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 (74)화 (75/227)

74화 정착기 (24)

처음 내가 홈마트를 거점으로 확보했을 때 약탈하러 온 놈들 중 일부는 약탈을 포기하고 돌아간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아마도 이쪽의 전투력과 거점을 유지할 수 있는 역량을 확인해 보고 추후에 재정비를 해서 다시 쳐들어올 생각이었겠지. 혹은 내가 약탈자들에게 당해서 탈탈 털리더라도, 그 약탈자들을 역으로 털 자신이 있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신중하게 움직이면서 자신들의 전력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부류는 스스로를 감추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대놓고 존재감을 드러내면서 직접 주도권을 쥐고 행사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내가 그 생존자 그룹을 ‘직접’ 확인해 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추측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지역의 통제권이 내가 아니라 상대에게 있음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첫째로 이 근방은 더 이상 좀비들이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간혹 보이는 것도 소규모 무리일 뿐, 다른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십, 수백 마리 단위의 좀비 떼는 완전히 종적을 감춘 지 오래였다.

당연히 내가 처리한 것도 아니고, 내 거점 일원들이 처리한 것도 아니다. 상대가 직접 처리한 것이다. 어떻게? 그 쫄쫄이 차림의 자전거 동호회를 이용해서.

‘상대는 무작정 다른 세력을 약탈하거나 필요 이상으로 과하게 세력권을 확장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어. 오히려 과하다 싶을 정도로 신중하고 끈덕지게 좀비들을 정리하면서 지역의 안정화를 꾀했지.’

이 지옥 같은 3주를 견디면서 작은 지역을 통째로 정리했다는 건 결코 세력이 작지 않음을 의미한다. 상대의 머릿수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300 이상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다만 실제 전투원은 전체 인원에 비해 훨씬 적을 거야. 절반도 안 되겠지.’

이런 재난에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평범한 민간인들이 어떻게 갑자기 야성미 넘치는 전투 민족으로 거듭날 수 있었겠는가. 위험하게 무기를 든 사람보다 단순 노동을 하며 목숨을 부지하려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지정된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예측했던 대로 우리를 지켜보는 눈이 상당히 많습니다.

나는 건물 옥상에서 자세를 바짝 낮춘 채 망원경으로 박지찬 일행이 몰고 있는 두돈반 트럭의 움직임을 좇았다. 늦은 밤이라 오히려 차량의 움직임은 훨씬 더 잘 보였다.

박지찬은 각성한 덕분에 일반인보다 훨씬 더 예민해진 감각으로 주변을 살피며, 내가 알려 주었던 대로 일단 ‘생존자를 찾는 척’하면서 느긋하게 움직였다.

박지찬 일행은 이쪽으로 온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으니 상대도 정규군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일 터. 지금쯤 보고를 받은 상대 세력의 수장은 머릿속이 꽤나 복잡할 것이다.

민간인이나 각성자, 좀비는 상대해 봤지만 무장한 정규군을 상대하는 건 이번이 처음일 테니까. 심지어 멀쩡하게 굴러가는 트럭을 타고 다니는 정규군이라면 더더욱.

“계획대로 상대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넓은 학교 운동장으로 무작정 들어가세요. 입구 앞 바리케이드는 적당히 밀어 버리고.”

-자극을 받은 상대가 공격해 오면 어떻게 대응합니까?

“자극은 받겠지만 공격은 안 할걸요. 자진해서 총 맞아 죽고 싶은 놈은 없을 테니까.”

그것도 그렇다고 대답한 박지찬은 거리를 순회하는 척하다가, 트럭의 핸들을 팍 꺾어서 영운 초등학교의 운동장으로 파고들었다.

바리케이드는 인간형 적을 막기 위한 용도로 대충 학교 책상과 의자들을 엮어 놓은 수준이었다. 당연히 트럭이 들이박자마자 형편없이 무너지며 요란한 소음을 발생시켰다.

그러자 어두컴컴한 학교 안에서 움직임이 보였다. 촛불이나 횃불 등으로 추정되는 광원들이 하나둘씩 켜졌고, 다수의 인영이 발 빠르게 뛰어다녔다.

아니나 다를까, 곧 학교 옥상에서 다수의 인간들이 직접 만든 새총이나 벽돌 투사기 같은 것으로 트럭을 조준했다. 총이 아니라서 모양새가 좀 빠졌지만, 그 정도 무장으로도 사람을 죽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때 학교 옥상 정중앙에서 모습을 드러낸 한 남자가 박지찬을 향해 무어라고 소리쳤다. 내가 있는 건물까지는 잘 들리지 않았다.

