탑이나 머신 피스톨 터렛으로 그들을 모두 지키고 관리하는 건 불가능했다.

시스템도 그 점을 신경 썼는지 뉴 밀양역에는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방위 무기를 배치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병원을 지키기에 걸맞은 [멸균 시스템]처럼, 뉴 밀양역에도 컨셉에 걸맞은 방위 무기인 [경비 로봇]이 등장한 것이다.

“휘유, 무시무시하네요. 가까운 미래에 드론이나 로봇견이 아니라 진짜 사람처럼 움직이는 군용 로봇이 나올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 이런 형태로 보게 될 줄이야.”

옆에서 같이 CCTV 화면을 지켜보고 있던 김진경 경장이 혀를 내둘렀다.

그의 말대로 화면 속에 등장한 뉴 밀양역 전용 방위 무기인 경비 로봇은 정말로 근미래에 등장할 법한 외관을 가지고 있었다.

무한궤도(캐터필러)로 굴러가는 하반신, 그리고 두터운 방호 장갑이 부착된 상반신과 고성능 카메라가 부착된 머리, 한쪽 팔에는 고정형 기관포를, 다른 한쪽에는 무언가를 집을 수 있는 전용 기계 팔을 달고 있는 것이 소형 건 탱크를 연상시켰다..

인간형은 인간형이지만 좀 더 기계에 가까운 느낌이라고 할까, 어쨌든 그런 경비 로봇이 무려 10대나 있다.

내가 미리 역 안쪽에서 배치시켜 둔 경비 로봇은 외부인 요격 설정을 ON으로 바꿔 두었기 때문에, 겁 없이 안쪽으로 밀고 들어온 군인들을 포착하자마자 즉시 붉은 안광을 흩뿌렸다.

어둠 속에서 인간보다 먼저 상대를 포착한 살인 기계가 뭘 하겠는가?

당연히 흔들림 없는 편안한 침대 같은 느낌으로 기관포를 쏴 갈기고, 등 뒤에 부착된 백팩형 유탄 발사기에서 저속 유탄을 투사하는 것이었다.

난데없는 기관포 세례 앞에선 아무리 잘 무장한 인간이라도 발길질에 부서지는 모래성이나 다름없었다.

20mm 기관포가 인간의 몸을 타격한 순간 전해지는 막대한 운동 에너지는 기껏해야 세라믹 방탄판을 삽입한 방탄복 정도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20mm부터는 ‘총’이 아니라 ‘포’ 취급을 받는다. 때문에 소총탄이라면 어찌어찌 방어할 수 있었을 방탄복도 살점과 함께 문자 그대로 분해되었다.

주먹보다 커다란 바람구멍이 하나, 둘, 셋, 넷, 다섯.

1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성인 남성 한 명이 가지고 있는 부피와 질량을 반 이상 없애 버렸다.

멀쩡한 성인 남성 하나를 원형도 알아볼 수 없는 고깃덩어리로 만든 기관포는 순차적으로 다음 대상을 향해 불을 뿜었고, 마치 콩알탄처럼 통통 바닥을 튕기며 굴러간 40mm 저속 유탄은 놈들의 발밑에서 펑 터졌다.

충격 신관이 따로 없기 때문에 수류탄처럼 3~4초 정도 지난 뒤에야 폭발하는 저속 유탄은 실내에서 쓰기 안성맞춤이었다.

그렇게 역 안으로 들어온 쓰레기들을 정리했다. 내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음에도 경비 로봇들이 알아서 상황을 판단하고 적을 철저하게 말살한 것이다.

오직 뉴 밀양역을 지키기 위한 용도로 배치된 방위 무기라 다른 거점으로 가지고 올 수 없다는 게 정말 아쉬웠다.

-[침입자 무리 잔당 확인]

거점창으로 들어온 경비 로봇의 보고대로, 역 입구 근처에서 부상의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는 놈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애시당초 저놈들은 야심한 시각에 뉴 밀양역에 침투하여 우리를 조지고 거점을 날로 먹을 의도였다. 그러니까 우리와 접촉하지도 않고 무장 병력을 보낸 것이겠지.

