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정착기 (22)
정부에 의해 통제받던 시절의 군대도 병신 같았는데, 이젠 정부의 통제마저도 받지 않는 군대는 얼마나 더 병신같을까.
안 봐도 비디오였기 때문에 딱히 그쪽 사정이 궁금하지는 않았다. 그쪽은 그쪽대로 부질없고 대단한 영광도 없는 애국심이나 열심히 강조했겠지.
애국심을 가지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고, 또 숭고한 희생정신이기 때문에 존중받아야 하는 것은 맞다. 나 또한 한 명의 애국자였으니 어찌 순수한 애국심을 깎아내릴 수 있겠는가.
다만 그 애국심을 이용해 먹는 이 사회에 질렸을 뿐이다.
“저 사람들이 소란을 일으켰다던 그 군인들인가요?”
의사들과 함께 타 거점에 보급해 줘야 할 의약품 및 의료 도구를 한창 선별하던 채성아가 다가와 말했다.
그녀는 내가 부재중일 때 이 병원의 임시 책임자로 일해 줘야 하기 때문에, 최근에 거점 방위자로 새롭게 임명했다.
그녀는 식당 통유리 너머로 걸신들린 듯이 밥을 퍼먹고 있는 군인들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소란을 일으킨 사람들에게 귀중한 식량을 나눠 줘도 괜찮느냐는 의미인 것 같았지만, 밥은 먹여야 일을 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인간은 가장 기본적인 것의 유무에서 자신과 상대의 차이를 크게 실감하는 법이다. 가난한 집안의 아이가 부잣집 아이의 넉넉한 지갑 사정에 주눅 드는 것처럼, 저들 역시 이곳의 넉넉한 물자 사정에 기가 눌렸을 것이다.
이곳이 단순히 물자 사정만 괜찮은 생존자 거점이었다면 저들이 무력을 써서라도 약탈할 가능성이 있겠으나, 그것도 내가 직접 나서는 것으로 해결했다.
저들은 이곳에서 안락하게 지내는 비각성자 민간인들을 한껏 부러워하면서, 한편으로는 내가 던져 주기로 약속한 콩고물에 정신이 팔려 있을 터.
막말로 세상이 쫄딱 망한 지 벌써 3주째인데 애국심이고 나발이고 당장 본인 먹고사는 게 더 중요하지 않겠나. 각종 스트레스로 한계에 몰려 있을 저들을 귀찮은 약탈자 집단으로 만들지 않으려면 적당한 당근과 채찍을 제시해야 한다.
‘전장에서 약탈자로 돌변하는 군인이 가장 무섭듯, 종말의 시대에 의무와 애국심으로만 움직이던 각성자들이 비각성자를 억압하고 약탈하기 시작하면 난감해진다.’
나는 이미 그런 사례를 두 번이나 겪었다.
내가 홈마트를 확보했을 때, 그리고 인제대에서 민간인들을 구출해 낼 때.
애초에 두 사례 모두 세상이 망해 버린 틈을 타 흑심을 품은 각성자들이 벌인 사태였다. 자기보다 약하고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싶으면 일단 대화보다 주먹을 내지르는 놈들이었으니까.
만약 내가 각성하지 않았거나 생존에 그닥 도움이 안 되는 직업으로 각성했다면 지금쯤 약탈자 무리에게 당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좀 씁쓸하네요. 저 사람들도 딱히 저런 일을 하고 싶어서 하는 건 아닐 텐데.”
“안된 건 사실이지만 딱히 동정하고 싶지는 않아요. 본인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면 스스로 바꿀 생각을 해야지 남들이 바꿔 주길 기대하면 안 되니까요.”
자신들이 일반인과는 다르다는 걸 알았다면, 이런 세상에서 자신의 가치가 꽤 높다는 사실을 인지했다면 좀 더 똑똑하게 굴어야 한다.
자기 앞가림도 하기 힘든 마당에 무턱대고 남을 돕는 건 바보짓이다. 그럴 여력도 없으면서 누군가를 떠안는다는 건 무책임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
한국 사람은 정이 깊다, 서로 상부상조하면서 살아온 민족이다 같은 말도 이젠 옛말이다. 지금은 감정에 호소할 것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할 때다.
“그러니까 실험해 보려고요. 저들에게 적절한 노동과 대가를 지불하고, 저들이 소속된 집단으로 돌려보낼 거예요. 그럼 그 집단에서 저들의 뛰어난 실적을 보고 새롭게 평가를 내리겠죠. ‘아, 이 사람들은 좀 더 합당한 대우를 받을 가치가 있구나’, ‘지금이라도 더 긴밀하게 협조해서 함께 이 사태를 잘 이겨 내야겠구나’. 조금 늦더라도 서로에 대한 평가를 수정하고 좋은 방향으로 걸어 나갈 수 있다면 다행이겠죠. 그럼 이쪽이 필요 이상으로 개입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살아남을 거예요.”
