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정착기 (20)
좀비 사태가 발발하면서 좀비들과 죽기 살기로 싸운 사람들 중 살아남은 이들은 대부분 각성이란 것을 경험했다.
시스템이란 알 수 없는 무언가에게 대뜸 ‘생존할 자격이 있다.’며 선택받았고, 각자에게 어울리는 직업까지 부여받았다. 그렇게 각성자, 혹은 생존자로 불리게 된 이들은 일반인과 궤를 달리하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종전 선언을 한 지 1년 남짓 되어 가고 있던 시기에 후방 부대에서 꿀을 빨고 있던 군인들에게는 쉽사리 상상하기 힘든 경험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또다시 총을 들고 누군가와 싸워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중국과 러시아는 미국의 힘을 잘 알기 때문에, 또 한국에 선제 타격을 한 북한의 책임이 명확했기 때문에 국제 사회에서 비난할지언정 총부리를 한반도로 겨누지는 않았다.
2차 남북 전쟁이 완전히 종결되면서 한반도에 영구적인 평화가 찾아왔는데 뜬금없이 동북아발 세계 대전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을 테니까.
어쨌든 중요한 것은 지난 1년간 많은 사람들이 ‘전쟁 후유증’에 찌들어 있었다는 점이다.
전쟁 후유증이란 말만 들으면 굉장히 고통스럽고 괴로운 현상일 것 같지만, 쉽게 말하면 그냥 평화였다.
수십년 간 전쟁 위협에 시달리고 있던 국민들이 드디어 한반도의 오랜 숙적, 암덩이가 사라진 것을 기점으로 긴장이 탁 풀린 것이다.
그래서 한반도 북부 지역으로 차출되지 않은 후방 군부대도 대부분 근무를 하는 둥 마는 둥, 적당히 놀고먹고 지냈었다. 대뜸 일본의 초대형 크루즈선이 부산항에 꼴아박기 전까지는.
“좆같은 좀비 새끼들!”
타탕! 탕!
두돈반 트럭 화물칸에 적당히 상자를 쌓아서 엄폐물을 만든 박지찬 병장이 신중하게 사격을 가했다.
그는 좀비 사태 당일 김해 시내에 폭도 진압 및 교통 통제로 투입되었다가 좀비 떼에게 부대가 와해된 소총병이었다. 운 좋게 소대원들과 함께 김해 공항으로 집결했다가 ‘각성자’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다시 현장에 투입된 인원이었다.
각성을 했기 때문에 일반인보다 더 대단하고, 그만큼 할 수 있는 일도 많다는 건 다 아는 사실이었다. 문제는 대한민국에서 절대로 능력적인 두각을 드러내면 안 되는 단체가 존재하는데, 그게 바로 군대였다.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군대 생활 잘하는 비결은 0%도, 100%도 아니고 딱 50%만큼 일을 하는 것이라고.
폐급으로 욕먹지 않고 에이스라고 일감을 더 받지도 않기 때문에 중간의 회색 지대에 머무를 수만 있다면 가장 안정적으로 꿀을 빨 수 있다. 그런데 각성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김해 공항의 임시 지휘관이 그를 물자 수색 팀으로 차출해 버렸다.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너희 각성자들밖에 없다느니, 너희가 이 민간인들과 전우들의 유일한 희망이라느니, 온갖 그럴싸한 미사여구를 갖다 붙이면서 사지로 내던진 것이다.
펑! 끼이이이이!
“씨발, 타이어! 타이어, 씨발!”
자신이 타고 있는 두돈반의 대각선 방향에서 뒤따라오고 있던 차량의 타이어가 펑 터지더니, 곧 중심을 잡지 못하고 마구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그쪽 차량의 화물칸에 타고 있는 병사들이 갑작스러운 흔들림에 비명을 내지르고, 운전석과 조수석에 타고 있던 병사들의 얼굴이 사색으로 물들었다.
박지찬은 욕설을 내뱉으면서도 화물칸 후방에 쌓아 둔 철제 보급 상자 뒤로 몸을 숙였다. 한발 늦게 파바바박! 박히는 날카로운 가시들이 철제 보급 상자를 맞고 튕겨 나갔다.
위력이 어찌나 센지 굵기가 두꺼운 가시는 튕겨 나가지 않고 철제 보급 상자를 일부나마 관통할 정도였다. 단순 운동 에너지로 비교하면 소총탄과 비슷한 위력이었다.
다시 몸을 들어 올린 박지찬의 시야에 보이는 것은 완전히 제어 능력을 상실한 두돈반이 미끄러지면서 그대로 전복되는 처참한 광경이었다. 끼이이이익 하고 매우 진한 스키드 마크(Skid mark)를 남길 때부터 짐작하고는 있었다.
