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 (59)화 (60/227)

59화 정착기 (9)

“제가 좀 살펴볼게요!”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선 채성아는 환자들의 상태를 살폈다. 의사든 간호사든 기본적으로 환자를 살필 때 가장 우선시하는 동공 반사부터 확인했다.

펜라이트로 환자의 눈을 비춰 본 그녀는 다음으로 환자의 호흡 상태와 맥을 짚어 보거나, 가볍게 말을 걸어 보는 식으로 문진을 했다. 전문적인 의료 설비가 없는 이상 그 정도가 한계였다.

환자들의 상태를 살핀 채성아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창고 천장에 손전등을 매달아서 조명 대용으로 삼기는 했지만 분위기까지 밝아지지는 않았다.

“환자분들 모두 공통적으로 가벼운 탈수 증세를 보이고 전체적으로 기력이 쇠해지셨어요. 동공반사는 있는데 호흡이 가늘고 의식이 거의 없어요. 체온이 조금 높으니 몸살 증상이 있는 것 같은데, 당연히 감기나 독감은 아니겠죠.”

“역시 그 녹색 연기에 노출된 게 문제였다는 겁니까?”

경찰의 물음에 채성아는 확답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그럴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 시기라면 보통 감기나 독감, 폐렴 등을 의심하기 마련인데 여러분들의 증언에 의하면 환자분들 모두 녹색 연기에 노출됐다는 공통점이 있으니까요. 문제는 그 녹색 연기가 어떤 성분인지, 인간에게 어떤 작용기전을 가지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어서 당장은 대응하기 힘들어요. 원칙대로라면 일단 혈액 검사부터 하고, 그사이에 탈수와 영양 결핍을 막기 위해 수액 꽂고 상황을 지켜보는 게 정석이에요.”

문제는 이 판국에 환자들에게 투여할 수 있는 생리식염수나 포도당수액 같은 걸 어디서 구할 수 있느냐는 거다.

가장 기본적인 생리식염수조차 병원이나 약국이 아니면 구할 수 없는데, 바깥에 나가서 그걸 구해 오기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렵다.

사태가 일어나기 전에 피난민들이 편의점, 약국, 마트, 백화점에 집중적으로 몰려들어서 죄다 헤집어 놨을 테고, 좀비들이 한바탕 거리를 휩쓴 지금은 그마저도 멀쩡하게 남아 있을지 의문이다.

그리고 수액팩을 어찌어찌 구한다고 해도 문제인 게, 환자 모두의 팔뚝에 꽂을 바늘과 카테터가 부족하다.

결론만 말하자면 이들 모두 지금 멀쩡하게 운영 중인 병원에 데려가지 않는 한 응급 처치조차 힘들다는 얘기다.

‘민간에서 직접 제작할 수 있는 0.9% 생리 식염수도 극히 제한적인 용도로만 사용할 수 있지. 이건 힘들겠는데.’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지만 채성아도 당장 전문적인 의료 설비나 의약품이 없는 한, 극적으로 이 상황을 타개하는 것은 다소 어려워 보인다.

그녀가 가진 스킬 중에 응급처치와 영양수액 투여가 있긴 하지만, 스킬의 등급이 낮은 데다 아직 성장도 시켜 두지 않았기 때문에 한 번에 처치할 수 있는 환자가 매우 적다고 한다.

스킬의 긴 쿨타임까지 고려하면 차라리 직접 간호하는 게 더 나을 것이다.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이런 말 드려서 죄송하지만 당장은 환자분들을 병상에서 일어나게 해드릴 방법이 없어요. 하지만 환자분들의 탈수와 영양 결핍을 최대한 막을 수 있는 경구수액요법을 사용할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스킬을 사용해서 한두 명만 상태가 나아지면 왜 이 사람은 치료 안 해 주냐느니, 차별하는 거냐느니 같은 말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그녀도 스킬 사용은 자제하기로 한 것 같다.

“그…… 경구수액요법이라고 하신다면?”

“깨끗한 물과 소금, 그리고 설탕, 깨끗한 식기만 있으면 쉽게 만들 수 있는 수액이에요. 수액을 정맥주사로 투여할 수 없거나 급한 상황일 때 환자의 입으로 직접 수액을 투여하는 방식이죠. 다행히 그 정도라면 저희가 준비해 드릴 수 있을 것 같네요.”

우리는 이번 원정을 시작하기 전에 기본적인 물자를 인벤토리에 챙겨서 나왔기 때문에 그 정도 여력은 있었다.

채성아가 잠시 내 눈치를 살피기에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의사나 간호사 동료에게 눈앞의 환자를 무시하라고 하는 건 너무 잔혹한 데다, 스킬을 사용할 수 없다면 최소한 공평하게 환자들을 봐줘야 한다.

그걸 거부했다간 되레 동료인 내가 비호감을 살 우려가 있었다.

