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 (88)화 (89/227)

88화 정착기 (38)

내가 약탈자와 일반인 생존자 집단을 구분하는 방법은 단순히 신들린 듯한 관심법이 아니라, 그 집단이 가지고 있는 생존 방향성을 살피는 것이다.

약탈자는 기본적으로 좀비들이 도사리고 있는 도심 속 위험을 스스로 제거하며 성실하게 물자를 모으지 않는다. 그건 너무 어렵고 손해가 막심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손해를 봐 가면서라도 어떻게든 선을 지키며 자급자족하려는 일반인 생존자 집단은 약탈자 집단에게 먹음직스러운 꿀통처럼 보인다. 결국 좀비와 약탈자, 이중으로 고통받는 일반인 생존자 집단은 그만큼 살아남기가 매우 힘든 구조였다.

그래서 나는 일반인으로 구성된 생존자 집단이 현시점에서 거의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고 잠재적 결론을 내린 상황인데, 새로운 생존자 집단의 등장이 신경 쓰일 수밖에.

“협상단은 일단 저와 김진경 경장님, 그리고 경비 팀에서 열 분 정도 자원하셨어요.”

“금방 모였네요.”

급하게 내린 명령이었음에도 특유의 밝은 분위기와 넓은 사교성을 가진 채성아는 금방 협상단으로 참석할 사람들을 모아 왔다. 의사 같은 고급 인적 자원을 밖으로 내보낼 수는 없으니 꽤 적절한 인선이었다.

활천초 거점이 모두가 함께 으쌰으쌰하는 분위기라면, 경희대 병원 거점은 그때그때 필요한 인력을 적재적소에 동원해서 협력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후자가 좀 더 사무적인 분위기이긴 하지만, 동시에 동료애를 키우기에는 나쁘지 않은 환경이었다.

원래 일이 거친 직장에서도 며칠 함께하다 보면 금세 친해지는 게 사람이라는 동물 아니던가.

채성아는 자신의 긴 뒷머리를 질끈 묶고, 햇빛을 가려 줄 스포츠 캡, 입김을 가려 줄 마스크까지 둘렀다.

그녀가 허리에 메고 있는 컴파운드 보우를 사용하기 위해서 얼마나 연습을 했는지는, 그녀의 새하얀 팔뚝에 돋은 잔근육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안전한 병원 내부에서 지내면서도 다시 필드에 나갈 것을 대비해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그, 그렇게 보시면 좀 부끄러운데요…….”

“이런 시국에 여자도 실전 근육 정도는 키우는 게 좋죠.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가요? 하하…….”

곧 좀비에게 물려도 잘 뜯기지 않을 질긴 가죽 재킷을 위에 걸친 그녀는 마스크를 코 위까지 올려 썼다.

곧 김진경 경장을 필두로 한 경비 팀 인원이 무장을 갖춘 상태로 병원 앞에 모였다. 김진경 경장은 각성자라는 이점과 자신의 전직 직업을 잘 살려, 현재는 경비 팀을 이끌고 있다고 들었다.

“오랜만입니다, 승권 씨. 아, 이젠 병원장님이라고 불러드려야 하나요? 하하!”

“편한 대로 부르는 게 제일 좋죠. 제가 계급에 연연하고 그러는 성격은 아니라서.”

오랜만에 만난 김진경과 가볍게 악수를 나눈 뒤, 최근 이 주변 구역을 시끄럽게 돌면서 지속적인 좀비 어그로를 유발하고 있는 그 집단과 만날 계획을 알렸다.

“안 그래도 조만간 그 사람들과 만나서 이 주변에서 소란을 피우는 건 피해 줄 수 있겠냐고 말을 나눠 볼 생각이었는데 잘됐군요. 좀비들은 기본적으로 소음 유발 지역으로 몰리는 편이지만, 소란이 끝나고 나면 남겨진 놈들이 우리 주변에서 배회하기 때문에 바깥에서 활동을 하는 팀원들이 고충을 호소하고 있거든요. 어쩌다 병원 쪽으로 흘러 들어오기라도 하면 위험하기도 하고요.”

“아마 저쪽도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닐 겁니다. 며칠 전에 병원으로 찾아와서 식료품과 의약품 거래를 요구했다면서요? 그런 필수품들이 부족하니까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도심을 헤집고 다니는 거겠죠.”

“뭐, 무작정 우리를 공격하지 않은 것만 봐도 천성이 나쁜 사람들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일머리가 좀 무식해서 그렇지…….”

일머리가 무식하다는 말은 나도 동의한다.

아무리 자기들이 장갑판을 덧댄 용달 트럭과 중장비를 다루는 집단이라고 해도 그렇지, 막무가내로 도심을 휘젓는다는 건 말벌이 가득 찬 벌집을 건드리는 꼴 아닌가.

