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 (64)화 (65/227)

64화 정착기 (14)

D등급에 머물러 있던 거점 지정 스킬을 마침내 C등급으로 올려놓은 순간, 나는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것이…… 사랑?

“내가 믿고 투자할 가치가 있었다는 걸 어서 보여 줘!”

그럴싸한 포즈를 취하기가 무섭게 반투명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경희대 중앙 병원이 마치 거대한 손에 짓눌리기라도 한 것처럼 통째로 일그러졌다.

그것을 단순히 붕괴 현상이라고 불러야 할지, 아니면 공간의 뒤틀림이라는 그럴싸한 수식어를 갖다 붙여야 할지는 알 수 없었으나, 중요한 건 병원을 구성하고 있던 모든 요소가 잠깐이지만 ‘0’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폭발적인 재설계 과정.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갑자기 땅이 치솟고 벽이 세워졌으며, 천장이 머리 위를 덮었다.

숙련된 공사 인부들이 초고속으로 작업을 진행하는 것처럼 티끌 하나 없는 타일이 촤르르르륵 깔리고, 병원에 어울리는 산뜻한 인테리어와 장식품 등이 저절로 배치되었다.

시시각각 건물이 재설계되어 가는 동안 나는 무언가에 단단히 붙들려 허공에 고정된 상태로 그 광경을 지켜봐야 했다. 마치 나 혼자 시간 여행을 하는 기분이었다.

‘병원 내부 풍경이 확 달라졌다.’

병원 부지와 건물의 규모가 엄청나게 확장되어 가는 것도 눈에 띄기는 했지만, 기존의 고리타분하고 어딘가 살짝 부족해 보이는 내부 풍경이 근미래적인 느낌을 주었다.

사람 대신 의료용 로봇이 돌아다니며 환자들에게 캡슐 모양의 만병통치약을 나눠 줄 것 같은 병원이라고 하면 이해가 편할까?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진짜’ 의료용 로봇이 병원 복도에 떡하니 배치되었다.

서울에서 종종 볼 수 있었던 서빙용, 길 안내용 로봇과 비슷하게 생긴 모델이었는데, 환자가 의사와 만나기 전에 가볍게 문진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이 탑재된 것 같았다.

1층이 먼저 완성되자 허공에 고정되어 있던 내 몸이 자연스럽게 지면에 착지했다. 동시에 의료용 로봇도 자동 청소기처럼 빨빨거리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을 즈음, 저 밑에서 다다다다 하고 다수의 사람들이 달려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이 병원에 숨어 있던 사람들과 채성아였다.

생각해 보니 지하가 가장 먼저 재설계되었을 텐데, 저들 모두 건물 구조가 휙휙 바뀌는 엄청난 광경을 보고 온 참이겠지. 경악에 찬 얼굴로 말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도 이해가 된다.

“대, 대체 이게 무슨…….”

때 묻은 의사 가운을 입고 있는 의사 중 한 명이 안경을 고쳐 쓰며 1층 로비를 둘러보았다.

본래 이 병원은 경희대 가야 의료원으로 새롭게 개원할 목적으로 이래저래 손을 보긴 했지만, 그래도 부족한 점이 많았다. 오래된 건물 연식, 부족한 부지, 근본부터 뜯어고치지 않으면 안 되는 건물 구조가 대표적인 문제였다.

그래서 1천 개 이상의 병상을 확보하려 했던 장대한 계획은 물거품으로 끝나고, 대충 김해의 어중간한 종합 병원 수준으로 남을 거라 생각했건만, 그 볼품없던 병원이 한순간에 서울의 대학 병원 못지않은 규모로 탈바꿈해 버렸다.

“혹시 꿈인가……?”

“꿈이 아닙니다! 진짜 바뀐 거라고요!”

“하지만 어떻게 현실에서 이런 마법 같은 일이…….”

“현실에서 좀비도 나왔는데 마법이라고 없으리란 법 있습니까?!”

이 병원의 사정을 잘 아는 의료진들은 어안이 벙벙해진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거나, 이제 살았다는 사실에 신이 나서 열광했다.

그 많던 좀비들이 사라지고, 갑자기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나서 이 병원을 근본부터 싹 바꿔 버렸다. 거기에 끊긴 줄로만 알았던 전력이 다시 공급되고 있었으니 ‘생존’이라는 희망을 본 것이 틀림없었다.

