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 (92)화 (93/227)

92화 정착기 (42)

중장비를 필두로 움직이는 대규모 차량 행렬은 마치 모 국가의 열병식을 떠올리게 했다.

실제로 그렇게 웅장하고 위엄 넘치는 광경은 아니지만, 그래도 현재 군대가 아닌 민간인이 동원할 수 있는 전력으로 치면 상당한 수준인 것은 맞다.

노련한 중장비 기사들은 일전에도 많이 해 봤다는 듯, 고속 도로를 막고 있는 폐차량들을 이리저리 치워 냈다.

차량 행렬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만 길을 터 주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작업이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이렇게 시끄러운 소음을 내면서 움직이면 도로 한복판에서 좀비들에게 포위당할 것을 우려해야 하는 것 아닐까 걱정할 수도 있는데, 의외로 또 그렇지만은 않다.

좀비 사태 초기에는 당연히 사람들이 도로 한복판에 많이 몰려 있었으니까 좀비들도 대부분 도로에 몰려들었지만, 한 달 가까이 다 되어 가는 지금은 좀비든 사람이든 모두 도시 안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사람은 안전한 거처를 찾고 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좀비는 그런 사람들을 사냥하기 위해 서로 앞다투어 도심 속으로 뛰어든 것이다.

그러다 보니 지금처럼 고속 도로에는 버려진 차량들만 남아 을씨년스러운 기운을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가끔 비싼 외제차가 중장비에 밀려 허무하게 도로 옆으로 나가떨어지거나 찌그러지는 광경을 볼 때면 괜히 입맛을 다시기도 했다.

저거 하나에 최소 억대 돈은 들였을 텐데, 차주는 좀비가 됐는지 생존자로 아득바득 살아남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나 같으면 재산이 아까워서라도 악착같이 살아남았겠지만.

오늘 우리 목표는 고속 도로를 뚫고 올라가 해가 지기 전까지 한림면 방면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최소 목표일 뿐이고, 그 과정에서 좀비나 또 다른 약탈자 무리에게 기습당할 가능성이 있으니 신중하게 움직여야 했다.

안 그래도 대규모 인원이 움직이는 만큼 신중에 신중을 가하다 보면 자연스레 움직임이 더뎌질 수밖에 없었다.

이번 일을 주도하는 이만철 세력과 우리 측 세력의 능력자들끼리 모여서 사전에 논의해 본 결과, 김해시를 완전히 벗어나려면 2~3일 정도 소요될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냥 차량들만 움직인다면 모를까, 중장비라는 놈이 덩치와는 다르게 꽤 예민한 놈이라 주기적으로 상태를 점검해 줘야 한다는 점이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중장비의 도움 없인 폐차량들이 꽉 막고 있는 도로를 통과할 방법이 없다. 그 부분은 감수해야 해.’

이번 장기 원정에 외부 활동 경험이 있으며, 좀비와 갑작스럽게 전투를 벌여도 패닉에 빠지지 않을 사람들만 뽑아서 데려온 건 다 이유가 있다.

우리가 좀비 밭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 이상, 충돌을 피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도로 외곽 산기슭에서 뭔가 보이네요.”

홈마트에서 가져온 레저 스포츠용 망원경을 들고 조수석에서 창밖을 살피던 채성아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러자 차내에서 조용히 대기하고 있던 다른 팀원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하필 지금 ‘뭔가’ 보였다는 보고는 무의식적으로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다들 침착하고, 일단 차창만 살짝 내려서 총안구로 새총수 사격 대기. 채성아 씨는 산기슭에서 포착된 게 정확히 뭔지 확인해 주세요.”

“수풀과 나무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산이랑은 어울리지 않는 색감이었어요. 움직임도 동물의 그것과는 조금 달랐고요.”

야생 동물이 사람처럼 옷을 입고 다니지는 않을 테니 그녀가 본 것은 아마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사람이거나, 사람의 형태를 한 좀비이거나.

새총수들은 차체 외부에 철판을 덧대어 만들어 둔 총안구로 새총을 겨누고 숨죽였다. 저 새총은 일전에 학교의 약탈자 세력을 처리하면서 구해 온 견본품을 우리가 개량한 것이었다.

총만큼 위력이 대단하지도, 사거리가 길지도 않지만 휴대성이 용이하고 소음이 없으며, 무엇보다 가성비가 괜찮은 원거리 무기였다.

