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정착기 (35)
거점을 노린 좀비들의 대공세를 받아 낸 지 며칠이 지났다.
“상태창.”
[생존자 : 이승권]
[직업 : 퇴역병]
[직업 숙련 레벨 : 24 > 26]
[칭호 : 오버킬, 피바람, 응급 구조 요원, 동족포식자, 농성의 왕(NEW)]
[생존 기간 : 25일 차]
[숙련 포인트 : 10 > 12]
지난번 대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 낸 데다 돌연변이 좀비를 상당히 처리한 덕분일까, 직업 숙련 레벨이 2나 올랐고 새로운 칭호를 하나 더 얻었다.
숙련 포인트는 벌써 12나 쌓여서 슬슬 한 번쯤 더 투자를 해 줘야 할 것 같은데, 아직 다음 활동 방침을 정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잠시 미뤄 두고 있었다.
또 다른 대공세가 우려되니 거점의 방위 무기들을 우선적으로 강화할지, 아니면 내 작전 능력을 더 높이기 위해 스킬이나 스텟을 강화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던 것이다.
“어휴, 시발. 대체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부지런했다고. 누가 보면 대기업에 취직이라도 한 줄 알겠네.”
활천초 옥상에 설치해 둔 임시 초소. 홈마트에서 가져온 소형 전기 히터와 작은 소파를 가져다 놓고 누워 있으니 잠이 솔솔 왔다.
과거의 나였다면 지금 이 자세 그대로 간식을 와작와작 씹어 먹으면서 넷플러스의 숨 막히는 막장 드라마를 시청하고 있었을 텐데, 인터넷이 먹통이 된 지금은 TV와 컴퓨터, 스마트폰이 있어도 넷플러스를 볼 수 없었다.
물론 모든 가정집을 돌아다니면서 버려진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긁어모은 다음 내 거점에서 작동시켜 보면 불법 다운로드된 영화나 드라마가 몇백 개쯤 나오긴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궁극적으로는 휴식에 대한 내 갈망을 온전히 채워 줄 수 없다. 애초에 그걸 일일이 다 긁어모으기도 귀찮고.
차라리 내 직업이 퇴역병이 아니라 방구석 여포였다면, 평생 집 밖에 나가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넷플러스를 감상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을 것을.
직업이 퇴역병인데도 현장에서 퇴역을 못 한 내 아이러니한 운명이 저주스럽다.
와작와작!
배 위에 올려 둔 감자 칩을 입 안 가득 털어 넣으면서, 임시 초소의 창밖 너머로 보이는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지금 이렇게 여유 부릴 수 있는 것은 거대한 창고형 마트로 리뉴얼된 홈마트에서 물자가 쏟아져 나온 덕분이다.
과자, 음료수, 냉동식품, 라면, 심지어 신선한 고기와 야채, 각종 조미료까지. 입이 심심할 틈이 없다.
족히 몇천 명을 한 달 내내 먹여 살릴 수 있는 풍족한 물자는 홈마트와 거리가 가까운 활천초 사람들에게 가장 우선적으로 공급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다들 식사 시간만 되면 노골적으로 기뻐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각자 맡은 역할에 충실해야 하지만, 대신 삼시 세끼와 간식까지 넉넉히 지급되고, 깨끗한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는 데다 난방비 걱정할 필요 없는 아늑한 잠자리까지 준비되어 있다.
당연히 여기에 불만을 가지는 사람은 없었다. 애초에 불만을 가지면 그날로 좀비 밥행인데.
문제는 이게 지금 당장은 이상적인 지상 낙원처럼 보이겠으나, 장기적으로 보면 결코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젊고 힘센 노동력보다 늙거나 약한 노동력이 훨씬 더 많은 상황이니까.
‘넘치는 물자와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생활 인프라, 그리고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는 장점을 충분히 살리지 못하고 있어. 더 많은 사람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현재 김해 내부에서 다수의 생존자를 확보하기란 요원하다.
좀비 사태가 벌어진 당일에 휘말린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도 한몫하지만, 지난 25일간 인간들만큼이나 좀비들 역시 활발하게 사냥을 했다는 점이 크다.
분명 내가 때려잡은 좀비만 얼추 1만 마리쯤 되는 것 같은데, 여전히 김해 내부에는 좀비들이 바퀴벌레처럼 득시글거린다.