“와, 저 의료 로봇은 삼성 대학 병원에서나 운용하던 걸로 아는데…….”

“여기 정수기랑 자판기도 있습니다! 깨끗한 물이 나와요!!”

“세상에…… 최신식 냉난방에 공기 청정 기능까지 있어. 이제 춥고 먼지 쌓인 곳에서 잠들지 않아도 돼!”

“호, 혹시 식당이나 편의점도 있나? 카페는?”

“있습니다! 다 있어요!”

지난날 동안 시달린 게 꽤 많았는지 저들은 어린이날에 놀이공원에 간 아이들처럼 흥분해서 날뛰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제야 겨우 빛을 본 사람들에게 초장부터 빡빡하게 굴다간 자칫 비호감을 살 우려가 있었기에, 나는 우선 저들의 흥분이 가라앉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생각이 있으면 좀비는 왜 사라졌는지, 병원은 왜 이렇게 바뀌었는지에 대해서 떠올리겠지. 채성아가 미리 나에 대해 귀띔을 해 두었다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승권 씨의 능력은 이런 식으로 작동하는군요.”

“이번에 얻은 대량의 경험치로 스킬을 업그레이드했거든요. 기존의 스킬 성능에 비해 효과가 대폭 강화된 덕분이에요.”

“아, 그러고 보니 저도 경험치를 얻어서 직업 숙련 레벨이 올랐다는 메시지를 받았는데…… 혹시 포인트를 얻으면 바로 스킬 업그레이드를 해야 할까요?”

“당장 급하게 선택할 필요는 없지만, 미래를 생각해서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투자하는 게 좋죠. 아니면 스테이터스에 투자해도 돼요.”

채성아는 그런대로 체력이 있는 편이었지만, 그래도 평균적인 성인 남성에 비하면 육체적인 능력이 부족했다.

스킬이 투자 대비 효율이 좋은 것은 사실이지만, 당장 그녀처럼 신체 능력이 부족하다면 스테이터스 투자를 고려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막말로 이런 시국이라면 자기 목숨은 자신이 직접 챙겨야 하지 않겠나. 동료인 내가 적극적으로 그녀를 지원하겠지만, 그렇다고 어린아이처럼 감싸고 돌면서 모든 위협으로부터 100% 보호해 줄 수는 없었다.

“음, 조금 더 고민해 볼게요. 이런 엄청난 광경을 보니 저도 스킬에 투자하고 싶어지긴 하는데…… 생존에 도움이 되는 건 스테이터스이기도 하니까요.”

“천천히 고민해 보시고 신중하게 결정하세요. 그런 걸로 제가 뭐라고 할 일은 없을 테니까요.”

나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믿지 않지만, 주변인들이 나를 믿게 하는 건 의외로 아주 간단하다. 바로 내가 먼저 저들에게 대가 없는 신뢰와 지지를 ‘보여 주는 척’ 하면 된다.

이쪽이 먼저 호의를 보내면 어지간히 계산적이거나 의심병이 도진 상대가 아니고서야 호의라는 선한 감정에 자극받을 수밖에 없다. 설령 냉철하고 계산적인 사람이라고 해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과정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결국 나를 믿게 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는 과정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결국 내가 똥볼을 차지 않는 한, 나를 믿게 될 수밖에 없다.

다만 이 방법은 기본적으로 남에게 퍼주는 것을 전제로 삼고, 또한 과할 정도로 돌려받을 걸 기대하지 않는 방식이다.

기브 앤 테이크를 고수하더라도 내 쪽이 당분간은 크게 손해를 봐야 그만큼 신뢰와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참 복잡하고 까다롭지 않은가? 사람 사는 세상이란 게 원래 이렇다.

나는 이윽고 자신의 상태창을 열심히 바라보며 고민하고 있는 듯한 채성아에게서 시선을 떼고, 어느덧 흥분을 가라앉힌 사람들이 모인 1층 로비를 훑어보았다.

의사, 간호사, 일반인, 환자,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채성아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인정하기 싫겠지만 저들도 결국 인정해야 한다는 걸 깨달은 것이리라.

내가 이 새로운 병원의 새로운 주인이라는 사실을.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본 사람들은 잠깐 동안 1차원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게 된다.’

