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정착기 (11)
-거점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모든 적성체가 임시 거점의 내구도를 공략하거나 퇴역병, 간호사, 중립체를 말살하려 할 것입니다.
나와 똑같은 메시지를 확인했는지 채성아가 응급실에서 달려 나왔다. 그녀는 갑자기 비현실적인 공간으로 뒤바뀐 병원 내부 모습에 적잖이 당황한 듯했다.
“승권 씨! 거점 전쟁이 시작됐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쉽게 말하면 퇴역병인 제가 특정 거점을 손에 넣기 위해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과정이에요. 주인 없는 빈집이나 시설이라면 몰라도, 이렇게 사람과 좀비들이 꽉 차 있는 개미굴 같은 곳은 그냥 꿀꺽할 수 없는 구조더라고요.”
“아, 그래서 거점마다 그 흉흉한 무기들이 있었던 거네요.”
채성아는 내 집이나 활천초, 홈마트에 배치되어 있던 자동 포탑이나 머신 피스톨의 출처를 그제야 깨달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좀비들의 수가 4천 마리가 넘던데, 그걸 다 어떻게 처리할 생각인가요? 총기가 있어도 그렇게나 수가 많으면…….”
“방위 무기는 거점마다 종류나 수량이 다른 것 같더라고요. 여긴 병원이니까 병원에 쳐들어올 적들을 쓸어버리기에 적합한 방위 무기가 준비되어 있겠죠.”
아니나 다를까, 거점창을 열어 보니 경희대 중앙 병원에서 배치, 사용할 수 있는 방위 무기들의 목록이 나열되었다.
다른 거점에 비해 확실히 뭔가가 달랐다.
-배치 가능한 방위 무기 : 멸균 시스템 A형 x3, 멸균 시스템 B형 x3, 머신 피스톨 터렛 x10, 멸균 주사 덫 x50
꽤 규모가 있는 병원답게 가볍게 설치할 수 있는 머신 피스톨은 넉넉하게 10개나 준비되어 있고 설치할 수 있는 덫도 50개나 되었다.
하지만 멸균 시스템 A형과 B형은 도무지 어떤 용도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수량도 각각 3개씩만 준비되어 있는 걸 보니 자동 포탑처럼 나름 중요한 방위 무기인 것 같은데…….
간호사인 채성아라면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해서 물어봤더니 그녀도 아리송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멸균 시스템은 보통 UV나 소독액을 이용한 처리를 뜻하는데…… 그리 대단하진 않을 것 같은데요?”
좀비 머리 위에 소독액 같은 걸 끼얹나?
결국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나는 즉시 거점창에서 붉은 점으로 가득한 지점에 CCTV를 설치했다. 우선 놈들의 동태를 확인해야 방위 무기든 뭐든 사용해서 조질 것 아닌가.
좀비들은 병동에 가장 많이 몰려 있었는데, 외부에서 유입된 좀비와 내부에서 감염된 피난민, 그리고 미처 병원을 떠나지 못하고 남아 있던 환자와 의료진들이 모두 합쳐진 결과인 듯했다.
거점 전쟁 중에는 아군끼리 거점창에 대한 정보가 서로 공유되는지 채성아도 CCTV가 막 연결된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병실이 많고 복도가 좁은 병원 특성 때문인지 좀비들 대부분이 병동에 모여 있네요. 고인 물처럼 자력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 말대로 병동은 발 디디기 힘들 만큼 좀비들이 빽빽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아마 사태가 벌어진 당일에는 저들 중 상당수가 사람이었을 텐데, 결국 밀려드는 좀비들에게 뜯기고 뜯기다 보니 저렇게 된 것이 분명했다.
좀비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사방이 막힌 공간에서 물밀듯이 밀려 들어오는 좀비 떼 상상을 했더니 괜스레 오한이 들었다.
“저렇게 많은 좀비를 처리하려면 차라리 건물에 불을 지르는 게 더 나을 것 같네요.”
“거점 전쟁은 건물 내구도까지 신경 써야 해서 건물을 파괴하면 우리만 손해예요.”
“아, 그래서 좀비들이 의미 없이 벽을 두들기거나 물어뜯고 있는 건가요?”
“……이런 씹!”
그래, 거점 전쟁이 시작되면 좀비들 입장에선 날 찾아 족치는 것보다 당장 건물부터 때려 부수는 게 더 빠르긴 하지. 이렇게 한가하게 대화나 나누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대로 병동까지 한달음에 뛰어 올라간다고 한들 층마다 꽉꽉 들어찬 놈들을 모조리 때려잡을 방법은 마땅치 않으니, 우선 그 멸균 시스템인지 뭔지부터 사용하기로 했다.
