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정착기 (19)
“상태창.”
[생존자 : 이승권]
[직업 : 퇴역병]
[직업 숙련 레벨 : 20 > 21]
[칭호 : 오버킬, 피바람, 응급 구조 요원]
[생존 기간 : 21일 차]
[숙련 포인트 : 6 > 7]
병원을 확보하고, 김진경 일행을 구출하고, 한동안 병원에서 머무르며 약 2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회복되는 과정을 지켜봤다.
병원은 현재 내가 보유하고 있는 거점 중에서도 가장 높은 중요도를 자랑했기 때문에, 이곳의 거점 일원들이 충분히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는 내가 주변 안전을 확보해야 했다.
‘이 지랄맞은 사태가 일어난 지도 벌써 3주 차에 접어드는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소중한 것을 잃고 고통에 몸부림쳤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절망 속에서 부질없는 희망을 꿈꾸며 눈을 감았을까?
딱히 그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저 운이 없다고 생각할 뿐.
그래, 나는 운이 좋아서 시스템으로부터 좋은 능력을 부여받았고, 또 운이 좋아서 형편 좋은 상황과 자주 마주쳤다. 이런 시국임에도 운이 좋아서 이득 본 게 많다.
아무렴 어떠랴. 내 운이 좋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 운이 나쁠 수도 있지. 세상일이라는 게 어디 자기가 원하는 대로만 흘러가던가? 절대 그렇지 않다.
내가 정말로 행운의 사나이였다면 우리 가족이 그렇게 될 일도, 내가 전쟁을 겪을 일도, 지금 여기서 이 짓거리를 하고 있지도 않았겠지.
정말로 운이 좋았다면 그 모든 절망과 고통을 맛보기도 전에 나 역시 가족들과 함께 죽어야 했을 테니까. 고통도, 후회도, 미련도 없는 깔끔한 죽음.
“새벽이라 그런가, 감수성 미쳐 돌아가네.”
만약 내가 SNS에 미친 놈이었다면 지금쯤 멋들어진 풍경 사진 하나 올려놓고 그럴듯한 개소리를 끄적여 놨을 것이다.
어느덧 늦가을을 넘어서 본격적인 겨울이 이 적막감으로 가득한 세상을 인정사정없이 할퀴기 시작했다. 마치 예의 없는 고양이가 곤히 잠든 주인을 할퀴는 것처럼.
낮에는 그래도 괜찮지만 밤과 새벽이 되면 슬슬 입에서 새하얀 김이 새어 나올 만큼 기온이 많이 떨어졌다.
아직 어둠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저 바깥의 좀비들에겐 반가운 낭보였고, 꽁꽁 숨어 있는 인간들에겐 불운하게도 낭패였다.
나는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하는 태양의 도움을 받아 망원경으로 주변 지역을 훑었다.
병원을 거점화하는 것과 동시에 내 거점 지정 스킬도 업그레이드되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부지가 굉장히 넓어졌는데, 이는 기존의 주변 건물과 도로의 구조를 바꿀 만큼 대대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덕분에 어디서부터 어디를 출입로와 통제 구역으로 설정해야 하는지, 또 외세의 침입으로부터 방비를 굳건히 하기 위해 어느 쪽의 방비를 두텁게 해야 하는지 살펴야 했다.
‘병원 부지 북쪽은 상대적으로 덜 위험하군. 건물 구조가 빽빽하고 도로의 규모도 크지 않아. 저곳을 출입로로 지정한다면 지역 통제와 거점의 안전 확보도 쉬울 거야.’
거점의 안전 확보는 둘째 치고, 어째서 고작 거점 하나로 지역을 통제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하겠다.
요새화한 거점 하나가 주변에 미치는 영향이 굉장히 큰 데다 그 범위도 어마어마하게 넓기 때문이라고.
방공 기지 하나만 자리 잡고 있어도 그 지역 일대에서 헬기나 수송기가 활동하기 힘들어진다. 그래서 전쟁이 벌어지면 가장 먼저 방공망을 걷어 내기 위해 대대적인 폭격이나 지상군 투입으로 처리하는 것이다.
이 거점도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방공 기지와 유사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좀비들의 대규모 진격이나 침투를 사전에 파악할 수 있으며, 여차하면 이 거점으로 놈들을 막아 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리적 이점을 잘 살리고 적절한 인력 분배만 한다면 이 거점으로 주변 지역을 통제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기엔 사람과 무기가 모두 부족하지 않냐고? 부족한 건 시간을 들이고 자원을 꾸준히 확보하면 충분히 메꿀 수 있다. 정말 중요한 건 그걸 실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의지다.
내가 거점 일원들에게 원하는 건 딱 하나. 바로 협력해서 살고자 하는 의지였다.
