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정착기 (10)
낮의 도시와 밤의 도시는 천지 차이다.
과거에는 낮이고 밤이고 온전히 인간의 세상이자 인간의 시간이었지만, 지금은 어느 곳에서도 인간이 설 자리는 없었다.
그냥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의 법칙이 휙 뒤바뀐 것처럼 그렇게 되었다. 아무도 그 이유는 모르고, 아마 앞으로도 모를 것이다. 당장 살아남기에 급급해졌으니까.
“녹색 연기는 걷혔지만 지하나 건물 속에 있던 좀비들이 거리로 빠져나왔네요.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데…….”
“놈들에게 후각은 없으니 냄새를 맡고 우르르 몰려나왔을 리는 없고, 아마 그 녹색 연기가 놈들에게도 어떤 작용을 하는 거겠죠.”
개미가 서로 의사소통을 할 때 페로몬을 흩뿌리는 것처럼, 좀비들에게도 저 녹색 연기가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녹색 연기에 노출된 인간은 한순간에 무력화되었다고 했었죠. 죽음에 이르거나 좀비로 감염되는 게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는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쇠약해진다고.”
“그랬었죠.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요?”
채성아의 되물음에 나는 잠시 생각을 곱씹었다.
이건 내 추측이지만, 그 녹색 연기는 꽤 지능적이면서도 영악한 덫이 아닐까 싶다.
“한번 생각해 봐요. 불규칙적으로 거리 전체에 그런 녹색 연기를 흩뿌리다 보면 운 나쁘게 거점에서 빠져나온 인간들 중 누군가가 피해를 입지 않겠어요? 그리고 녹색 연기에 자극을 받은 좀비들까지 거리로 몰려 나온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어요?”
“손쉬운 먹잇감과 감염체를 얻게 되겠네요. 세상에…….”
“좀비들 입장에선 차려진 밥상이나 다름없어요. 한전 건물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어째서 안에 틀어박혀 있기만 했던 건지 이해가 되네요.”
녹색 연기가 1차로 인간을 무력화시켜서 육지에 끌려나온 물고기처럼 거리에 늘어져 있으면, 뒤이어 거리로 나온 좀비들이 주변을 배회하다가 그걸 포착한다.
그다음은 모두가 아는 것처럼 산 채로 잡아먹히거나 물려서 좀비가 되는 거다.
우리가 거점을 세우고 안정화하고 있는 거리에 비해 이곳은 유독 좀비들의 숫자가 많은 것도, 생존자들의 활동이 극히 적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궁금증이 풀린 것과는 별개로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낮에도 이 모양이고 밤에도 이 모양이라면, 이곳에서 대놓고 활동하는 건 불지옥 난이도를 넘어서서 헬조선 난이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두운 밤에는 좀비들이 청각에 많이 의존하지만 환한 낮에는 시각으로 인간을 빠르게 포착할 수 있으니 놈들의 사각지대로 움직여야겠네요. 제가 앞장서죠.”
거리로 몰려나온 좀비들은 여느 때처럼 녹색 연기에 당해 축 늘어진 인간을 찾아 정처 없이 배회했다.
나와 채성아는 대로를 이용해 빠르게 움직이려던 계획을 잠시 접어 두고, 평소라면 절대로 들어가지 않았을 좁은 골목이나 건물 틈새로 이동했다.
“전방에 좀비 하나. 혼자인 것 같지만 이쪽을 발견하면 소리를 질러서 동료를 부를 테니 처리하고 가죠.”
골목 중앙에서 그어어어어, 하는 낮은 하울링과 함께 비척비척 움직이고 있는 좀비는 겉모습만 보면 약골처럼 보인다.
하지만 인간을 포착하는 순간 사나운 짐승처럼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들 것이고,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으로 어그로를 끌겠지. 직접 접근해서 처리하는 건 불가능했다.
“거리는 30m 정도. 골목이라 바람은 없고 대상의 움직임은 극히 적어요. 지금이 적기니까 바로 자세 잡아요.”
“후우우우.”
가볍게 심호흡을 한 그녀는 내 옆에서 곧게 선 자세로 컴파운드 보우의 시위를 당겼다.
한국인은 주몽의 후예다, 원거리 무기 하나는 기막히게 잘 다룬다는 근거 없는 낭설은 제쳐 두고서라도 채성아는 평범한 아마추어보다 나은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마추어보다 못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녀 혼자서 좀비 떼의 습격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아 내 집까지 도달하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나는 그녀의 생존 본능과 실전 경험을 믿는다.
투웅!
무심하게 쏘아져 나간 화살은 희미한 파공성을 자아내며 30m 거리를 가로질렀다.
퍽!
때마침 고개를 돌리던 좀비의 눈구멍에 정확히 틀어박힌 화살은 그대로 뇌를 헤집었다. 깔끔한 헤드샷에 좀비가 천천히 뒤로 무너졌다.
혹시라도 주변에서 다른 좀비들이 몰려들진 않는지 잠시 기다린 다음, 재빨리 움직여서 좀비의 눈에 박힌 화살을 뽑아내고 골목을 빠져나왔다.