어렵게 발견한 희망이 도로 사라지는 일이 없도록, 자신이 그 희망을 품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때까지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길 원한다.

즉, 자신의 생명줄을 쥔 상대가 무작정 자비롭기를 바라는 것이다.

일주일 넘게 쫄쫄 굶다가 간신히 먹을 것을 손에 넣었는데, 이제 와서 그걸 도로 빼앗긴다고 생각해 보라.

얼마나 억울하고 분하겠는가? 그러니까 오체투지를 해서라도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내게 간청해야 할 판국이다.

저들 눈에 비치는 나는 한 손에 칼을, 다른 한 손에는 자비를 들고 있는 무시무시한 사람처럼 보이겠지.

칼을 택한다면 손쉽게 공포로 사람을 지배할 수 있다. 다만 그렇게 할 경우 사람들의 진심 어린 신뢰와 지지를 얻을 수 없다. 배신과 불신의 싹이 자라나는 것은 덤이다.

반대로 자비를 택한다면 나는 저들의 구세주나 영웅이 될 수 있다. 자칫 호구처럼 보일 가능성이 있기는 하나, 어쨌든 그들의 뇌리에 ‘좋은 사람’이라는 이미지는 확실하게 박아 넣을 수 있다.

‘다른 거점이라면 몰라도 병원은 가장 중요한 거점이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인재들은 무작정 억압하기만 해봤자 나만 손해야.’

의사와 간호사.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구해 낼 수 있는 일반인 능력자들.

이 혼란스럽고 모든 것이 부족하며, 또 위험천만하기 그지없는 시대에 저들과 함께하지 못한다면 나 역시 밝은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

인류의 평균 수명이 어째서 과거에 비해 대폭 늘어난 것 같은가? 발전된 의학 기술과 그걸 다루는 전문가들이 많이 늘었기 때문이다.

“이곳에 고립되어 있었던 여러분들의 심정 이해합니다. 원하시는 만큼 먹고 마시고 푹 쉬세요. 다만 빈속에 갑자기 자극적인 걸 먹으면 탈이 날 수 있으니까 몸 상태 봐 가면서 드시고요. 아, 의사분들이 계시니까 검사받고 드시는 게 낫겠네요.”

“그…… 진짜 마음대로 먹고 마셔도 됩니까? 그쪽이 좀비들을 싹 다 처리해 주고 이 건물을 이렇게 바꾼 것 같은데.”

“제가 좀비들을 처리하고 이 병원을 새로운 거점으로 만든 건 맞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제부터 제가 이곳의 새로운 주인이죠. 하지만!”

나는 아직도 누군가의 부축을 받지 않으면 제대로 설 수도 없는 환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다고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병원에서 생명을 경시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병원에서 의료진을 홀대하고 환자들을 내쫓으면 그게 병원입니까? 그냥 영양 수액 파는 편의점이지.”

영양 수액 드립에 몇몇 의사들이 피식 웃었다. 어느 병원이든 꾸준히 찾아와서 영양 수액 좀 놔 달라는 이상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몇몇 의사들도 술 먹은 다음 날 비타민제를 맞곤 했으니 수액이라면 학을 뗄 것이다.

“여러분이 이곳에서 누군가의 생명을 구하는 사람으로 있는 한, 이곳이 바로 여러분의 집입니다. 그러면 환자들도 여러분들을 믿고 이곳에서 치료받을 수 있을 겁니다. 이 병원은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분 모두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말을 끝마치자 몇몇 이들이 감동적이라는 표정으로 박수를 쳤다. 곧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게 된 나는 겸연쩍게 웃으며 그들에게 병원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를 내주었다.

아직 내 눈으로 직접 둘러보지는 않았지만 이 병원은 정말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거점창으로 잠깐 확인해 봤을 뿐인데도 기존 건물 대비 2배 이상 규모가 확장된 것은 물론, 엄청난 수의 병상과 검사실, 수술실, 각종 의료 설비들이 추가된 것을 알 수 있었다.

비전문가인 내가 잠깐 훑어보기만 해도 대단하다고 느낄 정도인데, 전문가인 의료진들 입장에선 그야말로 신세계나 다름없을 터. 이 병원은 이제 엄청난 수의 환자는 물론이고 다수의 피난민과 의료 관련 인재들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거점이 되었다.

김해에서 인간의 영역을 조금이나마 확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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