“우선 다들 차량에 탑시다. 마침 이 주변 도로는 저쪽이 다 뚫어 준 것 같으니까 일정이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나는 병원으로 오기 전에 홈마트 거점에 들러서 미리 인벤토리를 각종 식료품과 생필품으로 꽉꽉 채워 왔다. 현재 내 직업 숙련 레벨은 26, 내 인벤토리는 몇 번의 자동 업그레이드를 거쳐 무게 제한이 10톤까지 늘어난 상태였다.

마음만 먹는다면 무식하게 10톤 트럭 한 대를 인벤토리에 쏙 넣어 버리는 것도 가능하다.

‘이것이 26레벨 인벤토리의 위엄.’

라노벨 좋아하던 군대 동기의 말을 빌리면 이미 나는 옆에 히로인 1개 군단을 끼고 살아야 하는 먼치킨 소설의 주인공이지만, 유감스럽게도 내 주변에 그런 여자는 없었다.

바깥에서 공수해 온 다음 손재주 있는 양반들이 뚝딱뚝딱 고쳐서 쓸 만하게 만들었다던 수송 차량. 대한민국 승합차계의 자존심 ‘스타-렉스’ 두 대에 사람들이 탑승했다.

스타렉스는 차창마다 짙은 선팅 처리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외부에선 차량 안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 즉 소리만 내지 않는다면 좀비들의 추격이나 수색을 피할 수 있는 움직이는 도피처인 셈.

게다가 차량 내부 적재 공간도 넓어서 바깥을 돌아다니는 팀원들이 곧잘 이것저것 주워 온다고 한다.

이제는 단종되어서 신제품을 볼 수 없는 K-승합차의 절대 지존에 올라타니 푹신하고 따뜻한 좌석이 내 등허리를 어루만져 주었다. 장갑 구급차에 딸린 딱딱한 방탄 좌석과는 차원이 달랐다.

소위 말하는 ‘엉따’라고 불리는 좌석 열선이 뜨뜻하게 하반신을 뎁혀 주는 이 친숙함, 사회 물이 빠질 대로 빠진 나조차도 무심코 감수성에 젖게 만들었다.

조수석에 앉은 채성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길래 다급히 차를 몰았다. 하마터면 스타렉스에 쾌감을 느끼는 차박이로 보일 뻔했잖아. 정신 차려, 이승권!

1호 차량에 탑승해 먼저 길 안내를 하는 김진경 경장이 무전기를 통해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알려 주었다.

일전에 미행을 몰래 딸려 보내서 저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아본 결과, 김해 주촌면에 위치한 덕암마을 방면이 저들의 주거지라고 한다.

자잘한 마을 몇 개, 그리고 수심이 낮고 강폭도 좁은 강 하나를 건너서 북상하다 보면 나오는 게 덕암마을이라고 한다.

덕암마을에는 수상할 정도로 크고 작은 금속, 화학 공장과 카센터, 중장비까지 관리하는 시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덕분에, 거친 일을 하는 그쪽 동네 사람들이 좀비 사태를 이겨 내고 역으로 치고 나온 것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

인터넷은 되지 않지만 마지막으로 갱신된 GPS 자료는 여전히 지도 어플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채성아가 덕암마을 방면을 검색해 보았다.

“와, 마을 규모인데도 공장이나 소규모 제조 업체가 다닥다닥 붙어 있네요. 근처에 고속 도로가 연결되어 있어서 주유수나 충전소도 제법 많고요.”

“과연. 그래서 차량에 뭔가 덕지덕지 붙이고 아까운 기름까지 팍팍 쓰면서 중장비를 운용할 수 있는 건가?”

“그런 것 같아요. 특히 부족한 기름이나 차량 부품은 인근의 고속도로에 잔뜩 버려진 차량들에서 회수한 것을 가져다 썼겠죠. 중장비를 끌고 김해 시내까지 밀고 들어올 만하네요.”

다만 그런 덕암마을에도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있었으니, 자체적으로 생필품 수급을 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덕암마을에 있는 거라곤 기껏해야 공장 직원들 상대로 장사하는 음식점이나 편의점 몇 개가 전부. 대형 마트는 고사하고 시장도 없어서 생필품이 빠르게 소모되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가까운 곳에서 생필품을 수급할 수 있었느냐면 그건 또 아니었는데, 덕암마을 주변은 꽉 막힌 도로와 산, 평야뿐이었다.

어찌어찌 가장 가까운 마을까지 원정을 나간다고 한들 그쪽도 상황이 별반 다를 것은 없었기 때문에 득보다는 실이 많았을 것이다.