테러리스트나 은행 강도조차 빈말로라도 협상을 요구하는데, 저놈들은 협상 시도조차 하지 않았으니 나 역시 대화를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아, 안 돼!

-살려 줘!

-그만…… 여기서 나갈 테니까 제발!!

CCTV 너머로 들려오는 구슬픈 목숨 구걸에도 내 감정은 조금도 요동치지 않았다.

차라리 도축장에 끌려가는 가축의 울음소리가 저것보다 더 불쌍하게 들렸을 만큼.

너희가 강 건너 불구경하듯 수십만의 생명을 고통 속에서 바스러지게 했으니 이제 그 죗값을 받아야지.

그렇게나 쉽게 버릴 국민들의 목숨이었다면, 대체 왜 6년 전에 우리 같은 불쌍한 청년들을 희생시키면서 온갖 생색을 냈던 거냐?

“쓰레기 분리수거가 끝났네요. 이제 뉴 밀양역을 걱정할 필요는 없겠어요.”

경비 로봇들이 마지막 잔당까지 기관포로 깔끔하게 조지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CCTV 화면을 끄고 거점창을 닫았다.

아직 밀양시를 완전히 ‘청소’한 건 아니지만 지금은 일단 이 정도로 충분했다. 당장 급한 부산역부터 장악하고 나서, 경상도의 커뮤니티를 되살리는 김에 밀양시에 자리 잡은 나머지 금수 새끼들을 살처분할 것이다.

저쪽의 사정을 계산해 보면 부산역 문제를 해결한 뒤라고 해도 늦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모든 물자가 부족한 이 시국에, 억만금을 주고도 쉽게 구할 수 없는 중무장 2개 소대 병력이 깔끔하게 증발해 버렸다.

상대 세력의 규모가 최소 1개 대대 이상이라고 해도 몹시 뼈아픈 실책일 터. 또 같은 방법으로 뉴 밀양역을 노리지는 않을 것이다. 노린다고 해도 상관없고.

“그런데 이대로 밀양을 완전히 정리하지 않고 부산으로 내려가도 되겠습니까? 만약 저들이 작정하고 포격 같은 걸 퍼붓기라도 하면…….”

“포격을 할 거라면 우리가 무방비하게 야외에서 고기 파티나 벌이고 있을 때 벌써 했을 겁니다. 아니, 우리가 밀양시에 도달하기 전, 저들 손으로 직접 밀양시를 파괴할 때 포격 수단을 사용했겠죠. 하지만 포격 흔적은 없었습니다. 그런 시도도 없었고요.”

좌푯값을 딸 수 있는 정찰 드론까지 운용할 수 있으면서 포격을 하지 않은 이유는 저들에게 포격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드론 운용반은 수색대 역할을, 드론 운용반과 함께 움직이는 즉각 대응반은 타격대 역할을 대신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신속 기동과 초동 대처가 목표인 만큼 군용 차량을 다수 보유하고는 있겠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는 알보병 부대라는 뜻이다.

애초에 잠재적 적성국인 중국과 러시아를 최전방 국경에서 감시, 견제할 목적으로 창설된 부대인데 멀쩡한 포병 놔두고 곡사포나 자주포까지 운용할 리가 없잖은가.

정확히는 다른 부대와 연계해서 그들이 일할 수 있게 도움을 주는 한편, 그들이 일하기 전까지 적들을 붙들어 놓으며 시간을 버는 게 목적인 부대다.

대대적인 포격은 고사하고 기껏해야 박격포나 몇 개 들고 다니면 다행인 놈들이다.

그리고 얼마 있지도 않은 박격포로 화력을 집중시킨다고 한들, 뉴 밀양역의 막대한 내구도에 흠집조차 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포격 같은 걸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그나마 재고가 빵빵했을 설치형 폭약도 밀양시 건물과 교각을 파괴할 때 대부분 사용했을걸요. 그리고 남아 있는 놈들은 돌아오는 길에 처리하면 됩니다.”

“그건…… 그렇군요. 설마 거기까지 다 예측한 겁니까?”

