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정착기 (13)
“키에에에에에에에에!!!”
전방위에서 미친 듯이 이빨을 딱딱 부딪치며 들이닥치는 좀비 떼의 위용은 실로 대단했다. 내가 정말로 병원 1층의 정중앙에 서서 스스로 미끼가 되어야 할 가치가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될 만큼.
현대 사회에서는 더 이상 저만한 군세가 육박전을 벌이기 위해 무작정 돌격하는 일은 없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총과 대포로 싸우는 현대인에게 엄청난 괴리감과 공포감으로 다가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물며 저것들은 인간과 달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어지간해선 잘 죽지도 않는다. 터미네이터 영화에서 인간 저항군을 상대로 거침없이 돌격하고 모든 것을 때려 부수던 로봇 군단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더 들어와라. 아직 더 남았잖아.’
50개에 달하는 주사기 덫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배치해서 좀비 떼 선두 대열의 진입을 최대한 늦췄다.
멸균 시스템의 효율을 최대한 당기려면 내가 먼저 죽어서도, 그렇다고 섣불리 멸균 시스템을 가동해서도 안 된다.
더 많은 좀비들이 나 하나 뜯어먹기 위해 물밀듯이 몰려 들어오고, 그 과정에서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며 마구 엉켜야 한다. 물론 주사기 덫을 최대한 이용했다고 한들 놈들의 돌격을 완전히 막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소총을 겨누고 용케 주사기 덫을 넘어온 놈들부터 쏴 갈겼다.
타타타!
퍼벅 소리와 함께 터져 나간 좀비의 두개골은 썩은 뇌수와 검은 피를 흩뿌리며 달려오던 자세로 그대로 엎어졌다. 그 시체를 새로운 좀비가 짓밟으면서 도움닫기로 뛰어든다.
이미 허공에 몸을 내던진 놈에게 총을 쏴 봤자 막을 도리는 없다. 죽든 살든 저 몸이 가진 질량 그대로 내게 부딪쳐 오겠지. 그래서 몸을 반쯤 회전시켜 놈의 경로에서 살짝 벗어났다.
빈 허공을 가로지르며 볼품없이 바닥을 뒹군 놈의 뒤통수에 재차 총알을 박아 넣고, 허리춤에 차고 있던 대검을 뽑아 머리 위로 크게 쳐들었다.
내 옆구리로 파고들어 단숨에 물어뜯으려던 좀비의 뒷목을 있는 힘껏 내려찍자, 놈은 켁켁거리며 미친 듯이 발버둥 치다가 부르르 떨면서 축 늘어졌다. 대검 손잡이를 비틀어 단숨에 척추 신경을 끊어 버리고 발로 머리통을 짓밟으면서 대검을 뽑아냈다.
현대인은 총이 없으면 전장에서 아무것도 못 한다고 종종 오해를 사는 경우가 많은데, 그건 틀렸다.
급박한 상황에서 총알이 떨어지면 개머리판을 휘두르고, 대검으로 상대를 찌르고, 군홧발로 상대의 턱주가리를 걷어차서 날려 버려야 한다. 뭣하면 하이바를 벗어서 그대로 상대방을 내려찍기도 해야 한다.
가난한 북한군과 교전할 때는 우리 쪽이 보급이 훨씬 더 널널했으니 실제로 그런 상황과 마주할 일은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전쟁 중에 방아쇠를 당기는 단순 작업만 있었던 건 아니다.
이 손으로 직접 누군가의 따뜻하고 생생하게 맥동하는 생명을 끊어야 했던 적도 분명 있었다.
북한군은 생화학 무기가 그렇게나 많으면서 정작 방호복이나 방독면 수량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런 놈들을 상대로 우리는 최루탄을 실컷 까 넣은 다음 방독면을 쓰고 들어가서 제압하기도 했다.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면서도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놈들의 머리통을 직접 깨부술 때, 방독면의 렌즈 너머로 붉은 피와 살점이 튀었을 때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는 지금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냥 시키니까 했고, 그래야 하니까 했고, 최종적으로 그렇게 될 걸 알았기 때문에 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라는 적군을 말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려드는 좀비들은 그때 마주한 북한군과 언뜻 닮아 있었다.
