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 (95)화 (96/227)

95화 정착기 (45)

“이곳에서 생존자 수색은 더 이상 하지 않겠습니다. 솔직히 여긴 기분 나쁘거든요. 더 볼 것도 없습니다.”

어느 정도 마음을 다잡고 다시 모인 일행 앞에서 나는 그렇게 못 박았다.

이 도시는 죽은 도시다. 살아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좀비조차 이곳에는 코빼기도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좀비들도 아는 것이다. 이곳에는 자신들이 먹을 만한 인간이 더 이상 없다는 걸.

그래서 우리가 이곳까지 오는 길에 좀비들과 마주치지 않은 거다. 좀비들에게 있어서 밀양은 죽은 사냥터였으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지 않나?”

“이 광경을 보고도 ‘혹시’라는 말이 나옵니까?”

이만철이 조심스럽게 묻기에 내가 반문했다.

그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고 착잡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겉보기엔 산적처럼 생긴 곰 같은 남자라고 해도 사실은 평범한 대한민국의 가장 중 한 명이었을 테니, 그 심정이 어떨지는 모르는 바 아니다.

혹시라도 이곳에 숨어 지내고 있을 불쌍한 사람이 있다면 챙겨야 하는 것 아니냐, 그런 말 정도는 꺼낼 수도 있지.

하지만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이곳에서만큼은 그런 제안을 용납할 수 없다.

무고한 민간인을 미끼 삼아 좀비와 이 도시를 끝장내 버린 금수 새끼들이 살고 있을 저 섬으로 넘어가기 싫기 때문이다. 당초 목적대로 밀양역만 접수하고, 부산으로 내려갈 생각이다.

“여기서 밀양역을 접수하고 잠시 휴식 시간을 가졌다가 우리는 부산으로 남하할 겁니다. 그곳에서 부산역을 확보하여 대량의 화물과 기차를 손에 넣고, 최종적으로는 경상도 전체로 세력권을 확대할 발판을 마련할 겁니다.”

중장비와 수많은 호위 인력을 동원해서 간신히 고속 도로를 뚫어야 했을 만큼 인간이 도보로 움직이기 힘든 상황이다.

도로 위에 널려 있는 각종 건물 잔해나 폐차량도 문제지만, 도로 위에서 작업하는 인간들을 노리는 좀비들도 골머리 아픈 존재다.

때문에 선로 위를 맹렬하게 내달리는 기차라면 물리적으로 방해받을 일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좀비들이 우르르 몰려든다고 해서 기차의 움직임을 저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애초에 내륙에서 장거리 이동과 다수의 사람, 물자 운송에 기차보다 더 제격인 것도 없다.

무엇보다 우리가 발을 내딛게 될 또 다른 도시에서 이런 꼴을 보지 않으려면 더욱 적극적으로 발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수색 팀, 밀양역 내부 상황은 확인했나요?”

“내부에 숨어든 민간인이 농성하던 흔적이 있었으나, 모두 밀양을 습격했던 좀비들에게 당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거기에 화재와 폭발에 휩쓸려서 그런지 멀쩡한 곳이 거의 없더군요. 지금은 더 이상 생존자도, 좀비도 없습니다.”

“……솔직히 역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 엄청난 격전을 벌일 각오까지 했는데, 불행 중 다행이라면 다행이겠네요.”

치열한 격전은 부산역으로 떠날 미래의 나에게 맡겨 두기로 하고.

나는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천천히 밀양역 입구 앞으로 걸어갔다.

2020년대 초에 정부 주도하에 확장, 증축 공사가 이루어지면서 한층 더 규모가 커진 밀양역이 눈에 들어왔다.

2차 남북 전쟁 때문에 남부 지방에서 북부로 더 많은 화물을 실어 보낼 필요가 있었고, 그렇게 역의 규모가 기존에 비해 1.5배 정도 확장된 것이 현재의 밀양역이다.

경상도에서 가장 유명한 두 도시, 부산과 대구를 이어 주는 중간역이자 경상도 철도 교통의 중심부, 수많은 기차들이 선로 위로 내달렸던 이 유서 깊은 장소는 지금 불에 타서 흉한 몰골로 전락해 버렸다.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고, 필요에 의해 불태워지고, 참 야속한 운명인 것 같지만 그래도 한 번 더 필요에 의한 부름에 답해 주었으면 한다.

“거점 지정.”

그러고 보니 채성아를 제외하면 누군가가 지켜보는 앞에서 거점 지정 스킬을 사용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던가?

이참에 내가 가진 힘에 대해 사람들이 좀 더 알았으면 한다. 내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이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뇌리에 새기길 바란다.

그래야 내 앞에서 허튼 생각을 품지 않게 될 테니까. 이 도시를 불살라 버린 금수 새끼들처럼.

드드드드드드드!