“멸균 시스템 A형 설치.”
2층 병동의 복도 정중앙에 설치된 멸균 시스템은 대형 공기청정기와 상당히 유사한 외형을 가지고 있었다.
이게 뭐 하는 놈인가 싶어 가만히 지켜보니, 곧 밝은 파란색 연기 같은 것을 내뿜기 시작했다. 이전에 거리에서 봤던 녹색 연기와 비슷해 보였으나, 인간이 아니라 좀비를 괴롭게 하는 성질이 있는 것 같았다.
“파란 연기에 노출된 좀비들이 굉장히 고통스러워하네요.”
자폭형 좀비가 내뿜던 녹색 연기에 노출된 인간은 빠르게 무력화되었던 것에 비해, 멸균 시스템 A형이 내뿜는 파란 연기는 좀비들을 광견병 걸린 들개처럼 발작을 일으키게 했다.
검은 피를 토해 내는가 하면, 자신의 동료도 알아보지 못하고 주변을 마구잡이로 공격한다든가, 아예 바닥에 엎어져 물고기처럼 펄떡거리는 놈들도 있었다.
기대했던 것만큼 좀비 놈들을 시원스럽게 쓸어버리지는 못했지만, 그건 단순히 거점 방위 무기의 등급이 낮아서라고 생각한다.
‘A형이 놈들을 괴롭게 하는 파란 연기를 내뿜는다면 B형은 뭐지?’
이참에 B형 성능도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에 같은 지점에 멸균 시스템 B형도 설치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복도의 천장에 커다란 소방 스프링클러가 생성되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광기의 물대포 쇼.
무색의 물대포가 확 퍼져 나가자 좀비들은 강산에 닿은 것처럼 피부가 타들어 가더니 순식간에 슬라임 액괴처럼 흐물흐물하게 녹아 버렸다. 콩나물 시루처럼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던 좀비들이 순식간에 녹아 없어진 것이다.
물론, 역겨움도 배가 되었다.
“……세상에.”
“이래서 멸균 시스템이었네.”
멸균 시스템 A로 건강한(?) 좀비의 힘을 빼놓고, 멸균 시스템 B로 한꺼번에 조진다.
총이나 폭탄보다 안전한 것은 물론이고, 굳이 꼼꼼하게 머리통을 파괴할 필요도 없이 파란 연기와 무색 액체에 노출시키기만 하면 평등하게 모든 좀비를 조질 수 있는 방법이었다.
믿고 있었다고, 퇴역병!
좀비 바이러스 따위는 티끌도 남겨 두지 않겠다는 멸균 시스템 A, B 형제의 기가 막힌 콤보에 전 세계가 열광하는 것만 같다. 만약 너튜브가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면 국뽕 스트리머로 데뷔했을 것이다.
‘앞으로 아침마다 상태창을 향해 세 번씩 절해야겠군.’
너무나도 압도적인 멸균 시스템의 위력 덕분에 나와 채성아는 깔끔해진 병동 2층에 무혈입성할 수 있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멸균 시스템 A와 B는 아마도 같이 사용해야 극적인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점, 그리고 수량이 각각 3개씩이라 최대 3회까지만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멸균 시스템을 툭툭 건드려 보니 6시간이라는 미친 쿨타임 후에 재사용이 가능하다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결론이 나왔다. 이건 극한의 효율충을 위한 파밍 아이템이다. 마치 바쁜 직장인 게이머들이 자동 사냥을 돌리는 것처럼.
음식도 최대한 꾸역꾸역 입에 밀어 넣은 뒤에 콜라를 마셔 줘야 청량감이 오지지 않던가? 이것도 좀비들을 최대한 한 공간에 꾸역꾸역 밀어 넣은 다음 발동시켜야 꽉 막힌 변기를 뚫는 것 같은 쾌감을 느낄 수 있을 터.
“제가 놈들을 유인해서 최대한 같은 공간으로 몰아 보죠. 그사이에 채성아 씨는 숨어 있는 생존자들을 확보해 주세요.”
“괜찮겠어요? 멸균 시스템의 효과가 굉장하다는 건 입증됐지만 그래도 좀비들의 수가 어마어마하던데…….”
“괜찮아요. 몰이사냥은 질릴 정도로 많이 해 봤거든요.”
몰이사냥이라고 하기엔 내가 쫓기는 입장이 되겠지만, 어차피 결과는 똑같을 테니까.