유일한 차이점이 있다면 북한군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고통을 느꼈다는 것이며, 이놈들은 오직 식욕과 살육 본능으로만 움직인다는 것이다.
“아아아아아아아! 느으으아아아아아아!”
“아가리 닫아, 씨발 놈아.”
꽤나 튼튼한 임플란트를 박았는지 노인 좀비가 유달리 튼튼해 보이는 이빨을 딱딱 부딪치면서 얼굴을 들이밀었다. 천을 덧대서 감아 둔 팔로 놈을 밀어붙이는 것과 동시에 복부를 발로 힘껏 걷어차서 날려 버렸다.
탕!
허우적대며 뒤로 넘어진 놈에게는 방아쇠를 꾹 당길 필요도 없었다. 딱 한 발로 미간을 꿰뚫은 다음, 총구가 돌아가는 것보다 더 빠르게 시선을 옮겼다.
여길 봐도 좀비, 저길 봐도 좀비, 주사기 덫이 펑펑 터지면서 놈들을 무력화시키는 마취제가 미친 듯이 퍼져 나갔지만 이제 그것도 끝물을 달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전히 놈들은 많았고 나는 여전히 혼자였으니까.
하지만 지금 여기서 지레 겁먹고 멸균 시스템을 작동시키면 낭패다. 아마 놈들의 반도 처리하지 못하겠지. 여분의 멸균 시스템 1세트가 더 있긴 하지만 그것으로 깔끔하게 뒤처리를 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머신 피스톨은 1층의 벽을 죄다 때려 부수느라 탄약이 오링 났다. 주사기 덫도 이제 다 써서 없어.’
탄약과 덫이 긴 시간에 걸쳐 조금씩 재생성된다는 건 분명 나쁘지 않은 메리트였지만, 적들이 끊임없이 몰려드는 상황에선 무의미했다. 설상가상으로 내가 인벤토리에 채워서 가져온 소총탄도 이제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숙련된 솜씨로 빠르게 재장전하고, 정확히 놈들의 미간을 쏘는 것에는 이골이 날 정도로 자신이 있을지언정 한계는 명확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꼴사납게 빼긴 좀 그래.’
나 이승권, 전쟁 후 트라우마 센터에서 띠껍게 굴던 군의관 면상도 당당히 박살 내고 퇴역한 남자다. 쫄려서 움츠러들 바에야 차라리 정면 돌파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지금까지 살아오지 않았던가.
더 이상 소총으로 좀비 떼의 돌격을 막기 어렵겠다는 판단이 서자마자 즉시 소총을 인벤토리에 넣고 권총과 대검을 양손에 쥐었다. 그리고 그랩 훅을 쏴서 천장으로 솟구치듯 튕겨져 올라갔다.
내가 서 있던 자리는 순식간에 좀비들로 가득 메꿔졌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다.
병원 1층 천장 높이는 대략 4~5m 정도.
신체 능력이 매우 뛰어난 장신의 농구 선수가 혼신을 다해 점프해도 손끝이 닿지 않는 높이였다. 다만 상대는 육체적 한계가 명확한 인간이 아니라 좀비였다.
놈들은 서로의 등과 어깨, 머리를 마구 짓밟으면서 미친 듯이 뛰어올랐다. 그 모습이 꼭 사료를 먹기 위해 발버둥 치는 양식장 물고기 떼처럼 보여서, 천장에 잠시 매달려 있던 나는 짚라인의 쿨타임이 돌자마자 즉시 위치를 바꿔야 했다.
