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 (80)화 (81/227)

80화 정착기 (30)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활천초에서 꽤 많은 변화가 있었다.

본판이 학교임에도 불구하고 이 거점에 정착한 사람들이 어떤 생활을 하느냐가 거점 리뉴얼에 반영된 것 같다.

예를 들어, 나는 홈마트를 주거지가 아니라 철저하게 대량의 물자 수급 및 보관 용도로 사용했기 때문에 이번 거점 리뉴얼에서 창고형 마트로 바뀌었다.

내부 공간은 확 넓어지고, 더 많은 물자가 쌓였으며, 물자를 운반하기 위한 지게차와 파레트까지 잔뜩 쌓여 있지 않았던가. 어딜 어떻게 봐도 거주지다운 생활감은 없었지만 물자 저장고라는 명칭은 딱 어울렸다.

그러니까 활천초도 아마 같은 케이스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집단을 형성해서 각자의 역할에 맡는 일을 하고, 용도에 따라 거점 내 구역을 나눴으니 시스템이 그것을 인식하고 의도를 파악했다는 뜻이다.

“이야, 진짜 오랜만이네요, 형님!”

요 근래 나를 보지 못했음에도 만나자마자 싹싹한 태도로 나온 박성호가 손을 흔들었다.

여행 동아리 회장이자 현재는 거점 방위자로 임명되어 활천초의 감독 비스무리한 것을 맡고 있는 녀석이었다.

모범생인 데다 특유의 인싸스러운 분위기 때문에 사람을 잘 이끌어 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믿고 맡긴 보람이 있군.’

“거의 2주 만이던가요? 형님이 없는 사이에 활천초가 장난아니게 바뀌었죠? 처음엔 저희도 깜짝 놀랐는데, 벽과 천장이 제멋대로 치솟거나, 부지가 더 넓어지거나, 아예 건물 구조가 바뀌거나 하더라고요.”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싶다가도, 지난 2주간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커뮤니케이션을 크게 활성화했을 테니, 생각해 보면 당연한 변화였다.

아싸는 주변에 사람이 많든 적든 기본적으로 혼자 있기 때문에 심경의 변화가 크지 않지만, 인싸들은 주변에 사람이 없으면 개복치처럼 죽어 버린다고 들었던 것 같다.

나도 풋풋한 대학생 새내기 시절에는 미친 듯이 친구들 잡고 술집이나 PC방을 전전하던 때가 있었으니 안다.

“일단 진정하고, 아까 봐서 알겠지만 오늘은 위쪽 지역에서 구출해 낸 피난민들을 이곳에 합류시킬 겸 내부 상황이 어떤지 둘러보려고 온 거야. 방벽도 있고, 건물 높이도 이전보다 훨씬 높아져서 적들의 침입은 거의 없었을 것 같은데, 맞나?”

“반은 맞고 반은 틀려요. 오히려 거점의 안전도가 더 높아지면서 주변의 어그로가 더 끌리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형님이 처리하셨다던 그 양아치 무리도 주기적으로 찾아와서 방벽을 부수려고 시도했었고, 이전에는 본 적 없었던 좀비들도 밤이 되면 갑자기 나타나서 주변을 배회하더라고요.”

“즉 예전보다 더 안전해진 건 맞지만 외세의 습격 빈도는 오히려 더 늘었다?”

“그렇죠. 양아치 무리는 이제 사라졌으니 논외라고 쳐도, 좀비들은 천지에 널려 있으니까요. 특히 그 괴상하게 생긴 좀비들은…… 어우,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네요.”

박성호가 호들갑을 떨며 양팔을 슥슥 문질렀다.

나도 지금껏 흐느적흐느적 걸어 다니다 인간을 포착하면 미친 듯이 달려와서 뜯어먹으려 했던 일반 좀비 말고도 다른 종을 목격하긴 했다.

녹색 고름 주머니 같은 자폭형 좀비, 그런 좀비의 몸에서 주기적으로 흘러나온 오염성 독가스를 인간이 들이마시고 변이한 강화형 좀비, 그리고 어깨에서 날카로운 무언가를 쏘아 대던 원거리 공격형 좀비.

놈들은 기본적으로 ‘인간형’과 ‘좀비’라는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마치 지금보다 훨씬 더 인간을 사냥하기 쉽도록 진화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예를 들어 자폭형 좀비는 거점 내부에 숨어 있는 인간을 고사시키거나 반대로 끄집어낼 수 있다.

