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정착기 (37)
김해의 상황은 언뜻 나아진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꽤 복잡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김해 인구는 바로 옆의 진짜 공업 도시인 창원의 절반밖에 되지 않지만, 부산 다음으로 좀비에게 함락된 도시인지라 생존자 비율이 극단적으로 낮다.
서울과 부산발 좀비 사태 소식을 전해 들은 경상도의 주요 도시들은 지금쯤 ‘굳히기’에 들어갔을 텐데, 그쪽 동네는 생존자 비율이 꽤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해가 유령 도시라면 부산은 폐허 그 자체. 부산과 김해가 피 터지는 동안 창원, 대구, 포항은 어찌어찌 대비를 했을 것이다.
특히 울산과 포항 근처에는 원전이 있기 때문에 아직까지 관리를 하고 있다면 제한적이나마 가까운 도시에 전력 공급을 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최악의 경우 그쪽 인프라가 완전히 끊겼다고 해도 내가 중요 거점을 확보한다면 문제없고.’
일전에 장갑 구급차로 개척해 둔 루트를 따라 스무스하게 경희대 병원으로 복귀하니, 저 멀리서부터 내가 일러둔 대로 방어 태세가 잘 갖춰져 있는 게 보였다.
활천초 거점처럼 경희대 병원도 리뉴얼되면서 건물과 부지가 엄청나게 확장되었는데, 애매하게 다른 건물이나 뻥 뚫린 도로와 맞닿아 있었다.
그래서 부지 주변을 따라 적당한 깊이의 호를 파두라고 했었는데, 다행히 젊고 힘 좋은 사람들이 많았던 덕분에 일이 잘 풀린 듯했다.
병원 입구에 세워진 임시 초소에서 내 차량을 확인하더니 경비 몇 명이 즉시 수동으로 게이트를 열어 주었다.
사실 병원 뒤쪽에 있는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도 되지만, 언제 또 이런 에스코트 받아 보겠나 싶어 그냥 정문으로 들어갔다.
미리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경비들이 깍듯하게 인사를 해 보였다. 자리를 비우기 전에 각자 역할과 그에 대한 보상 체계를 정해 뒀기 때문일까? 역시 오고 가는 게 있어야 아름다운 사회가 만들어지는 것 같다.
“오셨습니까, 병원장님!”
“음? 병원장?”
“이 병원 주인이시니까 병원장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흐흐.”
“뭐, 틀린 말은 아니네요. 앞으로 그렇게 불러 주세요. 그보다 제가 없는 동안 별일 없었나요?”
“작업 소음을 듣고 좀비 떼가 우르르 몰려온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아.”
거점 내부에서 발생하는 소음, 특히 방위 무기가 발생하는 총성이나 폭음 같은 건 외부의 좀비들에게 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그냥 넘어갔었다.
하지만 거점 일원들이 거점 부지 바깥에서 작업을 한다면 당연히 소음이 주변으로 퍼져 나갈 수밖에 없고, 주변을 맴도는 좀비들을 적잖이 자극했을 것이다.
“제 실수였네요. 혹시 다친 사람은 있었나요?”
“거점 안으로 재빨리 들어가서 농성을 하면 좀비들이 알아서 자멸했기 때문에 사고나 부상자는 없었습니다. 거점 방위 무기 그것들이 아주 일을 잘하지 뭡니까. 저희 경비 팀보다 더 쓸모 있는 것 같습니다, 하하!”
“자진해서 위험하고 힘든 일을 맡아 주고 있는 분들의 수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큰 문제가 없었다고 하니 다행이네요.”
“아, 사실 좀비보다 더 중요한 안건이 있습니다. 자세한 건 그때 대응을 맡으셨던 채성아 간호사님께서 알고 계시겠지만, 대략적인 내용은 경비 팀에서 보고 들은 게 있어서 말입니다.”
“무슨 일이죠?”
“며칠 전에 ‘거래’를 하려고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철판으로 덧댄 용달 트럭에 잡동사니를 잔뜩 싣고 다니던 사람들인데, 의약품이나 식료품을 꼭 좀 거래했으면 한다고…….”
거래, 사람들, 그리고 용달 트럭.
경비원에게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나는 그에게 감사를 표한 뒤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환자가 북적였던 광경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병원 내부는 환자들의 고통 섞인 신음과 의료인들의 바쁜 움직임보다 생활감이 좀 더 넘치는 공간으로 바뀌어 있었다.
