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정착기 (39)
‘확실히 우리와 비교하면 전체적으로 무장 상태가 훌륭하다.’
우리도 무장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적극적으로 무장을 시키고 있었지만, 그래도 약탈자와 비슷한 수준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내가 경찰서를 털어 총과 탄약을 어느 정도 확보하긴 했지만 그걸로 무장할 수 있는 사람은 잘 쳐줘도 10명 안팎이었으니, 진짜 군사기지라도 확보하지 않는 한 정규군 수준의 무장은 어림도 없었다.
그런 반면 눈앞의 이들은 중세 시대 기사의 플레이트 아머를 SF풍으로 재해석한 복장을 갖추고 있었다.
경량 소재의 금속을 통짜로 가공한 것도 아니고 작은 조각 단위로 분해해서 쉽게 조립할 수 있는 갑옷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위험한 곳에서 작업하던 사람들이라 어디를 어떻게, 얼마나 잘 보호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저 정도면 좀비와 근접 전투를 벌여도 손톱이나 이빨이 박힐 일은 없겠지. 금속으로 만들어진 만큼 독침을 쏘는 원거리형 좀비의 공격도 제한적이나마 방어가 가능하지 않을까?
우리를 포위하듯 에워싼 무장 인원들에게 길 안내를 받으면서도 이곳의 상황이 어떤지 면밀하게 살폈다.
수많은 공장과 제조 업체가 자리 잡고 있지만, 지금은 도시에 전력이 공급되지 않고 있다. 결국 아까운 기름을 넣어서 비상 발전기를 돌리거나, 한때 정부 사업으로 진행했던 태양광 패널로 모은 전력을 찔끔찔끔 써야 할 터.
‘현재 공장이 가동되고 있는 낌새는 없다. 그렇다면 남아 있는 연료는 모두 중장비와 차량, 그리고 난방용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거야.’
죽은 공장인지 살아 있는 공장인지 구분하는 법은 매우 쉽다. 환풍기가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는지만 확인하면 된다.
웅웅대는 환풍기 패널 돌아가는 소리는 조금도 들려오지 않으니 최소한 이 주변 공장은 확실하게 침묵한 상태다. 그보다 작업복이나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도 없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이들은 전기가 끊어지기 전에, 혹은 연료가 충분하다 못해 넘치던 사태 초기에 공장을 미친 듯이 돌려서 온갖 장비와 무장을 바짝 뽑아낸 것이다. 그다음은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주변 지역을 돌면서 생존 물자를 찾으러 다니는 것이고.
이들에게 공장장이라고 불리는 그룹 리더는 아무래도 꽤 유능한 사람인 것 같다.
‘하지만 사태를 분석하고 대응하는 능력과 집단을 효율적으로 이끌 수 있는 능력은 별개지.’
이 혹독한 추위와 좀비라는 위험 속에서도 우리 측 인원들은 건강하다 못해 살이 통통하게 올랐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싼다는 증거다.
반면 이들은? 추위와 피로, 굶주림이라는 최악의 디버프가 3중첩으로 걸려 있다. 퀭한 눈빛만 봐도 얼마나 지쳐 있는지 알겠다.
뱃사람만큼이나 터프하고 힘 좋은 양반들이라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거지, 평범한 일반인 집단이었다면 벌써 내분이 일어났거나 탈주자가 대거 발생했을 거다.
“그쪽 책임자와 동행자 한 명까지만 출입을 허가하셨다.”
컨테이너 박스를 쌓아 올려서 개조한, 진짜 현대판 벌집 같은 거대 구조물의 입구에서 우리 일행은 다시 한번 찢어져야 했다.
자연스럽게 채성아가 나를 따라나서고, 김진경 경장이 경비 팀과 함께 남아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로 했다.
좀비, 혹은 인간의 침입에 대비해 몇 겹이나 되는 컨테이너 박스의 철문을 열고 들어간 우리는 바깥보다 비교적 따스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자세히 보니 바닥과 벽에 단열재를 설치하고 보온에 신경 쓴 흔적이 보였다.
손재주 많은 인간들이 10명도 아니고 100명 단위로 모이면 이런 물건도 뚝딱 만들 수 있구나 싶어 새삼 신기했다.
“그래서 날 만나러 왔다고.”
안쪽에서 측근으로 추정되는 부하 두 명과 함께 나타난 인물은 공장장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사내였다.
곰 같은 덩치에 산적 같은 수염, 짧게 자른 머리와 부리부리한 눈, 그리고 짙은 눈썹. 진짜 전형적인 ‘호랑이 아저씨’를 연상케 하는 외관이었다.
