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정착기 (23)
“야, 이 개새끼야! 애들을 그렇게나 데려가고도 고작 학교 하나를 못 털었어?! 이런 무능한 새끼!!”
“죄, 죄송합니다, 형님! 밤에 몰래 애들 데리고 접근했는데 웬 이상한 기계가 우리의 움직임을 칼같이 포착했는지라…….”
“그냥 네가 조심성이 없었던 거겠지!”
“2주 전이랑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게 달라졌습니다! 처음 염탐했을 때는 사람도 별로 없어 보이는 평범한 학교였는데…… 지금은 거대한 벽이 세워진 성 같은 느낌입니다.”
“지랄! 고작 2주 만에 작은 초등학교가 성으로 바뀌어? 이 새끼가 진짜 뒤질라고!”
영운 중학교에서 인근 주거 지역을 약탈하며 버티고 있던 생존자 그룹의 우두머리 최상두는 열불이 뻗쳤다.
부하들이 멍청하고 무능하고 욕망에만 앞선 놈들이란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힘과 카리스마스를 보여 주면서 나름 잘 이끌었다고 생각했는데, 슬슬 제대로 굴러가는 일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
짐작일 뿐이지만 최상두는 이 모든 사태가 약 2주 전쯤에 벌어진 ‘홈마트 학살극’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생존자 그룹이 홈마트를 약탈하기 위해 우르르 몰려간 그날, 최상두도 동태를 살피기 위해 감시역 몇을 그쪽에 붙여 두었다.
뒷골목에서 활동할 때도 항상 그런 식이었다. 조직 간의 항쟁, 짭새의 기습적인 검거처럼 시끌벅적한 일이 벌어지면 언제나 한 걸음 물러서 동태를 살피곤 했다.
그래야 자신에게 위협이 될 만한 세력의 힘과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고 그에 맞는 대비를 할 수 있었다.
마침 다른 생존자 그룹과 충돌할 날이 머지않은 것 같아, 그들의 전력을 알아내기만 해도 충분히 남는 장사라고 생각했었다. 결국 마지막에 자신이 승리해서 남의 세력과 물자를 모두 흡수하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런데 보기 좋게 예상이 빗나갔다.
감시역으로 붙였던 이들이 겁에 질린 얼굴로 돌아오더니, 홈마트를 약탈하러 갔던 타 생존자 집단이 전멸해 버렸다는 것 아닌가.
그래, 불시의 기습이나 총 같은 무기가 있었다면 몇 명 죽고 다치는 일 정도는 있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전멸이라니? 어떻게 그 많은 놈들이 몰려가서 전멸을 당한단 말인가?
‘다른 생존자 그룹을 털어 보면서 알아본 결과, 그때 몰려갔던 놈들 중 상당수가 건장한 체격을 가진 성인 남성들과 각성자들이었다.’
문자 그대로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죄다 몰려가서 홈마트에 꼴아박았다는 건데, 그럼에도 떼죽음을 당했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래도 덕분에 영운초, 영운중, 영운고 생존자 그룹을 손쉽게 통합할 수 있었다. 싸울 수 있는 장정과 각성자 대부분이 나가리 된 생존자 그룹들은 자연히 최상두에게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이제 삼방동에 넓게 포진해 있던 생존자 그룹은 크게 셋만 남았다. 학교 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김해 동부 스포츠 센터 생존자 그룹, 그리고 학교 동쪽에 자리 잡고 있는 김해 대학교 생존자 그룹.
최상두가 마음만 먹으면 그쪽도 손에 넣을 수는 있겠지만, 그러려면 먹여야 할 입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사채업자였던만큼 셈이 빠른 그는 저쪽이 먼저 고사하기까지 우선 기다리기로 했다.
그 틈에 홈마트와 어떤 연관점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활천 초등학교를 확보하라고 부하들을 보냈건만…….
“스마트폰 배터리만 멀쩡했어도 사진을 찍어 왔을 겁니다. 진짜 거기엔 학교가 아니라 성이 있었습니다, 형님!”