타인과 협력해서 생존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조직의 기강을 해이하게 만들거나 사고를 칠 가능성은 적으니, 바꿔 말하면 그쪽 의사만 확실하게 체크하면 되는 것이다.
다행히 내가 구조해서 거점 일원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모두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내 뜻에 거부하는 사람들을 쫓아내겠다고 말한 적도 없는데 그런 태도를 보인다는 건, 그들 입장에서도 위험한 바깥으로 내쫓기는 것보다 내게 붙어 있는 편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한다는 증거였다.
망원경을 거두고 아래로 내려가니 꽤 많은 사람들이 이른 아침부터 1층 대합실에 모여 있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건장한 성인 남성이었으며, 딱히 병원에서 할 일이 없는 일반인들이었다.
“어제 공지했던 것을 잊지 않고 제때 모여 주셨군요. 다들 아침 식사는 입맛에 맞으셨는지 모르겠네요.”
“따뜻하고 배부르게만 먹을 수 있으면 됐지! 난 세상이 이렇게 되기 전에도 아침은 빵 하나로 때우던 사람이야.”
“택시나 택배 하는 사람들 중 늦잠 자는 사람은 없수다. 늦게 움직일수록 손해 보는 건 본인이니까.”
“다행히 여기 식당에선 반찬에 국까지 제대로 나오더만. 밥이 이렇게 잘 나오는데 쌀 한 톨도 남기면 안 되지~.”
이른 아침부터 노동하는 것이 익숙한 30대 이상 중년 남성들은 대부분 허허 웃으면서 밝은 분위기를 형성했다.
막말로 세상이 이렇게 개 막장으로 변해 버렸는데 공짜로 먹여 주고 재워 주고 보호까지 해 주는 곳이 얼마나 흔하겠나? 아마 규모가 큰 군사 기지도 이렇게는 못 할 거다.
애초에 이들 대부분이 병원에 오랫동안 갇혀 지낸 탓에 탈수와 영양 결핍 상태를 겪고 있었을 뿐, 심각한 질병이나 부상을 달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10일 가까이 푹 쉬게 하고 꼼꼼하게 치료까지 해 주었으니 슬슬 노동력으로 활용해도 문제없다고 판단했다.
이 병원에 새롭게 자리 잡은 의료진들도 상태가 심각한 극소수의 환자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건강 상태가 크게 호전되었으니 잘 먹고 열심히 움직이는 게 더 좋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오늘 여러분이 이 자리에 모인 이유는 간단해요. 이 병원을 요새화하기 위해 추가적인 보수와 증축 공사를 담당할 공사 인력, 그리고 교대 근무 방식으로 병원을 지킬 경비 병력, 마지막으로 주변 지역을 탐사하며 정보와 물자를 수급해 올 탐색 인원을 선별하기 위함이에요.”
대한민국에서 건장한 성인 남성 10명 중 9명은 군필이며, 또 그들 중 절반 이상은 삽질에 매우 능통하다. 징병제 국가에서 설움의 상징이었던 군 전역증이 지금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자격증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그때 한 중년 남성이 손을 들었다. 곰 같은 인상 때문에 공사 현장의 베테랑 작업 인부처럼 보이는 사내였다.
“혹시 특별한 선발 기준이 있는감?
“선발 기준보다는 가산점 방식이라고 생각하면 편해요. 남들보다 삽질, 총질, 수색을 더 잘하는 사람이 당연히 그 자리를 꿰차는 거죠. 물론 능력이 출중한 사람은 남들보다 더 대우해 드리겠다고 약속드리죠.”
“예를 들면?”
“예를 들어 자기가 용접 경력이 15년쯤 되는 베테랑이다, 그러면 용접반 반장 자리 드시는 거죠. 일반 인부보다 더 많은 생필품과 더 다양한 기호품 보급 선택지가 주어질 거예요. 쉽게 말해서 남들이 깡소주 깔 때 혼자 양주 깔 수 있다는 거죠.”
“흐흐…… 괜찮은데? 돈이 휴지 조각이 됐으니 더 좋은 생필품에 더 좋은 밥 먹는 게 최고라는 뜻이잖아.”
“그렇죠. 능력과 의지만 있다면 성별도, 국적도, 나이도 안 따져요. 하는 만큼, 할 수 있는 만큼 페이를 높게 쳐 드릴 생각이에요.”
그 말에 이렇다 할 만한 기술적 지식이나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난처한 기색을 보이는 한편, 오랜 사회 생활로 개개인의 기술이나 노하우가 축적된 사람들은 기세등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모두를 평등하게 대하고 보수도 공평하게 나눠 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는데, 내 생각은 다르다. 인간은 원래 끊임없이 자신과 타인을 비교하고 경쟁하는 것으로 성장하는 동물이다.
