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정착기 (34)
내가 구입한 방탄 방패는 높이 1m 50cm에 소총탄까지 무난하게 방어할 수 있는 방패인 만큼 이동 시 은폐성을 기대하긴 힘들었다. 보통은 수레처럼 바퀴로 밀고 다닌다니 말 다 한 것이다.
한쪽 팔로 방패를 들 수 있게끔 가죽 벨트로 단단히 고정하고, 방탄 방패 측면의 총열 거치대에 소총을 견착시켰다.
필요에 따라 권총, 기관단총을 견착시켜서 느리고 움직임이 제한적인 방패병도 즉각적으로 적에게 대응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보조 장치였다.
방탄 방패를 들고 건물을 내려가 장벽 위로 놈들에게 접근하자, 놈들도 내가 사거리 내에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무언가를 쏘아 댔다.
팅! 티잉! 깡!
자세를 살짝 낮추고 방탄 방패에 몸의 대부분을 가린 채 접근하니 자그마한 가시 같은 것들이 소나기처럼 요란하게 방패를 두들겼다.
놈들의 이목이 내게 집중된 틈을 타, 나는 재빨리 거점창을 조작해서 머신 피스톨 터렛의 위치를 놈들 근처로 재배치했다.
거점 내부라면 방위 무기를 재배치하는 건 내 자유였기 때문에, 놈들의 코앞에서 무기를 재배치하는 것도 가능했다.
마법처럼 뿅 하고 나타난 머신 피스톨 터렛이 갑자기 총구를 쳐 들자, 눈치채는 것이 한발 늦었던 놈들에게 9mm 탄환이 쏟아졌다.
만약 처음부터 놈들의 앞에서 머신 피스톨 터렛을 재배치했다면 즉각 반응한 놈들이 먼저 터렛을 박살 내 버렸겠지만, 하필 내게 가시를 쏟아 내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놈들의 방어선을 손쉽게 와해시킨 나는 순간적으로 속도를 높였다.
그리고 꿀렁꿀렁 호흡하고 있는 자폭형 좀비에게 접근해서 방패로 밀어냈다. 손으로 직접 만지기엔 뭔가 꺼림칙하고, 큰 충격을 주면 터질 테니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내 힘에 밀린 자폭형 좀비가 통통한 스모크 햄 같은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다가 장벽 아래로 떨어졌다.
장벽 아래에 가득 쌓여 있는 좀비들의 시체가 훌륭한 경사면이 되어 자폭형 좀비를 저 멀리 굴려 보냈다.
“청소 한번 더럽게 힘드네.”
까앙!
“빡쳤냐?”
머신 피스톨 터렛의 장점은 순간적으로 근거리에 엄청난 화력을 투사할 수 있다는 점이고, 단점은 내구도가 낮아서 잘 부서지는 데다 탄약도 적어서 금방 오링이 난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처음 머신 피스톨 터렛을 재배치했을 때만 해도 미처 그쪽을 신경 쓰지 못한 좀비들이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구조였는데, 놈들은 빠르게 가시 같은 걸 쏴서 터렛을 박살 내 버렸다.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어진 놈들은 방탄 방패 뒤에 몸을 숨기고 있는 나를 다시 집요하게 노려 댔다.
하지만 거리낄 것이 없어진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놈들이 터렛에 엉덩이가 털리는 동안 나는 착실하게 장벽 위에서 꿀렁대고 있던 폭발형 좀비들을 저 바깥으로 밀어냈거든.
저놈들은 다른 좀비의 도움이 없으면 절대 이 장벽을 넘어오지 못한다. 남은 건 근접 전투 능력이 상대적으로 후달리는 원거리 공격형 좀비들뿐이다.
나는 놈들에게 양각을 주지 않기 위해 교묘하게 다른 좀비들의 시체를 고기 방패로 삼으며, 신체 부위가 조금이라도 드러나지 않도록 신경 썼다.
놈들이 어깨의 특이한 구멍에서 퓩퓩 쏴 대는 가시는 별다른 보호 장구를 갖추지 못한 일반인을 상대로는 확실히 치명적이었다.
총탄만큼 위력이 엄청난 건 아니었지만, 두꺼운 겨울옷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관통할 것이다. 제대로 된 방탄복도 지급받지 못했을 군인들이 허망하게 당한 건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다만 놈들이 원거리 공격 원 툴이라고는 해도 지능 면에서는 일반적인 좀비를 크게 상회한다.
놈들은 자폭형 좀비가 무력화되자마자 내가 혼자라는 점을 이용해 포위망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내 방패로 막을 수 있는 범위는 잘 쳐줘도 전면부. 측면이나 후방은 뻥 뚫려 있다.
터렛도 모두 망가지고, 발칸포의 탄약도 다 소진된 지금, 나는 혼자서 십수 마리의 원거리 공격형 좀비들을 상대해야 했다. 자꾸 원거리 공격형 좀비라고 부르는 것도 귀찮으니까 그냥 독침 좀비라고 부를까?
