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정착기 (33)
“비전투원은 모두 건물 안으로 대피시켜요! 경비 인력은 무장한 상태로 건물의 각 출입구를 봉쇄한 뒤에 사주 경계와 방어!!”
내 지시에 여행 동아리의 박성호와 전현석이 먼저 뛰쳐나갔다.
다른 사람들도 전투에 부적합한 여성이나 노약자 등을 불러 모아 건물 안으로 대피시키기 위해 움직였다. 강대현 교수만이 굳은 얼굴로 나를 따라나섰다.
“갑자기 그렇게 다급해져서는, 대체 무슨 일인가?!”
“적이 침입했습니다. 저만 볼 수 있는 거점의 경보 시스템이 작동한 겁니다.”
“!”
강대현 교수와 함께 옥상으로 올라간 나는 발칸포의 포구 각도를 미리 아래로 내려 두었다. 어차피 자동으로 적을 감지하면 알아서 포구를 돌리겠지만, 포구를 미리 내려 두면 더 빨리 적을 포착하고 타격할 수 있으리라.
그때, 옥상의 임시 초소에 있던 망원경을 집어 든 강대현 교수가 남쪽 장벽을 가리키며 외쳤다.
“뭔가가 장벽 너머에서 움직이고 있네!”
“거점과 인근 건물 간의 거리가 물리적으로 가까워지면서 장벽을 쉽게 타 넘을 수 있게 된 겁니다. 그래서 좀비들이 기회를 엿보다 침투하기 시작한 게 틀림없습니다!”
콰아아앙!
장벽 아래에 설치해 둔 1차 방어선 겸 놈들의 침입을 알리는 신호탄 역할인 부비 트랩이 마침내 폭발했다.
저 아래에선 사람들이 이미 건물 안으로 대피를 끝마친 듯, 다소 소란스럽기는 했지만 함부로 바깥을 돌아다니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교수님도 안으로 대피하시죠. 아직 확실한 건 없지만 놈들 중에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놈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난 저놈들에 대해 알아야겠어. 어떤 놈들인지, 뭐가 목적인지, 어떻게 해야 확실히 죽일 수 있는지. 이런 시대일수록 아는 것이 곧 힘이라고들 하지 않던가.”
“……전 분명히 경고했습니다.”
장벽을 타 넘어온 좀비 떼의 선봉대가 부비 트랩을 건드려 순차적으로 폭발을 일으키고, 사방팔방에 육편과 혈흔을 흩뿌렸다.
저만한 숫자의 좀비들이 일반적인 거점을 기습했다면, 거점 내부의 인간들이 멋모르고 놈들과 마주했다면 어떤 대참사가 벌어졌을지 감도 안 잡힌다.
다행히 내 거점에는 무방비한 사람들도 쉽게 보호할 수 있도록 방위 시스템이 잘 짜여 있다. 물론 이 방위 시스템도 무적은 아니었지만, 구석까지 몰린 인간들에게 희망을 품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지금.’
나는 일부러 전력을 공급하지 않고 있던 전기 철조망에 원격으로 전력을 공급했다.
처음부터 전기 철조망이 작동하고 있었다면 장벽을 타 넘던 놈들 몇몇만 타 죽으면서 놈들이 싱겁게 기습을 포기했겠지만, 상당한 수의 좀비들이 장벽에 몰려든 지금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파파파파파팍!
지금까지 침묵하고 있던 전기 철조망에 전력이 공급되기가 무섭게 장벽에 몰려든 좀비들이 단체로 감전되었다.
부비 트랩이 폭발할 때는 사방팔방으로 육편을 흩뿌렸지만, 고압 전류에 감전된 좀비들은 새까맣게 타들어 가면서 역겨운 냄새를 공기 중에 흘려보냈다.
11월의 쌀쌀한 밤바람을 타고 날아든 살 타는 냄새는 비위 좋은 사람의 속도 메스껍게 하는 힘이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 코는 오랜만에 맡는 ‘익숙한 냄새’에 반가워하고 있었지만.
-경고 : 전기 철조망이 파괴되었습니다.
-원인 : 내구도 50% 이하로 감소.
“쓰읍…….”
전기 철조망은 애초에 적의 침입을 예방하는 물건이지, 막상 침입을 개시한 적들을 상대로 오래 버티는 물건은 아니었다.