‘개선의 여지’가 있는 집단이 악의 축으로 돌아설 가능성은 적으니 나도 지금보다는 그들을 덜 견제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요?”
“……사실 그럴 가능성이 높긴 해요. 이 나라는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이 병원으로 두돈반 트럭을 타고 도망쳐 온 이들은 모두 군인이며 한 명도 빠짐없이 각성자였다.
즉 김해 공항에 자리잡은 생존자 집단은 책임과 의무를 강요하기 쉬운 군인에게, 각성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런 위험천만한 임무를 떠넘겼다는 뜻이다.
군의 협조? 민간인의 자원 입대? 무엇 하나 없었다. 좀비가 득시글거리는 세상에 저들만 달랑 내보내서 물자든 뭐든 구해 오라고 호통친 것이다.
“그러니까 제가 생각했던 대로 되지 않으면 그 집단은 그냥 망할 운명이었던 집단이 되는 거예요.”
“듣기로는 꽤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다던데, 민간인들이라고 구조할 생각은 없으신가요?”
“언더도그마 아시죠. 약자라고 다 선하지 않아요.”
채성아가 간호사라는 입장을 생각해서 거기까지만 말했지만 사실 한마디가 더 남아 있었다.
선하지 않은 약자는 구할 가치가 없다는 말이다. 악한 강자와 손잡을 이유가 없듯이.
곧 식당에서 만족스럽게 식사를 끝마친 군인들이 하나둘씩 겸연쩍은 표정으로 걸어 나왔다. 일단 밥을 줘서 먹긴 먹었는데 사양 않고 막 퍼먹은 느낌이라 괜스레 민망한 모양이었다.
채성아에게 인벤토리로 보급용 의약품과 의료 도구를 건네받은 나는 이 이상 병원에서 잡음이 생기지 않도록 그들을 데리고 나왔다.
병원은 가스와 전기, 수도가 무한정 공급되고 있었기 때문에, 비상 발전기용으로 재생성된 경유 여유분이 좀 있었다. 그걸로 두돈반의 연료를 채우고 나니 금세 떠날 채비를 갖출 수 있었다.
두돈반으로는 아무래도 적게는 수십 마리, 많게는 기백이 넘는 좀비 떼를 정면 돌파하는 건 조금 힘들 테니, 내가 직접 장갑 구급차를 몰고 선두에 서기로 했다.
일전에 장갑 구급차를 끌고 나갔다가 경미한 손상을 입었는데, 거점 내부에 조금 처박아 두니 신차를 뽑은 것처럼 말끔하게 내구도가 회복되었다.
듣도 보도 못했던 김해시 최고 규모의 병원에서, 생전 처음 보는 순백색의 장갑 구급차를 본 군인들은 처음 내 능력을 봤던 때처럼 충격을 먹은 표정이었다.
장애물을 들이박아서 그대로 짓뭉개는 용도가 아니라면 딱히 전투에 사용할 수도 없지만, 사실 이 장갑 구급차야말로 내 계획에 꼭 필요한 액세서리였다.
두돈반 차량 행렬, 무장한 각성자 군인들, 그리고 맨 앞에 서서 위풍당당하게 좀비 밭을 뚫고 들어온 장갑 구급차. ‘아무것도 모르는’ 제3자라면 무조건 착각할 수밖에 없는 구도였다.
외부에서 좀비들이 습격하면 즉시 대응할 수 있도록 거점 방위 무기를 재배치해 둔 다음, 거점 일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다시 원정에 나섰다.
본격적으로 시내에 진입하기까지 내 뒤를 따라오는 군인들은 잔뜩 굳은 얼굴로 사주 경계를 할 뿐이었다.
‘지금쯤 머릿속이 꽤 복잡하겠지.’
당장은 내가 적인지 아군인지 명확하게 구분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순히 나를 따라나서는 이유는 내가 그만한 힘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각성자를 아무렇지도 않게 맨손으로 개 패듯 뭉개 버리고, 좀비 떼로부터 거점 하나를 완벽하게 방어할 수 있으며, 또한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신뢰와 지지를 받고 있다는 ‘힘’ 말이다.
무작정 신뢰하기에도, 반대로 불신하기에도, 섣불리 뒤통수를 치기에도 꺼려지는 상대가 바로 나. 저들에게 인식되는 나의 포지션은 딱 그 정도면 충분했다.
