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 (91)화 (92/227)

91화 정착기 (41)

대한민국은 현실적으로 식량 자급자족이 불가능한 나라다.

가장 큰 이유는 한반도 대부분이 산으로 뒤덮여 있어 농사와 목축업을 하기에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이 좁아터진 땅덩어리에 산은 또 어찌나 많은지, 만약 지구 온난화로 빙하가 녹아내려 해수면이 크게 상승해도 한국인들은 그놈의 산 때문에 대부분 살아남을 것이라는 말이 있다.

이렇다 보니 대한민국 정부는 오래전부터 농업을 크게 장려해 왔다.

하지만 그렇게 갖은 노력을 들여도 쌀 수급량만 그럭저럭 괜찮게 확보했을 뿐, 국가적 자급자족은 요원한 일이었다.

산이 많으니까 임업으로 먹고살자니 생각보다 효율이 떨어진다. 그렇다고 현대사회에 화전을 일굴 수도 없고, 계단식 논밭을 만드는 것도 한계가 있다. 무엇보다 더 이상 젊은 세대는 힘든 임업이나 농업을 하지 않는다.

그럼 삼면이 바다니까 수산업으로 먹고사는 건 어떨까? 유감스럽게도 중국, 일본, 러시아와 한정된 수산 자원을 두고 피 터지게 경쟁해야 하는 입장이라 효율은 둘째 치고 수율이 안 좋다.

앞의 이유들 때문에 동방의 작은 나라 한국은 끊임없이 외국과 무역을 해야만 먹고살 수 있는 제조업 강국이 될 수밖에 없었다.

미국산 돼지고기, 호주산 소고기, 브라질산 닭고기, 노르웨이산 연어, 기타 등등. 한국인의 밥상은 외국과의 무역이 활발하게 진행된다는 전제하에 풍성해지는 법이다.

그럼 이제 이야기를 다시 원점으로 돌려 보자.

한 달 가까이 외부와의 모든 연락, 무역망이 끊어진 동방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 국민들은 과연 좀비 아포칼립스를 맞이하고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추위나 더위는 어찌어찌 이겨 낼 수 있을 것이다.

대충 버려진 건물에서, 버려진 옷을 입고, 구시대적인 방법으로 불을 피워서 강물이나 우물물을 끓여 먹으면 되니까.

하지만 ‘의’와 ‘주’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해서 미래 전망이 밝은 건 아니다. 가장 중요한 ‘식’을 해결할 방법이 없다.

범세계적인 좀비 아포칼립스가 터진 마당에 누가 태연하게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울 수 있겠는가?

보존 기간이 긴 통조림이나 전투 식량을 찾아서 먹으면 된다고? 모든 생존자가 그런 생각을 할 것이고, 그들 모두가 잠재적 경쟁자다. 물론 그마저도 양이 충분치 않다.

그렇다면 남은 수단은 정말 적다.

깊은 산속이나 작은 섬으로 기어들어 가 자연인 생활을 하며 마지막 문명인으로서 쓸쓸한 최후를 맞이하든가, 아니면 어떻게든 인간의 영역을 되찾고 자급자족 대책을 강구하는 것이다.

“중간 거점이자 중개역으로 활용할 수 있는 특정 역을 확보해서 활동 영역을 넓히자라… 발상 자체는 괜찮은 것 같아요. 다만 비전문가인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문제라든가, 역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짊어져야 할 리스크가 얼마나 클지 모른다는 게 흠이겠네요.”

인간의 영역 확장, 흩어져 있는 소수 단위의 생존자 그룹 집결, 나아가서 커뮤니티를 복구하고 지역 단위의 사회 재건 및 자급자족 문제에 대응.

스케일이 제법 큰 이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우선 첫걸음으로 규모가 제법 있는 기차역부터 확보해야 한다는 내 설명을 듣고서 채성아가 보인 반응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작은 도시 안에 처박혀 있기만 할 수도 없으니까요. 좀비는 먹거나 마실 필요도, 심지어 잠을 잘 필요도 없지만 인간은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많은 것들을 필요로 하잖아요?”

“그건 그래요. 당장 이번 겨울만 해도 버티지 못하고 쓰러질 사람들이 셀 수도 없을 만큼 많겠죠. 하지만 그들 모두를 살리려면 천문학적인 생존 물자와 지역 단위의 안전 거점이 필요한데…… 현실적으로 그건 불가능하니까요.”

1만 명이 하루에 먹어 치우는 식량이 얼마나 될 것 같은가? 10만 명은? 100만 명은?

