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정착기 (27)
‘말도 안 돼!’
최상두는 사채업자이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자신에게 ‘빚’을 지고 있던 사람들의 수가 실시간으로 쭉쭉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그것도 한두 명씩 찔끔찔끔 줄어드는 게 아니라 한 번에 대여섯, 심하면 10명 단위로 사람이 죽어 나자빠졌다.
사채업자는 빚쟁이가 사라지길 원하지 않는다. 계속 남아서 그에게 골수까지 쪽쪽 빨아 먹혀야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성심성의껏 관리하고 있었건만, 지난날의 노력들이 빠르게 물거품으로 변하고 있었다.
‘일반인들이 죽어 버린 건 이해할 수 있다. 어차피 머릿수만 차지하고 있을 뿐이라 금방금방 충원할 수 있어. 하지만 각성자는……!’
그의 스킬에 구속되어 있는 일반인들은 정말로 수백 명 단위가 아니면 본전을 뽑기도 힘들 만큼 DNA 샘플 수급량이 적었지만, 각성자를 ‘빚쟁이’로 등록시켰을 때는 얘기가 달랐다.
소량이긴 하지만 그들이 얻는 경험치 중 일부를 공짜로 나눠 먹을 수 있었고, 일반인보다 더 많은 DNA 샘플을 수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그에 걸맞는 대접(주로 사치품 제공)을 하는 것으로 적당히 꿀을 빨 수 있었는데, 각성자마저 허무하게 당해 버린 지금은 최상두의 전력이 큰 비율로 깎여 나갔다.
그가 믿고 있던 총잡이 김만호, 그리고 바이커의 행동대장이었던 신하성이 그의 빚 장부에서 이름이 지워졌다. 그가 빚을 탕감해 줄 일은 없으니 죽어서 해방되었다는 뜻이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는데 어째서 놈의 꼬리조차 잡지 못하고 있는 거지?’
건물 내부에도, 외벽에도, 옥상에도 놈이 없다면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막말로 상대의 직업이 투명 인간 같은 게 아니고서야 이 포위망을 벗어나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돌아 버리겠군.”
옥상에서 뭔가를 마구 깨부수는 엄청난 진동음이 울려 퍼졌기에 부하들을 이끌고 힘겹게 올라왔더니만, 최상두 일행이 옥상에서 발견한 것은 처참하게 널브러진 시체들이었다.
개중에서도 대번에 눈에 들어온 것은 항상 솔선수범하여 바이커들과 함께 자전거를 몰고 나가서 좀비들을 다른 지역으로 내보냈던 신하성의 시체였다.
그는 숙련된 칼 솜씨를 지닌 누군가에 의해 상반신이 크게 베여 사망한 상태였다. 하체 근육이 탈인간급인 것에 비해 상체 근육은 ‘상대적으로’ 약했던 그의 허점을 노린 것이 분명했다.
단순 신체 능력으로는 조직 내에서 적수를 찾기 힘들었던 그의 처참한 몰골을 보자, 다른 부하들도 크게 동요를 일으켰다.
벌써 이유도 모른 채 죽어 나간 부하들만 수십 명이고, 각성자도 둘이나 죽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어둠 속에서 소리 소문 없이 튀어나와 부하들을 죽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장부를 확인해 보면 계속 이름이 지워지고 있다. 소수로 다니는 녀석들 위주로 각개격파 당하고 있는 거야!’
처음에는 기세 좋게 부하들을 이끌고 건물을 이 잡듯이 수색하다 보면 언젠가는 적이 잡힐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사로잡은 놈을 끌고 나와서 실컷 농락하다가 공개 처형 좀 해 주면 잠깐 가라앉은 분위기도 희석시킬 수 있을 거라 믿었고.
그런데 지금 이게 다 무슨 꼴인가.
부하는 부하대로 죽었고, 적의 정체는 일단 추측 단계일 뿐, 아직 확인되지도 않았다.
사실 다 제쳐 놓고서 적이 이곳을 급습한 이유만이라도 알고 싶었다.
왜냐하면 최상두는 세력권을 확장시킬 때 불화의 씨앗이 될 수 있는 아주 작은 가능성도 남기지 않고 철저히 짓밟은 다음 완벽하게 흡수했으니까. 이제 와서 누군지도 모르는 놈에게 피의 복수 같은 걸 당할 이유가 없었다.
“혀, 형님…… 이거 혹시 홈마트의 그 악마 놈 아닙니까?”