녹색 연기가 일종의 자극제나 흥분제처럼 작용한 덕분인지 좀비들은 좁고 어두운 공간보다 넓고 밝은 장소 위주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가락로를 따라 전하교 교차로까지 이동한 우리는 딱 봐도 눈에 띌 것 같은 다리를 건너는 대신, 봉황역 바로 아래쪽에 위치한 둑을 건넜다.
적당한 높이로 자란 수풀과 낮은 위치를 이용해서 좀비들의 시야를 피해 강을 건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실제로 놀라우리만치 성공적이었다.
마치 국경선 같은 역할을 하는 강을 또 하나 넘고 나니 이번에는 다시 좀비의 출현 빈도가 줄어들었다.
아니, 분명 거리에 좀비들이 돌아다니고는 있었지만 우리가 지나쳐 온 곳 만큼은 아니었다. 녹색 연기가 강 너머까지는 닿지 않는다는 반증이었다.
“승권 씨, 저기 좀 봐요.”
봉황역 근처에서 상황을 살피고 있던 나는 채성아가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봉황역 바로 옆에 위치한 김해여객버스터미널은 겉보기엔 멀쩡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부가 엉망진창이었다.
버스가 뒤집어져 있거나 1층 출입구가 박살 나 있는 건 기본이었고, 벽이나 유리창에는 온통 피로 점철된 사람의 손자국들이 찍혀 있었다.
입구에 어설프게 세워져 있던 바리게이트는 좀비 떼를 효과적으로 막아 주지 못했는지 그 주변에도 핏자국이 한가득이었다. 많은 사람이 좀비 떼를 피해 터미널로 숨어들었다가 저곳에서 몰살당한 게 분명했다.
“버스를 몇 대 끌고 나올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상태가 저러니 불가능하겠네요. 환자들을 병원까지 실어나를 수단이 필요한데…….”
“버스보단 차라리 불도저나 포클레인을 확보하는 게 더 나을 걸요. 거리에 온통 버려진 차들뿐이라서.”
이런 시대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중장비는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 연료 대신 전기를 사용하는 초대형 배터리팩을 사용하는 모델이 상용화됐었다. 북한 토지 복구 지역에서 본 적 있다.
무려 300kWh 용량에 무게만 3톤 이상 나가는 배터리팩을 장착한 모델이라고 했던가.
다행히 김해, 부산, 창원은 중장비를 제법 사용하는 공업 위주 지역인 만큼 찾다 보면 몇 대쯤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전기로만 움직이는 차량이나 중장비라면 내 능력을 이용해서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지. 그때가 되면 거리를 한 번 싹 밀어 버려야겠어.’
당장은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으니 넘어가기로 하고, 중간에 녹색 연기 피하랴 좀비들에게 발각되지 않는 사각지대로 이동하랴,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기 때문에 지금부터는 속도전이었다.
아침 일찍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오후에 접어들었고, 태양은 빠르게 서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노을이 지고 밤이 찾아오면 거리의 모든 것이 위험 요소로 작용할 터.
그 전에 경희대 중앙병원에 들어가서 거점을 확보해야 한다.
“여기도 아파트, 저기도 아파트, 눈 돌리면 다가구주택 단지. 의외로 ‘생존자’는 이전 지역보다 이쪽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네요.”
“집 안에만 숨어 있으면 안전하니까요?”
“대신 죽어 줄 사람이 많으니까요.”
“…….”
채성아가 뜨악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지만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서 정정하지 않았다.
좀비는 기본적으로 어그로가 끌린 대상을 우선 공격한다.
불을 켜고, 비명을 지르고, 나 여기 있소 하고 대놓고 광고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먹잇감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걸 눈치챈 사람들은 이제 집 안에서 숨죽인 채 숨어 지내다 하나둘씩 물자를 찾아 기어나오거나, 구조대가 올 거라는 무의미한 희망을 품고서 지금도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이다.
다른 지역에 비해 유독 아파트와 빌라가 많은 이곳은 아마도 김해 내에서 가장 많은 인구 포화도를 자랑할 것이다.
게다가 김해의 중심지이기도 한 만큼 대부분 피난을 떠나지 못하고 이 지역에 갇혔을 것 아닌가.
희망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아직 회생의 여지가 있는 곳이고, 절망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언제 대규모 감염이 터질지 알 수 없는 화약고 같은 곳이다.
이 지역 사람들을 저 멀리 있는 활천초까지 죄다 이송할 수는 없으니, 결국 대형 거점 하나를 먹고 최대한 생존자를 보호하는 게 핵심이다.
실패한다면 기껏 확보한 거점일지라도 도로 뱉어 내고 좀비 떼에 밀려 도망가야 할 수도 있다.
“저기 병원이에요!”
경희대 교육협력 중앙병원. 김해에서 그나마 가장 규모가 크다고 할 수 있는 종합병원급 의료시설.
