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정착기 (43)
우리는 기어이 중장비를 이용해 막힌 도로를 뚫고 한림면까지 올라왔다.
“역시 이렇게 됐네요…….”
가장 먼저 한림면의 풍경을 살핀 채성아가 씁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채성아는 이 근방 출신이었으니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한림면은 ‘읍’의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으나, 면의 범위가 꽤 넓은 행정 구역인 데다 한림역이라는 기차역도 하나 보유하고 있다.
나름 번화가 비스름한 시내도 있고, 또 드넓은 논밭에서 각종 농작물을 키우는 농가도 제법 자리 잡고 있다. 한림면에서 서쪽으로 조금 더 나아가면 드넓은 평야에 세워진 각종 공장들도 볼 수 있다.
김해는 매우 특이하게 논밭과 공업 단지가 짬뽕이 된 지역이라 이런 광경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좀비 사태 초기, 군인들이 이런 곳을 제대로 지켰을 리가 만무하다.
그나마 한림역이라면 몇몇 경찰과 군인들이 지켰을지도 모르겠으나, 결국 내외부에서 몰려오는 좀비들에 의해 중과부적이었겠지.
당장 우리가 여기까지 오던 길에 갈대밭에 숨어 있던 좀비 떼만 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가? 이 주변은 더 이상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것이다.
“이곳은 주변이 온통 평야라 특정 장소에서 농성을 하며 버틸 수 없는 환경이에요. 쉬지 않고 움직일 수 있는 좀비들에겐 그야말로 최적의 사냥터였겠죠.”
채성아는 무언가의 습격을 받아 철저하게 박살 난 건물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차량들이 시내로 들어선 와중에도 생존자들이 튀어나오지 않는 걸 보니 그녀의 말이 맞았다.
“당시에는 저 혼자 죽기 살기로 도망치느라 이곳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는데, 이런 광경을 보게 될 줄 알았다면 차라리…….”
“세상만사가 그렇게 자기 뜻대로 쉽게 돌아가는 구조였다면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지도 않았겠죠. 그래서 누구나 한 번밖에 못 사는 인생, 최선을 다해 살거나 반대로 허무할 정도로 미련하게 사는 것 아니겠어요? 눈앞의 광경이 최악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런 걸 계속 신경 쓰다 보면 어느샌가 사람의 뇌는 버티지 못하고 망가져 버리거든요.”
“……제가 너무 실없는 소리를 했네요. 방금 건 잊어 주세요.”
마음을 다잡은 채성아가 코끝을 킁 하고 훔치면서 컴파운드 보우를 뽑아 들었다, 나는 그녀를 비롯해 몇몇 팀원들과 함께 차량에서 내려 주변 경계에 나섰다.
차량 행렬은 이대로 한림역 주변까지 움직여 임시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고, 우리는 이 근방에서 혹시 모를 위험 요소나, 아직 누가 건드리지 않은 물자가 남아 있는지 수색할 예정이다.
생존 물자는 내가 홈마트와 병원에서 가져온 것만으로도 여기 있는 사람들을 족히 한 달은 먹여 살리고도 남겠지만, 반대로 나만 없으면 이들 모두 얼마 버티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내가 작전 중 불가피하게 일행과 떨어지거나, 혹은 일행이 뿔뿔이 흩어지거나 한다면 원활하게 물자 공급을 할 수 없다.
그런 불상사에 대비해 원정을 나서는 중에도 꾸준히 물자 수색을 해서 미리 일행에게 나눠 주거나, 특정 장소에 물자가 보관되어 있다는 정보를 공유해야 한다.
그냥 속 시원하게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물자들을 미리 나눠 주면 되는 것 아니냐고?
다소 비인간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나는 항상 ‘갑’의 위치에 있어야 한다.
내가 다른 각성자보다 우위성을 가지는 이유는 압도적인 물자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들보다 직업 숙련 레벨이 더 높거나, 더 강하거나 하는 사실은 부차적이다. 적과 아군(동료)을 모두 완벽하게 통제하려면 몸과 마음을 모두 압박할 수 있어야 한다.
내 힘은 상대의 몸을 물리적으로 지배할 수는 있지만 마음까지 지배하지는 못한다. 힘으로만 상대를 압박하면 특유의 반발 심리를 억누를 수 없다는 얘기다.
그러니 채찍과 당근을 모두 적절하게 사용해서 내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항상 갑의 위치에 있게 만들어야 한다.
즉 내가 가진 풍족한 물자를 무작정 호구마냥 쉽게 나눠 줄 수 없다는 뜻이다.
