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 (78)화 (79/227)

78화 정착기 (28)

기계화 보병도 아니고 포병도, 공병도 아니었던 내가 대전차 무기 같은 걸 다룰 기회는 거의 없었지만, 전쟁이란 건 일개 소총병에게도 다양한 경험을 겪게 해 주었다.

과거 이민자들이 기회를 찾아 떠났던 미국을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불렸던 것처럼, 전장 역시 뭐든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적자생존과 기회의 장이었던 셈이다.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미군이 운용하는 장비를 의도치 않게 몇 번인가 사용해 본 적이 있다는 것이다. 미군이라고 총 맞고 죽지 말란 법은 없었으니까.

베트콩처럼 땅굴에서 튀어나온 북한군들이 미군을 급습했고, 다시 그놈들을 우리가 쓸어버리면서 쓸 만한 무기 몇 개를 노획한 적이 있었다.

바로 지금 내가 들고 있는 미국제 SMAW의 대명사인 Mk.153 발사기였다. 정작 미군은 M141 BDM을 정식 채용했지만, 2차 남북 전쟁으로 재고 땡처리를 위해 Mk.153 발사기와 탄두를 한반도에 꽤 많이 들여왔던 것이다.

그때 이 발사기를 이용해 암벽으로 위장한 북한군 벙커를 날려 버렸다. 바로 지금처럼.

투카아아앙!

집라인 후크를 걸고 단숨에 회수하는 힘을 이용해 하늘 높이 솟구친 나는 열 압력 탄두를 발사했다. 묵직한 후폭풍이 터져 나오는 것과 동시에 로켓이 아름다운 선을 그리며 아래로 내리꽂혔다.

옥상의 정중앙에 뻥 뚫려 있는 거대한 구멍 속으로 쏙 들어간 로켓은 건물 내부에서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다.

초고열과 압력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옥상 지반을 통째로 무너뜨리기 직전, 나는 옥상에 옹기종기 모여서 멍청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보고 있던 놈들과 시선을 교환했다.

저들은 아래에, 나는 위에.

저들은 죽고, 나는 살았다.

적자생존에서 누가 승리했고 누가 패배했는지에, 최종 결과가 기입된 성적표가 양측에게 배부된 것이다.

열 압력탄은 문자 그대로 열과 압력을 이용해 건물을 무너뜨리고, 건물 내부에 숨어 있는 적에게까지 피해를 입히는 무시무시한 무기였다.

명색이 대전차 무기라고는 하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는 대부분 재블린이면 떡을 친다. 그 대단한 러시아의 최신예 전차들도 재블린이면 손쉽게 박살 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점에서 전차보다 사람이나 건물을 노리고 쏘는 일이 더 많은 이 발사기는 대량 살상 무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실제로 내 눈앞에서 열 압력 탄두 한 방에 대량 살상이 벌어지고 있었으니까.

지반이 약해진 옥상에 있던 놈들은 모조리 그 아래층으로 떨어지면서 초고열에 1차로 태워지고, 압력에 2차로 몸이 터져 나갔다.

일반 고폭탄이었다면 저 정도 위력을 낼 수 없었겠지.

탁!

하늘에서 다시 떨어진 나는 건물 외벽에 집라인 후크만을 걸어서 떨어지지 않고 버텼다.

뜨거운 열기에 달궈진 건물을 맨손으로 잡을 수는 없어서 어렵사리 움직이다 보니 내려오는 데만 한세월이 걸렸다.

“이 정도면 등 뒤에서 갑자기 칼이 박히는 일은 없겠지.”

나는 넓은 운동장에 서서 반파된 학교를 바라보며, 내가 저지른 짓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내렸다.

1. 잠재적 위험 요소이자 꾸준히 내 거점을 노리고 있던 무리를 일망타진했는가 = YES. 이제 등 뒤를 위협하는 적은 없으니 세력 확장과 좀비에 대한 대응에 집중할 수 있다.

2. 학살을 하다시피 수백 명 단위의 사람을 내 손으로 직접 갈아 버린 것이 사회적, 법적, 인권적으로 문제가 되는가 = NO. 내가 처리한 것은 악질적인 약탈자이자 죄 없는 민간인들을 억압하고 있던 범죄자들이었다.

3. 최종적으로 나는 이득을 보았는가? = YES. 안전한 거점과 세력에 합류시킬 수 있는 다수의 민간인을 확보했다. 김해 공항을 제외하면 내가 이 지역의 실질적인 패자로 등극한 셈이다.

이해득실을 하나하나 따져 보니 이만하면 스스로에게 합격점을 줘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 건물은 더 이상 못 써먹겠군.’

본래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지만, 놈들의 수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았기 때문에 손속에 사정을 둘 수는 없었다.