날카롭게 깎아 낸 손가락만 한 크기의 금속 볼트를 장전해서 있는 힘껏 당겨 발사하면 인간의 연약한 살점 정도는 쉽게 찢을 수 있었다. 또 여러 발 당겨서 머리를 집중적으로 노리면 단단한 두개골도 박살 낼 수 있다는 걸 이미 검증한 바 있다.

군사 기지나 규모가 큰 경찰서 무기고를 털어서 본격적으로 총기를 대량 보급하지 않는 이상,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원거리 무기는 다소 구식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넉넉한 재료를 이용해서 화염병이나 소음을 발생시키는 디코이(미끼)는 잔뜩 만들어 왔기 때문에 시가지 전투에서 아주 꿀리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하필 시가지로 진입하기도 전에 수상쩍은 낌새가 포착되었다는 것.

나는 일단 무전기로 다른 차량에도 이쪽에서 뭔가 본 것 같으니 주의하라는 경고를 날렸다.

우리보다 앞서가고 있는 이만철 일행의 차량들은 대부분 중장비에 집중하고 있어서 주변의 수상한 낌새를 파악하는 게 조금 늦었던 것 같다.

곧 저쪽에서 ‘알겠다’는 답이 돌아오기가 무섭게 산 인근의 넓은 갈대밭이 갑자기 파도처럼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채성아뿐만 아니라 나도 포착했기 때문에 확신이 들었다.

우리가 좀비들의 습성이나 태생을 전부 이해하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고.

“놈들이 도로 위로 침범하지 못하게 막아!”

피잉! 팡! 쐐애애애애액!

채성아를 필두로 새총수들이 일제히 원거리 무기를 사용하자 갈대밭 아래에 숨어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던 좀비들 중 몇 놈이 그대로 고꾸라졌다.

모두가 알다시피 김해시는 절반 가까이 산으로 뒤덮여 있다. 그 말인즉슨 꼭 도심이 아니더라도 좀비가 숨어 있을 장소는 존나 많다는 뜻이다.

“끼에에에에에에에에에!”

갈대밭에서 뛰어오른 좀비가 우렁찬 괴성을 내지르자 다른 차량에서도 뒤늦게 호위조가 튀어나와 차량을 지키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좀비들은 도로 한복판에서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는 우리를 그대로 쌈싸 먹을 속셈인지, 무수한 볼트가 날아들어도 개의치 않고 달려들었다.

퍽, 퍽. 마치 수박이 터지는 듯한 불쾌한 파열음이 줄기차게 들려왔지만 결코 안심할 수는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산에서 뛰쳐 내려온 놈들이, 그리고 갈대밭에서 숨죽이고 있던 놈들이 우후죽순으로 튀어나오고 있었으니까.

이만철이 무전기 너머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중장비의 작업 속도를 높이도록 독려했다. 그런 한편, 호위조는 좀비들이 차량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방진을 짜서 대응했다.

“대가리 깨져서 뇌수가 질질 흐르는 새끼들이 여기 뭐 먹을 게 있다고 기어 오나 모르겠다. 안 그러냐?”

“행님! 헛소리 그만하고 몽둥이나 쎄리 휘두르소!”

“흐흐, 니들 오늘 운 좋은 줄 알아라. 지금 우리 컨디션이 최고조거든! 내 불 빠따 한 방이면 그냥……!”

콰직!

좀비들에게 물리거나 할퀴어져도 흠집 하나 나지 않을 갑옷을 걸친 아저씨들이 특유의 허릿심으로 몽둥이나 오함마, 소방 도끼 따위를 휘둘렀다.

기세가 어찌나 대단한지, 일격에 쩌억 하고 좀비의 두개골이 통째로 갈라지는 기염을 토해 냈을 때는 동료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올 정도였다.

우리도 질세라 볼트를 마구 쏴서 좀비들의 사지를 망가뜨리거나, 아예 도로 위로 침범하지 못하게 원천 봉쇄해 버렸다.

무장한 인간들만 자그마치 백 명이 넘었기 때문에 좀비들은 금세 각개 격파당했다. 자신 있게 매복부터 기습까지 가한 것치곤 역으로 털릴 만큼 결과가 안 좋았다.

하지만 전투란 원래 방심할 때가 가장 위험한 법. 나는 운전대를 잠시 다른 팀원에게 맡겨 두고 차량 지붕으로 올라섰다.

‘마침 겨울이라 건조해서 화염병을 던지면 갈대밭을 통째로 불태울 수 있겠지만, 대형 산불로 번질 수도 있으니 자제해야겠지.’