-저희더러 정체와 목적을 밝히라고 합니다. 어떻게 합니까?

“예정대로 하세요. 전시체제로 전환된 만큼 국민 여러분의 적극적인 협조를 바란다고. 아울러 피난을 원하는 사람들은 안전한 김해 공항까지 이송해 드릴 수 있다고 하세요.”

박지찬은 군인이 가진 실질적인 권위인 K-2 소총을 들어 보이며 내가 시킨 대로 말을 전했다. 그러자 학교에 자리 잡은 생존자들이 적잖이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는 거기서 쐐기를 박기로 했다.

“안전하게 김해 공항까지 가고 싶은 사람들은 조를 짜서 동이 트기 전까지 한일 여고까지 내려오라고 하세요. 그리고 동이 트기 전까지만 기다릴 테니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 기회는 언제가 될지 알 수 없다는 말도 덧붙이세요.”

-그렇게 말하고 물러나면 됩니까?

“예, 한일여고 앞에서 기다리지 말고 곧장 김해 공항으로 복귀하세요. 그다음부터는 내가 처리할 테니까.”

-……하기야 그런 능력을 가지고 계시니 적이 아무리 많아도 문제는 없겠군요. 건투를 빕니다.

박지찬은 내가 전달한 말을 그대로 내뱉어 적들의 혼란스러운 정신 상태에 쐐기를 박고는, 유유히 차량을 빼서 어두운 밤거리로 사라졌다.

영운 고등학교와 영운 중학교에서 슬금슬금 기어 나와 차량이 빠져나갈 길목을 차단하려던 놈들은 아슬아슬하게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나는 박지찬 일행이 완전히 철수한 것을 확인하자마자 집라인을 이용해 영운 고등학교로 잠입했다.

지금 이 소란에 무기를 들고 나온 놈들 중 대다수는 내 적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물론 모든 전투원이 내 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다수의 민간인이 존재하는 작전 구역에선 언제나 피아 식별을 철저히 해야 한다.

‘전투 의지가 없는 민간인은 적의 등장에 쉽게 공포에 질리고 적극적으로 투항하거나 도망치려는 경우가 많다. 반면 전투 의지가 있는 적들은 적의 등장에 경계하고 기회를 엿보지.’

여기서 적이 ‘기회를 엿본다’는 점이 참 좆같은데, 민간인을 고기 방패로 쓰거나 그들의 틈바구니에 숨어서 아군을 기만하는 놈들이 종종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내가 먼저 선수를 쳐 버리면 그만이다.

무장한 전투원들 대부분이 박지찬 일행에게 어그로가 끌려 건물 밖으로 나간 사이, 나는 건물 내부를 조용히 돌아다니며 비전투원들이 모인 장소를 찾았다.

“별일 아니니까 다들 들어가서 잠이나 자! 괜히 이상한 생각하다 걸리면 연대책임으로 다 같이 좆되는 거야! 알아들어?!”

최대한 많은 사람을 욱여넣을 수 있는 다목적실 앞에서 못을 박아 넣은 커다란 방망이를 든 사내가 위협적으로 윽박질렀다. 다목적실 안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비전투원들은 저곳에 있는 모양이다.

당연히 야간 노동이나 경계, 전투에도 억지로 차출된 인원이 존재하겠지. 그런 사람들은 전투의 공포가 알아서 물러나게 할 것이다.

사람들에게 실컷 윽박지르고 다목적실 문을 쾅 닫아 버린 순간, 나는 놈의 하체에 태클을 걸고 들어가 단숨에 다운시켰다. 그리고 마운트를 잡아 그대로 목젖과 명치를 주먹으로 내려쳤다.

“끅, 끄으윽, 게륵……!”

버러지 하나를 깔끔하게 처리하고 놈이 들고 있던 방망이를 다목적실 입구 손잡이 사이에 끼워 넣었다. 전투 중에 겁먹은 비전투원들이 우르르 뛰쳐 나오면 곤란하니 일단 막아 두기로 했다.

그렇게 영운초와 영운중까지, 고작 담벼락 하나로 나뉘어 있는 세 학교를 돌면서 비전투원들이 갇혀 있는 공간을 임시로 막아 두었다.

우르르 몰려 나간 전투원들은 방금 떠난 박지찬 일행에 대해 적지 않은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그 증거로 다짜고짜 오밤중에 김해 공항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느니, 아예 군인들을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거나 역으로 약탈해야 한다느니 같은 정신 나간 소리를 해 대고 있었다.

‘세상일이 그렇게 쉽게 돌아가면 여기가 헬조선 소리 듣겠냐고.’