“드넓은 논밭이나 몇몇 구역을 제외하면 워낙 작은 마을(면)이다 보니 특별히 눈에 띄는 건 없습니다. 논밭이 관리가 안 되어 있다는 점, 안타깝게도 미곡 처리장이 불타서 건질 게 없다는 점이 그나마 신경 쓸 만한 부분이겠네요.”
수색 팀에서 유독 눈이 좋은 한 사내가 가볍게 주변을 정찰한 뒤에 올린 보고였다.
사람이 없으니 겨울철에 논밭이 관리가 안 된 건 당연한 거고, 농협에서 관리하는 미곡 처리장이 불탄 건 아마도 좀비를 막기 위해 이곳 주민들이 어떤 수를 쓰려다 태워 먹은 게 아닐까 싶다.
미곡 처리장이 멀쩡하게 남아 있었다면 곡식이라도 좀 챙겨서 이만철 일행에게 나눠 주려 했는데, 그건 좀 아쉬웠다.
한림역 근처에 다다른 우리는 이 작은 마을에서 몇 안 되는 편의점이나 할인 마트까지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건질 수 있었던 물자는 그리 많지 않았는데, 이곳에도 좀비 사태가 발발하기 전에 주민들이 불안함에 떨며 물건을 사재기했던 흔적이 있었던 것이다.
주변에 크고 작은 아파트나 주택가가 있었으니, 작은 마을이라고 해도 최소 1만 명 이상은 거주했을 터. 피난을 가든, 집에 숨어 있든 식량은 필요했을 테니 주변 상가를 마구 털었겠지.
안 그래도 규모가 작은 할인 마트 매대에 남은 거라곤 통조림 몇 개가 전부였다.
신선 식품은 관리가 안 된 탓에 죄다 썩어 버린 지 오래였고, 그나마 좀 남아 있는 것들도 식품이 아닌 잡다한 생활용품 정도였다.
“안쪽 창고도 가 봤는데 냉장고에 전기가 안 들어와서 식품은 죄다 상했고, 부피가 너무 무거워서 사람들이 챙겨 가지 않았던 술 궤짝만 몇 개 찾았습니다.”
팀원 몇 명이 낑낑대며 가지고 나온 술 궤짝에는 낱개로 가져갈 수 없게끔 포장된 소주나 맥주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
제아무리 한국인이 술에 미쳐 사는 민족이라고 해도 낱개로 몇 개 가져갈 수 없는 술 궤짝까지 가져갈 틈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시대에 기호품은 생각보다 가치가 높다.
담배와 술.
문명사회가 정체된 이상 필연적으로 유흥거리가 부족해진다. 따라서 원초적인 향락을 제공하는 두 기호품의 가치가 높아지는 건 당연했다.
정작 나는 생존 물자에 담배와 술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아서 가져오지도 않았는데, 그런 기호품들은 아군의 사기 진작에 도움이 된다는 걸 깜빡 잊고 있었다.
최전방의 군인들만 해도 술은 입에 대지도 못했지만, 담배는 당장 내일 폐암으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뻑뻑 피워 대곤 했으니까.
눈뜨고 있는 매 순간마다 입에 담배를 안 물고 있으면 사람이 미쳐 버리는 게 바로 전장이란 곳이었다.
특히 이만철 일행은 술과 담배면 껌뻑 죽는 노동자 집단이니 이걸 풀어 주면 뛸 듯이 기뻐하겠지.
일단 창고에 남아 있는 술, 그리고 계산대 안쪽에 남아 있는 담배를 보루째로 죄다 챙겨서 인벤토리에 넣었다.
내가 기호품을 어떻게 나눠 줘야 잘 나눠 줬다고 소문이 날지 고민하고 있을 때, 채성아는 다른 팀원들을 이끌고 마트 인근의 아파트나 주택가를 훑어보고 돌아왔다.
“주변을 잠시 둘러보고 왔지만 생존자는 없었어요. 집집마다 습격당한 흔적이 꽤나 격렬하게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곳에 숨어 있던 사람들 대부분은 좀비들에게 당한 것 같아요.”
“이곳은 애초에 사람이 적은 곳이니 좀비들도 빠르게 사냥을 끝내고 타 지역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높겠네요.”
아마 이쪽에서 발생한 좀비들은 김해 시내로 곧장 내려와서 생존자 사냥에 합류했을 것이다. 우리가 기습을 받았던 고속 도로 옆 갈대밭도 따지고 보면 한림면보다 김해 시내에 더 가까운 위치였으니까.
주변에 위험 요소가 없다는 걸 알게 된 건 좋은 일이지만, 이렇게 한 번 망가져 버린 곳을 사람의 힘으로 다시 복구하려면 얼마나 많은 인력과 자본이 들어갈지 가늠조차 하기 힘들다.