채성아가 마음 놓고 환자를 돌볼 수 있도록 우리는 잠시 자리를 비켜 주기로 했다.

“후우, 솔직히 말해서 처음엔 웬 정신 나간 침입자들인가 싶었는데, 이렇게 발 벗고 나서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 제 소개가 늦었지요. 저는 김해중부경찰서 산하 지구대에서 근무 중이었던 김진경 경장입니다.”

“이승권입니다. 딱히 어디 소속은 아닙니다.”

“초면에 이런 말 드려서 실례가 되는 건 압니다만, 혹시 군대는……?”

“군필입니다.”

“아.”

자신보다 조금 더 어려 보이는 내가 군필이라고 답하자 그는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가 한창 짬찌 순경으로 국내 치안을 담당하고 있을 때, 나는 북한에서 빨갱이들이랑 치고박고 있었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북진군이셨군요. 실례했습니다.”

“신경 안 씁니다. 누구한테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니기도 하고.”

이 나라는 내가 국가와 국민을 위해 희생했노라고 당당하게 자랑한들 대접해 주는 나라가 아니었다.

전쟁통에 부모 잃은 군인에게 부모가 죽었다는 필수적인 통보도 전역 전에야 해 준 미친 나라였다.

“그보다 혹시 사태 초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좀 알려 줄 수 있겠습니까? 경찰이시니까 민간인들이 모르는 뭔가를 알고 계실 것 같은데요.”

“그런 얘기 몇 번 듣긴 했습니다. 그리고 항상 같은 대답을 했었죠. 확실한 건 저도 모른다는 겁니다. 애초에 상층부에서 도로 통제와 치안 강화 명령이 내려온 것도 사태가 발발하기 불과 하루 전이었으니까요. 이승권 씨도 아시다시피 몇주 전부터 흉흉한 일이 많았잖습니까. 도시 곳곳에서 시위가 일어난다거나, 심하면 폭력 사태가 벌어진다든가 말입니다.”

“경찰들이 잘 관리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요.”

“그 많은 사람을 통제할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그때그때 신고받고 출동해서 혹시 모를 폭력 사태를 방지하거나 현행범을 체포하는 것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서울에서 불온한 소식이 들려오더니, 대뜸 상층부가 경찰 인력을 총동원해서 거리에 내보낸 겁니다.”

좀비 사태가 발발하기 전에 서울에서 지속적으로 폭동과 소요 사태가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은 나도 들었다.

물론 나와는 눈곱만큼도 상관없는 얘기라고 생각해서 집에 처박혀 있었지만.

“처음에는 다들 어리둥절하면서도 불안해했습니다. 진짜 사태가 심각해져서, 6년 전에 북한이 기습적으로 일으킨 2차 남북 전쟁처럼 또 한 번 난리가 나는 건가 싶었으니까요. 그리고 군대와 합동으로 도로 통제를 하게 되었을 때 확신했습니다. 뭔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됐다는 걸 말입니다.”

“군인들도 아는 게 없던가요?”

“그쪽도 우리처럼 명령 하나만 받고 부랴부랴 장비 챙겨서 나온 눈치였습니다. 민간인들이 최대한 다른 지역으로 빠져나가거나 들어오는 걸 막고, 폭력 사태가 발발하면 즉시 진압하라고 했다더군요.”

“그러다 사람 물어뜯고 잡아먹는 좀비들이 터져 나왔고요.”

“……예.”

김진경은 아직도 그때만 떠올리면 고통스러운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처음에는 또라이 같은 사이비 종교의 광신도나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사람들이 날뛰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더군요. 피난을 가기 위해 거리에 몰려나온 사람들을 덮치기 시작한 건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여기저기 뜯어먹히고 피 칠갑을 하고 있었다는 게 차이점이긴 했지만.”

나도 그때 거리에 있었으니까 안다. 지하철역에서 개미 떼처럼 좀비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오던 그 광경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때부턴 다들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누가 먼저 발포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총성이 울려 퍼졌고, 난장판이었죠. 멀쩡한 민간인과 좀비들이 뒤섞여 있어서 총을 제대로 쏠 수 없었고, 그만큼 진압이 늦어졌습니다. 현장 대원들을 지휘하는 사람들의 명령도 제각각이다 보니 누구는 발포하고, 누구는 머뭇거리고, 그러다 오인사격에 무고한 시민이 죽거나 좀비에게 방어선이 뚫리고…… 난리도 그만한 난리가 없었습니다.”

“…….”

나는 어째서 군대와 경찰이 도시에서 모습을 감출 만큼 철저하게 박살 났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거리에 쏟아져 나온 민간인들과 좀비들, 그 사이에서 도로 통제만으로도 애먹고 있던 군대와 경찰이 명령과 본능 사이에서 누군가의 목숨을 저울질해야 했던 것이다. 당연히 좀비들에게 밀릴 수밖에 없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됐죠? 동료 경찰이나 군대요.”