외부 지역으로 빠져나간 놈들이 있다고 해도 김해 내부에 최소 십만 단위의 좀비들이 더 있겠지. 부산? 부산은 못해도 백만 단위다.
나는 머릿속에서 한반도 지도를 그려 놓고 좀비들의 예측 이동 경로를 표시했다.
우선 서울에서 가장 먼저 터져 나온 천만 좀비. 이놈들은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고 미친 듯이 퍼져 나갔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인천과 경기도가 2차 피해를 입었을 것이고, 피난길에 오른 사람들 때문에 충청도와 강원도, 경상북도가 순차적으로 좀비들의 공세를 받아 내야 했을 터.
만약 부산에서 좀비 사태가 발발하지 않았더라면 후방 군부대는 경찰과 협력하여 전라도와 경상도를 합친 남부 방어선을 구축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좀비는 준비되지 않은 인간보다 항상 빨랐다. 그것도 아슬아슬하게 한 걸음 빨랐던 것이 아니라 최소 열 걸음 이상은 빨랐다.
군대와 경찰이 제대로 방어선과 방역망을 구축하기도 전에 좀비들이 모든 지역을 집어삼켰으니까.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한반도에서 그나마 안전하다고 추정되는 곳은 북부 지역과 제주도인가?’
한반도 북부 지역은 한창 재건 사업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많은 자본과 인력이 투입되었으나, 그들은 한반도 평화 유지를 위해 주둔 중인 강력한 한미 연합군과 함께하고 있다.
즉 질적, 양적으로 모두 후달리는 한반도 최후방 부대와 달리 제대로 된 군대가 진을 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 곳에 좀비들이 무지성으로 어택땅을 찍어 봤자 모조리 몰살당했을 게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북부에서 지원군이 내려오지 않는 이유? 당연히 K-좀비만 그들을 노리는 게 아닐 테니까.
한반도 북부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두 국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강시(차이나 좀비)와 고프닉(러시아 좀비)이 있지 않은가.
머릿수 많고 화력도 쩔어 주는 강력한 군대라고 한들, 위아래로 몰려드는 좀비들을 모조리 쳐부수고 지원을 오는 것은 다소 힘들 것이다.
좀비들을 처죽일 수 있느냐 없느냐는 둘째치고 보급이 끊어졌을 테니까.
‘외부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으니 이쪽에서 자체적으로 세력을 꾸리고, 인간의 영역을 빠르게 확장시켜야 한다는 건데…… 그러려면 필요한 게 한둘이 아니다.’
우선 나처럼 존나 잘 싸우지는 못해도 그럭저럭 싸울 수 있는, 최소 1인분은 해 주는 전투원이 다수 필요하다. 덧붙여서 그들에게 지급돼야 할 각종 무기도.
그다음은 도시 어디서든 우리의 작전을 지원해 줄 수 있는 전초 기지와 생존자들이 거주할 수 있는 안정된 거점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안전하면서도 빠른 이동 수단이 필요하다.
인간은 좀비와 달리 먹고 마시고 싸고 잠도 자야 하는 생물인지라 행군으로 이동할 수 있는 거리는 잘 쳐줘도 수십 km이며, 행군 중에는 기습에 매우 취약해진다.
도시 내부를 휘젓고 다니는 것 정도는 문제없겠으나, 지역 간의 이동, 나아가서 도(道) 단위로 움직일 때는 안전한 이동 수단이 필수다.
이동 수단도 평범한 것은 안 된다. 일반 승용차 정도로는 어림도 없고 최소 수송 트럭이나 군용 장갑차 정도는 돼야…….
“잠깐. 지역 간 이동이 자유롭고 안전한 데다 한 번에 옮길 수 있는 인원과 화물 수량이 많은 이동 수단?”
그거 완전 기차 아니냐?
선로 위를 거침없이 달리는 기차, 그 기차의 벌집 같은 창문을 총안구로 개조해서 거치형 기관총이나 고속 유탄 발사기 따위를 달아 둔다면…… 2차 세계대전 이후 종적을 감춘 무장 열차가 다시금 부활하는 것이다.
“오오…….”
