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정착기 (26)
기만전술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전술 중 하나가 바로 위장이다.
아프리카 반군이나 중동의 테러리스트 단체들을 전장에서 마주하면 대부분 ‘거기서 거기’인 느낌이라 민간인과 크게 구별하기가 힘들다.
이는 북한군과 한국군에 대입해도 아주 틀린 공식은 아니었는데, 실제로 북한군들 중 일부는 한국군의 군복과 장구로 위장하여 낙오 부대인 척 접근하거나, 한국인과 북한인을 겉으로 구분하기 힘들어하는 미군 부대에 침투하려 하던 적도 있었다.
대부분은 아군 인식용 식별 띠의 유무, 암구호 문답으로 간단하게 파악하고 대응할 수 있었지만, 어쩌다 한 번 실수하는 부대는 그대로 기만전술에 당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작전을 진두지휘하는 장성이나 장교들은 한반도 전역을 면밀히 감시하고 있는 감시 자산 덕분에 지형지물을 훤히 꿰고 있었지만, 현장에서 뛰는 부사관이나 병사들은 북한의 모든 지역이 낯설기만 했다.
그래서 특정 방향에선 아군이 절대 나타날 수 없다던가, 또 나타난 것이 정말 아군인지 아닌지 빠르게 파악할 능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이를 본받아 나는 김만호에게서 입수한 군복과 소총으로 빠르게 위장하고, 아직까지도 건물 내부에서 날 찾아다니고 있을 양아치 무리의 꽁무니에 스리슬쩍 달라붙었다.
그들은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간간이 불빛에 비치는 군복 차림과 소총을 보고 당연히 나를 김만호라고 착각했다. 이 생존자 그룹 내에서 군인이었다가 양아치로 전향한 건 김만호 한 명뿐이었기 때문이다.
한 층 복도에 사람이 어느 정도 빠져나가고 대략 열 명 남짓 남았을 무렵, 나는 앞서가는 그들의 등 뒤에 대고 K-2 소총을 연발로 당겼다. 삼 점사로 끊어 쏴야 했던 M16에 비하면 선녀 그 자체였다.
“카하아아악?!”
“아아악! 내 다리!!”
“쿨럭! 크흐…….”
조준도 제대로 하지 않고 복도 정중앙을 향해 대충 난사로 갈겼기 때문일까, 나보다 앞서가고 있던 양아치 대다수가 픽픽 쓰러지거나 환부를 부여잡고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질러 댔다.
다른 층, 다른 건물을 뒤지고 있던 또 다른 무리가 이 소란을 듣고 우르르 몰려들기 전에 다시 한번 창밖으로 몸을 던져서 집라인의 후크를 쐈다.
이번에는 다시 시체들밖에 없는 옥상으로 돌아온 다음, 놈들이 한 번도 쏴 보지 못하고 허무하게 손에서 놔 버렸던 원시적인 투사기를 조작했다.
이 근방에선 쉽게 구할 수 있는 튼튼하고 질긴 공업용 밴드를, 어느 공사 현장에서 공수해 온 철골 프레임에 연결한 물건이었다.
최초의 총성이 들렸던 장소보다 훨씬 낮은 층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으니, 뭔가 이상함을 느낀 놈들이 건물 밖으로 달려 나왔다.
위에서 아래, 다시 아래에서 위. 정신없이 울려 퍼지는 총성과 어찌할 새도 없이 죽어 나자빠지는 동료들 때문에 적잖이 당황한 것이다.
‘이쯤 되면 내가 건물 안이 아니라 외벽에 들러붙어 위아래를 오가며 총을 쏜다고 생각할 법하지.’
가장 먼저 그런 의심을 했던 김만호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먼저 죽었지만, 아무튼 생각이란 게 조금이라도 있는 놈들은 기어이 건물 밖으로 뛰쳐나와 외벽을 확인할 것이 분명했다.
“창문을 잘 살펴봐! 놈이 외벽에 매달려서 창문 너머로 총을 쐈을 수도 있어!”
“새총에 쇠구슬 말고 날카롭게 깎은 볼트를 장전해! 그 빌어먹을 새끼가 누구든 간에 한 방에 족쳐야 돼!!”
“어두워서 잘 안 보니까 손전등 불빛 좀 비춰 봐!”
불빛을 비춰 주면 나야 좋지.
“자, 조준하시고.”
