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정착기 (5)
여행 동아리 넷밖에 없어 어딘가 휑하고 삭막한 느낌을 주었던 활천초는 사람들로 북적거리게 되었다.
활천초등학교는 나의 전초 기지이자 생존자들의 중간 거점이며, 적당히 넓은 부지와 다양한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건물 그리고 방어와 생존에 유리한 구조적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까지라면 흔하디 흔한 B급 거점 중 하나였겠으나, 내 거점 지정 스킬의 성장이 빛을 본 것은 비단 자택뿐만이 아니었다. 당연히 활천초에도 내가 미처 살피지 못했던 자잘한 변화가 있었다.
우선 뒷문과 정문을 이어 주던 자그마한 담장은 생존자들을 보호하는 커다란 쇠말뚝 담벼락으로 거듭났다. ‘학교’라는 거점의 특성상 담벼락의 가치를 스스로 이해한 것일까?
어쨌든 튼튼한 벽돌 담장은 건장한 성인 남성도 쉽게 기어오를 수 없는 3m 높이까지 커졌으며, 그 위로는 누구도 쉽게 타넘을 수 없게끔 날카로운 쇠말뚝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이 시점에서 나는 20mm 발칸포가 어째서 굳이 학교 건물 옥상에 배치된 것인지 이해했다.
담벼락이 높다면 적들이 이 거점을 공략하기 위해 진입할 방향도 일정하지 않겠나. 옥상에 설치된 발칸포는 이 거점의 특성과 미래를 보고 설계된 것이 분명했다.
반면, 꽉 막힌 담벼락보다는 외부를 살필 수 있는 철책이 더 나았을 수도 있다고 누군가는 불평할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간 멀쩡한 시각으로 먹잇감을 찾는 좀비들에게 너무 많은 어그로가 끌린다.
실제로 활천초가 좀비들의 주요 습격 대상이 되지 않은 것도 부지의 대부분이 담벼락으로 막혀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활천초에서 격전을 벌인 이후로 더 이상 총성을 내지 않은 이유도 한몫했고.
결과적으로 후각이 없는 좀비 놈들을 자극하는 건 빛과 소음뿐이니, 높고 튼튼한 담벼락은 좀비와의 상호 간섭을 달가워하지 않는 생존자들에게 최고의 보호 수단 중 하나였다.
다음으로 눈여겨볼 것은 비옥해진 토지다. 마치 당신이 지정한 생존 거점 내에서 자급자족하며 유유자적 살아 보세요, 라는 그럴듯한 광고 문구가 나타난 것 같았다.
활천초의 특정 부지. 정확히는 농사를 짓고 가축을 돌볼 수 있을 만한 장소에 한해서 질 좋은 토양으로 바뀐 것이다. 우물까지 있었다면 금상첨화였을 텐데 아쉽게도 우물은 없었다.
“허어, 저 마트도 그렇고 여기도 진짜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는구만. 옥상 물탱크에 물이 좀 넉넉하게 남아 있어서 그런가?”
재료와 사람만 있다면 하우스 한두 개쯤은 금방 지을 수 있다는 40대 농부 김만배 씨가 신기한 눈으로 수도꼭지를 바라보았다.
곧 엄동설한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수도관이 동파하거나 물이 말라붙은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시원하고 깨끗한, 너무 투명해서 보석이라고 착각해 버릴 듯한 물이 끝도 없이 콸콸 쏟아져 나오고 있었으니 당황한 것이다.
“마트에서 가져온 연장 케이블이 있으니까 그걸 연결하면 내부 전기를 끌어다 쓸 수 있겠지. 토양 상태도 좋으니까 하우스 짓고 내부 온도 조절까지 해주면 당장 파종을 해도 되겠어.”
“하우스에서 가장 가성비 좋게 키울 수 있는 작물은 뭐가 있겠습니까?”
