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정착기 (40)
다행히 얘기가 좋게 풀린 우리는 1차 거래부터 진행하기로 했다.
이만철 측에서 넘쳐나는 원자재로 제작해 두고 혹시 몰라 예비 물자로 남겨 뒀던 무기와 장비들을 먼저 넘겨받았다.
처음 병원을 방문했을 때는 kg 단위로 거래를 하니 어쩌니 허튼수작을 부리던 그들이었지만, 거래를 내가 주도하고 있는 이상 어림도 없었다.
“무기와 보호구 세트 하나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원자재값과 인건비, 그리고 현 시국에 걸맞은 수요를 계산하면…… 대략 이 정도 값이 나올 것 같네요.”
내가 직접 무기와 보호구의 품질을 살펴보면서 계산기를 두들긴 결과, 성인 남성 한 명을 무장시킬 수 있는 세트 하나당 가격은 생각보다 낮게 책정되었다.
어차피 같이 일도 하고 추가 거래도 할 대상인데 좀 더 인심을 쓰는 게 어떤가, 하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주도권이란 건 한 번 잡으면 계속 가지고 있어야 한다. 지금 급한 건 저들이지 내가 아니다.
그리고 사정이 급한 사람들은 대개 자신들의 발등에 떨어진 불이 꺼지고 나면 태도가 돌변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사회생활을 조금만 해 봐도 알 수 있는 부분 아닌가?
때문에 물물 거래는 조금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사람이 독하게 나가야 한다.
처음 정하는 물건의 가격이 곧 판사들이 재판장에서 내리는 판례처럼 남기 때문에, 향후 커뮤니티가 활성화되고 물물 거래가 활발하게 일어나기 시작하면 그때 여기서 정한 가격이 반영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만철도 가격 후려치기만 당하면 손해를 보는 건 알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어필을 했다.
이런 장비는 어디 가서 쉽게 못 구한다, 우리가 이곳의 설비를 이용해 특별히 제작한 거다, 우리가 만든 거라 A/S도 우리만 가능하다 등등.
정확한 액수가 정해져 있는 화폐로 거래해도 서로 10원 한 장 더 뜯어내기 위해 밀고 당기기를 하는 마당에, 당장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물물 거래라면 더욱 치열해질 수밖에.
결국 나는 무기와 보호구 세트 한 벌당 통조림 몇 개와 식수 10병, 쌀 1kg 5봉지와 신선한 과일 및 채소 조금, 마지막으로 냉동육 1kg을 얹어서 교환해 주었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많은 양의 식료품은 아니었지만, 이런 구성의 식료품 세트를 정확히 99개 더 넘겨받을 수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굶주려 있던 수백 명의 사람들을 당장 배불리 먹일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잘 아껴 쓴다면 적어도 생존자 그룹 전체가 일주일은 버틸 수 있는 양이다.
특히 이만철은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절대로 구할 수 없는 신선한 과일과 채소, 그리고 고기까지 얹어 주는 것을 보고 적잖이 당황했다.
다만 다른 식료품에 비해 채소와 과일은 조금 적게 챙겨 왔기 때문에 그 대신 계란이나 생선, 향신료 등을 대신 끼워 넣기도 했다.
내 인벤토리에서 끝도 모르고 계속 튀어나오는 식료품 더미를 보고 이만철 측 사람들은 멍하니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마치 수표가 묶음으로 들어 있는 슈퍼 리치의 지갑처럼 끝을 모르고 튀어나오는 수준이었으니, 오랫동안 굶주려 있던 저들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이걸로 값은 정확하게 치렀습니다.”
나는 대기하고 있던 우리 측 사람들을 시켜 무기와 장비 일부는 차에 싣도록 하고, 부피와 무게 때문에 차에 싣지 못하는 양은 내 인벤토리에 채워 넣었다. 대량의 식료품을 뺀 만큼 공간이 조금 남았던 것이다.
또 차량을 보강하기 위해 따로 거래했던 철판은 차량의 지붕 위에 실었다.
“그럼 우린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이번 겨울을 무사히 넘기는 방법이 ‘그것’뿐이라는 걸 잊지 마세요.”
“…….”
이만철은 자신의 동생에게 식료품의 재고 정리 및 배급을 지시해 두고 우리가 떠나는 길을 배웅했다.