오히려 더 큰 문제는 한가득 쌓여 있을 사체의 처리였다.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고 다른 외적 요인으로 사망한 사람이 갑자기 좀비로 되살아났다는 보고는 아직 없으니 다행이지만, 시체라는 건 그냥 방치해 두기만 해도 인간의 터전에 적잖은 악영향을 끼친다.

시체를 뜯어먹기 위해 모이는 벌레, 쥐, 산짐승, 놈들을 타고 번지는 전염병, 근처를 지나가기만 해도 코를 싸쥐게 하는 악취까지.

최악의 경우 멋모르고 돌아다니던 좀비가 시체를 발견해서 그걸 뜯어먹다가 어떤 변화를 일으킬 가능성도 있다.

나는 우선 각 학교 건물에 갇혀서 총성과 비명이 잦아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민간인들을 데리고 나왔다.

상황 자체는 인제대의 쓰레기들을 처리하고 민간인을 구출해 냈을 때와 구도가 똑같지만, 이번에는 그 수가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것, 그리고 약탈자들이 비축해 두었던 각종 물자까지 모조리 챙길 수 있다는 점이 달랐다.

가만 보면 내 앞길이 너무 탄탄대로인 것 같은데, 혹시 나는 소설 속에서 혼자 다 독식하는 전형적인 먼치킨 주인공인 게 아닐까?

‘탄탄대로였으면 내 인생이 그따위로 꼬일 일은 없었겠지.’

구출한 민간인들과 함께 학교들을 돌면서 약탈자들이 쌓아 두었던 물자를 싹 챙겼다. 어차피 더 이상 이곳에 사람이 머무를 수는 없으니 민간인들에게 피난 행렬을 꾸리게끔 했다.

나도 가치가 있어 보이는 물자나 원자재는 인벤토리가 꽉 찰 만큼 가득 챙겨 넣었다. 또 약탈자 무리에 합류했던 각성자 놈들을 일망타진한 덕분에 경험치와 DNA 샘플 파밍도 쏠쏠하게 했다.

“상태창.”

[생존자 : 이승권]

[직업 : 퇴역병]

[직업 숙련 레벨 : 21 > 24]

[칭호 : 오버킬, 피바람, 응급 구조 요원, 동족 포식자(NEW)]

[생존 기간 : 22일 차]

[숙련 포인트 : 7 > 10]

좀비 수천 마리를 잡아 죽였을 때는 폭발적인 성장을 했지만, 각성자 몇 명 조진 것 정도로는 생각보다 큰 성장을 이루지 못했다.

새롭게 얻은 동족 포식자 칭호는 일정 수 이상의 각성자나 인간을 죽이면 얻게 되는 모양이다. 학살자 같은 보기 흉한 칭호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그렇고말고.

그때 한 꾀죄죄한 남성이 다가와 최대한 비굴해 보이는 표정으로 굽신거리며 내게 말을 걸어왔다.

“저, 각성자님……. 저흰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난날 동안 약탈자 무리에게서 꽤나 시달렸는지, 이곳에서 구출한 민간인들은 대부분 각성자라는 존재를 엄청나게 두려워했다. 하물며 나는 혼자서 약탈자들을 다 쓸어버렸으니 그 두려움이 더욱 증폭될 수밖에.

‘하기야 각성자가 마음먹으면 손가락만으로도 평범한 인간을 죽일 수 있으니 무서워하는 게 당연하겠지.’

효율적인 거점 관리를 위해서 공포 정치도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구성원들 사이에서 해소되지 않는 불안감을 폭탄처럼 안고 가는 것도 문제가 있었다.

나는 대답하는 대신 일부러 무거워 보이는 짐 덩이 하나를 짊어졌다. 나도 저들과 똑같다는 모습을 보여 줘야 한다.

군인이 전쟁 중에 지역 점령을 하게 되면 해당 지역의 주민들과 표면적으로라도 잘 지내야 하는데, 숙련된 대민 지원 경험을 가진 덕분에 겁먹은 시민들에게 환심을 사는 것 정도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저는 각성자라고 해서 여러분을 억압하거나 이유 없이 폭력을 가할 생각은 없습니다. 만약 그게 목적이었다면 처음부터 이곳을 점거하고 있던 약탈자 놈들과 싸우지 않고 협력했을 겁니다.”

“그건…… 그렇지요.”

“비록 세상이 망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고, 그런 사회적인 동물에겐 제대로 된 사회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어차피 다 망해 버렸으니까 포기하는 게 아니라, 다시 원래대로 되돌려서 지금보다 훨씬 더 풍족하고 안전한 삶을 누릴 생각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을 구한 겁니다.”

“하지만 저희는 그 괴물들이나…… 다른 약탈자와 싸울 수 있을 만큼 강하지도, 용맹하지도 않습니다. 다들 어디에나 있던 평범한 주부이거나 직장인, 학생이었는데…….”