콰아아앙!
전복된 차량이 충격량과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몇 바퀴나 구르다가 상가 건물에 처박았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승냥이 떼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차량을 뒤덮었다.
“아아아악!”
“사, 살려…… 카하아아악?!”
“저리 꺼져, 이 개새끼들아! 아아악! 아아아아아!!”
탕! 탕! 간헐적으로 울려 퍼지는 총성과 함께 끔찍한 비명이 그의 귓가를 때린다 싶더니, 곧 빠르게 멀어졌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가 타고 있던 두돈반은 어떻게든 포위망을 벗어나기 위해 최고 속력으로 달리고 있었으니까.
요 근래 시내와는 달리 버려진 차량이 거의 없는 공단 쪽 방향으로 움직였던 것이 화근이었을까, 오늘은 새벽 일찍 물자 수색 원정에 나서자마자 일이 터졌다.
“분명 지난주까지는 안전한 루트였잖아, 씨발!”
물론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다. 놈들이 마네킹처럼 백 날 천 날 제자리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정기적으로 무리 지어 움직이거나, 인간을 발견하면 포효를 내질러 주변 동포들을 불러 모아 몰이사냥을 한다는 사실도 안다.
다만 지난주까지는 이 루트를 이용해서 원정을 나가도 별 탈이 없었고, 간혹 좀비들이 발견되더라도 총만 있으면 매우 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게임이나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머리에 총알 한 발 박아 주면 좀비는 꼼짝도 못 했다.
그런데 왜 하필 오늘, 그것도 모두가 잠든 고요한 새벽에 남몰래 움직였음에도 이런 대참사가 벌어졌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좀비들은 원거리 공격을 못 하는 것 아니었나?’
뒤 차량이 미끼가 되어 준 덕분에 물자 수색 팀을 쫓는 좀비 떼가 더 이상 보이지 않자, 박지찬은 숨을 크게 몰아쉬며 주저앉았다.
징발된 두돈반 차량은 총 5대였다. 그중 선두를 달리고 있던 1대가 공단에 접어들자마자 당했고, 2호 차량이 방향을 바꿔서 다른 루트로 움직였다. 그리고 조금 전 모두가 봤듯이 가장 뒤에 있던 5호 차량도 당했다.
이제 남은 건 2호, 3호, 4호 차량뿐.
이제 와서 김해 공항으로 되돌아가기엔 너무 늦은 감이 있었기 때문에, 차라리 놈들을 완전히 따돌리고 작전을 속행하는 게 낫다는 게 2호 차량의 선탑자 의견이었다.
“작전 속행은 니미럴…….”
말은 그렇게 해도 작전 속행 외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각성자들 중 대부분이 김해 공항에 비각성자 가족이나 연인, 친구를 두고 있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또 군인의 본분을 다한다는 의미에서 어쩔 수 없이 이렇게 구르고 있는 건데, 만약 물자를 구하지 못하면 자신들뿐만 아니라 김해 공항의 모두가 위험하다.
무엇보다 슬슬 본격적인 겨울 한파가 난방도 없는 시설을 마구 할퀴고 있었다. 물자를 최대한 모으고 아끼지 않으면 올해를 넘기기 힘들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마저 돌고 있다.
2호차 선탑자는 무전기로 일단 급한 불은 껐으니 시내에 진입해서 최대한 챙길 것만 챙겨 떠나자는 말을 해 왔다. 그게 쉬웠으면 애초에 이 고생도 하지 않았겠지만, 박지찬은 그러려니 했다.
두돈반을 두 대나 잃었고 각성자도 열 명이나 죽었다. 이젠 정말 될 대로 돼라 느낌이었다.
그때.
까앙!
“억! 씨발!”
시내에 진입하기 직전, 공단의 끄트머리에서 아침 햇살과 함께 등장한 좀비 무리가 차량으로 덤벼들었다.
평범하게 이족 보행을 하는 좀비와 다르게 놈들은 짐승처럼 사족 보행을 하면서, 어깨에 뚫린 커다란 구멍으로 녹색 가시 같은 것을 쏘아 냈다.
자세히 보면 그건 단순한 가시가 아니라 좀비의 녹색 체액을 급격하게 얼린 얼음송곳이었다. 좀비가 어떻게 원거리 공격을 하나 싶었는데, 저런 특이한 신체 기관으로 체액을 얼려서 쏘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야! 더 밟아! 저 새끼들 작정했다!!”