“성이고 지랄이고 헛소리는 그쯤 해라. 슬슬 우리가 여기에 자리 잡은 지도 3주째인데, 그깟 학교 못 먹는다고 해서 손해 볼 건 없다. 다른 곳을 먹으면 그만이야.”
지금도 바이커 각성자들이 꾸준히 자전거를 타고 좀비 떼를 다른 지역으로 유인시켜서 교통 정리를 하고 있다. 거리가 깔끔해질수록 인간들이 활동하기 쉬워지는 법.
최상두는 잠시 내버려 두었던 김해 대학교를 이번에 완전히 집어삼키면서 인근에 위치한 대규모 아파트 단지까지 싹 접수할 계획이었다.
바이커들이 좀비를 빼낸 만큼 아직 약탈당하지 않은 빈집들이 넘쳐날 터. 우선 부족한 물자는 아파트 단지를 터는 것으로 충당하고, 문제의 홈마트와 활천초는 이쪽 사정이 넉넉해지면 다시 한번 찔러 볼 생각이었다.
“그보다 김해 대학교의 그 애새끼들은 최후통첩을 받아들이겠다고 했냐?”
“바이커들이 다녀오긴 했는데 고집불통이랍니다. 아직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들이라 그런지 바락바락 대드는 게…….”
“그럼 우리야 좋지. 앙칼지게 대드는 년놈들은 철저하게 복종시키는 맛이 있으니까.”
돈 빌렸다가 제때 못 갚아서 무릎 꿇고 사정사정하는 년놈들을 어디 한두 번 봤던가? 항상 갑의 위치에 있었던 최상두는 쥐뿔도 없는 을이 바락바락 대들 때마다 보기 흐뭇했다.
여자들은 노리개로 가지고 놀 수 있고, 남자들은 노동력이나 새로운 조직원으로 키울 수 있으니까. 정부도, 짭새도, 질서도 없는 이 세상에선 힘 있는 자가 곧 법이었다.
“일단 애들 다 불러들여서 오늘은 푹 쉬게 해. 내일 새벽 일찍 나가서 김해 대학교 우리가 접수한다.”
“그럼 저희가 선두에 서겠습니다, 형님! 실수를 만회하게 해 주십시오!”
“새끼…… 그래도 충성심 하나는 참 깊다니까. 좋다, 일이 잘 풀리면 너희 팀에 노리개 몇 명 던져 주마.”
“감사합니다!!”
비록 멍청하고 무능해도 충성심 하나로 자신에게 철저히 복종하는 부하들은 얄밉지만 싫지는 않았다. 자신처럼 능력 있는 리더가 이런 놈들을 이끌어야 한다는 말에 정당성을 부여하기도 했고.
이 일대를 완전히 접수하고 나면 아마도 자신의 세력이 김해에서 최고가 될 것이다. 김해 공항에 처박혀 있기만 하는 겁쟁이들은 아예 논외다.
‘그렇게 되면 홈마트와 활천 초등학교에 있을 사람과 물자도 모두 내 것이 된다.’
각성자 부하만 해도 10명이 넘고, 일반인 부하는 무려 150에 달한다. 그보다 더 많은 노예들이 있지만 그건 일단 제쳐 두고.
진짜 이 시대의 왕으로 군림할 수 있을 때까지 앞으로 조금이었다.
일단은 일이 틀어지지 않게끔 차근차근 계획을 진행할 것이다. 자신은 스마트한 리더니까.
* * *
두돈반 차량마다 절반 정도의 공간을 물자로 채운 우리는 출정하기에 앞서 작전 회의를 열었다.
엄밀하게 따지면 같은 편도 아니면서 작전 회의를 왜 하는 건가 싶겠지만, 원래 이런 건 소통이 가장 중요하다. 소통이란 곧 서로의 속내나 의도를 일부라도 나누는 교류 과정이고.
나는 임시로 박지찬 병장이 이끌고 있는 각성자 군인들이 내 속내와 의도를 파악할 수 있도록 일부러 말을 골랐다.