해가 지기 전에 무사히 도착한 건 좋았지만 병원 내부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으니 조금 망설여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무를 수도 없는 법. 나는 과감하게 병원 응급실로 진입했다.
구급차가 병원 응급실 입구에 처박힌 상태였기 때문에 반쯤 개방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
뒤따라 응급실에 들어선 채성아는 청결하고 새하얀 병원의 이미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검붉은 색과 역한 피비린내에 탄식했다.
침대에 가죽 벨트로 사지가 묶인 채 좀비로 변한 남자는 우리를 보자마자 으르렁거렸으며, 응급실 근무를 서다가 변을 당한 의사와 간호사들은 피 칠갑을 한 채 복도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환자와 의료인, 그리고 피난민들이 병원에 몰려들었는지 피와 살점으로 뒤덮이지 않은 곳을 찾기가 힘들었다.
채성아는 괴로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가죽 벨트로 침대에 묶여 있는 좀비들의 머리통에 화살을 박아 넣었다. 그사이 나는 응급실과 연결된 복도로 나갔다.
텅텅!
인벤토리에서 꺼낸 야구 방망이로 벽을 두들기자 비척비척 움직이던 좀비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몰렸다.
순간, 놈들은 총성을 들은 육상 선수처럼 폭발적인 속도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사방팔방에서 좀비가 몰려드는 넓은 장소였다면 모를까, 적당히 사람 한 명이 날뛰기 좋은 복도라면 내가 꿀릴 이유가 없었다.
빡! 으적!
가장 먼저 짐승처럼 사족 보행으로 달려든 놈의 머리통을 풀스윙으로 후려갈겨 벽에 처박고, 그 반동을 이용해 방망이 끝을 창처럼 길게 내질렀다.
졸지에 돌진하다 방망이 끝에 가슴팍을 찔린 좀비는 내게 팔을 뻗으며 허우적거리다가, 발차기를 얻어맞고 뒤로 넘어갔다.
그리고 다시 자세를 잡고 풀스윙. 이번에는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환자복을 입고 있던 노인 좀비의 두개골이 수박처럼 터져 나갔다.
검은 뇌수와 뼛조각을 흩뿌린 좀비가 단번에 침묵했지만 그 너머에는 아직도 좀비 서넛이 더 있었다.
영화 속 주인공처럼 시원하게 총이라도 갈겨 봤으면 소원이 없으련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총을 쏘기로 마음 먹는다면 상대를 완전히 끝장낼 작정으로 밀어붙여야 하는데, 그 전에 상대의 수준을 봐야 하지 않겠는가.
방망이로 벽을 두들기고, 좀비들과 엎치락뒤치락 싸우면서도 ‘생각보다 할 만하다’라고 확신이 들 즈음, 나는 결국 거점 지정 스킬을 사용했다.
-현재 거점을 점령 중인 적성체가 너무 많습니다!
-‘강제 거점 탈취’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였습니다!
-강제 거점 탈취 조건 : 거점 지정 스킬 숙련 레벨 B- 이상.
-강제 거점 탈취 실패 시 거점 전쟁을 벌여야 합니다.
-거점 전쟁 실패 시 해당 거점 영구 탈취 불가.
“역시.”
-거점 전쟁 참가자 : 적성체 4,022체, 퇴역병 1명. 간호사 1명.
-거점 내 중립체 : 생존자 107명.
-거점 전쟁이 진행되는 장소는 양측 모두에게 ‘공평한’ 전장으로 전환됩니다.
-거점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경희대 교육협력 중앙병원’이 퇴역병 이승권의 임시 거점으로 지정됩니다.
-거점 전쟁 승리 조건 : 적성체 전원 처치 or 6시간 동안 사망 및 전장 이탈 없이 거점 내구도 50% 방어.
-거점 전쟁 패배 조건 : 임시 거점 내구도 50% 미만으로 하락 or 퇴역병 사망 혹은 전장 이탈.
-부가 승리 조건 : 거점 내 중립체 전원 생존.
-거점 전쟁 승리 보상 : 8,044 DNA 샘플 및 그에 상응하는 경험치. (DNA 샘플 x2 보너스)
-추가 보상 : 거점 내 중립체 생존 비율만큼 확률적으로 특전 스킬 혹은 아이템 지급.
-거점 패배 페널티 : 해당 지점에 영구적으로 거점 지정 스킬 사용 불가능, 거점 내 중립체 전원 사망.
“역시 생존자도 있군.”
좀비가 이렇게 많은데 생존자들이 숨어 있을 정도라면 필시 어딘가에 바리게이트를 쌓아 두고 숨어 있는 게 분명하다. 좀비들도 대부분 그 근처를 배회하고 있겠지.
곧 거점 전쟁이 시작되면서 건물 내부의 풍경이 회색빛의 반투명한 공간으로 바뀌었다.
내부와 외부가 일시적으로 격리되었으니 이제 자유롭게 지지고 볶아도 된다는 의미였다.
“병원에선 어떤 방위 무기가 나오려나.”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거점창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