자폭해서 건물 벽을 무너뜨리기만 해도 좀비들이 물밀듯이 거점 내부로 쏟아져 들어갈 것이고, 인간이 꼭꼭 숨어서 자폭할 각이 안 나온다고 해도 그 치명적인 독가스를 흩뿌리면 그만이니까.

이른바 존버형 생존자의 카운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해당 좀비의 독가스에 노출되어 강화형 좀비로 변이한 인간은 생존자가 많은 집단일수록 더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다. 내부에서 팬데믹이 터지는 순간 거점은 안전지대가 아니라 생지옥이 된다.

마지막으로 원거리 공격형 좀비. 이놈은 탈것을 타고 이동하는 인간, 먼 곳에서 공격하는 인간에게 일반적인 좀비가 대적할 방법이 없어서 진화한 느낌이 강했다.

자전거나 바이크처럼 몸을 노출할 수밖에 없는 탈것은 손쉬운 사냥감일 것이고, 방호 성능이 떨어지는 차량이나 건물의 얇은 벽도 충분히 공략해 봄 직하다.

김해 공항에서 물자 수급을 위해 원정 나왔다던 박지찬 일행도 놈들의 습격에 병원까지 도망쳐 들어오지 않았던가. 아마 현존하는 좀비들 중에선 가장 위협적일 것이다.

“밤에 주로 좀비들이 나타난다고 했지? 놈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관찰해 봤어?”

“예, 저기 건물 옥상에 서치 라이트 보이시죠? 그걸로 놈들을 비추면서 대략적인 규모나 움직임을 파악했었어요. 많이 나타날 때는 보통 2~30마리씩 무리 지어 나타나고, 적게 나타나면 10마리 안팎이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특이하게 활천초 주변 건물 외벽을 오르내리거나, 대략적인 거리를 가늠하는 것 같은 행동을 취하더라고요.”

나는 방벽 뒤에 설치된 초소로 직접 올라가 학교 밖을 살폈다.

내 직업 스킬인 거점 지정이 C-급으로 향상되면서 거점이 리뉴얼됨에 따라 활천초의 부지 넓이가 기존의 도로를 집어삼켜 버렸다. 당연히 부지가 넓어진 만큼 도로도 재정비 되었지만, 다른 건물과의 간격이 좁아진 건 확실했다.

‘생각해 보면 병원과 홈마트도 건물 규모가 커지고 부지가 확장되면서 주변 건물과 거리가 가까워지곤 했지. 아예 거점을 지정하면 주변 건물까지 싹 다 집어삼킬 수 있을 정도로 스킬을 성장시켜야 하나?’

그정도 효과를 가지려면 추측상 거점 지정 스킬이 B급 이상은 되어야 할 것 같다. 어쩌면 A급일지도 모르고. 아마도 최종 라인인 S급까지 간다면 정말 ‘지역’ 단위를 먹을 수 있겠지.

문제는 당장 그럴 여력이 없다는 거다.

통일 대한민국의 인구는 최소치로 잡아도 8천만이다.

사태의 심각성을 고려해서 감염 비율을 대충 9할 정도로 잡는다면 못해도 7천만 이상의 좀비들이 한반도 전역을 돌아다니고 있다는 뜻이 된다.

감염 비율을 너무 높게 잡은 것 아니냐고? 서울이 감염 한 번에 폭발하고 전국적으로 좀비 감염 사태가 벌어진 지 이제 22일이 흘렀다.

대략 3주 만에 인간 문명이 철저하게 박살 날 정도로 사태가 심각하다면 오히려 그보다 더 높은 비율을 잡아도 이상하지 않다. 당장 내가 김해 시내를 이 잡듯이 뒤져도 생존자를 찾기 힘든 것과 일맥상통한다.

‘확실한 건 좀비들에게도 어느 정도의 지능은 있다는 거다.’

일반적인 좀비는 육체 능력이 좀 뛰어나다는 점만 빼면 1차원적이라 멍청한 축에 속하지만, 지금껏 마주친 변종들은 묘한 괴리감이 있었다.

‘무작정 인간을 적대하는 놈들은 사고방식이나 행동 양식이 단순해서 그만큼 대처하기도 쉽다. 하지만 인간을 사냥하는 놈들은 수 싸움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상대하기 까다롭지.’

먼 옛날, 사냥꾼들이 사람 잡아먹는 식인 맹수들과 힘겨운 사투를 벌였다는 일화는 유명하니까.

어째 문제 하나를 해결하면 문제 두 개가 더 늘어나는 이 익숙한 느낌은 마치 나를 6년 전으로 회귀시키는 듯했다.