“만나서 반갑다, 독침 좀비. 잘 가라, 독침 좀비.”
형식적인 인사치레를 한 나는 똑같이 제 동료의 시체를 엄폐물 삼아 움직이는 독침 좀비를 향해 총구를 겨눴다. 방패의 거치대를 사용한 덕분에 한 손으로도 소총을 쏘는 데 무리는 없었다.
타타타타타!
소총탄이 시체를 꿰뚫고 검붉은 육편을 튀기며, 영악하게 움직이고 있던 독침 좀비의 살점을 헤집었다.
‘남은 탄약은 25발. 상황이 상황인지라 재장전은 할 수 없다.’
팔 한쪽은 방탄 방패의 가죽 벨트에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움직이면 방탄 방패도 같이 움직인다. 한 손으로 장전할 수는 없다. 설령 가능하다고 해도 공격이 멈춘 순간 놈들이 달려들겠지.
까앙! 깡!
또 한번 방탄 방패를 두들기는 독침 세례에 간담이 서늘해진다. 방탄 방패는 절대로 뚫리지 않겠지만, 혹시라도 전부 가려지지 않은 내 몸의 일부에 적중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감염돼서 좀비행? 아니면 자폭형 좀비의 독 연기를 들이마신 것처럼 신체 능력이 감퇴해서 무력화? 어느 쪽도 달가운 소식은 아니다.
‘놈들은 나와 싸우기 전에 이미 군인들과 싸워 본 경험이 있다. 총에 대해서 알고 있어.’
이 시끄럽고 무서운 무기가 불을 뿜을 때마다 동료들이 픽픽 쓰러져 나가지만, 동시에 재장전이라는 큰 빈틈이 존재한다는 걸 모를 리가 없다.
내가 시발, 살다 살다 좀비랑 눈치 게임을 하게 될 줄이야. 대 단 하 다 이승권!
타타! 타타타타타!
잔여 탄약 18발. 둘 처리.
탕! 탕!
잔여 탄약 16발. 하나 처리.
타타타타!
잔여 탄약 12발. 하나 처리.
높은 사격 스킬 덕분에 한 손으로 총을 쏴도 최소 한 놈 이상은 처리할 수 있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아직도 놈들은 여덟 마리나 남았다.
‘게다가 시체가 늘어나면서 놈들에게도 공격 기회가 더 생겼다.’
늘어난 시체는 내가 고작 한 놈을 처리하는 데도 쓸데없이 더 많은 탄약을 쓰게 하는 원흉이었다. 단 한 발로 시체를 꿰뚫어서 그 뒤에 있는 놈을 즉사시킨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차라리 남은 탄약을 한 번에 쏟아붓고 방탄 방패를 등에 멘 다음 전력으로 달려서 안쪽으로 도망칠까? 잠깐의 틈을 번다면 재정비를 해서 놈들을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타앙!
“음?”
타앙! 탕! 타타타!
내가 쏜 게 아니다.
학교 방향에서 들려온 총성이다.
퍼퍽!
신경 써야 할 적은 나뿐이라고 방심하고 있던 놈들이 측면에서 날아든 총탄에 허망하게 쓰러졌다. 슬쩍 곁눈질을 하니, 어느새 건물 옥상으로 올라온 여행 동아리 회원들이 앉아쏴 자세로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내가 저 녀석들에게 총과 탄약을 지급하면서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게끔 자체적으로 사격 훈련을 시켰는데, 그 노력이 지금 빛을 발하고 있었다.
타타타타타!
나도 질세라 합공을 퍼붓자 되레 양각이 잡힌 놈들은 속수무책으로 총탄에 꿰뚫렸다. 숨어도 숨을 수 없고, 도망치자니 너무 늦은 상황.
결국 놈들은 앞뒤로 날아드는 총탄에 버티지 못하고 전멸했다. 활천초 거점의 기념비적인 첫 대규모 전투 승리였다.
내가 조용히 소총을 하늘 높이 들어 올리자 옥상에 있던 녀석들도 소총을 치켜들고 환희의 함성을 질러 댔다. 이것이 훈련받은 미필의 힘……?
* * *
“형님, 방금 봤습니까?! 제가 쏘니까 그 좀비 새끼들 머리통이 퍽 터지는 게……!”
“성호 오빠는 손 떨려서 제대로 못 쐈잖아요. 현석이가 더 잘 쏘는 것 같던데?”
“고럼고럼, 성호 형 훈련은 잘하던데 실전은 영 젬병이더만.”
“아니! 야! 나 진짜 잘 쐈다니까?!”
건물로 복귀하니 처음으로 총을 쏴서 좀비들을 소탕한 여행 동아리 회원들이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나는 그런 녀석들을 진정시키고, 전투가 끝났으니 불미스러운 사고가 생기지 않도록 약실에 탄약이 남아 있는지, 안전장치를 다시 걸어 뒀는지, 잔여 탄약은 얼마나 되는지 확인하게 했다.