놈들이 사용하려 했던 큼지막한 벽돌 하나를 공업용 밴드 사이에 끼워 넣고 쭈욱 당겼다. 튼튼한 철골 프레임을 양발로 힘껏 짓누르면서 당겨야 했기 때문에 마치 대형 크로스보우를 장전한 느낌이었다.
손전등 불빛이 천천히 학교 본관 외벽을 훑기 시작하자 조준이 한층 수월해졌다.
투아아아앙!
뻐억!
힘차게 쏘아져 나간 벽돌이 손전등을 들고 있던 양아치의 머리통을 문자 그대로 날려 버렸다.
장갑차를 깨부술 정도는 아니겠지만 확실히 두돈반 트럭 정도는 고물처럼 찌그러뜨릴 수 있는 위력이었다. 이걸 설계한 놈이 대인용으로 상정하고 제작했다면 꽤 악랄한 취미를 가진 놈일 것이다.
뒤늦게 손전등을 들고 있던 동료의 머리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양아치들이 욕지기를 해 대며 길길이 날뛰었다.
아까는 총만 써서 동료들을 죽이는 줄 알았더니, 이번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벽돌이 날아오니 열이 받을 수밖에.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옥상에 쌓여 있던 날카로운 철 조각이나 깨진 유리병을 가져와 미친 듯이 지상으로 투사했다.
오밤중에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날카로운 흉기 세례 때문에 적들은 다급히 투사기의 사정권에서 벗어나야 했다.
놈들은 건물 안으로 도망쳐 들어가는 와중에도 ‘놈이 옥상에 있다! 가서 잡아!’ 같은 대사를 잊지 않았다.
기껏 총성을 듣고 내려왔더니 다시 옥상으로 올라가라고 하면 놈들이 얼마나 빡칠까? 체력은 체력대로 낭비하고, 동료는 동료대로 죽어 나갔으니 극심한 스트레스가 정신과 육체를 피폐하게 만들 것이다.
물론 더 이상 내 기만전술에 놀아나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렇게 나와 주길 바라고 있다.
‘일반인으로 대응이 불가능하단 걸 판단한 순간, 각성자들이 튀어나오겠지.’
바로 그때, 옥상 지반을 통째로 부수며 솟구친 것은 허벅지가 문자 그대로 말벅지 그 자체인 쫄쫄이 차림의 남자였다. 매일 질리지도 않고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며 좀비들을 다른 지역으로 내보내는 자전거 동호회의 일원을 내가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역시 각성자였군.’
투사기의 방향을 돌리기엔 너무 늦어, 허리춤의 권총을 뽑아서 당겼다.
하지만 말보다 강한 각력으로 단숨에 옥상 지반을 박찬 상대는 순식간에 총구 끝을 벗어났다. 저 정도면 우사인 볼트 할아버지가 와도 따라잡지 못할 순간 속력이었다.
쉬익!!
무언가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드는 소리에 본능적으로 자세를 낮추자, 머리 위로 서늘하면서 아찔한 감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저 다리에 머리통을 정통으로 얻어맞았다간 각성자인 나라도 온전치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운 좋게 살아남는다고 해도 심각한 뇌진탕으로 쇼크를 일으키겠지.
단단한 두개골로 보호받고 있는 머리가 그럴진대, 하물며 다른 신체 부위라면 어떨까.
상대도 그걸 모르는 건 아닌지 한 번 빗나간 미들킥을 회수하는 것과 동시에 연이은 찌르기로 압박해 왔다.
자전거만 타고 다녀서 별것 아닌 줄 알았던 인간이 사실 킥 한정으로는 태권도 국대보다 더 강력할 줄이야. 이 정도면 발 펜싱이 아니라 발 검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움직임이 완전히 보이지는 않지만 몸이 못 따라갈 정도는 아니다.’
엄청난 집중력을 요구하는 사격은 빠르게 몸을 움직이고 시야가 자주 흔들리는 근접전에선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 대신 내가 오랜 기간에 걸쳐 습득한 실전형 체술이 상대의 공격 패턴을 하나씩 파악하며 적응해 나가고 있었다. 한 번이라도 삐끗하면 죽는다는 마인드로 몸을 움직이니 아슬아슬하게 피하는 것은 가능했다.
‘피하기만 하는 게 해결책은 아니다.’
내가 상대보다 직업 숙련 레벨은 확실히 높을지언정, 파워 싸이클로 단련된 저 무시무시한 체력을 정면 승부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애초에 나는 효율을 고려해서 숙련 포인트를 스테이터스가 아니라 스킬에 투자하기도 했고.