“여기서 그놈이 왜 나와?”
“그게…… 홈마트를 먹은 그놈도 총을 사용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무엇보다 거기 약탈하러 갔던 다른 세력의 각성자들도 죄다 당해 버렸고요.”
“그러니까 그놈이 뭐가 아쉬워서 우릴 노리냐는 말이다! 다른 세력이 홈마트를 노릴 때도 우린 거길 건드리지 않았어! 염탐꾼 몇 명만 보냈을 뿐, 아예 그쪽으로 얼씬도 하지 않았는데 우리가 타깃이 될 이유가 어디 있냐고!!”
홈마트와 영운 초중고가 비교적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으니까? 그나마 가장 가능성 있는 얘기지만, 그럴 거라면 처음부터 홈마트를 먹은 놈이 다른 세력을 흡수했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홈마트로 쳐들어온 놈들만 깔끔하게 정리했을 뿐 요 몇 주간은 잠잠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 와서 여길 들쑤신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빌어먹을…… 이렇게 된 이상 날이 밝을 때까지 우리가 유리한 위치를 고수한다! 놈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천방지축 날뛰는지는 몰라도 이렇게 많은 수가 한곳에 모여 있으면 쉽사리 공격할 수 없겠지.”
무엇보다 가장 높은 건물의 옥상이라 애먼 곳에서 총탄이 날아들 걱정도 적다. 동이 트려면 얼추 두세 시간 정도 더 버텨야겠지만, 그 정도는 버틸 수 있었다.
놈이 이대로 물러난다면 즉시 거점을 재정비해서 두 번 다시 침투하지 못하도록 보강을 하면 그만이고,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면 날이 밝았을 때 놈을 잡아 족치면 된다.
적극적으로 원인을 제거하기보다는, 일단 피해를 줄이는 것으로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안정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애당초 사채업자란 미래를 보고 빚쟁이들에게 투자하는 족속이기에.
* * *
“이래서 사람은 능력대로 살아야 한다니까.”
대검에 묻은 피를 탁탁 털어 내자 조금 전까지 생기가 가득했던 인간의 시체가 썩은 고목처럼 맥없이 쓰러졌다.
신분제가 사라지고 개인의 능력과 재능의 비중이 커진 경쟁 사회에선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다 다리 찢어진다.’는 말이 한층 더 날카로운 팩트로 박힌다.
경쟁이 과열된 요즘 같은 세상에선 능력도, 재능도 타고나지 못한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능력껏’ 살아야 하는 거다. 괜히 자신에게 맞지도 않는 옷을 입으려 들었다간 이런 대참사가 일어나는 거다.
나는 발치에 쓰러진 시신을 대충 밀어내고 주변에 와이어와 날붙이를 이용한 부비 트랩을 설치했다. 시체가 있는 곳은 보통, 적이 이곳을 한번 휩쓸고 지나갔기 때문에 오히려 근처에 적이 없을 것이라는 착각을 심어 준다.
그러다 멋모르고 시체 근처로 다가오면 부비 트랩에 걸리는 경우가 꽤 잦다.
이 방식으로 학교 내부 곳곳에 부비 트랩을 설치해 두었는데, 꽤 많은 얼간이들이 걸려들었다. 폭발물을 사용하지 않아서 한 번에 대량 살상은 불가능하지만, 한두 명씩 꾸준히 잡아 죽이는 데는 이만한 것도 없다.
이쯤 되면 슬슬 건물 내외부와 외벽, 지상, 옥상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내 기만전술도 더 이상 적들에게 통하지 않을 것이다.
놈들도 적잖은 피해를 입은 후에야 그 사실을 깨닫고는 아예 한데 모여서 내 기습을 차단하고 있었다. 이대로 동이 틀 때까지 버틸 속셈인 게 안 봐도 뻔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래서 사람은 능력대로 살아야 한다.
기껏해야 양아치 몇 명 부하로 데리고 다니면서 조폭 놀이나 하던 놈이 갑자기 수백 명 단위를 이끄는 거대한 집단의 리더가 된다고? 그런 집단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지.
사공이 많아서 배가 산으로 가는 게 아니라 선장이 병신이기 때문에 배가 산으로 가는 거다.
그리고 지금 저놈들은 공교롭게도 병신의 말만 믿고 산 위(옥상)로 올라간 참이다. 집단 지성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면 집단 무지성이 된다는 걸 잘 보여 주는 사례다.