왜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한국에 유튜버 유망주들이 그렇게 많았을 것 같은가? 잘나가는 유튜버들이 연예인 뺨칠 만큼 유명해지고 억 소리 나게 돈 버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비교, 경쟁, 그리고 쟁취. 이 세 가지 과정을 거쳐서 인간은 깊은 성취감을 맛보고 한층 더 성장한다.
지금은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어 일반 인부로 작업에 투입될 사람들도 일을 하다 보면 점점 더 익숙해지고 개인의 노하우가 생긴다. 그럼 나이 먹고 은퇴하는 뒷방 늙은이들의 자리를 자신이 차지하는 거다.
이 간단한 경쟁주의가 도입되는 것만으로도 평등, 공평 같은 개소리는 구석에 처박아 둘 수 있다.
한정된 자원과 인력을 효율적으로 운용해야 하는 조직을 평등하고 공평하게 운용하면 망하기 딱 좋으니까.
그렇게 나는 미리 경험과 기술이 출중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선별했다. 물론 최소한의 형평성을 위해서 실기 테스트를 거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외에도 자잘하게 체력과 담력을 검증하거나, 전문적인 지식을 남들에게 선보이는 시간도 가졌다. 그 과정에서 재주나 지식이 겹치는 사람들이 있으면 서로 교차 검증을 하기도 했다.
어떻게든 자신의 능력을 검증하고 또 증명하기 위해 사람들은 정말 최선을 다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의식주가 보장된 병원 내에서 특별한 지위와 더 많은 물자를 보급받는 건…… 끝내주는 일이었으니까.
난 저들과 달라, 난 저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어, 난 특별해! 같은 생각을 가지게 해 주는 것이다.
물론 핵심 권력은 독재자나 다름없는 내가 전부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모두가 생각하는 불상사가 생길 일도 없다.
내가 이들을 흥분하게 만들었다! 나는 감정을 지배할 수 있다!
‘다 뒤졌다. 이제 주말마다 원내 마이크로 훅훅, 바람 불어 주고 일광 건조랑 병동 청소랑 배수로 파기 시킨다. 그리고 마음에 안 들면 편의점 이용 금지시켜야지.’
나는 지킬 것만 지키면 터치 안 하는 대쪽 같은 사람이 될 것이다. 내 장래 희망은 어릴 때부터 당직 사관이었거든.
아무튼 재주, 경험, 그리고 지식에 따라 사람을 나누고 거기서 다시 실기 테스트와 교차 검증을 거치느라 오전 시간 대부분을 허비했다.
공사 인력으로 차출된 사람들은 전체 인원 175명 중에 110명, 경비 병력은 40명, 15명은 유사시 어느 조든 투입할 수 있는 예비 인력(잡부)로 지정했다.
최후의 10명은 내가 심사숙고해서 뽑은 사람들인데, 당연하게도 가장 위험성이 높고 그만큼 보수도 많이 받는 탐색 인원이었다.
다만 이것만큼은 생존과 직결된 문제라 자원하는 사람만 받기로 했다. 설령 자원하는 사람이 없어도 내가 틈틈이 하면 그만이었으니까.
나는 어디까지나 내가 부재중일 때도 거점 주변 정보와 물자를 꾸준히 구해다 줄 실력파 인재들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렇게 자원해서 탐색을 나서겠다고 한 사람들은 딱 봐도 한가닥 하는, 혹은 담이 세고 깡다구가 있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개인적으로 훈련시켜서 경험 좀 쌓게 해 주면 그럭저럭 쓸 만한 인재들이 될 것 같다.
슬슬 인원 선별도 끝났으니 조금 이르지만 점심을 먹고 오후부터 작업에 들어가기로 한 그때였다.
저 멀리서 요란한 소음이 울려 퍼지더니, 곧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두돈반 트럭 서너 대가 병원 입구로 돌진해 왔다. 트럭 뒤 칸에 탑승한 군복 차림의 사내 몇 명이 양팔을 휘휘 내저으며 무어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일단 모두 건물 안으로 들어가세요!”
아직 외세의 침략에 대해 제대로 대비가 되지 않은 사람들을 먼저 대피시키고, 나는 주사기 덫과 머신 피스톨 터렛을 주변에 재배치했다.
정확한 피아를 식별할 수 없는 상황이라 저들이 병원 부지로 들어오는 순간 공격해야 할지, 아니면 일단 기다려야 할지 살짝 고민했다.
다행스럽게도, 그리고 참으로 좆같게도 저들이 트럭 뒤에 좀비 떼를 줄줄이 달고 있는 걸 포착한 나는 거점 방위 무기의 ‘외부인 요격’ 설정을 OFF로 바꿨다.
내 신성한 거점에 좀비 떼를 끌고 들어온 책임은 나중에 천천히 물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