‘난 지금 월드스타 콘서트장에 와 있는 거다. 그리고 이놈들은 이승권이라면 껌뻑 죽는 사생팬 집단이다.’
날 산 채로 씹어 먹고 갈기갈기 찢어발기려 드는 위험천만한 사생팬이라는 점만 빼면, 지금 나는 월드 스타급 인기를 누리는 유명 가수나 다름없었다.
탕!
내가 쏜 총알은 친필 사인이 되어 사생팬의 머리통에 꽂혔고, 새로운 탈락자의 등장과 함께 또 다른 도전자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천장에 닿을 듯 말 듯 치고 올라온 놈들의 안면을 짓밟으면서 다시 그랩 훅을 쏘아 내고, 또 다른 위치에 벌레처럼 찰싹 들러붙었다.
간혹 나를 붙잡기 위해 손을 내뻗는 놈들은 대검을 휘둘러 손가락만 베어 냈다. 손가락이 없으면 손이 멀쩡해도 날 잡을 수 없을 테니까.
웅크리듯이 거꾸로 매달려 있다 보니 금세 머리에 피가 쏠렸다. 수많은 좀비들이 내질러 대는 비명 소리에 슬슬 귀도 아프고, 바쁘게 움직인 탓에 땀도 줄줄 흘렀다.
그나마 이 병원이 가야 의료원이라는 대형 병원으로 새롭게 개원하기 위해 증축과 확장 공사를 미리 해 뒀기에 망정이지, 예전의 중형 규모 그대로였다면 천장도 낮아서 피할 방법도 없었을 거다.
쏘고, 베고, 피하고, 다시 쏘고, 베고, 피하고.
짚라인의 쿨타임을 벌기 위해 천장에서 이 악물고 버티면서 좀비들의 공격을 피하고 반격하는 건 정말 힘들었다.
차라리 건물 외벽에 매달려 있을 수 있다면 내가 일방적으로 놈들을 두들겨 패는 구도가 나왔을 텐데, 멸균 시스템을 사용해야 했기 때문에 그러지 못하는 게 정말 아쉬웠다.
‘그래도 존버 끝에는 결국 빛이 드는 법이지.’
내가 서커스단의 곡예사처럼 미친 듯이 어그로를 끌면서 천장을 이리저리 돌아다닌 덕분에 거의 모든 좀비들이 병원 1층의 넓은 로비에 집결했다. 미리 벽을 박살 내 두지 않았더라면 이마저도 불가능했을 터.
나는 스스로의 대견함을 칭찬하며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렸던 멸균 시스템 A, B를 순서대로 작동시켰다.
먼저 멸균 시스템 A형이 푸른 연기를 주변으로 확 퍼뜨리자 병동에서 그랬던 것처럼 좀비들이 몹시 약화된 모습을 보여 주었다. 팔팔하던 놈들이 갑자기 비실비실해졌으니 제3자 입장에서 보면 무슨 요술이라도 부렸나 싶을 거다.
그리고 푸른 연기가 충분히 퍼졌을 때, 천장에 설치된 스프링클러 같은 멸균 시스템 B형이 정체불명의 액체를 방출하며 더러운 좀비 떼를 깨끗하게 씻겨 주었다.
“오오오오오오오! 오오오!!”
“그르으으으으아아아아아!”
3D와 4D를 넘어서, 이제는 현실을 영화처럼 즐기는 시대가 왔다.
나는 천장에서 거꾸로 매달린 채 코앞에서 놈들이 발버둥 치고 괴로워하다가 끝내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리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홈마트에서 압도적인 화력으로 좀비들을 쓸어버릴 때도 느꼈지만, 십 년 묵은 체중이 쑥 내려가는 이 쾌감은 좀처럼 잊기 힘들었다.
“그래, 그렇게 죽어라.”
내 넷플러스와 안락한 노후를 위해서.
녹아내린 좀비들의 거무죽죽한 체액 위로 뛰어내리자 때마침 거점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메시지가 눈앞에 나타났다.