결국 굶주림과 추위에 의한 쇠약함을 이기지 못한 저들은 이미 좀비 사태로 엉망이 된 김해 시내(번화가)에 본격적으로 진입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김해 시내는 이미 한참 전에 털린 지 오래지. 남아 있는 게 거의 없어.’

순식간에 좀비들에 의해 멸망한 서울이나 부산과는 다르게 김해는 여러 차례 피난민들의 소요 사태가 발생했다. 그 이전에도 폭동 같은 것이 몇 번이나 있었고.

이제는 좀비가 되어 버린 자들이 대부분 쓸 만한 물자를 쓸어가 버렸고, 그나마 남아 있는 것들도 3주 넘게 방치되면서 대부분 못 써먹을 것이 되어 버렸다. 신선한 식품?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을 거다.

그런데 세상에나 마상에나, 신선한 식품을 한가득 보유하고 있는 황금 고블린 같은 남자가 있다? 바로 나, 도내 최고 마성의 남자 이승권이다.

저쪽에서 먼저 길을 뚫어 준 덕분에 스타렉스 두 대가 한 번에 움직여도 별문제는 없었다. 오히려 오랜만에 뻥 뚫린 길을 시원하게 내달리니 이건 이것대로 운치가 있었다.

좀비들로 가득 찬 죽음의 길을 다시 인간의 길로 개척한 중장비의 저력은 실로 대단했다.

목적지에 가까워지니 서부로 방면으로 XX산업, XX전기, XX테크, XX섬유 같은 흔하디흔하게 볼 수 있는 제조 업체들이 줄줄이 비엔나처럼 딸려 나왔다.

김해의 공단은 남부에서 책임지고 있는 줄 알았더니, 창원과 가까운 이곳 서부에서도 공장들이 만만찮게 자리 잡고 있었다.

‘여기 근무자들만 싹 모아도 가볍게 1개 사단은 뽑겠는데.’

공장 근무 연령층은 주로 30대에서 50대 사이. 군인으로 치면 이미 예비군까지 끝마치고 민방위나 하고 있을 베테랑들이 실전 압축 근육을 가지고 일하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군대와 경찰도 이겨 내지 못한 좀비 사태를, 이곳 사람들이라면 당당하게 이겨 냈다고 해도 절대 허언은 아니겠지.

아니나 다를까, 경험 많은 아저씨 집단 아니랄까 봐 주요 길목마다 폐자재를 이용해서 쌓아 올린 각종 바리케이드와 함정으로 좀비들의 접근을 원천 봉쇄하고 있었다.

이렇게 차량이 다닐 수 있는 길도 저들이 의도해서 만든 단일 루트일 터.

예상대로 길목 끝에는 우리의 접근을 사전에 포착한 상대방이 무장을 갖춘 채 우르르 몰려나온 상태였다.

내가 만약 약탈자 무리의 리더였다면 이런 곳은 쳐다보기도 싫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고작 승합차로 중장비를 들이박는 자살행위는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상대는 최소 중장비 짬밥 10년 이상은 기본으로 깔고 들어가는 양반들이다. 달려오는 차량도 포클레인으로 콱 찍어서 파스타처럼 둘둘 감아 버리는 것도 가능하겠지.

노련한 중년 사내들이 내뿜는 아찔한 스윗함에 정신이 아득해지려는 찰나, 상대 쪽이 먼저 확성기를 들고 우리의 접근 의도를 물어 왔다.

여기까지 온 이상 어쨌든 협상은 해야 한다. 저들에게는 생존 욕구가, 내게는 확장 욕구가 있기 때문에 서로가 가진 것들이 너무나도 절실하게 필요했다.

내가 먼저 차량에서 내리자 김진경 경장과 채성아를 비롯한 경비 팀도 일제히 나를 따라나섰다. 갑자기 열 명이 넘는 무장 인원이 우르르 차에서 내리니 저쪽도 놀란 것일까, 다시금 접근 의도를 물어 왔다.

“당신들이 며칠 전에 찾아와서 거래를 요청했던 경희대 병원의 주인이 바로 납니다. 거래하려고 찾아온 손님을 이렇게 밖에 세워 두기만 할 겁니까?!”

먼저 질렀음에도 살짝 긴장되는 순간.

내 외침을 들은 상대가 저들끼리 쑥덕대더니 곧 게이트를 개방해 주었다.

“공장장님께서 찾으신다. 얼른 들어가 봐라!”

‘난 병원장이고 저쪽 리더는 공장장이니까 내가 더 높은 건가?’

게임으로 치면 SR 캐릭터랑 SSR 캐릭터의 대결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한 수 먹고 들어가는군.

나는 개선장군처럼, 아니 병원장처럼 당당한 발걸음으로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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