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 (65)화 (66/227)

65화 정착기 (15)

“거점창.”

-경희대 중앙 병원

[전체 거점 수 : 4/8(+4)]

[전체 거점 방위자 수 : 1/20(+10]

[전체 거점 일원 수 : 241/∞]

[거점 방위 무기 : 멸균 시스템 A 5개, 멸균 시스템 B 5개, 머신 피스톨 터렛 20개, 주사기덫 100개]

[모든 거점 방위 무기는 배치 후 최대 1시간 동안 배치 구조를 변경할 수 없습니다.]

[적성체 자동 요격 기능 : ON]

[외부인 자동 요격 기능 : OFF]

[퇴역병 및 거점 방위자와 거점 일원은 자동 요격 대상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거점 지정 스킬이 구닥다리 같은 D등급에서 나름 중간 격이라 할 수 있는 C등급까지 진화한 순간, 내가 소유한 거점에 엄청난 변화가 생겼다.

우선 내가 지정할 수 있는 최대 거점 수와 거점 방위자 수가 각각 2배씩 증가했으며, 경희대 중앙 병원의 방위 무기 수량도 대폭 늘어났다. 건물의 규모가 워낙 커졌기 때문일까?

‘이 정도라면 모든 출입구는 물론이고 사각 지대 하나 없이 거점 방위 무기를 설치할 수 있겠어. 여기에 CCTV까지 달아 둔다면 물 샐 틈 하나 없는 천혜의 요새가 되겠지.’

나는 기존의 쓸데없이 부지만 차지하고 있던 병원의 넓은 주차장에 야전 의료 막사와 환자용 검색대가 설치된 것을 보고 크게 만족했다.

소독실, 야전 의료 막사, 환자용 검색대가 설치되어 있다면 외부인들을 무차별적으로 받아들였다가 낭패를 볼 일이 없어지게 된다. 몇몇 의료진과 경비를 붙여 두는 것만으로도 큰 소동 없이 외부인을 검사, 격리할 수 있으니까.

몇 번이고 말하지만 이런 시대에서 인간이 걱정해야 할 것은 비단 좀비만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 옳을지 알 수 없는 계절성 유행병이나 수인성 전염병(Water-Borne Infection)을 특히 조심해야 한다.

평생 물이라곤 한국의 깨끗한 수돗물이나 생수만 마셔 봤을 한국인들이 이 난리 통에 대체 어디서 물을 구할 수 있겠는가? 상황이 급박해지면 더러운 물도 마시게 될 텐데, 한국인의 연약한 소화 기관은 그걸 버틸 힘이 없다.

더러운 물을 마시고도 버티지 못하면 꼼짝없이 죽어야 하는 후진국 사람도 아니고, 아마 대다수는 설사와 탈수에 시달리며 골골댈 것이다.

때문에 지금 존재하는 생존자 그룹은 높은 확률로 식수원을 미리 확보했거나, 나 같은 각성자가 상점창에서 정기적으로 식수를 구입해 가며 버티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 외에는? 목숨 걸고 좀비들을 피해서 식수를 찾아다니거나 더러운 강물을 마시겠지. 공교롭게도 김해 근처에는 크고 작은 강이 흐르고 있으니까.

‘내 능력으로 병원이 리뉴얼되면서 최신식 의료 설비와 대량의 전문 의약품을 확보했다. 생활 인프라도 무한정 공급되고 있으니 식량만 떨어지지 않는다면 천 명 단위의 사람들도 가볍게 수용할 수 있겠어.’

다만 다른 거점에 비해 병원이 가지고 있는 이점은 너무나도 거대했다. 따라서 선량한 생존자 그룹으로 위장한 약탈자 무리나, 수많은 사람들에게 어그로가 끌려 몰려오는 좀비 떼의 습격에 대비해야 한다.

병원의 규모가 확 커지면서 부지 전체를 감싸는 높은 담장과 가시철조망이 생겼지만, 그것만으로는 침입자를 막기 버겁다. 막말로 좀비 놈들이 산처럼 쌓여서 한 번에 돌파를 시도한다면 고작 담장이나 가시철조망 따위로는 막지 못할 테니까.

‘추가적인 조치가 필요해.’

우선 부지 전체를 아우르는 담장 전면부에 최소 2m 이상의 호를 파서 간접적으로 담장의 크기를 높이는 방법이 있다. 이건 인력을 직접 동원해야 하는 일이라 품이 많이 들어가겠지만, 이 안전한 거점에서 머무를 수 있게 해 준다면 어느 누가 노동을 마다하지 않을까? 만약 합당한 노동을 거부한다면 내 쪽에서도 그들을 수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 그만이다.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이런 시국에 그런 태도로 나올 수 있냐고 비난받을 수는 있겠지만, 내가 쓸모도 없고 양심도 없는 식충이들을 위해 무한정 베풀어야 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이런 시국일수록 감성적으로 움직이고 감정에 호소하면 안 된다. 누구보다도 냉철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상점창 원자재 코너에서 최소 두께 1cm에 해당하는 대형 철판을 사서 담장과 입구에 용접한다. 추가로 지지대를 설치해 준다면 어지간한 충격이나 하중에도 버텨 줄 거야. 총탄이나 유탄도 무리 없이 막아 주겠지.’

