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정착기 (46)
사람이 안전 불감증에 걸리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먼 나라’ 이야기를 많이 접하기 때문이다.
타국에서 발생한 전쟁, 자연재해, 감염병의 창궐 등등, 어디선가는 비일비재한 일이 자신에게 직접 해악을 끼친 적은 없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무신경해지는 것이다.
불과 6년 전까지만 해도 북한이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느니, 핵을 쏴서 남조선괴뢰도당을 싹 멸하겠다느니 같은 발언을 밥 먹듯이 해도 다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다 결국 때아닌 전쟁을 한 번 더 겪기는 했지만, 그 충격 요법조차도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암이 심각하게 진행된 환자에게 항암제가 제대로 듣지 않듯이.
그런 점에서 좀비 사태가 발발했을 당시의 밀양은 안전 불감증 환자들의 도시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밀양 시장은 좀비 사태를 단순한 감염병 유행으로만 보고 검역소를 설치했을 뿐, 머지않아 피난민과 함께 몰려들 좀비에 대한 대응책은 세워 두질 않았다.
늙은 정치인들이 으레 그렇듯, 그는 좀비가 무엇인지도 몰랐으며,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후에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했다.
모종의 감염병에 걸린 사람들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 불편함을 감내하면서 정부의 지침을 잘 따라 줄 것이라 생각했고, 함락된 서울은 머지않아 국군이 수복할 것이라 여겼다.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된 근본적인 관점의 차이 때문에 밀양은 좀비 사태에 대응할 수 있는 골든 타임을 놓치고 말았다.
바로 위에 있는 대구가 수백만 피난민을 수용할 긴급 계획을 세우고, 어떻게든 주변의 군부대를 긁어모아 최적의 방위선을 구축하는 사이에도 시간을 허비했다.
결국 뒤늦게 엄청난 피난민이 몰려들었음에도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당연한 결과를 낳았다.
“선생님! 차례를 지켜 주세요!”
“야, 이 미친 새끼야! 우리가…… 우리가 어디서 도망쳐 왔는지 알기나 해?! 이 문 당장 열어!!”
“검역 절차에 따라 주십시오! 간단한 검사와 신원 확인만 하면 끝날 일입니다!”
“우리가 병 걸린 사람들처럼 보여?! 우리가 병에 쫓겨서 여기 온 것 같냐고! 저 밖에 사람 잡아먹는 괴물들이 득시글거린다고!!”
“밀양은 안전하게 보호되고 있습니다. 검역 절차에 응하지 않을수록 불편해지는 건 여러분입니다. 부디 지시에 따라 주십시오!”
“밀지 마!”
“빨리 들여보내 줘!”
“이 판국에 검역은 얼어 죽을 검역! 독감 검사라도 하겠다는 거냐?!”
보건소와 병원에서 파견 나온 의료인들이 검역소에서 진땀을 빼는 동안, 경찰들은 검역소를 기준으로 세워 둔 임시 바리케이드를 묵묵히 지켜야 했다.
밀양 외부에서 갑작스럽게 몰려든 피난민들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순식간에 밀양역 앞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콰아아아아앙!
그때 저 멀리서 들리는 엄청난 폭음에 고래고래 악을 지르고 있던 사람들의 움직임이 일순 멈췄다.
폭음은 한 번으로 멈추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폭탄으로 만들어진 도미노를 무너뜨리는 것처럼 순차적임 진동이 사람들을 떨게 만들었다. 대규모 폭격이 떨어지던 6년 전의 그날을 떠올린 사람이 대부분이었으리라.
불행 중 다행스럽게도 그들을 떨게 만든 것은 폭격이 아니었다.
밀양을 둘러싸고 있는 교각들이 차례차례 폭파되기 시작한 것이다. 대대적인 방위선을 구축하기 어렵겠다고 판단한 군부대에 의해서. 정확히는 그들을 지휘하는 ‘높으신 분들’에 의해서.
“바, 방금 무슨 소리야?!”
“설마 또 전쟁이라도 터졌나?”
“전쟁은 무슨! 이 판국에 전쟁 일으킬 미친 놈들이 어딨다고!”
“그럼 저 폭발은 뭔데!”
“아, 아! 안심하십시오, 여러분! 방금 전 인근 군부대로부터 연락이 들어왔습니다. 여러분들의 안전을 책임지기 위해 외부와 연결된 교각을 파괴하는 작업이었다고 합니다!”
