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 (86)화 (87/227)

86화 정착기 (36)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깊은 지역인 부산은 대한민국의 두 번째 수도라고 불리기에도 손색이 없었다.

곧장 태평양으로 나아갈 수 있는 드넓은 해안을 가졌으며, 실제로 러시아와 일본을 비롯한 아메리카 대륙의 국가들과 활발하게 해상 무역을 할 수 있는 무역항을 보유하고 있다.

무역항을 가지고 있다는 점, 서울 다음으로 규모가 큰 광역시(대도시)라는 점을 들어 인천과 자주 비교가 되곤 하지만, 지역 브랜드 싸움에서 우승하는 건 항상 부산이었다.

인천은 항상 서울에 밀리는 느낌이라 발전이 더딘 반면, 부산은 경상도의 핵심이나 다름없는 곳이라 빠르게 발전한다는 점이 근거였다.

뭐, 사실 그런 시시콜콜한 얘기는 이제 와서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UCAV로 내려다보고 있는 부산의 모습은 빈말로도 대한민국의 제1 해안 도시라고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으니까.

좀비 사태로 김해가 입은 피해는 부산에 비하면 약과였다.

‘엄청난 격전과 학살이 있었군.’

화면 너머로 보는 광경임에도 참담함이 생생하게 느껴질 만큼 부산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불타서 반쯤 주저앉은 건물의 잔해, 연쇄 추돌로 줄줄이 뒤집어지거나 찌그러진 차량들, 시체는 보이지 않지만 오랫 동안 외부에 노출된 탓에 검게 말라붙은 대량의 핏자국이 마치 기름 유출 사고처럼 보였다.

행정상 기록된 부산의 공식 인구는 약 335만 명. 서울의 3분의 1 정도 되는 인구를 보유하고 있지만 실제로 행정상 부산에 거주하고 있지 않은 사람들까지 합치면 못해도 500만은 될 것이다.

사실상 서울 인구의 반 정도 되는 인구가 불시에 좀비 떼의 기습을 받은 결과가 바로 이것이다.

오직 정적과 피비린내만 감돌고 있는 죽음의 거리, 그 위를 어기적어기적 돌아다니는 살덩어리, 십 년 묵은 변비보다 더 꽉 막힌 교통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알 수 없는 총체적 난국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내가 1년 전에 부산이 아니라 김해의 별장을 구입한 것이 다행이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부산에는 해작사(해군 작전 사령부)가 있지만 가장 먼저 당했겠지. 후퇴할 겨를도 없었을 테니까. 잔존 병력 일부가 사상구 방면으로 빠지면서 싸우다 5기동 비행단과 함께 김해 공항으로 후퇴한 건 이미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고…… 문제는 해운대구에 있었을 53보병 사단인데.’

53보병 사단의 최후가 어땠을지는 굳이 확인해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해운대구에서 부산, 양산, 울산을 지켜야 하는 53보병사단은 사태가 발발하자마자 군 병력을 이끌고 부산항으로 향했을 텐데, 이미 수십만 단위로 불어나 버린 좀비 떼에게 그대로 휩쓸렸을 가능성이 높다.

그 증거로 도로 곳곳에는 파괴되거나 앞뒤가 막혀서 퍼진 군용 차량이 꽤 많았다.

최신예 장갑차나 전차는 진즉에 북한을 점령할 겸, 러시아와 중국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최전방으로 보내졌다. 때문에 이런 최후방에 남은 군용 차량은 대부분 구식이었다.

이미 실전성이 거의 없다고 판명되어 훈련이나 지역 방위 정도에만 쓰이는 구식 K-200 장갑차나 두돈반, 박격포 차량 정도가 전부였을 터.

2010년대까지 어찌어찌 굴려 먹던 패튼 전차도 진즉에 박물관으로 보내지거나 스크랩 처리되었기 때문에, 부산 거리에서 주력 전차(MBT)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전차가 있었다고 해도 이 참상이 바뀌는 일은 없었겠지. 고작 전차 몇 대로 해결할 수 있을 만큼 좀비 사태는 가볍지 않았으니까.

막말로 전차 대대가 도심 전역을 휘젓고 다녔어도 한계는 명확했을 것이다. 물경 500만에 달하는 인구가 빠르게 좀비 바이러스에 집어삼켜졌을 텐데 군인들이라고 뭘 할 수 있었겠나.