‘당장 한림면 일대의 논밭만 되살려도 수십만 명의 입은 책임질 수 있을 텐데.’
생존자를 결집시키다 보면 자연스레 인재와 각성자도 모이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처리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런 처참한 현실을 볼 때마다 방구석에 틀어박혀 일평생 넷플러스만 보다가, 조용히 소파 위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내 안락한 노후 생활이 점점 더 멀어지는 기분이다.
이승권의 넷플러스 드림은 정녕 이룰 수 없는 꿈이란 말인가?
‘아니, 과거에 무일푼으로 무작정 미국에 가서 아메리칸 드림을 이뤄 냈던 선조들도 있는데, 나 이씨 가문의 마지막 생존자이자 적법한 계승자, 김해의 군주 이승권이라고 해내지 못할 이유가 없지.’
우선 밀양역이다. 밀양역을 확보하고 부산으로 향할 것이다. 내 넷플러스 드림은 바로 그곳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승권 씨, 이만 돌아가죠.”
“아, 네.”
잠시 실없는 상상이나 하다가 주변 수색을 끝낸 팀원들의 재촉에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한림역으로 돌아오니 이미 숙련된 노동자 집단 이만철 일행이 임시 베이스캠프를 구축해 둔 상태였다.
이들은 밀양역까지만 우리와 함께하고 다시 복귀할 예정이기 때문에, 미리 이곳에 중간 거점을 세워 둘 작정으로 베이스캠프를 지은 듯했다.
마치 숙련된 군인들이 빛과 같은 속도로 24인 텐트를 치는 것처럼, 일분일초라도 더 빨리 쉬고 싶은 아재들의 움직임에는 간절함과 촉박함이 엿보였다.
한림역 입구 앞에 서서 몇몇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이만철에게 다가가니, 그는 말없이 턱짓으로 한림역 안쪽을 가리켰다.
안쪽에서부터 쇠사슬을 걸어 잠근 문 너머에는 핏자국 한 점 없이 깔끔했다.
“역 내부는 의외로 깔끔했던 모양이죠?”
“그래, 우리가 온갖 소음을 내도 쥐새끼 한 마리 나타나지 않더군. 아마 처음 이곳에 숨어들었던 사람들이 주변이 잠잠해지니까 선로를 통해 다른 지역으로 빠져나간 모양이야.”
하긴, 역 앞에서 대놓고 베이스캠프를 구축하고 있는데 청각에 예민한 좀비들이라면 벌써 우르르 몰려오고도 남았을 거다.
처음 이곳에 문을 걸어 잠그고 숨었던 사람들은 아마 운 좋게 사태 초기에서 살아남은 뒤, 이만철의 말마따나 선로를 타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애초에 이런 작은 역에 비상사태를 상정한 피난 시설 구축이나 재난 물자 적재가 제대로 되어 있을 리가 없다. 이곳에 숨어들었던 사람들도 그걸 아니까 곧장 내뺐겠지.
‘우리는 아직 김해 밖 상황을 정확히 모른다. 오히려 김해 외곽에 살았던 사람들이 주변 지역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아.’
최후가 확실하게 알려진 대도시는 서울과 부산뿐이다.
서울은 최초 감염 폭발(팬데믹)로, 부산은 일본발 감염자를 가득 태운 크루즈 선의 입항으로 영혼까지 털렸으니까.
서울과 부산으로부터 비교적 거리가 있는 전남, 혹은 경북은 의외로 김해보다 사정이 더 좋을 수도 있다.
특히 경부선을 타고 생존자가 가장 많이 몰려들었을 대구는 어쩌면 상당수의 생존자들이 결집해서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했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밀양역을 확보하고 기차로 돌아다녀 봐야 알겠지만, 만약 이곳에 있던 사람들이 그 소식을 듣고 대구로 올라갔다면,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야.’
우선은 휴식이 먼저다.
오늘 하루 종일 막힌 도로를 뚫고 한림면까지 올라오느라 다들 녹초가 되었을 테니, 오늘 밤만큼은 푹 쉬고 내일 밀양에 진입할 준비를 해야 한다.
“아, 우선 이거 받으시죠. 저녁 드실 때 다들 가볍게 반주로 하면 될 겁니다.”
“술? 이 귀한 걸 또 어디서…….”
“제가 없는 게 어디 있습니까. 다 가지고 있죠.”
다들 거나하게 취하면 곤란하니까 적당히 몇 잔만 나눠 먹을 수 있도록 술 궤짝을 나눠서 이만철에게 넘겨주었다.
술 궤짝을 받아 들고 희희낙락하며 자신의 일행에게 돌아가는 이만철은 퇴근길에 치킨 사 들고 가는 아빠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