철조망에 진득하게 눌러붙은 희생양들의 살점, 그 위로 쌓이는 무수한 시체들, 엄청난 중량과 충격이 연약한 전기 철조망을 짓누르다 보면 결국 무너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짧은 시간 동안 못해도 수십 마리는 감전사시켰다. 여기 있는 수백 명의 생존자들을 노리겠다면 너희도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경고 메시지로 충분했으리라.
“신체 능력이 인간보다 대단할 뿐, 치명적인 피해를 입으면 죽는 건 인간과 똑같군.”
“신체 구조가 인간과 똑같거나 흡사한 이상, 인간이 가진 태생적인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는 법이죠.”
인간은 굉장히 비효율적인 신체 구조를 가지고 있다. 복잡한 장기나 결함 투성이인 골격근은 둘째치고, 외부 충격에 너무 약했다.
인간의 몸뚱이에서 바이러스를 키우고, 인간의 몸뚱이로 움직이는 이상 좀비는 인간으로부터 파생된 문제들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고작 제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근육과 신경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이 인간의 신체 구조인데, 하물며 놈들이 감전과 폭발에 견딜 수 있을 리가 없다.
콰아아아앙!
“……놈들의 수가 좀처럼 줄지 않는 것 같군.”
“작정하고 덤벼든 놈들이니 못해도 이 거점에 있는 사람들의 배 이상은 될 겁니다.”
철컥!
배신자 군인에게서 노획했던 K-2 소총의 탄창을 한 번 더 확인하고, 조정간을 연발로 바꿨다.
전기 철조망은 진즉에 무력화되었고, 장벽 아래에 설치해 둔 부비 트랩도 전부 터지면서 사실상 1차 방어선은 뚫린 상태였다.
놈들도 더 이상 폭발이나 감전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눈치챘는지, 이번에야말로 작정하고 제 동료들의 시체를 짓밟고 거점 내부로 밀려 들어왔다.
“귀 막으세요.”
그때, 옥상에 설치된 2대의 발칸포가 맹렬하게 불을 뿜었다.
카카카카카카카카카카!
처음 활천초를 거점으로 삼았을 때 딱 한 번 써 본 게 전부였는데, 다시 한번 이 위력을 보게 되니 저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졌다.
2대의 발칸포가 넓은 운동장을 미친 듯이 질주해 오는 좀비들에게 흩뿌린 탄환 세례는 지상의 모든 것을 휩쓰는 허리케인이었다.
애초에 발칸포는 적의 비행체를 격추하기 위한 방공 무기이기 때문에 연사력이나 위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장갑차 정도라면 눈 깜짝할 사이에 걸레짝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을 만큼.
커다란 탄약통에서 한동안 쓰일 일 없이 차갑게 식어 있던 20mm 철갑 예광탄이 빠르게 탄띠를 통해 빨려 들어가며 총구로 배출되었다.
총성이 울려 퍼지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목표물에 착탄하면, 목표물은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느끼기도 전에 갈기갈기 찢겨 나간 지 오래였다.
단 한 발의 20mm 철갑탄이 인간의 몸뚱이를 베이스로 탄생한 좀비에게 얼마나 과한 화력이었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 없겠지.
팔이나 다리가 충격에 날아가는 건 애교였다.
아예 머리통이 통째로 사라지기도 했으며,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되어 바람에 날리는 비닐봉지처럼 이리저리 흩어졌다.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퍼즐 놀이 하는 것처럼 조각을 최대한 끼워 맞춰도 기껏해야 좀비 몇 마리 분량이 나올 만큼 철저하게 분쇄되었다.
철컥철컥! 쉬이이이……!
‘다 좋은데 조루인 게 너무 아쉽네.’
분당 6천 발을 쏴 대는 미친 괴물이 이렇게나 빨리 침묵한 이유는 탄약 박스에 들어 있는 탄약이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이것도 숙련 포인트를 투자하면 해결될 일이지만 지금까지 아까워서 투자를 안 했었다.
하지만 당장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
운동장에 밀려 들어오던 놈들을 한번 싹 쓸어버린 덕분에 이쪽에서도 대응할 시간을 벌었다. 놈들의 머릿수도 최소 반은 줄었다.
선봉대 격멸, 1차 공세도 분쇄.
초반전에서 기선 제압에 완전히 실패한 좀비들은 이 망가진 분위기를 후반전에서 뒤집을 생각으로 신중하게 움직였다.
놈들이 장벽 너머에서 힘겹게 끌어 올린 것은 일전에도 본 적이 있는 녹색 덩어리 좀비였다. 충격을 받으면 폭발하고, 평상시에는 독성 연기를 내뿜는 악질적인 변종.