나중에 사회가 재건되고 교과서를 새로 쓰게 되면 꼭 기재해야 할 소재다. 미래의 꿈나무들이 저런 병신으로 자라나지 않을 기회는 줘야 할 것 아닌가.
“상점창.”
상점창을 열어 생존 22일 차 판매 목록을 쭈욱 확인해 보았다.
개중에서도 DNA 샘플을 투자하기엔 가성비가 좋지 않은 총기류는 과감하게 패스하고, 폭발물 품목을 살폈다.
총기 정도는 노력하면 어떻게든 노획할 수 있고, 탄환은 도구 제작 스킬과 원자재를 이용해 대량 제작할 수 있다. 그러나 폭발물은 당장 제작할 레시피도, 노획할 방법도 없다.
애초에 거점 내부에 한해서는 C4 RC카라는 미친 가성비를 자랑하는 방위 무기도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폭발물을 크게 고집하지 않았었는데, 이번만큼은 좀 써야겠다.
‘KM181 60mm 박격포? 당장 운용 가능한 인원이 나뿐인데 박격포는 조금 그렇지.’
일단 상점창에 올라와 있으니 살펴보긴 했지만 박격포는 장점보다 단점이 더 많았다.
운반이야 인벤토리에 넣어 다니면 그만이지만, 건물이 많은 시가지에서 사용하기엔 제약이 너무 많은 데다 설치부터 표적 관측과 좌표 계산, 발포까지 전부 혼자 감당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군대처럼 포반을 운영할 생각이 아니라면 개인이 박격포를 들고 다니는 건 쌉손해 그 자체. 다음으로는 무반동총과 휴대용 유탄 발사기가 등장했다.
무반동총과 휴대용 유탄 발사기는 모두 일장일단이 있다.
무반동총은 유탄 발사기에 비해 화력이 매우 강력하며, 어떤 탄두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대인, 경장갑 차량, 건물 일부까지 파괴할 수 있다. 대신 중량과 부피가 큰 데다 실내 발사가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반면 유탄 발사기는 대부분 대인 살상 목적이라 2~40mm 탄을 사용하는 게 일반적인지라, 액션 영화처럼 화려하게 폭발하고 다 깨부수는 정도의 위력이 나오지는 않는다. 대신 휴대성이 좋고 실내외 실외를 가리지 않고 운용이 편하다는 장점이 있다.
‘이외에도 일회용 드론을 이용한 배달형 폭탄이나 설치형 C4, 수류탄 따위가 있지만…… 여기선 적절한 가성비와 남자의 로망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
북한으로 막 침공하기 시작했을 때 미 해병대도 북한의 동, 서 연안으로 함께 치고 들어왔다. 그때 함께 싸웠던 미 해병대가 북한군 벙커를 향해 쿨하게 SMAW를 사용하는 모습이 어찌나 보기 좋던지.
당시 북한 전역에서 우릴 괴롭혔던 온갖 벙커와 땅굴로부터 우리 군을 구원해 주었던 미 해병대의 SMAW 뽕맛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래, 남자는 역시 로켓 런처지.”
탄두만 교체하면 얼마든지 재활용할 수 있는 미국제 SMAW를 큰맘 먹고 8000 DNA 샘플을 주고 구입하자 묵직하고 서늘한 금속 덩어리가 내 품에 안겼다.
옵션으로 특수 탄두까지 구입하느라 DNA 샘플을 조금 더 써야 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아아, 이 감각. 일개 보병이 가질 수 있는 소총 같은 것과는 차원이 다른 ‘힘’이 느껴진다.
한때 국방 개혁으로 병사들을 계급이 아니라 ‘용사’라고 통일해서 부르는 헛짓거리를 했던가? 이 SMAW야말로 성검이고, 내가 바로 전설의 용사다. 마왕보다 주말 일광 건조가 더 무서운 용사.
“스으으으읍, 하아.”
SMAW-NE(열 압력탄)의 달콤한 냄새가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듯했다.
나는 즉시 건물 외벽에 후크를 쏘아 올리며 그 반동으로 튕기듯 날아올랐다.
꽤 높은 곳까지 솟구친 내 발아래에는 개미처럼 옥상에 모여 있는 놈들이 보인다.
놈들이 SMAW의 포구 끝에 안착되었다. 이 좋은 기회를 그냥 놓칠 만큼 나는 멍청하지 않았다.
83mm 열 압력 탄두가 발사기를 벗어나 공기를 찢어발기며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