‘불행 중 다행이라면 김해는 좀비 사태가 벌어지기 전에 피난민들이 날뛰어서 물자 수급이 어려워졌지만, 부산에는 물자가 꽤 많이 남아 있다는 거야.’

금방 상하는 신선 식품이나 유통 기한이 한 달을 넘지 않는 것들은 대부분 상해서 못 먹겠지만, 보존 기간이 꽤 긴 식품들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생필품이나 피복, 의약품을 비롯한 필수 물자들도 좀비들에 의해 강제로 보존되고 있는 상황. 부산은 위험한 만큼 물자 노다지로 가득 찬 금싸라기 땅이었다.

마지막으로 선로와 역이 멀쩡한지 확인하기 위해 동구 방면을 훑고 내려가 보았다.

미처 기차를 타고 피난 갈 틈도 없었는지 선로에는 쥐새끼 하나 돌아다니지 않았고, 기차도 대부분 역 외부 플랫폼에 정차한 상태 그대로였다.

기차 주변에 덕지덕지 묻어 있는 검은 흔적들은 어떻게든 피난을 가기 위해 애썼던 불쌍한 사람들이 남긴 다잉 메시지였으리라.

대한민국에 무슨 일이 터지면 보통 부산을 임시 피난처, 혹은 임시 수도로 활용했던 역사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아이러니하게도 부산이 통째로 증발해 버릴 줄이야.

UCAV를 자동 복귀시키면서 잠깐잠깐 살핀 부산의 참극 때문에 뒷맛이 더욱 좋지 않았다.

저 대도시에 들끓는 좀비들의 수는 잠정적으로만 300만 이상. 기껏해야 수십만 단위에 그치는 김해에 비하면 엄청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서울역을 제외하면 대한민국 최대 교통 중심지인 부산역은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 기차를 운용하는 것으로 얻을 수 있는 이점이 너무 압도적이야.’

만약 부산역을 손에 넣는 것이 가능하다면 경상도 지역 전체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김해와 창원, 울산과 포항에 있는 대규모 공업 단지를 모두 확보하는 것도 가능하다.

내 거점 지정 스킬과 최후의 보루 스킬의 보정 효과를 받는 모든 거점은 생활 인프라 무제한에, 기계 장치나 건물은 내구도를 가지게 된다.

특히 내구도를 가진 것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동 복구가 되니 완전히 파괴되지만 않으면 무한정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고, 그말인즉슨 자동화 공장만 손에 넣으면 24시간 공장을 풀로 돌릴 수 있다는 뜻이다.

원자재는 내가 직접 파밍을 해도 되겠지만, 여차하면 좀비를 때려잡고 얻은 DNA 샘플로 원자재를 싼값에 대량 구매할 수도 있다.

생산, 소비, 수익 창출, 다시 생산, 소비, 수익 창출. 이 꿈같은 쳇바퀴가 무한하게 돌아간다면…….

꿀꺽.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힌 미래에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넷플러스만 보다가 늙어 죽어도 되겠군.”

* * *

UCAV로 부산의 대략적인 상황을 살핀 나는 길었던 휴식을 끝내고 다시 몸을 풀었다.

이번에는 내가 자리를 비워도 거점 방위자와 일원들이 힘을 합쳐서 좀비들의 공세를 막아 낼 수 있도록 훈련시키거나, 무기를 지급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특히 거점 방위자는 내 대리 권한으로 거점 방위 무기를 수동 조작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상황에 맞춰서 무기를 재배치하거나 더욱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었다.

그런 부분들까지 전부 고려해서 밥 먹고 훈련, 자기 전에 훈련, 잠을 자다가도 깨워서 훈련을 시켰으니 이만하면 안심이었다.

사실 내가 본격적으로 다음 외부 활동에 나서도 되겠다고 판단한 이유는 따로 있었는데, 바로 며칠 전에 김해 대학교 측에서 직접 찾아온 생존자 무리들 덕분이었다.

내가 영운초, 중, 고를 장악하고 있던 약탈자 집단을 털어 버리기 전에 그들의 다음 약탈 대상이었던 김해 대학교 생존자 집단이 우리에 대한 소식을 듣고 합류를 요청했던 것이다.