‘한 번 어그로가 끌린 놈들을 처리해서 그런가, 대로에는 비교적 위험 요소가 적군. 딱 봐도 위험해 보였던 그 이상한 좀비들도 없고.’
다행히 걸리적거리는 소수의 좀비나 장애물은 장갑 구급차로 확 밀어 버리면서 길을 열었기 때문에 두돈반이 시내를 가로지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변종으로 추정, 아니 이제는 확신할 수 있는 그 기형적인 좀비들은 일반적인 좀비에 비해 수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았다. 거리를 꽉 채울 만큼 넘쳐 났다면 벌써 우리를 습격했겠지.
‘그렇다는 건 기존의 좀비가 변종으로 변하는 건가? 아니면 변이 바이러스에 새롭게 감염된 인간이 변종으로 탄생하는 건가?’
전자라면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많고 다양한 변종들이 나타날 것이며, 후자라면 생존자를 보호하기만 해도 그 위협을 크게 줄일 수 있다.
다만 녹색 연기에 심하게 노출되었던 사람 중 일부가 강화형 좀비로 돌변한 사례가 있으니, 무조건 생존자만 보호하는 것이 해결책은 아니었다. 적극적으로 좀비의 수를 줄이고 인간의 영역을 넓혀 나가야 한다.
엄청난 마력으로 장애물을 밀어낸 장갑 구급차 안에서 나는 한 손으로 장교용 권총인 K-5를 만지작거렸다.
이제 와서 사람을 상처 입히거나 죽이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런 건 북진군으로 참전한 지 1년 만에 싹 사라졌으니까.
세상에는 수많은 죽음들이 존재하지만, 전쟁만큼 인간의 생명이 가장 가치 없게 사라지는 것도 없었다. 전장에서 내 손으로 일으킨 누군가의 죽음은 몇 번이고 흘려보냈던 빗물이나 다름없었다.
의미 없고, 부질없고, 덧없는 것. 거기에 약간의 공익과 개인적인 감정을 섞기만 해도 자기 합리화를 할 수 있다.
그러니 이제 와서 상처 입어도 싼 놈, 죽어야만 남들에게 도움이 되는 쭉정이들을 내 손으로 걸러낸다고 한들 죄책감 같은 게 느껴질 리가 없다.
-전방에 굉장히 큰 홈마트가 보이는데, 저곳이 저희의 1차 목적지가 맞습니까?
그때 무전기로 들려오는 박지찬 병장의 목소리에 나는 그렇다고 답하면서, 스스로도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던 홈마트는 기껏해야 상가 건물보다 조금 더 높은, 그래 봤자 아파트보다는 한없이 낮은 건물이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삼방동으로 접어든 우리의 시야에 들어온 홈마트는 어지간한 백화점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거대했다.
거점 지정 스킬의 등급이 향상되면서 경희대 중앙 병원도 대학 병원 수준으로 커졌는데, 홈마트도 이제 서울 한복판의 대형 마트 수준으로 거듭난 것이다.
‘다른 생존자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저곳에서 꽤 많은 물자를 반출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거점 전체가 리뉴얼되면서 물자도 새롭게 재생성됐겠군.’
혹시 몰라 CCTV로 살펴보니 내 예상이 적중했다. 꽤 많이 비어 있던 판매대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상품으로 꽉 차 있었고, 내부는 한층 더 넓고 깔끔해졌다.
이만하면 족히 수천 명을 1개월 정도는 먹여 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주변 건물과 지형 일부를 집어삼키면서 스스로 몸집을 키운 홈마트 주차장에 차를 댔다. 거점 범위가 드넓은 야외 주차장까지 확장된 덕분에 밥을 먹지 않아도 속이 든든했다.
“세상에…… 김해에 이만한 규모의 홈마트가 있었을 줄이야.”
“애초에 그 병원도 처음 보는 규모의 병원이었잖습니까. 저기 부산이라면 또 모를까.”
두돈반에서 하나둘씩 내린 군인들이 김해 시내의 구석진 위치에 자리 잡은 홈마트의 규모에 감탄했다.
어째서 이 주변에는 좀비가 없을까? 저 안에는 대체 얼마나 많은 물자가 쌓여 있을까? 아니, 애초에 이곳의 주인은 누구일까?
그런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졌을 군인들에게 진실을 알려 주기 위해 나는 수동으로 홈마트 입구의 셔터를 열었다.
동시에 모습을 감추고 있던 강화형 자동 포탑과 머신 피스톨 터렛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좀비든 인간이든 주인의 허가 없이는 단 1mm의 침입도 허가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총구에 담겨 있었다.
“뭣들 합니까. 어서들 와서 차에 옮겨 실어요.”
총 맞기 싫으면 인벤토리에 꼬불칠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경고도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