대략 40대 중반에서 50대 초반으로 보였지만, 저렇게 오랜 세월 노동으로 다져진 육체의 소유자들은 겉모습만 보고 연령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얼마 전에 이쪽에서 먼저 방문해서 거래를 타진했던 경희대 병원 거점의 주인인 이승권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제 동료이자 간호사인 채성아 씨입니다.”
“나 이만철이야. 바깥에서 이미 들었겠지만 여기선 공장장이라고 불리고 있지. 이쪽은 내 동생 이두호, 그리고 그 친구인 김주성. 지금은 옆에서 내 일을 돕고 있지.”
나는 직감적으로 이만철과 이두호 형제, 그리고 김주성이 모두 각성자임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직업 숙련 레벨이 압도적으로 높기 때문일까, 상대가 나보다 직업 숙련 레벨이 낮으면 그 사람에 대해 잘 몰라도 ‘이 사람은 각성자구나’ 하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게 되는 것 같았다.
“이 추운 날에 먼 길 왔을 테니 일단 앉지.”
이만철이 상석에, 이두호와 김주성이 그의 좌우에 나란히 앉았다.
집주인들이 먼저 앉는 것을 확인한 나는 손님용 의자에 앉고 채성아는 살짝 떨어져서 내 뒤에 섰다. 협상의 주체가 나라는 것을 그녀도 아는 것이다.
우리의 행동을 보고 피식 웃은 이만철은 품속에서 작은 양철 수통을 꺼내 잠시 목을 축였다. 살짝 독한 알콜 향이 흘러나오는 걸 보니 물이 아니라 술이었다.
‘술은 오히려 체온을 떨구지만, 추위와 고통을 이겨 내는 정신 강화제로는 딱이지.’
딱히 그가 협상장에서 손님을 앞에 두고 술을 마시는 것에 대해선 불만 없다. 술이야 마시고 싶으면 마시는 거고, 또 취해서 난동을 피우지만 않는다면 문제없는 것 아닌가?
잠시 내 표정을 살핀 이만철은 수통을 집어넣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거래를 하기 위해서 찾아왔다고 했었지. 그런데 일전에 우리 애들이 찾아갔을 때는 퇴짜를 놨다고 하던데?”
“그땐 제가 자리를 비운 상태였기 때문에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었지만, 우리 측 사람들에게 듣자 하니 거래 비율이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더군요. 이런 시국이니까 조금 더 이득을 챙기려고 하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서로 먹고살기 힘든 판국에 바가지를 씌우는 건 좀 아니다 싶었던 거죠. 애초에 거래 방식 자체가 잘못됐던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애들 잘못이다?”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는 겁니다. 서로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였고, 처음 진행하는 거래에서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한다면 당연히 퇴짜를 맞을 수밖에 없지요. 그쪽이 급했던 것과는 별개로.”
나는 말끝에 은근히 ‘우리만 급해서 너흴 찾아온 게 아니다’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실제로 생존 물자가 급해서 무턱대고 우리를 찾아와 최대한 값을 후려치려고 했던 건 상대였다.
당연히 먹여 살려야 할 입은 많고, 이런 시국에 무기와 장비는 귀하니까 값을 후려치는 건 이해할 수 있다지만, 그래도 정도가 너무 심했다.
“흐음, 듣자 하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이렇게 직접 찾아왔다는 건 아직 우리와 거래할 의향이 있다고 봐야겠지?”
“생존 물자만큼이나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무기와 장비도 중요한 시대니까요. 필요 없는 물건을 사려고 이 추운 날에 먼 길 오는 사람은 없지요.”
“좋아 좋아, 지금이라도 서로 오해를 풀고 합리적인 가격으로 거래할 수 있다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 아니겠어? 그러니까 시시콜콜한 신변잡기는 이쯤 하자고.”
이만철은 자신의 동생 이두호에게 손짓해서 무언가를 넘겨받았다. 엑셀 자료로 정리해서 미리 뽑아 둔 서류 몇 장이었다.
“툭 까놓고 얘기하지. 우린 줄 수 있는 게 많아. 이 주변은 온통 공장과 가공, 제조 업체들이라 원자재와 가공품 모두 넘쳐 나거든. 이 품목 내에서 필요한 게 있다면 그쪽이 원하는 물량으로 충분히 맞춰 줄 수 있어. 그쪽은?”
나는 섣불리 대답하는 대신 그가 유리 테이블로 슥 내민 서류를 받아서 빠르게 훑었다.
‘각종 금속류와 플라스틱 같은 필수 원자재가 제법 많군. 그 외에도 이들이 직접 제작한 맞춤형 보호구나 무기, 차량 보강용 철판도 눈여겨볼 만해.’
원자재는 도심이든 외부든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에 제외. 당장 가공, 제조 능력이 없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맞춤형 무기와 장비였다.