곧 내 스킬에 반응한 밀양역이 지진이라고 착각할 만한 엄청난 진동과 함께, 3D 홀로그램처럼 외관이 휙휙 바뀌기 시작했다.

불타고, 벽이 무너져 내린 흉한 몰골은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말끔하게 사라졌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방금 막 지었다고 해도 믿을 만큼 깔끔한 벽이었다.

언제라도 손님들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양, 넓은 입구까지 이어지는 긴 출입로와 그 주변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화단이 생겼다.

아름다운 길의 끝에는 새롭게 탄생한 밀양역이 거대한 성채처럼 위광을 흩뿌리고 있었다.

폭격을 맞아도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튼튼함이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강화 콘크리트와 철골 구조에 둘러싸인 밀양역은 마치 벙커를 요새화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기존에 없던 새로운 선로도 만들어졌는데, 그 이유는 밀양시 중심부의 섬을 관통하는 교각이 끊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이게 고작 한 명이 가진 능력이라고?”

“분명 다 쓰러져 가던 폐허나 다름없었는데, 능력 하나로 이렇게까지 바뀌다니……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

“이거 고생해서 밀양까지 온 이유가 있었구만.”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탄성과 경외 어린 반응에 평소의 나였다면 어깨가 으쓱해졌겠으나,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거점 지정 스킬에 따른 거점의 리뉴얼 작업이 무사히 끝나고, 이제 사람이 마음껏 돌아다녀도 되겠다 싶을 때 앞장서서 걸어 들어갔다.

내가 먼저 뉴 밀양역으로 들어가니 그제야 다른 일행도 내 뒤를 따라 조심스럽게 걸어 들어왔다.

좀비 아포칼립스로 망한 세상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말끔하게 정비된 출입로와 그 주변을 장식하고 있는 아름다운 화단이 바깥의 풍경과는 상당히 언밸런스하다.

밀양역을 구성하고 있는 외벽은 가까이서 보니 질감부터 달랐는데, 총탄 정도로는 흠집도 안 날 것 같았다.

슬쩍 거점창을 확인해 보니 거점 내구도가 무려 5만이었다.

좀비의 공격 1회가 내구도를 1만큼 감소시킨다고 가정해 보면, 단순 계산상으로도 5만 번이나 공격받아야 거점이 완전히 박살 난다.

확실히 이 거점이 가지는 영향력이나 가치, 규모를 따져 보면 그에 걸맞는 내구도였다.

지이이잉.

입구의 자동문이 열리자 역 내부의 쾌적한 실내 공간이 우리를 반겨 주었다.

한겨울에도 손님들이 추위에 떨지 않도록 따스한 난방이 돌아가고 있는 것은 물론, 공기가 탁해지지 않도록 공기 청정기도 돌아가고 있었다.

누가 막 락스 칠로 광을 낸 듯한 매끄러운 바닥은 걷기만 해도 기분이 좋았고, 드넓은 대합실에는 최소 수백 명이 넘는 손님들이 대기할 수 있는 좌석이 보였다.

특이하게도 매표소는 없었는데, 그 대신 각종 편의 시설과 휴게실, 상점, 그리고 사정이 여의치 않은 손님들이 잠시 머무르다 갈 수 있는 숙박 시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국제 공항에 비하면 규모가 그리 큰 건 아니지만, 그래도 실용성 하나만큼은 공항을 웃도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꼭 별천지를 구경하는 기분이었다.

‘홈마트는 누구나 편하게 물자를 가져갈 수 있는 창고형 대형 마트로 리뉴얼되었지만, 밀양역은 아예 대놓고 손님을 받으라는 구조로 바뀌었네?’

그런 생각을 하며 거점창을 확인해 보니 꽤 놀라운 정보가 눈에 들어왔다.

-거점 : 밀양 중개역

-특수 구역 : 지하상가, 카페테리아, 캡슐 호텔, 화물 창고, 헬리포트

다른 거점에선 볼 수 없었던 특수 구역이 무엇인가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거점 일원과 외부자에게 DNA 샘플 물물 거래 품목(별도 지정)을 대가로 받고 상품이나 서비스를 상시 판매, 제공할 수 있는 유료 시설이었다.

즉 음식점에 들러서 가볍게 식사 한 끼 하고 캡슐 호텔에서 1박 하고 싶다면 거점 주인인 내가 정한 일정 대가를 지불하고 이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나를 포함한 소수 정예나 다름없는 거점 방위자에겐 따로 값을 받지는 않지만, 평범한 거점 일원이나 외부인은 대가를 지불해야만 사용할 수 있는 구조라…….

아무래도 화폐라는 개념이 무너진 세상에서 적절한 대가를 지불하고 무언가를 구매할 수 있는 대체 시스템으로 추정된다.