“우리가 마주치게 될 상대에게는 형식적인 투항 권고 및 무장 해제 권고를 하세요. 그리고 전시 상황에 따른 강제 징집을 하면 됩니다.”
“상대가 누구든 그런 요구는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정말로 군의 보호를 받고 싶었다면 그날 저희가 김해 공항으로 후퇴할 때 합류했을 겁니다.”
“알아요. 그러니까 더더욱 밀어붙여야죠. 당신들을 보호자로 인식하는 사람과 적으로 인식하는 사람을 구분하기 위해서.”
“……일부러 도발을 한다는 겁니까?”
“내가 왜 피 같은 물자를 나눠 줬다고 생각하죠? 현장에서 군인의 권위를 빌리는 값이기 때문이에요.”
“…….”
우리나라 사람들은 군인의 권위에 대해 쥐뿔만큼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겠지만, 원래 명분과 형식을 지키는 사람이 그걸 거부하는 사람보다 더 유리한 위치에 서는 법이다. 역사가 그것을 증명한다.
나는 그것을 이용해 죄책감이나 양심의 가책 같은 쓸데없는 것은 줄이고 작위적인 정당성을 부여할 생각이었다. 그래야 최종적으로 군인과 힘없는 민간인이 서로 협력할 테니까.
물론 거기에 해당되지 않는 양아치나 약탈자들을 죽이는 데에도 거리낌이 없어지겠지.
“자, 한번 생각을 해 보죠. 만약 당신들이 이 험난한 세상에서 추위에 떨고 굶주림에 지쳐 있을때, 수송 차량에 물자를 가득 싣고 나타난 군인들이 눈앞에 나타난다면 어떨 것 같아요?”
“아마도……안도하거나 크게 기뻐할 겁니다. 미처 대피하지 못한 우리들을 구해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겠지요.”
“바로 그거예요. 세상이 망한 지도 벌써 3주가 흘렀는데, 이쯤 되면 각 생존자 집단은 크게 두 가지 양상을 띠고 있겠죠. 끝없이 타인, 혹은 타 세력을 약탈하고 흡수해서 살아남은 쪽, 혹은 나처럼 안정적으로 거점과 물자를 확보해서 살아남은 쪽. 약탈로 살아남은 놈들은 구원의 손길을 달갑게 여기지 않을 거예요. 사람의 숫자가 곧 힘이고 세력의 규모를 결정짓는데, 군인들이 구조 작전을 벌이면 누가 좋아하겠어요?”
“예, 당연히 적대할 겁니다.”
“그러니 더욱 노골적으로 나가야 해요. 걸리적거리는 놈들을 매우 쉽게 구분 짓고, 일망타진 할 수 있으니까요.”
이건 내가 북한군 상대로도 꽤 써먹었던 기만전술이었다.
군벌로 전락한 북한 전역의 군부대는 개미집 같은 땅굴이나 산으로 숨어들며 몇 년만 악착같이 버티면 자신들이 이길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만 하면 미제 역적 도당과 그 앞잡이들이 아프간처럼 버티지 못하고 물러날 것이라며 멋대로 착각했던 것이다.
그 때문인지 북한군은 전장에서 민간인을 먼저 대피시키고 임시 수용 시설로 보내려 했던 우리의 ‘인도적인’ 작전을 참 많이도 방해했었다. 민간인 사이에 프락치나 자폭 테러범을 숨겨 놓는 건 일상다반사였고 아예 민간인 대피 중에 습격을 받는 일도 있었다.
그러니 처음부터 명확하게 구분 지어야 한다.
우리에게 적대심을 품은 놈, 절대로 협조할 생각이 없는 놈, 새로운 질서를 거부하고 투쟁을 외치는 놈. 그런 쭉정이들을 미리 걸러 내지 못하면 죄 없는 민간인들도 살리기 힘들었다.
사람을 살리고자 한다면 누군가는 죽여야 하는 것이다.
“작전은 간단합니다. 대놓고 놈들의 앞마당에 흙발로 들어가서 국군의 보호를 원하는 피난민들을 받는 거죠. 그럼 자연스럽게 그걸 원하는 사람과 반발하는 사람이 나뉘면서 분쟁이 발발할 텐데, 그때 당신들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물러나세요.”