통일 대한민국의 인구를 대략 7~8천만 정도로 가정하고, 그들 중 최소 절반 이상은 좀비가 되었다고 극히 단순하게 생각해 보자. 그래도 여전히 수천만 명이 남는다.

사람들끼리 서로 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싸우다 죽거나, 추위와 굶주림, 갈증을 이기지 못해 죽거나, 오랜 지병이나 갑작스러운 병증으로 죽어 나갔다고 해도 여전히 인구 천만 단위의 벽은 깨지지 않는다.

그럼 이제 더욱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차례다.

최소 천만 단위의 인간이 하루에 먹어 치우는 식량이 얼마나 될 것 같은가?

과연 그만한 양의 식량이 이 좁은 땅덩어리에 존재할까? 존재한다고 해도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아마 좀비를 더 많이, 생존자를 더 적게 잡아서 계산해 봐도 결괏값이 유의미하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사회 기반이 완전히 망가지기 전에 인간은 재도약을 해야 한다.

“당장 우리와 함께하겠다던 그 공장장의 세력만 봐도 답이 나오잖습니까. 사람이 많든 적든, 힘이 강하든 약하든, 식량을 구할 수 없다면 오래 버티기 힘들 겁니다.”

김진경 경장의 말에 모두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철이 이끄는 강력한 세력도 우리가 아니었다면 한 달을 채 버티지 못했으리라.

당장 대한민국의 지독한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 나갈 사람만 해도 얼마나 많을지 가늠할 수 없다. 

지금 당장 우리 편하자고 늑장을 부렸다간 나중엔 정말로 혼자 남아서 좀비 군단과 싸우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럼 이만철 세력과 함께 밀양역까지 치고 올라가서 중간 거점을 확보하는 데 다들 동의한 것으로 알겠습니다. 김진경 경장님은 몸이 날래고 무기 사용에 능숙한 외부 수색 팀 중에서 인원을 선발해 주세요. 채성아 씨는 필드에서 의무병으로 활동할 수 있는 사람들을 뽑아 주시고요. 간단한 의학적 지식과 응급 처치법, 응급의약품 사용법 등을 가르친 사람들이 제법 있죠?”

이번 원정은 제법 시간을 잡아먹을 테니 경비 팀은 거점에 남겨 둘 예정이다. 이만철을 통해 구입한 무기와 보호구로 무장시켰으니 거점을 지키는 데 손색은 없으리라.

김진경 경장은 먼저 사람을 뽑으러 나갔고, 채성아도 누굴 데려갈지 고민하다가, 곧 자신이 직접 가르친 몇몇 사람을 원내 방송으로 호출했다.

이미 다들 알고 있겠지만 내 거점에서 내 명령은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적재적소에 활용될 가치가 있는 인간들은 특정 업무에 지명되면 절대로 거절할 수 없다.

내가 ‘당신은 손재주가 좋으니까 정비공으로 일하세요’라고 말하면 그 사람은 싫어도 정비공으로 일해야 한다.

의무와 권리에 따른 평등한 혜택을 약속하되, 나는 기본적으로 구시대의 독재자 같은 방식으로 거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거점 일원들에게 소속감을 가지게 하면서도 다른 이들과 쓸데없는 분쟁을 벌일 틈이 없게끔, 내가 적절한 공포 정치로 그들을 옭아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위험한 일에 반강제로 투입되어야 하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내 덕분에 이 안전한 거점에서 실컷 먹고 마시며 따뜻하게 지냈으니, 이제 일 좀 같이 하자고 하면 딱히 거절할 방법이 없는 거다.

“작전 중 부상 혹은 사망의 위험에 대해서도 제대로 고지해 주세요. 위험한 곳에 가게 될 사람들한테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거든요.”

“물론이죠. 다들 승권 씨가 그런 부분에 대해선 칼 같다는 걸 알기 때문에 믿고 따르는 거니까요.”

“하하…….”

큰 불만 없이 믿고 따라 준다니 다행이지만, 솔직히 생존자 그룹의 규모가 커지고 거점이 늘어날수록 나 혼자서 모든 이들을 관리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된다.

거점 내부에 CCTV를 설치해서 감시를 한들, 내 사람을 심어 두고 쁘락치 활동을 시킨들, 사람이란 동물은 억압하고 통제할수록 주머니 속 송곳처럼 더 튀어나오는 법이니까.

그러니까 적당한 시점에서 조금 느슨하게 풀어 줄 생각이다. 융통성이 없으면 그게 로봇이지 사람인가?