뒤늦게 이성을 되찾은 녀석들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총기 점검에 들어갔다. 훈련으로 수없이 반복했을 작업이겠지만, 실전을 겪은 뒤에 하는 작업으로는 처음이라 다들 긴장한 눈치였다.
총기를 다루는 사람이 가장 주의해야 하는 것은 기능 고장과 오발 사고인 만큼, 이 부분은 몇 번을 더 강조해도 모자랐다.
내가 한숨 돌리고 있을 때 강대현 교수가 다가왔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투를 지켜봤기 때문인지 하고 싶은 말이 제법 많은 것 같았다.
“자네가 싸우는 모습을 지켜봤네. 그런데 다소 무모하게 싸우는 것 같더군. 이 학생들이 돕지 않았더라면 위험할 뻔했어. 혹시 그 녹색으로 부풀어 오른 덩어리 같은 괴물 때문인가?”
“자폭형 좀비를 말하는 거라면 맞습니다. 그놈들은 큰 충격을 받거나 하면 엄청난 폭발을 일으키는데, 그게 장벽을 무너뜨릴까 봐 직접 힘으로 밀어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다소 무리를 했죠.”
“그놈들이 ‘자폭’을 한다면 자네가 접근한 순간 폭발했을 가능성도 있지 않았나? 어째서 그런 위험한 짓을……?”
“아뇨, 자폭형 좀비는 주위에 다른 좀비들이 있으면 스스로 폭발하지 않습니다. 지켜보셔서 알겠지만 놈들에게는 어느 정도 지능이 있고, 서로를 돕는다는 기본적인 연계를 할 줄도 압니다. 그러니 일정 수치 이상의 충격을 가하지만 않으면 비교적 안전하죠.”
비교적 안전하다는 말도 어디까지나 폭발에 휘말릴 일이 없다는 의미지, 놈들이 내뿜는 독성 연기 때문에 일반인은 접근조차 할 수 없다. 방독면이 없었다면 나도 눈물을 무릅쓰고 결국 놈들을 폭발시켜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해도, 평범한 사람은 절대로 그런 시도를 하지 않았을 걸세. 누가 봐도 자살 행위 아니었나.”
“그럼 여러분들을 희생시켜야 했을까요?”
“…….”
“딱히 제가 성격 좋은 호구라서 직접 나선 게 아닙니다. 이 중에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이 저밖에 없으니까 한 거죠. 막말로 제가 이 거점의 왕이라는 절대 권력을 이용해서 여러분에게 대충 무기를 쥐여 주고 좀비들을 막으라고 했다면 어땠을 것 같습니까? 막기야 막았겠죠. 하지만 대부분 죽거나 다쳤을 겁니다. 그래서야 의미가 없죠.”
누가 편해지지 않고 싶겠느냐마는, 잠깐 편해지려고 더 편해질 수 있는 기회를 날려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많은 사람이 살아야 내가 더 편해지고, 많은 사람들이 살아야 새회 재건도 다 빨라진다.
물론 약탈자나 범죄자, 혹은 이기주의자들처럼 제 잇속만 챙기는 쭉정이들은 가차 없이 쳐 내겠지만, 당장은 내가 발로 뛰더라도 눈앞에 닥친 문제를 직접 해결해야 한다.
내가 놀고먹게 되는 그날이 오려면 아직 멀었으니까.
“그래도 이걸로 한 가지는 확실해졌죠. 언제까지고 제가 여러분을 보호해 드릴 수는 없으니, 여러분들이 스스로 무장하고 싸우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는 것 말입니다.”
“그 점은 동의하네. 오늘 자네가 싸우는 것을 보고 나니 어쭙잖은 무력으로는 이 가혹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힘들겠더군. 당장 늙은 나조차도 다시 총을 잡아야 할 판이야.”
“싸울 수 있는 사람이 하나라도 더 많아지면 좋죠. 하지만 현역과 예비군은 구분할 생각입니다. 제가 목표로 삼는 건 생존자들의 자립이니까요.”
언제까지고 내가 베이비시터인 양 그들을 비호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식량과 식수, 안전한 거점을 무한정 지원해 준다면 받는 것에만 익숙해진 인간들은 한없이 나약해지고, 이기적으로 변하게 되겠지. 나는 그런 정체된 사회를 원하지 않는다.
“우선은 좀 쉬죠. 좀비 시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질 테니 따로 치울 필요는 없습니다.”
아침 해가 밝아 오면서 또 한번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처음으로 거점을 노리고 몰려든 좀비들의 대공세를 겪으면서 느낀 점은, 역시 거점을 더 확보하고 가능한 많은 생존자를 집결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UCAV를 이용해서 도심 내부 정찰을 해 봐야겠군.’
좀비 사태가 벌어진 지 벌써 3주가 넘었지만 아직도 내가 모르는 것투성이다.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