병원의 넓은 부지와 화단을 이용해 텃밭을 가꿔 보겠다며 새로운 노동에 뛰어든 사람들, 내가 없는 동안에도 꾸준히 병원 주변을 탐색하면서 소소하게나마 정보와 물자를 모아 오고 그것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나름대로 통일한 제복을 갖춰 입고 매의 눈으로 병원 곳곳을 지키고 서 있는 경비 팀 사람들까지.
모두가 각자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는 점에선 활천초보다 높은 점수를 쳐줄 만했다.
“오셨습니까, 병원장님?”
“병원장님! 근처에서 철물점을 발견했는데 거기에 쌓여 있는 장비나 원자재가 제법 됩니다!”
“농협에서 농작물 종자를 좀 구할 수 있는지…….”
병원장이라고 불러 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내 호칭이 어느 샌가 병원장으로 통일된 걸 보면, 아마 의료인들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그들 입장에선 내가 자신들을 고용한 병원의 주인이면서 딱히 의료 업무에 간섭하지 않으니, 의학 드라마에 단골처럼 등장하는 병원장 내지는 이사장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낯부끄럽게 대장님이나 승권 님 하고 불리는 것도 뭣하니, 그냥 병원장이라는 호칭이 나은 것 같다.
나를 알아보고 간단한 업무 보고나 의견 전달, 지원 요청 등을 하는 사람들을 하나씩 상대해 주느라 조금 진땀을 뺐다.
내가 원래 높은 자리에 올라서 이것저것 처리해 주고 책임지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집구석에 처박혀서 넷플러스만 보던 백수 한량이 알고 보니 스윗 능력남? 오우야.’
삼류 막장 드라마에서도 안 써먹을, 끽해야 먼치킨 각성물 웹소설에서나 등장할 법한 상황인지라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내가 스윗해지든 세상이 스윗해지든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빨리 넷플러스나 다시 볼 수 있게 되면 좋겠다.’
사람들의 손길에서 간신히 벗어난 나는 때마침 의약품 재고 확인을 하고 있던 간호사에게 채성아의 행방을 물었다.
“지금 1회의실에서 선생님들이랑 주요 팀장분들 모아서 회의 중일걸요? 며칠 전에 이상한 사람들이 찾아와서 내부 분위기가 조금 어수선했었거든요.”
간호사가 알려 준 대로 1회의실을 찾아가자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회의를 진행한 지 시간이 제법 흘렀는지 그들 앞에 놓여 있는 물병의 양이 상당히 줄어 있었다.
“아, 승권 씨. 언제 오셨…….”
“신경 쓰지 말고 하던 대로 계속해요.”
이 병원의 진짜 주인이 돌아오자 느슨해져 있던 회의실 분위기가 다시 팽팽하게 당겨졌다.
사실 회의를 오래 해서 지쳐 있는 사람들에게 괜히 압박감을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거점 일원들이 하나같이 이상하게 여기는 그 방문자들이라면 나도 신경이 쓰였다.
“중간에 오셔서 잘 모르실 테니까 여기 회의 내용이 적힌 기록물을 먼저 읽어 주세요.”
채성아가 건네준 기록물을 한장 한장 살펴본 나는 지금 모인 사람들이 왜 골머리를 싸쥐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회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그 용달 트럭 타고 다니는 놈들과 거래를 터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된다, 이거네요?”
“그밖에도 자잘한 문제들이 있지만, 일단 핵심은 그래요. 상대는 철판을 두른 용달 트럭 다수와 포클레인 같은 중장비를 몰고 다니는 집단인데, 최근 이 주변 도로를 헤집고 다니면서 좀비들의 소요를 유발하거나 일부 도로를 변형시키고 있어요.”
“미친놈들인가?’
저들 입장에선 그냥 버려진 차량과 좀비로 꽉 막혀 있는 도로를 시원하게 뚫어 버릴 목적으로 그런 짓을 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지만, 최근 들어 이 주변을 건드리기 시작했다는 점이 거슬린다.
아마 본 적 없는 대형 병원이 갑자기 들어서고, 마침 그곳에서 안전하게 생활하고 있는 생존자들을 발견하고서 접촉을 시도했겠지. 사정이 넉넉해 보이는 이 병원에서 식료품과 의약품을 거래할 생각이었는데 그게 잘 안 풀려서 화가 난 건 덤이고.
“처음에 식료품과 의약품을 거래할 목적으로 접근했다던데, 그때 거래를 거부한 이유가 따로 있나요?”