같은 인간과 총질을 하게 되는 최악의 상황까지 치달을 거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으나, 세상살이라는 게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특히나 한국 성인 남성 대다수가 군필이기 때문에 총을 손에 넣기만 하면 최소 1인분을 하는 군인으로 돌변한다.

그런데 충성할 정부도, 지켜야 할 국가와 국민도 없는 군인에게 총만 남아 있다면 어떻게 될까? 매우 높은 확률로 테러리스트나 강도로 돌변할 것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이런 시국이니까.

‘군필자로 구성된 초병들이 근무할 수 있는 경계 근무지도 만들고, 적들이 대규모 공세를 펼쳐 올 것에 대비해서 병원 내부에 2차 방어선도 만들어 둬야겠지.’

일단 원자재를 구입해서 거점 창고에 적당히 쌓아 두고, 동원할 수 있는 인력이 확보되는 대로 보수 공사에 들어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지금 병원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육체적 노동과는 거리가 먼 의료진과 환자들 뿐이었으니까. 일부 피난민들도 오랫동안 굶주린 탓에 기력이 쇠해진 상태였고.

병원 부지를 적당히 돌아다니며 대략적인 계획의 틀을 구상하고 있던 그때, 문득 주차장이 사라졌다면 대체 어디에 차를 대야 하는 건지 의아해졌다.

아니, 물론 세상이 이 지경이 된 마당에 차량을 쉽게 운용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명색이 병원인데 구급차 정도는 있을 것 아닌가? 병원이 리뉴얼되면서 그것도 전부 복구되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병원 주위를 열심히 돌아보니, 남쪽의 정문에서 수십 미터 떨어진 동쪽에 지하 주차장 입구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전자동으로 여닫을 수 있는 거대한 철문을 개방하자,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세련되고 깔끔한 지하 주차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심지어 그냥 주차장도 아니고 무려 환자를 병원 내부까지 긴급 이송할 수 있는 게이트와 화물용 엘리베이터, 그리고 전기차 배터리를 충전할 수 있는 전기 충전소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역시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김해에서 가장 커다란 병원을 확보한 보람이 있었어.’

안으로 걸어 들어가자 동작 감지형 전등이 텅! 텅! 텅! 소리를 내며 순차적으로 켜졌다. 밝은 불빛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백색의 대형 구급차였다.

“와…… 시발.”

정정하겠다. 그냥 구급차가 아니다.

“이거 돈이 썩어 넘치는 미국에서나 운용하던 군용 장갑 구급차 아닌가?”

특정 국가나 소속 부대를 상징하는 위장 대신 온통 새하얀 페인트칠이 된 장갑 구급차의 전면부에는 떡하니 적십자 마크가 박혀 있었다.

크기는 또 어찌나 큰지 한국군에게 익숙한 K808 보병 전투형 장갑차보다 조금 더 커 보였다. 아마 별도의 무기 시스템이나 탄약을 탑재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만큼 장갑과 내부 공간을 크게 향상시킨 것 같다.

“8륜 구동에 전후좌우를 모두 살필 수 있는 방탄 유리창, 생화학 테러에 대비한 공기 청정 시스템까지? 갖출 건 다 갖췄네.”

후면 수송 칸 입구를 열어 보니 응급 환자를 실을 수 있는 들것과 응급 처치에 필요한 간이형 의료 설비, 구급상자, 방호복 등이 제대로 구비되어 있었다. 좌석도 널널하게 10개나 있는 걸 보니 어떻게든 사람을 구겨 넣으면 제법 많이 태울 수 있을 것 같다.

단점이라면 오로지 환자 이송이 목적인 구급 차량이라서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방귀 무기가 단 하나도 없다는 점이었다.

하다 못해 구식 장갑차에도 기관총이나 유탄 발사기 정도는 탑재해 두는 편인데, 이건 문자 그대로 통짜 철 덩어리였다.

‘아니지, 오히려 무기가 없으니까 외부 활동 시 좀비들의 어그로를 덜 끌게 될 거야.’

괜히 거리 한복판에서 기관총이나 유탄 발사기 같은 걸 쾅쾅 쏴 봐라, 여기저기서 맛집 소식을 전해 들은 좀비들이 헐레벌떡 달려올 게 뻔하다.

좀비 수백, 수천 마리에게 포위되면 제아무리 튼튼하고 강력한 엔진을 탑재한 장갑차라도 퍼지기 마련. 좀비 사태 당일, 기갑 차량을 동원한 군대가 왜 좀비에게 털렸는지 생각해 보면 이해가 편할 것이다.