스컥!
상대의 발끝이 스치고 지나간 팔뚝의 옷과 살갗이 함께 찢어지면서 주르륵 피가 흘러나왔다.
꽤 질긴 군복을 스친 것만으로도 찢어발길 정도의 위력이라면 상대도 작정하고 다리를 휘두르고 있다는 뜻.
저 무지막지한 근육의 탄성과 내구도는 인간의 힘으로 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노리려면 다른 곳을 노려야 한다.
‘다행히 상대는 전문적으로 격투기를 배운 사람이 아니다.’
주먹을 휘두르거나 발을 차는 것 정도는 어린아이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뇌가 그 동작을 알고 있고, 그걸 가능케 할 신체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제 전문가의 기교가 더해지면 마치 하나의 예술과도 같은 무술이 탄생하는 것인데, 그저 압도적인 근육의 힘만 믿고 마구잡이로 킥을 날리는 상대에게 그런 기교는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 빨라서 틈이 보이지 않는다면, 상대가 스스로 틈을 내보이게 만들어야지.’
나는 비처럼 쏟아지는 현란한 킥을 피하려다 뒤로 넘어지는 시늉을 했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상대의 공격에 점점 뒤로 밀리고 있던 형국이라 매우 자연스러운 그림이 나왔다. 당연히 상대도 의심하지 않고 이 절호의 기회를 받아먹으러 나왔다.
‘최후의 일격’으로 상대의 숨통을 단번에 끊으려 할 때는 큰 동작과 과한 힘, 불균형이 환상적인 콜라보로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훈련받지 않은 일반인이라면 더더욱.
“끝이다!!”
심지어 이런 상투적인 대사를 내뱉고 싶어지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그런데 적어도 주변에 뭐가 있는지는 확인하고 킥을 날렸어야지.
까앙!
“크윽?!”
내가 뒤로 넘어지는 척하며 재빨리 몸을 비틀자 상대가 내려찍다시피 날린 킥은 그대로 투사기의 철골 프레임에 박혔다.
인간의 몸이 아무리 튼튼하다고 한들 철골보다 단단할 수는 없는 법. 특히나 근육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복사뼈 아래쪽은 충격이 다이렉트로 들어간다.
놈이 통증으로 일그러진 얼굴과 함께 발을 회수하는 순간부터 내 턴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인간의 신체 구조상 죽어라 힘을 넣어도 반드시 무방비해지는 순간이 오는데, 그게 바로 신체의 균형이 크게 뒤틀렸을 때다.
‘잡았다, 개새끼야.’
한쪽 손으로 지면을 받치듯 치면서 반탄력을 이용해 단숨에 튀어 나갔다.
놈이 후퇴하는 것보다 내가 돌진하는 속도가 훨씬 빠른 것은 물론, 위력적인 킥을 먹일 수 없을 만큼 가까이 붙었다. 서로의 숨결과 지독한 땀내가 느껴질 만큼.
여기서 어쭙잖게 권총 같은 걸 뽑아서 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대검이라면 문제될 게 없지.
프싯!
역수로 쥔 대검을 대각선으로 세차게 그어 올리자 자전거 동호회 회장의 쫄쫄이 티가 촤악 찢어지며 선혈을 흩뿌렸다. 칼날 끝이 뼈까지 파고들었다는 걸 알 수 있을 만큼 확실한 손맛이 느껴졌다.
“쿠헉?!”
갈빗대가 잘려 나가며 폐까지 손상을 입은 듯, 상대는 급히 몸을 움직이려다 결국 제풀에 꺾여 쓰러졌다.
아무리 강인한 신체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정상적인 호흡을 하지 않으면 몇 분도 채 버티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생물 아닌가.
흉부를 크게 베이면서 피와 살점을 왈칵 쏟아 낸 그는 끊임없이 헛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시원스럽게 잘려 나간 폐는 산소를 담아내지 못했다. 급격한 저산소증에 의해 누구보다 건강했을 그의 신체는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이윽고 저산소증을 넘어 무산소증에 도달한 순간, 인간의 생명 활동을 담당하는 수많은 생체 기관들이 일제히 정지한다.
잠들 듯이 죽어 나자빠진 그의 시체에서 나는 또 한번 DNA 샘플과 경험치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이승권 Mk II의 복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