“예측했다기보단 그냥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내가 싸우는 상대가 누구인지, 상대가 어떤 수단을 사용하는지, 또 어떤 수단이 남아 있는지,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보다 보면 알아서 계산 결과가 나온다.

밀양시를 그 지경으로 만든 놈들에게 대규모 살상 능력이 더 이상 남아 있을 리가 없고, 남아 있는 건 끽해야 알보병들뿐.

하지만 우리가 직접 맞서 싸우면 상대가 보유한 개인 화기 때문에 화력에서 밀릴 테니 일부러 뉴 밀양역으로 유도해서 처리한 것이다.

우린 불필요한 피를 흘릴 필요 없고, 상대만 손해를 보게 만들었다. 그거면 된 것이다.

이제 빈집 털이 걱정을 할 필요 없는 뉴 밀양역을 뒤로 한 채, 우리는 ATX를 다시 출발시켰다. 김진경 경장과 채성아는 휴식을 위해 먼저 객실 안으로 들어갔다.

생존자가 한없이 ‘0’에 가까울 위험천만한 부산으로 진입하기 전에, 모든 팀원들의 컨디션을 맞출 필요가 있었기에 너무 서두르지는 않았다.

밀양의 끝이 얼마 남지 않은 평원에서, 밀양과 양산의 경계선이나 다름없는 산 아래로 접근하자 새로운 터널 입구가 우리를 반겨 주었다.

시스템의 막강한 현실 개벽 능력에 의해 기존에 없던 선로가 깔린 덕분일까, 말끔하게 정비된 산맥 아래 터널을 통과하자마자 곧바로 양산 시내가 눈에 들어왔다.

팀원들이 객실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지금, 나는 기존의 KTX보다 훨씬 더 느릿느릿한 속도로 달리고 있는 ATX의 바깥 공간에서 차가운 바람을 맞았다.

마치 거대한 산맥의 요람 아래에서 모든 것이 잠들어 있는 듯한 고요한 광경.

부산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도시치고 양산은 상당히 발전이 더딘 지역이었다.

바로 옆의 김해도 베드타운이라고 불릴지언정 제법 발전된 곳이 많았는데, 양산은 하필 산맥에 둘러싸여 있는 좁은 도시라 그런지 발전이 이루어질 건더기조차 없었다.

그 때문일까, 피난민들에게도 인기가 없는 곳으로 전락했다.

숨어 지내면서 농성할 만한 곳도 없고, 부산 옆에 위치한 것치곤 도시의 규모도 상당히 작아서 오래 머무르기도 힘들었다.

게다가 군대가 김해와의 유일한 연결망인 교각을 파괴해 버렸으니, 결국 이곳의 유령 도시화는 확정적이었다.

당연하게도 나 역시 물자를 재보급하기 위해 양산에 잠시 들렀다 간다는 계획은 세우지 않았다. 여긴 경상도 지역 전체를 복구하더라도 크게 쓰일 일은 없을 테니까.

“승권 씨도 좀 쉬는 게 어때요? 다른 사람들보다 신경 쓸 게 많아서 꽤 피곤하실 것 같은데요.”

갑갑한 무장을 해제한 채성아가 바람을 쐬고 있는 내 옆으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걱정해 주었지만, 나는 적당히 손사래를 쳤다.

“자고 싶어도 못 자요. 이런 상황에서만 잠이 안 오는 직업병이 있거든요.”

“아…….”

“제 걱정은 마시고 먼저 들어가서 쉬세요. 부산역에 진입하는 건 내일 이른 새벽이나 아침 전이 될 테니까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이거 드릴게요.”

채성아는 드링크 바에서 막 타 온 것 같은 따스한 코코아 한 잔을 내게 넘겨주었다. 바람결에 좋은 냄새가 흘러나온다 싶더니만.

“잘 마실게요.”

내게 코코아를 건네준 채성아가 싱긋 웃으며 객실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빛 한 점 보이지 않는 도심을 눈에 담으며 조용히 코코아를 홀짝였다.

밀양에서도, 양산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부산 역시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사방 천지에 죽음이 만연하군.’

나는 언제쯤 죽음을 벗 삼지 않고 편히 잠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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