그렇게 회의가 끝나고 시간이 조금 흐르자, 이번 장기 원정에 참가할 사람들이 얼추 모였다.

내가 없는 사이에도 자발적으로 안전한 거점 밖으로 나가서 좀비와 싸우거나, 외부 탐사를 하며 물자를 구해 오던 수색 팀 인원들.

그리고 병원이라는 환경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위해 채성아로부터 직접 의학 지식과 응급 처치법 등을 배운 의무병들.

다 함께 필드에서 뛰며 합을 맞추는 것으로 노련한 베테랑이 될 자질이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 중에 좀비 사태로 가족, 연인, 친구를 잃어 보지 않은 사람들은 없기 때문에 새로운 신뢰 관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줘야 한다.

어색한 사이에서 서로에게 등을 맡기고 싸울 수 있는 사이로.

그렇게 전우애가 깊어지다 보면 서로 솔선수범해서 자신들의 거점과 동료들, 최종적으로는 나를 지켜 주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게 모두에게도 좋은 일이다.

인원 확인, 장비 점검, 작전 물자 보급, 마지막으로 이번 장기 원정에 대한 브리핑까지 모두 끝마쳤을 때.

마침내 우리는 철판을 덧대 보강한 장갑 승합차에 몸을 싣고 이만철 세력과 합류할 수 있었다.

“늦었군. 이쪽은 새벽 일찍부터 일어나서 준비하고 있었는데.”

“합류 시간에 딱딱 맞추는 게 습관이 들어서요.”

군인으로 뺑이 치던 시절, 합류 지점(랑데뷰 포인트)에서 제시간에 맞춰 본대나 다른 부대와 합류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배웠다.

그런 내 마음도 모르고 공돌이 아니랄까 봐 새벽 일찍 일어난 이만철이 괜히 툴툴거렸다.

“그래서 지난 사흘간 어땠나요?”

“……그쪽에서 거래 대금으로 지급해 준 생존 물자 덕분에 살았지. 솔직히 그게 없었으면 일주일도 버티기 힘들었을 거야. 대체 그만한 양의 신선한 식료품은 다 어디서 구한 거야?”

“좀비 사태가 발발하자마자 식량부터 긁어모았죠. 이런 시국에 가장 큰 무기는 총이나 칼 따위가 아니라 식량이니까요.”

“흐흐…… 우린 무식한 놈들이라 무기부터 긁어모았다 이건가?”

“각자 가지고 있던 지리적 이점이 달랐다고 해 두죠. 저는 번화가와 가까웠기 때문에 식량 확보에 유리했고, 그쪽은 공장과 제조업체가 주변에 많아서 무기와 중장비를 쉽게 구할 수 있었던 거니까요.”

사흘 전에 내가 지급해 준 생존 물자로 실컷 먹고 마셨는지, 이만철 세력의 사람들은 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더 건강하고 여유가 있어 보였다.

그땐 피죽도 못 먹은 사람들처럼 눈 밑이 퀭하고 비실댔는데, 지금은 노가다 판 아재들처럼 무거운 것을 들고 휙휙 날아다니는 수준이었다.

“하긴, 시대가 달라졌다고 해서 역할군까지 크게 달라지는 건 아니지. 우린 공장에서 남의 돈 받으며 힘든 일이나 하던 놈들이야. 그쪽이 돈(식량)을 대 주기만 하면 힘든 일 정도는 못 해 줄 것도 없지.”

“우리야 그걸 지불할 능력은 있지만, 그쪽은 목숨을 걸어야 할 텐데요.”

“하! 세상이 이렇게 미쳐 돌아가는데 이제 와서 뭐가 겁난다고. 돈 없으면 굶어 죽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아니던가?”

“그건 그렇죠.”

“그럼 된 거지. 우린 굶어 죽기 싫어서라도 이 악물고 돈을 벌어야겠어, 물주 양반.”

이만철이 먼저 솥뚜껑 같은 손을 내밀기에 나는 그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밀양역까지 하이패스 개통 잘 부탁드립니다.”

“까짓거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밖에 더 되겠어?”

곧 이만철의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한 우렁찬 호령에 백 명 단위의 무장 인원들이 용달 트럭과 중장비에 탑승했다.

밀양역까지 치고 올라가려면 뚫어야 할 도로와 마을이 한둘이 아니었다.

나는 이승권 Mk-3이라고 새롭게 명명한 오도봉고(승합차)에 탑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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