먼 옛날 원시인들조차 빛나는 돌이나 조개 따위로, 식량이나 가죽 등을 물물 교환했었으니, 이 간단한 상거래 시스템조차 없다면 사회를 재건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나쁘지 않아, 나쁘진 않은데…… 섣불리 도입하기엔 조금 망설여지는 시스템이군.’

우리를 제외하면 당장 먹고살기도 힘든 사람들이 천지인데 각성자들만 구할 수 있는 DNA 샘플을 주 화폐로 삼는 건 말도 안된다.

그렇다고 물물 거래를 하자니 시세를 정하기가 어렵다. 나는 경제학 전공자도 아니니까.

그래도 본격적으로 커뮤니티가 활성화되고, 이곳을 이용하는 사람이 최소 수천에서 수만 명이 된다면 시험 삼아 도입해 봄 직하다. 적어도 지금 논할 부분은 아니겠지만.

애초에 상가나 숙박 시설 같은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것만큼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한다.’

‘그걸’ 내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는 재미없게 거점창으로 스포일러를 당할 생각 따윈 없다.

여전히 밀양역 내부 구경에 푹 빠진 사람들을 내버려 두고, 나는 곧장 플랫폼으로 내려갔다.

사실 밀양역을 거점으로 지정하면서 내심 기대하긴 했지만 정말 내 바람이 이루어졌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그래도 가능하면 이루어졌으면 한다.

그래야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으니까.

그리고 밀양역을 이 꼴로 만든 놈에게 한 방 먹여 줄 수 있을 테니까.

“오오.”

선로 외부에서 침입자가 침투하지 못하도록 전기가 흐르고 있는 철책이 쭉 이어져 있는 광경에 살짝 감동을 받았다.

선로가 이어지는 곳이라면 어디든 잠재적으로 내 밀양역 거점의 영향을 받는다는 게 확인된 것이다.

그것보다도, 플랫폼을 쭉 달려 나간 나는 마침내 화물전용 수송 열차와 KTX가 정차되어 있을 별도의 격납고로 향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기차역이 완전히 오픈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기차도 정비 점검이 필요하기 때문에 격납고가 존재하는 역도 있다.

마치 주인이 오길 기다렸다는 듯 자동으로 개방되는 격납고의 격벽. 그 너머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한 금속 덩어리의 모습에 나는 무심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지금이라면 거점창을 확인할 수 있다. 아니,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무장 KTX……!”

속도를 중시해서 굉장히 날렵하게 생긴, 일본의 신칸센보다는 살짝 듬직한 외형을 자랑하는 KTX는 무려 동체의 기존의 외형마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먼저 앞에서 달려드는 것이라면 뭐든지 들이박고 밀어 버릴 수 있는 두껍고 날카로운 충각 장갑, 거기서부터 이어지는 메인 프레임과 동체의 측면에 부착된 두꺼운 추가 장갑은 딱 봐도 방호력이 높아 보였다.

또한 열차 지붕 위에는 군함의 갑판을 연상케하는 별도의 금속 합판이 쫙 깔려있었다.

 그 합판 위에 설치된 거치형 기관총이나 자동 포탑, 탐조등은 로망 그 자체였다. 마치 꿈에서만 그리던 육상 전함을 떠올리게 하는 광경이었다.

“잠깐, 저건 설마…… 곡사포?”

객실 차량만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내 예상과는 달리 KTX의 가장 끄트머리, 꼬리 칸 지붕 위에는 별도의 곡사포 탑재 공간이 존재했다.

미군이 사용하는 표준 105mm 곡사포, 아무래도 열차 위에 얹으려다 보니 무거운 155mm가 아니라 105mm 곡사포를 채용한 듯 했다.

물론 필요하다면 방위 무기들을 거점창에 수납해서 걸리적거리는 일이 없게끔 할 수도 있다. 

21세기에 무장 열차를 손에 넣는, 아니 직접 타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나는 드디어 만족스럽게 거점창을 외칠 수 있었다.

-특수 거점 : ATX(Armored Train eXpress)

-내구도 : 5000/5000

-배치 가능한 방위 무기 : 12.7mm 자동 포탑 x3, 거치형 5.56mm 경기관총 x5, 105mm 열차 곡사포 x1, 접근 저지용 화염 방사기 x10, 투사형 연막탄 x10

-특수 조건 : 해당 열차는 선로가 존재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이동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해당 열차에선 모든 거점관련 스킬 효과가 동등하게 적용됩니다.(예시 : 최후의 보루(A+))

단 내구도를 완전히 상실할 경우 거점이 파괴된 것으로 간주하여 영구적으로 수리 및 사용이 불가능합니다.

자동 내구도 회복은 상시 적용되며, 응급수리를 위해서는 ‘전문 수리(B-이상)’ 스킬이 필요합니다.

나는 말없이 박수를 쳤다.

꽉 막혀 있던 우리의 앞길이 풀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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