상태창을 주더라도 그 시절로 되돌아갈 생각은 없지만, 어쨌든 이 불쾌함의 원흉은 떨쳐 내야 한다.

“좀비들과 싸울 수 있을 만한 사람들에겐 무기를 나눠 줬어?”

“예, 저희도 자체적으로 사격 훈련을 하거나 거점 방위 무기를 직접 다루는 연습도 했어요. 피난민들 중에 손재주가 좋으신 분들이 있어서 그분들 도움을 받아 기본적인 무기나 방호구도 만들었고요.”

“좋아, 잘하고 있어. 대신 오늘부터 야간 경비 인력은 2배로 늘려. 오늘 내가 데리고 온 피난민들 제법 많으니까 사람을 좀 더 뽑으면 될 거야.”

“역시 형님이 보기에도 뭔가 이상하죠?”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눈을 가늘게 뜨고 방벽과 가장 가까운 건물 틈새를 살폈다.

사람이 건드렸을 리가 없음에도 건물의 유리창은 죄다 깨져 있고, 최근까지도 누군가가 건드린 듯한 흔적들이 자잘하게 남아 있었다.

‘밤마다 이 주변을 어슬렁거렸다면 방벽을 물리적으로 부수려 했다기보단 방벽의 허술한 지점을 찾으려 했을 가능성이 높다.’

길고양이조차 담벼락을 넘을 때 자신이 넘을 수 있는가 없는가를 재 보는데, 하물며 인간을 사냥할 정도의 지능을 가진 좀비가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임시로 방벽 위에 철조망을 더 추가할까? 아냐. 거점 방위 무기는 거점 내부에 들어온 적만 요격하도록 되어 있어. 적을 확실하게 요격하려면 차라리 내부로 들어오게 하는 게 맞아.’

문제는 그 거점 방위 무기가 먼저 침투한 좀비를 요격하기 전에 과연 거점 일원들이 공격받지 않을 수 있을까였다.

좀비들은 빠르고, 강력하며, 또한 치명적이다.

놈들의 공격에는 스치기만 해도 바이러스에 감염되며, 또한 무리지어 공격할 때는 어마어마한 물량을 자랑한다.

나조차도 거점 방위 무기를 순간적으로 한군데에 긁어모아서 화력을 집중시켜야 물량 웨이브를 막아 낼 수 있을 정도인데, 거점 곳곳에 분산된 방위 무기들이 물량 웨이브를 효과적으로 막아 내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내가 24시간, 365일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이 거점을 수호신인 양 지키고 있어야 하는가? 당연히 아니다. 애초에 불가능하다.

스킬로 스스로를 강화한다고 한들, 결국 나는 한계가 있는 인간이고 좀비들은 한계가 없다.

나는 좀비들을 처리할 수단이 제한적이지만, 좀비들은 사실상 제한이 없는 물량으로 나를 찍어 누를 수 있다.

대량의 좀비를 사냥하는 것으로 얻는 DNA 샘플의 사용 가치가 역설적이게도 좀비들의 압도적인 머릿수에 의해 역전당하게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총알 한 발 vs 좀비 열 마리라면 말할 것도 없지.

‘내 스킬 이름이 최후의 보루인 이유가 있었군.’

이런 환경 속에서 끊임없이 위협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버텨야 하기 때문에 최후의 보루인 것이다.

“저녁 먹고 경비 인력을 모두 불러 줘.”

“어쩌시려고요?”

“현실을 알려 줘야지. 높고 튼튼하기만 한 벽이 언제까지나 자기들을 지켜 주진 않을 거라고.”

평화와 안전은 역설적이게도 방벽 따위가 아니라 힘이 있어야만 쟁취할 수 있다.

1만 년이 넘는 인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지 않았던가?

나는 활천초 주변을 에워싸듯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건물들에서 흘러나오는 살기에 인상을 찡그렸다.

낮이라서 놈들이 모습을 내보이지 않는 게 아니다. 아직 기회가 찾아오지 않았으니까 모습을 감춘 거다. 영악한 놈들.

거점마다 왜 게임처럼 내구도가 존재하는지, 어째서 거점이 파괴되면 그곳을 다시 거점으로 재지정할 수 없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시스템은 내게 거점을 지켜야 하는 상황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며, 자신의 힘으로 거점을 지키지 못한다면 거점을 가질 자격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 페널티도 없으면 너무나도 형편 좋은 스킬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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