“성인 남성을 최소 100명 이상 무장시킬 수 있는 맞춤형 보호구와 무기 세트, 그리고 차량을 5대 이상 보강할 수 있는 철판과 수리 도구.”
100명을 무장시킬 수 있는 보호구와 무기 세트에 차량을 5대 이상 보강할 수 있는 철판과 수리 도구는 결코 적지 않은 주문이었다. 시대와 환경적 요인을 감안하면 오히려 대량 발주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지금 이만한 물량을 한꺼번에 소화할 수 있는 생존자 그룹은 김해 어디를 뒤져 봐도 없을 테니까.
김해 공항에 자리 잡은 군대와 다수의 피난민? 그 얼치기들은 당장 이번 겨울을 무사히 넘기는 것부터 걱정해야 할 거다.
“……지금 내가 잘못 들었나? 10명을 무장시키는 게 아니라 100명을 무장시키겠다고?”
“안 됩니까?”
“허허, 지금 여기가 애새끼들 장난하는 곳도 아니고…….”
공장장 이만철의 얼굴이 점점 홍당무처럼 붉게 달아오르려던 그때, 나는 말없이 손을 옆으로 내뻗어 인벤토리를 개방했다.
그리고 주변에 식료품과 생필품, 의약품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지든 말든 인벤토리에서 미친 듯이 내용물을 쏟아 냈다. 누구라도 눈이 돌아갈 만큼 아찔한 양을 자랑하는 생존 물자가 순식간에 넓은 사무실의 절반가량을 집어삼켰다.
“제가 지금 장난하는 것 같습니까?”
“…….”
나는 인벤토리의 자동 회수 기능을 이용해 토해 냈던 대량의 생존 물자를 다시 빨아들였다.
지금 같은 시국이라면 같은 무게의 황금을 줘도 살 수 없을 생존 물자들이 순식간에 사라지자 이만철 측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휙휙 바뀌었다.
주도권은 이미 넘어왔다.
턱!
나는 대놓고 유리 테이블 위에 발을 올렸다. 평범한 협상장이라면 절대로 해선 안 될 무례한 행동이나, 지금의 나는 이래도 된다.
“다시 한번 말하죠. 성인 남성을 최소 100명 이상 무장시킬 수 있는 맞춤형 보호구와 무기 세트, 그리고 차량을 5대 이상 보강할 수 있는 철판과 수리 도구.”
“주, 주지! 원하는 만큼 주겠어!”
태도가 급변한 이만철이 당황하는 두 사람을 내버려 두고 먼저 납품 계약을 수락해 버렸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미끼였을 뿐이다. 내가 진짜 원하는 건 단순히 우리 측 사람들을 무장시킬 수 있는 무기나 장비 따위가 아니다. 막말로 그건 내가 조금 더 시간을 들여서 고생하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시간은 황금보다 귀하니까 황금을 써서라도 시간을 단축하려는 것뿐.
“납품 목록과 생존 물자의 거래 비율은 양측에서 조율해 봐야 알겠지만, 그쪽에서 처음에 기대했던 값을 받을 수 없다는 건 알고 계실 겁니다.”
kg 단위로 비율을 조정해서 거래? 개소리도 그만하면 노벨상급이다.
“무, 물론 잘 알지. 그 부분은 당연히 우리가 감안하고말고.”
“그리고 또 하나, 사실 이게 진짜 중요한 겁니다. 이번 거래와는 별개로 우리랑 일 하나만 같이 합시다.”
“일?”
“예. 어렵다면 어렵고, 위험하다면 위험하다고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당신들이 좀비들로 득시글거리는 도시를 이 잡듯이 뒤져 가며 간신히 얻을 수 있는 생존 물자와는 비교가 안 되는 보상을 약속하죠.”
“보상이라고 하면……?”
“식료품 3톤. 필요하다면 의약품이나 의료 서비스도 일부 제공해 드리죠. 우린 의사도, 간호사도, 약도, 병원도 있으니까.”
식료품 3톤.
그냥 톤 단위로 말하면 감이 잘 안 잡힐 텐데, 지금 이곳에는 사람들만 수백 명이 있다. 그것도 매일같이 공장이나 제조 업체에 출근해서 힘쓰던 장정들이 대부분이다.
체력과 힘이 뛰어난 만큼 먹성도 좋아서 잘 먹어 줘야 그만큼 일을 할 수 있는데, 지금 이들은 제대로 먹기는커녕 쉬지도 못하고 있으니, 사람들이 언제 픽픽 쓰러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들은 침을 질질 흘리면서 내게 협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시국에 안전하게, 오염되지 않고 신선한 식료품을 3톤이나 준비해 줄 수 있는 건 내가 유일하니까.
“거래하시겠습니까?”
“해야지! 뭐든지! 무조건!!”
살얼음 같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고. 이만철은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내 손을 잡고 흔들어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