내가 허세로 식료품을 와르르 쏟아 내는 퍼포먼스를 선보인 게 아니란 것이 증명된 지금, 이만철은 3톤짜리 식료품이 걸려 있는 그 위험한 거래가 자신들의 유일한 구명줄이라는 걸 깨달았으리라.
“서로 준비해야 할 것도 많을 테니 사흘 뒤에 봅시다.”
* * *
서로 준비할 것이 많으니 사흘 뒤에 보자는 말을 남기고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사라져 버린 젊은 청년의 뒷모습은 매우 강렬했다.
올해로 48세. 사실상 인간의 일생 절반을 살았다고 할 수 있는 노련한 공장장 이만철이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인간 군상이었다.
“저는 솔직히 애들 동원해서 저쪽이 가진 거 다 뺏고, 병원도 무력 점거하는 방향으로 일을 진행하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동생인 이두호의 친구 김주성의 말에 이만철은 인상을 썼다. 왜냐하면 자신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발칙하고도 무시무시한 생각은 그냥 상상으로 남길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 채성아라는 여자와 함께 사무실에 들어왔을 때 나는 저 청년이 각성자인 줄 몰랐다.’
자신을 이승권이라고 소개한, 자신의 아들뻘 되는 청년이 건방진 태도로 말을 이어 나갈 때마다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 같았다.
각성자도 아닌 일반인이, 이만철 본인보다 숙련 레벨이 훨씬 낮아 보이는 여자 한 명 데리고 들어와서 건방을 떨어?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각성자는 일정 레벨에 도달하면 자신보다 레벨이 낮은 각성자를 본능적으로 구분할 수 있게 된다. 현재 이만철의 숙련 레벨은 7. 이두호와 김주성이 똑같이 4였으니 확실했다.
이두호와 김주성은 서로가 각성자임을 알 수 있었지만, 이만철이 각성자인 걸 알면서도 그게 어째서인지 각성자 특유의 기운을 느낄 수 없다고 했었다. 두 사람은 이만철보다 레벨이 낮기 때문이다.
때문에 채성아라는 여자는 이만철보다 확실히 아래였다. 그 사실을 알고서 본격적으로 압박을 가하려던 찰나, 이승권이 인벤토리에서 식료품을 와르르 쏟아 내는 기행을 벌였다.
그리고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꼈다.
‘단순히 나보다 레벨이 높은 것을 떠나서 압도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인벤토리 용량은 레벨이 오를 때마다 업그레이드된다. 그 정도는 각성자라면 다들 알고 있는 기본 상식이지만, 중요한 건 이 시국에 신선한 식료품을 미친 듯이 쟁여 두고 있는 이승권이었다.
심지어 그는 바닥에 식료품을 와르르 쏟아 내면서 조금도 아깝다는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마치 슈퍼 리치가 거지에게 수표 한 장을 적선하는 것처럼 무심한 표정이었다.
식료품과 의약품이 곧 생존으로 직결되는 이 시국에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것을 아까워해야 한다. 오히려 자신의 패가 까발려질 것을 대비해 최대한 숨겨 두고 심리전을 걸어오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그는 이까짓 식료품이나 의약품이 뭐가 대수냐는 식으로 행동한 것이다.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럴 수가 없다.
자연스럽게 결론이 내려지고, 이만철의 사고와 행동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그는 자신보다 훨씬 더 높은 레벨과 막대한 용량을 자랑하는 인벤토리를 보유하고 있으며, 신선한 식료품과 의약품을 넘칠 만큼 확보해 두었다. 그걸 유지할 힘이 있다.
‘만약 섣불리 애들을 시켜서 저들을 공격하게 했다면……’
꿀꺽.
이만철은 각성자와 일반인의 차이가 어느 정도로 큰지 잘 알고 있었다.
각성자는 특별한 직업과 능력을 가지는 것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신체 능력도 일반인을 크게 상회하게 된다.
이만철에게는 휘하의 각성자들이 제법 있었지만 모두 레벨은 고만고만한 상황. 그 압도적인 실력자를 상대로 무작정 덤벼들었다면 이곳의 모두가 벌레처럼 쓸려 나갔을 것이다.
“오늘은 일단 애들 배불리 먹이고, 저쪽에서 정한 사흘간 최대한 준비할 수 있도록 해라.”