밀양은 특이하게 내륙 도시임에도 커다란 강에 둘러싸여 보호받고 있는 천혜의 요새 같은 도시였다. 이론상 강을 건널 수 있는 교각만 모조리 파괴해 버리면 외부에서 쉽사리 침입할 수 없었다.
물론 밀양역 인근은 강으로 보호받고 있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육로로 접근이 가능하지만, 일단 교각을 모두 끊은 것으로 피난민들의 불안한 마음을 달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반쯤은 거짓이라고 해도.
“교, 교각이 모두 끊어졌다면 조금은 안전해진 건가?”
“그럼 얼른 빨리 검역부터 받고 안쪽으로 들어가자고. 계속 여기 있다간 불안해서 못 견디겠어.”
“조금만 참자. 삼문동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안전해. 거긴 도시 내부에 있는 섬이니까…….”
대부분 가족 아니면 연인과 함께 피난을 온 상황.
갑작스러운 폭발에 대부분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곧 피난민들의 안전을 위한 대응책의 일환이었다는 얘기를 듣고 기세가 누그러들었다.
당장이라도 들여보내 주지 않으면 폭동을 일으킬 듯한 분위기에서, 지금은 짜증 나지만 참고 기다릴 수 있는 수준으로 진정된 것이다.
하지만 피난민들이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었으니, 이 세상에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사실이었다.
나만, 우리만 살 수 있다면 ‘너희’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도시의 최중심부에 득시글거리고 있었다. 좀비 떼처럼.
결국 비밀리에 의료인과 경찰 병력에 철수 명령이 떨어지고, 피난민들을 잠시 대기시켜 둔 그들은 서둘러 마지막 남은 교각을 넘어 삼문동(섬) 안으로 피신했다.
그들이 받은 철수 명령에는 ‘군인들의 도시 봉쇄 작업이 끝났다’라는 상당히 함축적인 의미가 담겨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일단 기다려 보자며 검역소 앞에 모여 있던 피난민들은 어느 순간 이상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들은 눈앞에서 도시의 마지막 내부 교각이 폭발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저, 저저……?!”
“아니, 이게 무슨!”
“야, 이 개새끼들아!!”
“엉엉…… 엄마!”
시민, 군대, 경찰, 의료인, 같은 나라 국민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배신당한 피난민들은 졸지에 밀양역 앞에서 고립되었다.
밀양역은 운영되고 있지 않다. 이미 대량의 피난민을 태운 기차는 모두 다른 지역으로 떠났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되돌아 나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자니 너무나도 늦은 감이 있었다.
그들을 바싹 쫓아온 좀비 떼가 퇴로를 막고 있었기에.
그 뒤에 이어진 것은 무수한 폭발과 인위적으로 발생한 대화재, 좀비와 사람의 비명과 피륙이 난무하는 대학살극이었다.
* * *
“보고드립니다! 현재 밀양역 인근에 접근한 외부인 무리의 규모는 대략 1개 중대 수준인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무장 상태는?”
“복식이 통일되어 있지 않으며, 잡다한 무기와 보호구로 무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정규군에 비할 바는 아닙니다. 다만…….”
“다만?”
“중장비와 차량을 적극 동원하여 도로 위의 잔해를 치우거나 빠르게 이동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걸 전부 굴리려면 정비해야 할 사람과 대량의 기름이 필요한데, 떠돌이 집단이 운용할 수 있을 만한 것이 아닙니다. 저들은 도시 내부를 정찰하기 위한 선발대이고, 본대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합리적인 추론이군. 요즘 같은 시대에 주인 없는 주유소를 턴다고 해도 저만한 규모의 중장비와 차량을 운용하기는 힘들지. 하지만 무장 수준이 형편없는 걸 보면 군대와 관련이 있는 건 아닐 텐데, 자네가 보기에는 어디에서 나타난 무리인 것 같나?”
“남포동 방면에서 올라오는 것을 저희 부대의 드론 운용반이 확인했으니, 김해 아니면 양산에서 올라온 무리일 것입니다. 부산은 진즉에 망했으니 논외로 했습니다.”
창원에서 올라온 무리라면 창녕군 방면을 거쳐 정반대로 밀양에 접근했을 테니, 부관의 말대로 김해 아니면 양산에서 올라온 무리일 가능성이 높았다.
울산일 가능성도 있지만, 그쪽은 부산이 망하면서 사람들이 급하게 포항으로 대피했다고 들었으니 앞의 두 지역보다는 가능성이 낮았다.