1차 매복과 추격도 모자라서 2차 매복까지? 심지어 이 루트는 자신들이 만일에 대비해 확인만 해 두고 실제로는 이번에 처음 사용하는 B루트 아니었던가? 그런데 매복을 당했다!
‘지난주 내내 습격을 받지 않았던 건 이 루트가 안전해서 그런 게 아니었어! 우리가 안심할 때까지 놈들이 방치하고 있었던 거야!!’
박지찬은 긴 혓바닥을 개처럼 내민 채 헉헉대며 달려오는 사족 보행 좀비들에게 재차 총구를 겨눴다.
그때 2호차 선탑자가 시내에서 가장 잘 보이는 ‘병원’을 발견했다며, 곧장 그리로 대피하겠다고 외쳤다. 시내에서 가장 잘 보이는 병원이 있었던가?
“좆같은 새끼들! 제발 이것만 먹고 떨어져라!!”
타타타! 타타타타타!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일단 방아쇠부터 당겼다. 몇몇 좀비들이 달려오다 말고 지면을 나뒹굴었지만, 되레 총성에 어그로가 끌린 시내의 좀비들까지 놈들과 합류했다. 사방 천지가 온통 인간의 생살을 노리는 좀비들 뿐이었다.
때로는 좀비를 치고, 총으로 처리하고, 목숨을 건 혈투를 벌이면서 세 대의 두돈반은 아슬아슬하게 ‘처음 보는’ 대형 병원 부지로 들어올 수 있었다. 이대로 건물에 숨어들고 농성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주변을 돌아본 순간, 그는 병원 부지로 밀려드는 좀비를 떡하니 막아서는 한 남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차량이 급하게 지나친 탓에 뒤늦게 발견한 생존자였는데, 무의식적으로 여긴 위험하니 피하라고 외치려 했다.
갑자기 그의 전방에 설치되는 기형적인 무기들이 일제 사격을 가한 탓에 말문이 턱 막혔지만.
신기한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빗발치는 탄환 세례에 와르르 무너진 좀비들의 시체를 넘어 새로운 좀비 떼가 병원 부지에 침투하려는 찰나, 그들의 발밑에서 특이한 폭발이 일어났다.
수류탄보다는 폭발이 크지 않고 폭음도 작았지만, 파편 대신 무수한 주사기들이 좀비들의 몸에 우수수 박혔다.
손가락보다 작은 주사기는 순식간에 좀비들을 고슴도치 신세로 만들더니, 그대로 마취제를 맞은 짐승처럼 바닥을 뒹굴게 했다. 그렇게 무력화된 놈들에게는 또 한번 총탄이 퍼부어졌다.
“미, 미친…….”
자신도 각성자다. 각성자니까 자신이 일반인에 비해 얼마나 대단한지 잘 알고 있다.
군인이라는 직업 덕분에 총 한 자루만 쥐여 주면 달리는 차량 위에서도 능숙하게 적을 요격할 수 있었으며, 전체적인 신체 능력도 크게 상승했다. 또 몇 가지 자잘한 보조 스킬들은 그가 오랫동안 먹고 자지 않아도 버틸 수 있게 해 주는 원동력이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이 가진 스킬 따위는 껌처럼 씹어 버리는 능력의 소유자가 등장했다.
일당백. 어쩌면 일당천일지도 모르는 진짜배기 각성자였다.
거의 수백에 달하던 좀비들을 깔끔하게 시체의 산으로 만들어 버린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는 천천히 뒤돌아섰다.
좀비 사태만 일어나지 않았다면 곧 전역했을 말년 병장도 흠칫하게 만드는 서늘한 눈빛이 꽂혔다.
아니, 서늘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무미건조하고, 생기가 없다.
더는 전투가 일어나지 않고 위험한 곳으로 끌려갈 일도 없는 안전한 후방에서 근무한 그는 저런 눈을 볼 기회가 드물었다.
하지만 그 몇 안 되는 기억 속에 존재하는 저런 눈의 소유자들에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틀림없어, 북진군 소속이다!’
2차 남북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곧장 북한으로 밀고 올라가, 거의 5년 가까이 악과 광기밖에 남지 않은 북한군들과 사투를 벌였다던 도살자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상대가 적이라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찢어발길 수 있는 맹수 같은 남자가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들을 상대로.
당황한 박지찬이 무어라 변명하기도 전에 2호 차량에서 선탑자가 내렸다. 그는 대위 계급의 각성자였다.
“이야, 이런 곳에 아직 징집이 안 된 인재가 있었네?”
선탑자의 신랄한 첫마디에 박지찬은 눈을 질끈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