대략 100명 남짓한, 딱 집단 수준이라고 불릴 만한 규모의 젊은 사람들이 합류해 준 덕분에 활천초 거점은 더욱 활기가 넘치게 되었다.

홈마트에서 가져온 장갑 구급차에 탑승하기 전, 나는 배웅을 나온 박성호와 강대현 교수에게 대략적인 지침을 전달했다.

“필요 최저한의 물자는 홈마트에서 얼마든지 갖다 써도 상관없어. 그 부분은 성호 네가 다른 사람들과 잘 상의해서 부족한 부분이 없도록 신경 써 줘.”

“맡겨만 주십쇼. 안 그래도 현석이랑 연희, 선혜한테 각 그룹의 물자 비축 상황을 정기적으로 보고받을 수 있게 보고 체계를 짜 놨습니다.”

“잘했어. 교수님은 젊은 학생들과 연세가 지긋하신 어른들 사이에서 분쟁이나 노골적인 편 가르기가 발생하지 않도록 조율 부탁드립니다.”

“교수니까 그 정도는 문제없네. 걱정 말게.”

이래서 집단에 교육자가 반드시 필요한 거다.

현명한 교육자가 중심을 딱 잡아 줘야 아랫사람들은 예의와 지식을 배우고, 윗사람들은 배려와 이해를 새겨듣는 법이니까.

만약 강대현 교수 같은 베테랑 교육자가 없었다면 이 집단에 얼마나 자잘한 분쟁들이 많이 쌓였을지 상상도 안 간다.

지난 1년간 사람과의 커뮤니케이션을 단절하다시피 했던 내가 그런 부분들까지 세세하게 케어하는 건 불가능했다.

혹시 모를 또 다른 공세에 대비해 활천초 거점을 떠나기 전, 나는 다른 거점과 가장 많이 호환되는 방위 무기인 머신 피스톨 터렛을 업그레이드했다.

[9mm 머신 피스톨 Lv.1 > Lv.2]

[현재 잔여 탄약 : 100%(500/500 > 750/750)]

[탄약 1% 재생성에 소모되는 시간 : 1분 > 50초]

[적용되는 스킬 : 거점 지정(C-), 거점 경계 강화(E), 거점 방어 강화(E), 최후의 보루(A+)]

[현재 전력이 정상적으로 공급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주의 : 전력 공급이 중단되면 탄약이 재생산되지 않습니다.]

[주의 : 자동 포탑의 내구도가 (50% > 40%) 이하로 떨어질 경우 ‘파괴’됩니다. 1회용 수리킷으로 수리 가능.(도구 제작 스킬 필요)]

[주의 : 거점 범위 바깥의 존재를 공격할 수 없습니다.]

‘이 정도면 방위 무기 업그레이드도 적극적으로 고려해 볼 만한데?’

머신 피스톨 터렛은 별장을 제외하면 내가 보유하고 있는 모든 거점에서 쓰이고 있는 범용성 좋은 무기다.

최대 500발의 9mm 파라블럼탄을 퍼붓는 이 소형 터렛은 설치해 두기만 해도 밀려드는 수십 마리 좀비 떼를 처리해 버릴 힘이 있다.

물론 그만큼 내구도가 약하고 탄약 소모가 너무 빠르다는 단점 때문에 한계가 명확하지만, 숙련 포인트를 2만큼 소모해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한 것만으로도 단점이 상당히 개선되었다.

이제 12포인트였던 숙련 포인트는 다시 10이 되었다. 나머지는 좀 더 생각해 보고 상황을 봐 가며 투자할 생각이다.

지금 거점 지정 스킬을 C-에서 B-까지 단숨에 업그레이드하려면 총 20포인트가 필요하다. B-에서 A-까지 가려면 그 2배인 40포인트, A-에서 S-까지 가려면 80포인트.

내가 죽어라 레벨을 올린다고 한들 거점 지정 스킬을 A까지 찍을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진 해 봐야지.’

사람들에게 배웅을 받으며 활천초를 빠져나온 나는 곧장 부산으로 넘어가는 게 아닌, 일단 경희대 병원 거점으로 향했다.

김해에서 부산으로 이어지는 모든 길목은 군인들이 파괴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 위험한 곳에 나 혼자 간다고 좋을 것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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