“그런 사람들은 사회 구성원이 아니랍니까?”

아직 사회가 멀쩡했을 무렵, 아무리 쓰레기 같은 범죄자에게도 최소한의 인권을 지켜 주었던 이유는 어찌 됐건 그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자 국민이었기 때문이다.

“약하고, 모자라고, 겁 많고, 타고난 재주가 없다고 해서 살아남지 말란 법 있습니까?”

“…….”

“소비자와 공급자, 어느 한쪽이라도 없는 시장이 유지가 될 수 없듯이, 강하든 약하든, 재주가 있든 재주가 없든 모두가 사회 구성원으로서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을 다하기 때문에 비로소 사회의 시스템이 돌아갈 수 있는 겁니다. 이런 말 하면 조금 그렇지만, 여러분들도 이곳에서 놈들에게 노예처럼 시달렸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들의 필요에 의해서 여태껏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 아닙니까? 그럼 이제 자유를 얻었으니 더 많고 다양한 일들을 해 봐야지요. 노동에 대한 합당한 보수를 받고 스스로 부조리를 타파해 나가는 겁니다.”

그리고 비로소 사회가 재건된다면 그들은 각성자들과는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될 것이다.

내 손으로 무너진 사회를 하나하나 다시 일궈 냈다는 성취감, 사람에겐 저마다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자신감, 내가 남들보다 못할 것 없다는 자존감.

그러니 내게는 이런 사람들이 필요하다.

‘당신들이 없으면 누가 내 넷플러스를 되찾아 주냐고.’

식당이 있어야 주문을 받고, 주방장이 있어야 요리를 하고, 또 그걸 배달해 줄 사람이 있어야 내가 집에서 편하게 배달 음식을 시켜 먹을 것 아닌가.

그러다 가끔 사회 재건 공신이라는 지위를 이용해서 맛없는 음식점은 가차 없이 별점 테러를 하는 거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완벽한 노후 계획이다.

“갑시다. 여러분들을 받아 주고, 무기력함을 느끼지 않게 일자리를 주고, 더 이상 추위와 굶주림에 떨지 않도록 안전하게 보호해 줄 거점이 있습니다.”

생존 22일 차 동이 트기 시작한 아침, 나는 무수한 피난 행렬을 선두에서 이끌며 활천초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홈마트 못지않게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하게 된 성채 같은 느낌의 건물이 우리를 반겨 주었다.

피난민들을 이끌고 내려온 나조차도 무심코 입을 떡 벌리고 놀랄 만큼, 거점 지정(C-) 스킬의 특혜를 제대로 받은 뉴 활천초가 그곳에 있었다.

기껏해야 종합 병원 수준이었던 경희대 중앙 병원을 대학 병원 수준으로, 중형 크기의 홈마트를 대도시 백화점에 꿀리지 않는 대형 마트로 탈바꿈시킨 스킬 아니랄까 봐 효과 하나는 확실했다.

학교 부지 전체를 감싸고 있던 벽돌 담장은 이제 좀비들의 침입 자체를 원천 봉쇄하는 거대한 금속 격벽으로 바뀌었다. 뿐만 아니라 입구는 전자동식으로 개폐되는 거대한 철문이었기 때문에 따로 바리케이드를 칠 필요도 없었다. 필요하면 언제든지 여닫을 수 있었으니까.

‘분명 군사 시설이 아니라 학교일 뿐인데 거점 방어력은 어지간한 요새 못지않군. 학교는 학생들을 보호하고 가르치는 장소인 만큼 외부에 대한 방어가 더욱 강화되는 구조인가?’

그래도 궁극적으로는 군사 시설이 아니기 때문에 구조 자체는 학교가 맞았다. 저런 성채 같은 건물에서 가르침을 받는다면 좀 특이한 학생들이 많이 나오긴 하겠지만.

당황했던 나와 달리 피난민들은 오히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웅장한 스케일의 거점에 안도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확실히 이런 곳에서 머무른다면 위험하지는 않을 테니까.

내가 직접 전자동 개폐식 입구를 개방해서 내부 풍경을 보여 주자, 가장 먼저 자유롭게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내가 미리 방침을 정해 둔 대로 여행 동아리 회원들이 거점을 잘 관리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세상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그놈들도 충분히 이런 곳을 만들 능력이 있었어. 자기들 이득 때문에 우리만 부려 먹은 거지. 망할 놈들!”

“지긋지긋했던 노예 생활도 이젠 끝이야……!”

나는 감격스러워하는 피난민들에게 양팔을 벌리고 그들이 원하는 대사를 던져 주었다.

“지난 과거는 잊고,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십시오.”

나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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