-거점 내의 모든 적성체를 말살했습니다.
-거점 전쟁 승리자 : 퇴역병, 간호사
-거점 전쟁 생존자 : 중립체
-모든 보상 및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거점 내에 존재하는 모든 중립체의 생존으로 비율(100%)에 따른 추가 보상을 획득합니다.
가장 먼저 획득한 것은 4천 마리에 달하는 좀비 떼를 몰살시킨 것으로 획득한 막대한 경험치와 8,044 DNA 샘플이었다. 안 그래도 DNA 샘플이 넘쳐 나던 참이었는데 이젠 1만 5천을 훌쩍 넘겼으니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부자들은 돈이 한가득 쌓여 있는 계좌를 보면 밥을 먹지 않아도 배부르다고 하던데, 돈에 큰 욕심이 없었던 나도 잔뜩 쌓인 DNA 샘플을 보니 괜스레 속이 든든해졌다.
“상태창.”
[생존자 : 이승권]
[직업 : 퇴역병]
[직업 숙련 레벨 : 13 > 20]
[칭호 : 오버킬, 피바람, (NEW)역병 의사]
[생존 기간 : 12일 차]
[숙련 포인트 : 5 > 15(+20레벨 돌파 +3)]
병원 관련 칭호도 하나 더 생겼고 숙련 포인트는 무려 20레벨 돌파 기념으로 3포인트를 더 얻어 합계 15포인트나 쌓였다.
압도적인 직업 숙련 레벨의 차이가 느껴지십니까?
“슬슬 스킬 투자를 할 때도 됐네.”
가만 생각해 보니 최근 바쁘게 지내느라 스킬이나 스테이터스에 크게 신경 쓰지 못했다. 물론 나 이승권이 워낙 대단한 인간이라 그런 쪽에 신경 쓰지 않고도 좀비들을 쳐부수는 데 문제가 없었지만, 상황이 점점 변하고 있다.
본격적으로 생존자를 규합하기에 앞서 의식주를 확보할 필요가 있었고, 내가 모르는 위험 요소들이 도심 곳곳에 퍼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심증도 있다.
“스킬창.”
-스킬창
[직업 고유 스킬 : 거점 지정(D+), 거점 경계 강화(E), 거점 방어 강화(E), 최후의 보루(A+)]
[개인 고유 스킬 : 사격(A), 체술(B), 야간 경계(B++), 통증 억제(D)]
[획득 및 특전 스킬 : 도구 제작(E), 짚라인(D-), 암행(D)]
[각 등급에 따른 숙련 포인트 요구치 : E(1), D(3), C(5), B(10), A(15), S(20)]
“15포인트나 있으니까 A등급 스킬에 +보정치를 하나 더 붙이거나, 더 낮은 등급의 스킬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킬 수도 있어.”
꼭 스킬이 아니더라도 스테이터스에 투자를 할 수도 있다. 다만 스테이터스에 투자하는 건 철저하게 개인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다수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스킬에 투자하는 것보다 효율이 끔찍하게 떨어진다.
스테이터스에 투자하는 건 숙련 포인트가 적어도 100단위쯤 쌓여 있지 않으면 투자하기 힘들 것 같다.
‘미친 척하고 최후의 보루나 사격 스킬에 보정치를 하나 붙여 볼까? A등급 스킬이니까 보정치 하나만 붙여도 꽤 큰 효과를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바꿔 말하면 둘 다 A등급 스킬이기 때문에 굳이 지금 투자해 주지 않아도 충분히 제값을 해 주고 있었다. 역시 좀 더 가성비를 따지고 싶다.
“내 안의 K-유전자는 아직 국밥 같은 든든함을 원하고 있다.”
결국 내 손은 ‘그 스킬’을 향해 움직였다.
[거점 지정(D+) > 거점 지정(C-)]
[숙련 포인트 : 15 >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