[무장 열차].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웅장해지지 않는가? 묘한 울림도 있고, 무엇보다 800mm 대포를 운송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론상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순수하게 기찻길만 이용하면 경상도에서 수도권까지 올라가는 건 문제도 아니다. 중간중간 선로를 바꾸기만 한다면 다른 지역으로도 얼마든지 갈 수 있고.
버려진 차량들로 꽉 막힌 도로처럼 교통 체증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좀비 사태 이후 대부분의 기차들은 제 역할을 끝마치자마자 특정 역에서 지금까지 처박혀 있을 테니까.
한번 상상해 보자.
우선 규모가 큰 기차역 하나를 접수하고 거점으로 삼는다.
그다음 내 소유가 된 기차는 거점 방위 무기로 탈바꿈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어디까지나 내 추측에 불과하지만.
거점 방위 무기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원격 제어가 가능하기 때문에, 그리고 전력을 무한정 공급하고 내구도가 자동으로 수리되는 내 직업 스킬 특성상 기차는 쉬지 않고 달릴 수 있다. 어디로든, 언제까지든.
‘사람을 모으고, 좀비를 배제하고, 인간의 영역을 넓힐 수 있다. 도시 한 곳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전국 단위로 활동 범위를 넓힐 수 있게 되는 거야.’
꿈만 같은 이야기지만 아주 현실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후보지를 찾아 봐야겠군.”
나 대신 열심히 도시를 정찰해 줄 놈이 마침 옆에 있다.
소파에 누운 채 컨트롤러를 손에 쥔 나는 UCAV 발사기의 각도와 방향을 조정하고, UCAV를 발진시켰다.
컨트롤러는 양손으로 쥐어야 할 만큼 큰 전술 태블릿이었다. 구형 오락기처럼 조이스틱을 이용해서 조종이라도 하는 건 줄 알았는데 이 부분은 조금 의외였다.
하늘로 힘차게 날아오른 UCAV는 수백 미터 상공 위에서 안정적인 궤도를 잡더니 곧 일직선으로 쭉 날아가기 시작했다.
UCAV의 전면부와 동체 아래에 부착된 정찰 카메라를 이용해 내려다본 도시의 전경은 놀랄 만큼 신선했다. 그리고 동시에 허무감을 느꼈다.
평시라면 사람과 차량이 북적거리고 있어야 할 김해 시내는 더 이상 시끌벅적하지 않았으며, 모든 것이 정체된 죽음의 도시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한때 크게 번영했지만 끝내 망해 버린 미국의 디트로이트시가 딱 이런 느낌이었을까.
무엇보다 저 아래에서 뭔가 꼬물꼬물 움직이는 게, 그것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도 사실은 인간이 아니라는 점이 씁쓸했다.
‘역시 김해는 가망이 없다. 지역 전체를 복구하더라도 전초 기지 내지는 생산 기지로 쓸 수밖에 없겠어.’
눈여겨볼 만한 구역이 공장 밀집 구역과 김해 공항뿐이다. 그 외에는 다른 지역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자잘한 거점 후보들뿐.
무려 김해 생활 6년 차, 이제는 당당하게 김해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는 나 이승권이 보기에도 김해는 S급 전략적 요충지가 아닌 것이다. 정말 잘 쳐줘도 B~A급?
‘당장 공단은 바로 옆에 있는 창원에 밀리고, 도시의 규모는 부산에 밀리지. 아주 양옆으로 얻어맞는구만.’
그렇다고 인프라가 잘 깔려 있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다. 김해는 경상도의 대표적인 베드타운이기 때문에 최신예, 첨단화와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김해 내부에선 더 이상 볼 것이 없다고 판단한 나는 과감하게 UCAV의 방향을 틀어 부산으로 향했다.
부산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김해 공항을 슬쩍 살폈는데, 피난민 수용소라는 이름에 걸맞게 꽤 많은 사람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긴 실속이 없다.’
군인과 민간인이 서로 협조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각자의 사정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분위기도 아닌, 그냥 저기에 처박혀 있다가 서서히 자멸하는 길을 걷고 있는 수용소 집단.
저기 있는 인간들을 당장 받아들인다면 일손 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으나, 온갖 사건 사고가 발생하겠지. 그런 건 내 쪽에서 사양이다.
김해 공항을 그냥 지나친 UCAV는 마침내 부산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김해와는 차원이 다른 참상을 정찰 카메라에 담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