‘전기로만 움직이는 대용량 배터리 팩을 장착한 장갑 구급차라서 내가 지정한 거점과 거점 사이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 안전하게 사람을 이송할 수 있으니 외부 활동에도 큰 도움이 될 거야.’

필요하다면 다른 거점에, 혹은 아직 나와 합류하지 않은 생존자 그룹에게 생존 물자와 의약품을 전달해 줄 수 있음은 물론이고, 전문 인력을 파견해서 도와주는 것도 가능해진다.

‘쓰임새가 어마어마하군. 이 장갑 구급차 한 대가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어. 내 거점이 존재하는 시가지에서만 활동할 수 있다는 게 흠이지만.’

그래도 이런 장갑 구급차가 무려 한 대도 아니고 두 대나 있다. 대형 병원에서 일반적으로 운용하는 구급차가 서너 대인 것을 감안하면 조금 적다고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대신 안전성이 확실하게 보장된 놈이니 불평도 사치다.

한때 미군이 전장에서 장갑 구급차를 운용하는 걸 보고 어찌나 부러웠던지. 심지어 미군은 장갑 구급차뿐만이 아니라 구급 헬기까지 보내서 아군을 후방으로 이송시키기도 했다.

“이젠 쭉 함께야……!”

벌써 흰둥이 1호, 흰둥이 2호라는 애칭까지 붙여 줬다.

“잠깐,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김진경 경장과 약속했다. 병원을 확보하는 대로 그쪽에 갇혀 있는 사람들도 구해 주기로. 그들을 구해 주고 치료까지 해 주면 큰 빚을 지워서 두고두고 부려 먹을 수 있겠지. 특히 세상이 이렇게 잔혹하게 변해도 경찰의 의무를 잊지 않았던 김진경 경장은 꼭 내 거점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혼란스러운 시국일수록 사람들을 통제하고 최소한의 규칙과 질서를 확립해 줄 사람이 필요한데, 나는 양자 역학적으로 모든 거점에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적절한 대리자를 세워야 한다.

병원처럼 사람이 많이 몰리게 될 곳은 필연적으로 힘과 강단, 그리고 준법 의식을 갖춘 사람이 관리해야 한다.

‘완전히 박살 나 버린 사회에도 아직 제대로 시스템이 돌아가고 있다는 걸 증명하는 게 관건이다.’

그래야 오갈 곳 없는 생존자들을 더욱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거점을 안정화시키면서 조금씩 사회를 재건할 것 아닌가.

무리해서 약탈자 무리를 찾아내고 철저히 파괴하는 것보다, 자연스럽게 생존자 거점의 규모를 확충하고 사회를 재건하는 게 훨씬 더 효과적이다.

100년 전부터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로 무장한 서방 세력이 결국 빨갱이들을 해체하고 깨부순 전략과 유사하다.

장갑 구급차에 올라탄 나는 병원 내에서 의료진들이 사용하는 무전기로 ‘잠시 드라이브 좀 다녀오겠다.’는 말을 전한 뒤, 유유히 병원을 빠져나왔다.

재미있게도 장갑 구급차는 틀림없는 의료 목적 탈것이지만, 분류상 ‘군용 장비’에 해당한다. 무기는 아니지만 군용이라는 태그에 분류되므로 나의 퇴역병 직업 특성상 숙련도에 50% 보정 효과를 받는다.

너무 속 편한 해석 아니냐고? 시스템이 그렇게 인정했는데 나더러 어쩌란 말인가. 실제로 운전도 꽤 잘되고 있고.

“나 같은 땅개들이 허구한 날 야전에서 개고생할 때 운전병 이 씹새들은 이렇게 개꿀을 빨았단 말이지……. 화나네?”

생각해 보니 그놈들이 야전에서 물자랑 지원 병력만 툭 던져 두고 바람처럼 사라질 때 굉장히 꼴 받았던 기억이 난다.

나는 이 주체할 수 없는 분노를 해소하기 위해 앞길을 가로막는 사소한 장애물을 모두 치고 나가며 신나게 인도로 내달렸다.

두꺼운 장갑과 육중한 덩치, 괴물 같은 엔진을 자랑하는 이 최신식 장갑 구급차는 15톤을 가볍게 넘는 무게를 자랑했다.

일반적으로 전투 중량이 20톤 가까이 되는 보병 전투 장갑차에 비하면 중량이 조금 덜 나가는 편이지만, 무기 시스템이 하나도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반대로 굉장한 중량이었다.

그렇게 다시 김진경 경장 일행이 갇혀 있는 거리로 돌아왔을 때, 나는 저 멀리서 길빵충인 양 걸어다니면서 녹색 연기를 내뿜는 기이한 존재를 발견했다.

“요동친다 하트.”

불타 버릴 만큼 히트.

네놈에게 박는다 장갑 구급차!

나는 이미 반쯤 눈이 돌아가서 액셀을 밟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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