“역시 하시는 겁니까?”
“해야지. 죽기 싫으면.”
상대가 좀비와 이승권이라면 차라리 좀비를 택하겠다.
이미 아내도, 딸도 모두 잃어버린 마당에 한 식구나 다름없는 공장 직원들을 챙기려면 자신의 알량한 자존심쯤, 얼마든지 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만철은 강렬한 의문이 들었다.
대체 저자는 어떤 목적으로 좀비들이 득시글거릴 게 뻔한 기차역을 접수하려고 하는 것일까.
* * *
별 탈 없이 병원으로 돌아온 우리는 이만철 측에서 거래해 온 무기와 보호구를 서둘러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다.
무기와 보호구를 우선적으로 받는 건 주로 밖에서 탐색과 물자 보급을 담당하는 사람들, 그리고 내부에서 거점을 지키는 사람들이었다.
무기와 보호구는 바로 나눠 준다고 해서 제 몸처럼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적응 기간이 필요했다. 훈련 같은 실전, 실전 같은 훈련을 반복하는 것으로 손에 익숙해지면 그제야 온전한 전투력이 나오는 법이니까.
“이제 우리도 자신들의 힘으로 거점을 지켜 낼 수 있게 됐군요. 지금까지 벽 뒤에 숨어서 거점 방위 무기의 도움을 받느라 폼이 조금 안 살았었는데…… 하하.”
김진경 경장이 쑥스럽다는 듯 말했지만 나는 그의 노고를 알고 있었다.
어차피 거점 방위 무기가 다 알아서 해 주지 않겠어? 하는 글러 먹은 마인드로 안전 불감증에 빠지기보단 자신들이 위험에 처하는 일이 있더라도 직접 나서서 일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 얼마나 보기 좋은가?
받는 게 있으면 주는 것도 있어야 한다는 걸 아는 인간은 서로 등을 맡길 수 있다.
나는 아니지만.
“그보다 저들이 정말 그 거래에 응할까요? 오히려 이번에 숨통이 트일 정도로 식료품과 의약품을 넘겨받았으니 우리와 협력하는 대신, 자신들의 힘으로 물자를 찾으려 하지 않을까요?”
채성아가 살짝 걱정된다는 어조로 말했지만 김진경 경장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김해는 도시치고 번화가의 규모가 너무 작은 데다 좀비 사태가 터지기 전부터 소요 사태가 어마어마했어요. 경찰인 우리들이 사태를 진정시키려고 나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편의점, 마트, 백화점을 미친 듯이 털고 다녔습니다. 지금 김해에서 정상적으로 보존된 물자를 확보할 수 있는 건 병원장님이 유일합니다.”
그의 말대로 김해는 도시치고 너무 좁고, 공단과 논밭이 반절 이상 차지하고 있어서 식량을 특히나 구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이런 와중에도 고집스럽게 자신들의 힘만으로 물자를 찾으려 해 봤자 스스로 목을 옥죄는 꼴이다.
‘하지만 나는 얘기가 다르지.’
거점을 확보하면 리뉴얼 과정을 거치면서 기존에 적재되어 있던 모든 물자가 복구되고, 그 물자를 모두 소진해도 거점을 업그레이드하는 것으로 한 번 더 복구시킬 수 있다.
최종적으로는 모든 물자를 소비하면 더 이상 물자가 나올 구석이 없겠지만, 내가 그동안 남아 있는 물자나 까먹으면서 펑펑 놀 리가 없잖은가?
인프라와 물자가 받쳐 주는 한 사람을 모으고, 사회를 재건하고, 자급자족이 가능한 시스템을 만들 것이다.
그때가 되어서도 나와 함께하지 않는 사람들은…….
글쎄, 내가 그런 인간들까지 신경 써 줘야 하나?
나는 손뼉을 쳐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정확히 사흘 뒤에 우리는 지원자를 뽑아 밀양역을 확보하기 위한 장기 원정을 나설 겁니다. 그동안 다들 충분히 먹고, 쉬고, 스스로를 단련해 주시길 바랍니다.”
나 이승권이 무장 열차(armored train)를 원하고 있으니까.
벌써 무장 열차 동체에 새겨 넣을 그래피티 문구도 정해 뒀다고.
-이 열차를 본 아쎄이, 희망을 버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