철컥!
총을 꺼내든 나는 좀비들의 이목을 확실하게 끌기 위해 조정간 단발을 점사로 바꿨다.
거점창을 공유받은 채성아는 좀비들이 없는 장소를 확인해 가며 먼저 이동했다. 일주일 넘게 답답하고 위험한 병원에 갇혀 있던 생존자들과 무사히 합류하게 된다면, 식량이나 식수를 보급해 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목숨 줄을 붙들어 놓을 수 있으리라.
그사이 나는 3천이 넘는 좀비 대군을 맞이하기 위한 무대를 물색했다. 여기가 무슨 경기장도 아니고 3천이 넘는 놈들을 한 번에 수용할 수 있을 만큼 넓은 곳은 병원 내부에 없었다.
“병원 구조상 그런 공간은 없지만, 구조를 조금만 바꾸면 공간이 생기지.”
경희대 중앙 병원은 2차 남북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그러니까 2020년대 중반에 경희대 가야 의료원으로 새롭게 개원하고자 병상 수를 최대한 늘리는 대규모 공사를 진행해 왔다.
그러다 국내 상황이 안 좋아지면서 중간에 공사 규모를 줄일 수밖에 없었고, 건물 구조도 1~2층만 비대하게 넓어지는 선에서 그쳤다. 결국 완전히 새로워진 가야 의료원은 탄생하지 못한 채 경희대 중앙 병원 2.0만 남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벽 몇 개만 허물어 주면 된다.
드다다! 다다다! 다다다!!
한 방 한 방이 강력한 자동 포탑과 달리 한 번에 막대한 화력을 퍼부을 수 있는 머신 피스톨을 설치해 벽을 때려 부수니, 분리되어 있던 공간들이 서로 연결되었다.
안 그래도 조금씩 줄어들고 있는 거점 내구도를 제 손으로 직접 깎아 먹은 게 뼈아팠지만, 50% 아래로 떨어지기 전에만 좀비들을 처리하면 된다.
아, 따서 갚으면 그만 아니냐고~.
‘머신 피스톨의 탄약을 다 쓰긴 했지만, 준비는 끝났다.’
분리된 병동과 의료동, 복도와 복도 사이의 벽이 모두 허물어지자 축구를 해도 될 만큼 넓직한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머신 피스톨이 미친 듯이 총알을 내뱉고 벽이 와르르 무너지는 과정에서 발생한 엄청난 소음 덕분에 이미 어그로도 괜찮게 끌렸다.
하지만 자잘하게 낚여 들어오는 피라미들에게는 관심 없다.
‘내가 왕년에 북한군 기관총 진지 어그로도 끌어 봤다 이 말이야.’
나는 즉시 건물 밖으로 나가 외벽의 모든 유리창에 대고 총을 쏴 갈겼다.
타타타! 타타타!
머신 피스톨처럼 시원스럽게 총탄을 쏟아 내자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유리 조각들이 사방팔방으로 비산했다.
3층부터 최상층까지, 모든 창가에서 일제히 나를 포착한 좀비들이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창밖으로 몸을 던졌다. 나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좀비 우박을 피해 내가 준비한 무대로 뛰어 들어갔다.
계단에서 우르르 뛰어 내려오는 놈들, 창밖으로 다이빙해서 다시 병원으로 들어오는 놈들,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날 씹어 먹겠다는 강력한 공동체 의식을 발휘하면서 넓은 공간에 발을 들였다.
하지만 3천이라는 숫자가 모이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그 전에 내가 놈들에게 포위당해 으적으적 씹히는 일도 없어야 하고.
푸슈슈슈슈슈슛!
“키아아아아아!”
“그아악! 아아아아아!”
그래서 놈들이 최대한 많이 모일 때까지 시간을 벌어 줄 주사기 덫을 모조리 설치했다.
덫 하나가 터질 때마다 새끼손가락보다 작은 주사기 탄환이 좀비들을 고슴도치 같은 꼴로 만들었다. 주사기에 꽂힌 좀비들은 부글부글 피거품을 쏟아 내더니 축 늘어졌다. 아마도 대상을 즉시 무력화시키는 강력한 마취제 함정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마침내 물경 3천이 넘는 좀비들이 전방위에서 쏟아져 들어오며 중앙에 자리 잡은 내게로 몰렸다. 놈들에게 붙잡히면 원형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갈기갈기 찢기겠지.
“하지만 찢기는 건 너희들이었고.”
멸균 시스템 A와 B형이 다시 한번 작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