“그쪽에선 우리 모두가 쓸 수 있는 수제 무기와 방어구, 각종 작업 도구를 제공해 주겠다고 했지만, 수지 타산이 너무 안 맞았어요. 무기와 방어구 한 세트당 식료품 5kg, 자신들이 지정한 의약품 일부를 요구했으니까요.”
진짜 미친놈들인가?
“혹시 거래를 거절하자마자 협박을 했다든가, 위압적으로 나오거나 했나요?”
만약 그랬다면 대충 던져 보기만 했을 약탈자 무리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채성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협박이나 폭력 사태를 일으키진 않았어요. 오히려 자신들이 손해 보고 거래하는 거라면서, 지금 자신들과 거래하지 않으면 이 험난한 시국에 우리만 더 힘들어질 거라고 비아냥거리기만 했어요.
“기록문에 따르면 그들의 규모가 얼추 50명 가까이 되어 보인다고 했었는데, 전부 무장한 전투원이었나요?”
“전부는 아니었어요. 차량이나 중장비에 탑승한 사람들은 대부분 맨몸이었고, 차량 바깥에서 호위하는 십수 명 정도만 무장하고 있었어요.”
거기까지 듣고 나니 상대가 전문적인 약탈자 무리는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이 병원의 역량을 파악하고자 간단한 탐색전을 걸어왔다고 하기엔 꽤 본격적으로 움직이는 규모다.
철판을 덧댄 용달 트럭과 중장비까지 몰고 다니는 놈들이 그걸 굴릴 기름은 어디서 났겠으며, 또 굳이 다른 생존자 집단과 ‘거래’를 하려고 선뜻 접근했다는 점이 신경 쓰인다.
“그러고 보니 김해시에는 운전 학원과 중장비 학원, 철물점이 꽤 많습니다. 주변에 공단도 많아서 사람과 차량은 항상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저도 여기서 의사 생활하면서 공사 현장에서 다쳐 응급 이송된 환자들을 꽤 많이 봤습니다.”
한 의사가 그렇게 말하자 대충 윤곽이 잡히는 듯했다.
주변에 꽤 많은 중장비 학원과 운전 학원이 있고, 철물점도 있고, 공단도 많다. 그렇다는 건 차량과 기름을 모두 선점한 생존자 집단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얘기다.
‘좀비들에게 어그로가 끌리는 것을 감수하면서도 도심을 헤집고 다닌다는 건, 우리와 거래하고자 했던 목적과 일치하겠지.’
사람도, 차량도, 장비도, 기름도 다 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식료품과 의약품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위험한 도심을 헤집고 다니는 한이 있더라도 물자 수색에 목을 매는 것이고.
‘이거…… 잘만 하면 저쪽과 다투지 않고 협력할 수도 있겠는데?’
참 웃기게도 내가 부족한 건 저들이 다 가지고 있고, 저들이 부족한 건 내가 다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부산으로 들어가기 위해 김해 북부까지 뚫고 올라가 밀양과 양산 루트를 이용해야 한다. 당연히 사람의 힘으로만 그 길을 뚫는 건 불가능하니 전문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저쪽과 다시 한번 만나 보죠.”
“약탈자 무리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좀 위험해 보이던데요? 그리고 그들 중에도 각성자가 있는 것 같았어요.”
“그러니까 더더욱 만나 봐야 한다는 거예요. 만약 정말로 앞뒤 안 가리는 놈들이었다면 무력을 이용해서라도 이곳을 약탈했을 테니까요. 식료품과 의약품이 꼭 필요한 상황임에도 최소한의 선을 지킬 줄 아니까 대화의 여지도 있다고 봐야죠.”
솔직히 저쪽도 언제까지고 좀비들이 넘쳐나는 도심을 돌아다니고 싶진 않을 것이다.
물자 수색에 나설 때마다 품은 많이 들어가는데 먹여 살려야 할 입은 많고, 막상 그렇게 해서 들어오는 수익마저 적다면 누가 그런 자살 임무를 수행하고 싶겠는가.
좀비보다 사람이 먼저 지치고 겁에 질리는 것은 당연하니, 그 점을 잘 활용한다면 괜찮은 조건으로 협상할 수 있을 거다.
“협상단으로 나갈 사람을 몇 명 꾸려 주세요. 경계해야 할 잠재적 약탈자인지 서로 상부상조할 수 있는 이웃인지 한번 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