그 대신 소총을 뽑아 들고 정조준 사격을 가해 수풀 속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던 놈들의 뚝배기를 터뜨려 주었다.

통제되지도 않고 제멋대로 뛰어들 만큼 잡스러운 놈들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인간을 습격하고 사냥하는 법을 깨우치게 되면 곤란하니 지금 여기서 최대한 처리해 두는 게 낫다.

탕! 타탕!

짧은 간격으로 사격을 가해 좀비들의 기세를 꺾어 두고, 상점창에서 구입한 따끈따끈한 세열 수류탄 몇 개를 꺼내 들었다.

총기는 더럽게 비싼 것에 비해 수류탄은 의외로 저렴했다. 그 저렴한 가격도 기본 백 단위의 DNA 샘플을 요구하지만, 그 정도 지출은 내 두둑한 지갑이 감당할 수 있었다.

“호 안에 수류탄!!”

대한민국 군필 남성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그 대사를 외치며 수류탄을 투척하자 자연스럽게 전열에 선 호위조가 자세를 바짝 낮췄다.

저건 그냥 본능이다. 호 안에 수류탄 소리가 들리면 일단 자세부터 낮추라고 DNA에 새겨진 K-본능.

나의 투척술에 의해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날아간 알감자는 아직도 좀비들이 우글거리는 갈대밭 한복판에 툭 떨어지고, 이내 맹렬하게 폭발했다.

세열 수류탄은 고폭 수류탄과 다르게 주로 파편을 비산시켜 주변의 모든 고깃덩어리를 찢어발기는 것이 목적이라, 연약한 갈대와 좀비들을 무참하게 도륙해 버렸다.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폭발물 중 가장 작으면서, 크기 대비 살상 반경과 위력이 가장 높은 물건답다.

수류탄은 이미 한번 터진 장소가 아니라, 고르게 던져서 가능한 넓은 반경으로 파편을 많이 흩뿌리는 게 중요하다.

집, 벙커 같은 실내에선 특히 위험한 물건이지만, 이렇게 넓은 경로에서 많은 적들이 한 번에 몰려올 때도 유용하다.

‘아직 감이 죽지는 않았네.’

내가 수류탄을 몇 번이나 던져 봤더라.

보급 부대에게 보급받고 소탕 및 위력 정찰 임무에 나설 때마다 꼭 사용하곤 했던 것 같다.

적들이 싸우기도 전에 항복하면 먼저 간 전우들의 복수를 할 수 없으니, 아예 항복할 틈도 없이 수류탄부터 냅다 까 넣는 건 최전방 부대원들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암묵적인 룰이었다.

그렇게 수류탄을 하나둘 까서 차례차례 던지고, 남아 있는 놈들을 소총으로 처리하고 보니 어느덧 주변이 잠잠해졌다.

옛 기억에 빠져 기계처럼 방아쇠를 당기다가 더 이상 적이 보이지 않아서 총구를 내렸을 때, 문득 주변인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어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의 시선 속에는 희미하지만 경외나 격려보다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마치 종전 선언 후 최전방에서 사회로 복귀한 군인들을 마주하던 일반 시민들처럼.

“……좀비들 때문에 시간이 지체된 것 같으니 서두릅시다. 해 지기 전에 한림면으로 진입해야 해요.”

“그, 그래! 다들 어물쩍대지 말라고! 지금 우리가 놀러 온 줄 알아?! 움직여, 새끼들아!”

눈치 빠른 이만철이 먼저 욕설을 퍼부으며 가까이 있던 동료들의 뒤통수를 가볍게 후려 갈겼다.

그제야 전투의 열기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빠르게 주변을 정리하고 다시 차량 행렬에 복귀했다.

때마침 우리가 고생하는 사이에 중장비 기사들이 앞길을 가로막고 있던 폐차량들을 치워 낸 상태였기 때문에 이 앞으로는 쭉쭉 밀고 올라갈 수 있었다.

지붕에서 훌쩍 뛰어내린 나는 말없이 차에 올라탔다.

밖에서 볼트를 회수해 온 채성아가 쓴웃음을 보이며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나는 손사래를 쳤다.

이제 와서 남들 눈치를 볼 만큼 나는 사회적인 인간이 아니었다.

내 사회성은 6년 전 그날 완전히 개박살 나 버렸고, 지금의 나는 과거의 껍데기만을 두른 채 사회적인 인간의 흉내를 내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내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내심 기대가 될 정도로.

“출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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