“경찰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방어선이 무너져서 좀비들에게 당하거나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군대는…… 제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장갑차와 트럭을 몰고 후퇴하는 것 같더군요. 아마 지금쯤 어딘가에 집결해서 재정비 중이거나 피난민들을 보호하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바로는 김해와 부산에서 후퇴한 군 부대가 김해공항에서 피난민과 흩어진 군 부대를 최대한 수습하고 틀어박혔다. 이 정도면 어느 정도 정보의 교차 검증이 된 것 같다.

“제 얘기는 이만하면 된 것 같군요. 이번에는 이승권 씨 얘기도 좀 들어 보고 싶습니다.”

“이쪽만큼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다. 전 집에서 배달 음식 시키고 넷플러스 보고 있었거든요.”

“……보통은 상황이 안 좋게 돌아간다 싶으면 밖에 나가서 물자 사재기를 하거나 그러지 않습니까?”

“사재기를 할 만큼 절실하진 않아서요.”

일평생을 안락하게 보내려고 집에 웬만한 건 다 갖춰 뒀는데 사재기는 무슨 놈의 사재기. 그나마 우리나라가 총기 소지 불법 국가라서 총 구하려고 밖에 나온 게 전부였다.

“그래도 지금은 저렇게 채성아 씨처럼 재주 있는 사람들을 하나둘씩 모아서 삼안동 방면에 생존자 거점을 마련해 두긴 했습니다. 여기까지 건너온 건 부족한 의약품이나 사람을 구하려고 온 거고요.”

생존자 거점이 있다는 사실에 김진경은 눈에 띄게 밝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모든 게 부족한 이곳에서 답답하게 갇혀 지내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더 안전한 생존자 거점에 의탁하는 게 낫다는 건 세 살 꼬마도 알 만한 사실이다.

“혹시…….”

“사람을 더 받아들일 생각 있느냐고요? 당연히 있죠. 하지만 지금 당장은 불가능하다는 거 알고 계시죠?”

“그건 그렇죠. 쓰러진 사람들을 그냥 방치하고 떠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러니까 저희가 경희대 중앙병원을 확보하고 다시 돌아올 때까지 버티셔야 한다는 겁니다.”

내가 백팩에서 전투식량 묶음을 꺼내 건네주자 그는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면서도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들었다.

며칠간 제대로 씻지도 못해 쿰쿰한 냄새까지 풍기는 그들이 제대로 먹거나 마셨을 리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대뜸 초면인 사람이 일단 물자부터 나눠주면 없던 신뢰도 생기는 법.

“안 그래도 저희 생존자 거점에서 일손과 치안 담당이 좀 부족하거든요. 최소한 어중이떠중이 집단이나 군대보단 나을 겁니다.”

“확실히 그래 보이는군요. 그런 사람들이라면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런 귀한 걸 선뜻 내줄 리가 없으니까요.”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를 배불리 먹이기엔 부족한 양이지만 아껴 먹는다면 며칠 정도는 더 버틸 수 있는 양이었다.

전투식량이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만든 것이기도 하고.

김진경과 대략적인 합의를 끝마쳤을 즈음, 창고 안쪽에서 채성아가 걸어나왔다. 경구수액 제작과 간단한 처치는 끝났는지 한시름 덜어낸 눈치였다.

“저 사람들까지 살리려면 결국 전문의약품과 의료설비가 필요하다는 건 김진경 씨도 알고 계실 겁니다. 우리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여길 확실하게 지켜 주세요.”

“뭐, 지금까지 쭉 그렇게 해 왔으니 그리 어렵지는 않을 거라고 봅니다. 그리고 원래는 경찰인 제가 솔선수범해서 위험한 일에 나서야 하는데…… 직접 도와드리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이곳을 지탱할 사람과 물자는 턱없이 부족했고 경찰인 그의 책임은 막중했다.

사실 세상이 이렇게 된 마당에 직업 정신이고 책임감이고 다 내팽개쳐도 뭐라 할 사람은 없겠지만, 김진경은 오히려 젊은 경찰이라 그런지 꼰대들보다는 더 나은 면이 있었다. 내 생존자 거점에는 저런 사람이 필요하다.

때마침 1층에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다른 생존자가 녹색 연기가 완전히 걷혔다는 소식을 알려 주었다. 농도가 옅은 만큼 빠르게 사라지는 듯했다.

우리는 주변을 돌아다니는 좀비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비상문을 열어 밖으로 나왔다.

김진경과 그 동료들은 건투를 빈다며 응원까지 해 주었다. 빈말이라도 고맙긴 하지만 딱히 버프 효과는 없었다.

병원도 확보하고, 중간에 만난 사람들도 챙기고, 정체불명의 녹색 연기와 혹시 모를 변종 좀비까지 신경 써야 한다니. 쾌락은 없는데 책임만 점점 더 막중해지는 것 같다.

‘일하기 싫다.’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내 몸은 솔직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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