“예? 저희의 도움이 필요하신 것 아니었습니까?”
“’권위’만 빌리겠다고 했었죠. 문자 그대로의 의미예요. 당신들은 위협용이고 진짜는 접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들이 가지고 있는 권위는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좀 더 대단했다. 특히 이런 시국일수록 그 가치가 더 빛을 발하고 있었다.
1. 좀비가 득시글거리는 바깥에서 태연하게 수송 차량에 물자를 싣고 다닌다.
2. 소수 정예로 움직이는 강력한 각성자 부대이다.
3. 무장 상태가 훌륭해 보인다.
내 눈에는 그냥 오합지졸로 보이지만, 일반인에게는 저렇게 보인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는 곧 생존자 집단을 무력으로 휘어잡고 있는 놈들에게 큰 혼란을 가져다줄 것이다.
단합되지 않은 무리일수록 혼란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해 무리 간의 균열을 야기한다. 한때 우리가 몸담고 있던 사회에 너무나도 쉽게 퍼져 나갔던 가짜 뉴스처럼.
“뒤처리는 제가 할 테니 당신들은 적당히 바람만 잡다가, 피난민들을 일부 구출해서 김해 공항으로 데려가면 됩니다.”
“정말 저희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됩니까?”
“예, 제 능력 봤잖아요?”
“하긴…….”
내 능력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내가 지정하고 확보한 거점이 아니면 거점 방위 무기를 일체 소환할 수 없다는 것. 아울러 거점 방위 무기를 소환하더라도 거점 외부의 적을 요격할 수 없다는 것.
하지만 아직 저들은 내 능력의 단점을 모른다. 아마 내가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무시무시한 무기들을 소환해서 적들을 쓸어 버리는 각성자라고 착각하고 있겠지.
저들이 더 깊이, 더 오랫동안 착각해 줄수록 좋다. 좋든 싫든 언젠가는 나에 대해서 알게 되는 사람들이 많아질 텐데, 날 함부로 건드릴 수 없게 하는 강력한 억제력이 필요했다.
그건 직접 총칼을 휘두르는 것으로 만들어지는 억제력이 아니라, 최초의 유포자로부터 끊임없이 다른 누군가에게 전달되면서 ‘루머’로 만들어지는 억제력이 될 것이다.
“짧은 시간 동안 다들 충분히 쉬어 두고 재정비라도 하세요. 인간들과의 교전이 없을 거라고 말은 했지만, 그래도 만일의 사태라는 게 있으니까요. 여러분은 김해 공항으로 빠져 나가기 전까지 ‘섣불리 맞서기 힘든’ 이미지를 계속 고수해야 해요.”
“알겠습니다. 말만 들으면 쉬운 일인 것 같지만 그렇다고 방심할 수는 없겠군요. 당장은 차량의 적재 공간도 부족하니 피난민을 그리 많이 싣고 갈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정기적으로 찾아와야 합니까?”
“처음 한번 피난민을 데려가면 끝입니다. 나머지 생존자들은 제가 처리하죠.”
박지찬 병장은 일단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은 철저히 대외 선전 같은 느낌으로 써먹을 것이라고 언질해 둔 덕분에 딱히 의문을 품는 눈치는 아니었다.
나 역시 쭉정이 제거에 능력을 직접 사용하지는 않겠지만, 능력을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어야 하니 저들과 필요 이상으로 가까이 지낼 필요는 없다.
교전이 일어날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저들의 도움을 거부한 것은 내가 일부러 능력을 사용하는 것처럼 요란하게 날뛸 생각이기 때문이다.
‘DNA 샘플도 넉넉하겠다, 모든 거점이 리뉴얼 되면서 각 거점 창고에 제작용 아이템도 잔뜩 쌓였겠다, 죽어라 탄약만 만들어야겠군.’
이번에는 좀비가 아니라 인간 상대로 아낌없이 탄약을 쏟아부을 계획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