책상 앞에 앉아 군용 대형 통신기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대령 계급의 남성은 한쪽 귀에만 쓰고 있던 헤드셋을 내려놓았다.
주기적으로 전파 중계기 역할을 하는 드론을 띄워 타 지역에 아직 남아 있는 군부대의 무전 내용을 들으려 했지만, 아직 대구와 포항을 제외하면 타 군부대의 생존을 확인하지 못했다.
이 판국에 정규군도 아니고, 스스로 무장한 민간인 집단이 중장비와 차량까지 동원해 가면서 엉망이 된 도로를 밀고 올라왔다?
이성철 대령 입장에선 이미 죽어 버린 것과 다름없는 밀양에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저 무리의 저의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교각은 모두 끊어졌기 때문에 이제 와서 외부인이 밀양 내부에 존재하는 2개의 섬에 접근할 방법은 없다.
정작 섬 안으로 숨어든 밀양 시민과 군대, 경찰은 필요하면 얼마든지 보트를 띄워 외부에서 물자 조달을 하거나 낚시도 할 수 있었지만, 외부인이 그런 사정까지 알아낼 수 있을 리가 없다.
당장 밀양 근처에 접근하기만 해도 이 도시가 철저하게 파괴되었다는 선입견을 가지고서 발걸음을 돌릴 게 뻔하니까.
그런데 저들은 발걸음을 돌리기는커녕, 오히려 이곳이 당초 목적이었다는 양 당당하게 전소된 밀양역 앞에 자리 잡았다.
그 폐허에서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물자도, 정보도, 교훈도.
남아 있는 거라곤 다 타 버리고 남은 재와 처참하게 무너진 잔해, 그리고 인간과 좀비의 시체뿐이다.
‘뭐가 목적이지? 섬으로 들어오려는 게 목적이라면 혹시 아직 끊어지지 않은 교각이 있는지부터 확인했을 터. 하지만 저들은 우리가 자리 잡고 있는 섬엔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드론 운용반에서 보고서와 함께 올린 녹화 영상을 확인한 그는 미간을 찡그렸다.
의도가 명확한 적은 의도가 불분명한 아군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저들이 적인지 아군인지는 둘째 치고 의도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오히려 섣불리 접근할 수 없었다.
‘차라리 평범한 약탈자 무리였다면 역으로 우리가 치고 나가서 저들이 가진 것을 약탈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저들은 평범한 약탈자 무리가 아니야.’
평범한 약탈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폐허를 뒤지지 않는다. 뭔가 있을 법한 곳을 뒤지지.
텅 빈 곳간에 쥐새끼가 드나드는 걸 봤나? 약탈자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일단 드론 운용반에게 지속적으로 저 무리를 감시하게 하고, 가능하면 저들이 우리의 존재를 눈치채는 일이 없도록 신경 쓰게.”
“예! 달리 지시하실 것이 더 있으십니까?”
“이런 곳에 중장비까지 끌고 올 놈들이면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다는 것이니, 만일에 대비해서 대응반을 대기시켜 두도록. 여차하면 놈들을 일거에 쓸어 버리고 놈들이 가진 것을 우리가 취하면 그만이니.”
“확인했습니다.”
부관이 경례를 하고 집무실을 떠나자 이성철 대령은 피곤함에 찌든 얼굴에 마른세수를 했다.
하지만 이 짓거리도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그 잘난 체하던 밀양 시장의 지병이 악화되어 죽을 날이 머지않았다. 그럼 머지않아 대중의 지지도가 내게 쏠리겠지.’
겉으로는 국민을 위하는 척, 밀양 시장의 무리한 요구를 마지못해 들어줘야 했던 참된 군인인 척하느라 힘들었다.
그가 사라지고 나면 자연스레 새로운 기득권층은 자신의 차지가 될 터. 슬슬 이 작은 도시에 웅크려 지내던 것도 그만둘 때가 됐다.
‘버려진 군사기지나 비밀 군수품 창고, 곡식 창고가 지방 곳곳에 퍼져 있다. 군부대가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지금,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는 그것들을 내가 먼저 확보하기만 하면…….’
힘만 있는 자는 오래가지 못하고, 가진 것만 많은 자는 금세 빼앗긴다.
하지만 힘이 있고 가진 것도 많다면?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절대 권력의 지배자가 될 수 있다.
행복한 상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그때, 문이 쾅 하고 열리며 조금 전 나갔던 부관이 다급한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보고드립니다! 밀양역이……!”
이성철은 뒤를 잇는 부관의 보고를 듣고 자신의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