학교 뒤뜰에서 집라인을 이용해 옥상까지 빠르게 치고 올라간 나는 삼삼오오 모여서 짜증 섞인 욕설을 주고받고 있던 놈들에게 총구를 겨눴다.

경계 근무 중에 잡담도 모자라 딴짓? 이만하면 수준급 기열 찐빠다.

“새끼…… 처형!”

뒤늦게 내 존재를 눈치채고 쇠구슬을 새총에 재우려던 놈들에게 쏟아진 것은 자비 없는 총탄이었다.

타타타! 타타타! 타타타!

점사로 끊어 쏘긴 했지만 사실상 난사나 다름없는 아찔한 총성은 고요했던 오밤중의 김해 시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안 그래도 문명의 빛이 사라지면서 생활 소음이라는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이 세상에 총성이란, 마치 잔잔한 호수 위에 바위를 내던지는 것만큼 어마어마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 근방의 좀비는 깔끔하게 처리했겠다, 조금 전에 모습을 드러낸 군인들도 저 멀리 가 버렸겠다, 더 이상 적이 찾아오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방심한 놈들이 어떻게 이 기습을 예상했겠나.

제갈공명 할아비가 와도 이건 못 알아차렸다.

“저, 저 새끼 뭐야!!”

“빨리 애들 호출해!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온…… 꺼흑!!”

건물 옥상에 남아 있던 놈들 대부분은 경계도 제대로 하고 있지 않았다. 웃대가리가 정보 수집을 위해 잠시 아래로 내려갔으니 안 그래도 해이해져 있던 군기가 더 심하게 풀려 버린 탓이다.

덕분에 나는 옥상에서 숨거나 피할 장소가 마땅치 않아 얼 타고 있는 인간 과녁판들을 어렵지 않게 조질 수 있었다.

타앙!

동료의 시체 뒤에 숨으려 했던 놈도.

타타타!

벽돌 몇 개 엉성하게 쌓아 놓은 바리케이드 뒤에 숨어 있던 놈도.

“이 개새끼야!!”

“우리 집 족보 SSS급이야 인마.”

탕! 타앙!

당혹, 공포, 울분을 참지 못해 무작정 뛰쳐나와 몽둥이를 휘두르거나 새총을 쏘려 했던 놈들도.

모두 미간에 바람구멍이 뻥 뚫린 채 먼지 쌓인 건물 옥상 바닥에 아무렇게나 뒹굴었다. 이것들은 좀비도 아니고, 중무장한 군인도 아니기 때문에 모잠비크 드릴까지 해 가며 확인 사살을 할 필요는 없었다.

좋은 능력을 가진 각성자가 아니고서야 대부분 총 한 발만 맞아도 과다출혈 내지는 쇼크로 죽으니까. 급소를 맞추면 거의 확정적으로 즉사하고.

사람의 목숨이란 탄약이 충분히 들어 있는 총의 방아쇠가 당겨지고 노리쇠가 전진 후퇴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쉽게 사라진다.

5.56mm 탄환 한 발의 군납가는 평균 500원 정도라고 하던데, 사람의 목숨은 껌 한 통 값도 안 되는 셈이다.

나는 지금쯤 저 아래에서 당황하고 있을 놈들을 위해 축 늘어진 시체 하나를 발로 밀어서 떨어뜨렸다.

옥상에 각성자는 없었으니 저 아래에 각성자가 있을 터. 나는 혹시 모를 어떤 능력의 사용 범위 내에 들어가지 않도록 모습을 숨겼다.

적들은 나를 한 번 이상 봐선 안 된다. 한 번 본 이상 반드시 그 자리에서 죽어야 하고, 놈들의 동료에게 내 정보가 흘러 나가는 것을 저지해야 한다.

전장에선 알고 당하는 것보다 모르고 당하는 게 심리적으로 훨씬 더 압박감이 크기 때문이다.

‘찾을 수 없는 저격수 같은 느낌이지.’

분명 총성도 들렸고, 옆에 있던 아군도 갑자기 죽었는데, 정작 적의 소재 파악이 안 되는 엿같은 상황.

내가 굳이 이 시간대에 습격을 감행한 건 놈들이 한창 잠에 빠져서 비몽사몽 해 있을 때, 완벽한 컨디션이 아닌 것을 노려 어둠 속에서 암습하기 위함이었다.

핑! 촤아아악!

다시 한번 옥상에서 집라인의 후크를 쏴서 위치를 변경했다.

동이 트기 전에 이곳의 모든 쭉정이들을 소각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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