다른 좀비의 도움으로 힘겹게 장벽을 넘어온 놈은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고 거칠게 호흡하면서 독성 연기를 생성하기 시작했다. 발칸포는 침묵했고, 머신 피스톨 터렛은 건물 주위에만 배치했기 때문에 그쪽까지 사거리가 닿지 않았다.
나와 함께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강대현 교수가 흠칫했다.
“저건…… 못 보던 놈인데.”
“변종입니다. 김해 시내 한복판을 돌아다니며 숨어 있는 인간들을 강제로 꾀어내는 역할을 하더군요. 놈이 내뿜는 연기에 노출되면 극도로 쇠약해지거나 심하면 감염되어 좀비가 됩니다.”
“바깥을 돌아다니면 다른 괴물들에게 위협을 받겠지만, 숨어 있어도 저 연기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군. 지독해. 그런데 자네는 저걸 두고 보기만 할 건가?”
“아마 한 놈이 아닐 겁니다.”
내 예상대로 장벽 너머에서 똑같은 놈들이 몇 마리나 더 나타났다.
그리고 어깨에 특이한 구멍이 있는, 예의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좀비가 놈들의 주변에서 호위를 서고 있었다. 인간들이 폭발형 좀비를 처리하기 위해 접근하면 역으로 자신들이 요격할 작정인 듯했다.
‘무작정 달려들기만 하는 일반적인 좀비와는 확실히 다르다. 어느 정도 지능이 있고, 각자의 역할을 지키면서 연계를 하고 있어.’
이쯤 되면 누군가가 내게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치면서 ‘아 빨리 UCAV 써서 일망타진하라고!’ 같은 훈수를 둘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폭발형 좀비들이 서 있는 곳은 장벽이고, 장벽에는 내구도가 있다. 심지어 좀비들의 대공세로 내구도가 꽤 손상된 참이다.
그걸 고려하지 않고 UCVA를 써서 놈들과 함께 자폭시킨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 대폭발과 함께 남쪽 장벽이 와르르 무너지겠지. 그럼 이번 공세를 막더라도 무조건 내 손해다.
좀비들의 습격이 이번 한 번으로 끝이라는 보장도 없는데 제 살 깎아 먹기 식의 전투는 할 수 없다. 소모전이란 결국 더 많은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법이니까.
좀비들은 지치지 않고, 숫자는 더럽게 많으며, 인간을 감염시킬 방법도 다양하다. 내가 놈들과 같은 방식으로 싸우는 것 자체가 하수 중의 하수라는 뜻이다.
‘폭발은 시키지 않는다.’
하지만 저대로 내버려 두면 결국 이 거점은 놈들이 내뿜은 독성 연기로 가득 차게 되겠지. 거점 내부에 자체적인 공기 청정 설비가 있으니 어느 정도는 버티겠지만, 그것도 만능은 아니다.
적이 너를 먼저 후려치면 협상하거나 항복할 생각하지 말고 뒤탈 없이 확실하게 끝장내야 한다. 평화는 결국 압도적인 투쟁으로 쟁취하는 것이니까.
‘어디 보자…… 역시 상점창에 방탄 방패가 있군.’
상점창에서 SMAW도 판매하는 마당에 고작 방탄 방패가 없을 리가. SMAW나 총기에 비하면 700 DNA 샘플이라는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구입했다. 방독면도 하나 얹어서.
나는 사태 첫날부터 상점창을 열어서 지금까지 생존 일수를 꾸역꾸역 누적해 왔기 때문에 꽤 많은 상품들이 추가로 개방되어 있었다. 앞으로도 유용한 상품들이 많이 추가되겠지.
“크고 아름답군.”
딱 봐도 묵직한 방탄 방패는 살짝 들어 보기만 해도 쌀 한 포대보다 무겁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보통 시위 진압용 방패는 알루미늄이나 폴리카보네이트 소재를 사용하지만, 이건 기본적으로 소총탄이나 폭탄 파편을 막기 위한 용도라 그런지 재질부터 달랐다.
짐작건대 티타늄과 강화 세라믹을 엄청 사용했으리라.
‘과연 바디 벙커라고 불릴 만해.’
저렴한 가격 700 DNA 샘플에 어머니의 품 같은 안락함을 느낄 수 있는 방탄 방패가 내 손에! 지금 전화하세요!
병신 백수 이승권에서 캡틴 코리아가 된 나는 당당하게 전장으로 나섰다. 지금이라면 전 우주의 운명도 내 손으로 구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