“돈 좀 만지고 싶어 하는 양반들은 죄다 베리나 수박, 약초 등을 키워 내곤 했지. 샐러드에 쓰이는 채소류도 인기가 제법 많았고. 그런데 가성비를 따지면 역시 구황작물만 한 게 없어. 이만한 면적으로 밀이나 쌀, 옥수수 같은 걸 키워 봐야 지력만 낭비할 뿐이지.”
“확실히 감자나 고구마 같은 게 싸게 먹히긴 하죠.”
“꼭 감자나 고구마를 말하는 건 아니지만, 일단 그것들도 후보는 맞어. 이렇게 면적이 넓지 않은 곳은 오히려 김장무나 배추가 더 싸게 먹히기도 하니까.”
나는 부드럽게 흩어지는 흙을 매만지면서 그의 말을 차분히 경청했다. 척박한 북한 땅은 대부분 황무지나 다름없었는데, 이곳은 비록 면적이 그리 넓지 않아도 토양 상태만큼은 최고였다. 뭘 키워도 최소 평타는 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뭘 키우든 중요한 문제는 바로 종자를 구해야 한다는 건데, 자네가 말한 감자는 지금 종자 찾아내기가 하늘에 별 따기야. 대부분 여름 장마철이 끝나는 8월쯤에 가을 감자 파종을 하는데. 자네도 알다시피 하필 이 시기에 난리가 터져 버렸잖나.”
김만배 씨는 안타깝다는 듯 혀를 쯧쯧 찼다.
만약 시기가 좀 더 잘 맞아떨어졌으면, 예를 들어 좀비 사태가 몇 달 더 일찍 일어났다면 막 수확이 끝난 봄 감자들을 어떻게든 구할 방법이 있었을 거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가을 감자는 이미 8월쯤에 일제히 심어졌고, 본격적인 추위가 다가오는 이 시점에 누구의 손길도 받지 못한 채 대부분 땅속에 잠들어 있다. 미리 수확된 것들이 있다고 해도 높은 확률로 썩었거나 그 수량이 매우 적을 것이다.
“어차피 농사는 길게 보고 하는 거니까 너무 괘념치 말어. 농가 창고나 하우스를 털든가, 아니면 씨앗부터 착실하게 키워 내는 방법도 있으니까. 우선은 하우스부터 만들어 보고 생각을 하자고.”
그는 하우스만이 아니라 닭 같은 효율 좋은 가축을 키울 수 있는 양계장을 짓는 것도 적극적으로 검토해 봐야겠다고 중얼거렸다. 세상은 이미 망했고, 자신의 능력을 쓸 만한 곳이 달리 없으니 최대한 뭐라도 해보려는 의지가 엿보였다.
나는 인벤토리에 보관해 둔 대량의 건설 자재를 이곳에서 가까운 체육 창고에 옮겨 두고, 김만배 씨와 함께 일할 사람들을 몇 명 추려서 그에게 붙여 주었다.
솜씨 좋은 장정 몇몇이 연장 들고 들러붙으면 하우스나 축사 하나둘쯤 만들어 내는 건 일도 아니겠지. 내가 할 일은 그들이 키울 수 있는 작물 종자와 가축을 구해다 주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생존 관련 물자를 판매하는 상점창에 아직 재배할 수 있는 작물의 종자 리스트는 존재하지 않았다. 내 생존 일수가 늘어난다면 언젠가는 상점창에도 그런 종류의 상품들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김만배 씨에게 하우스와 축사 관련 업무를 맡겨 둔 나는 학교 내부로 돌아와 다른 생존자들을 살폈다.
다행히 내게 미리 귀띔을 받은 여행 동아리 회원들은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무작정 총구를 들이밀고 폭력과 권위를 내세우는 대신, 이 거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며 협조를 구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물자는 어느 정도 비축되어 있다느니, 몇 명 정도 수용할 수 있다느니, 좀비 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자위 수단이 존재한다느니 등등.
생존자들이 의심하지도, 그렇다고 흑심을 품지도 않게끔 적절한 선을 유지하면서 ‘이 시국에 여기보다 살기 좋은 거점은 없다’는 여론을 형성해 나갔다.
“저 사람들이 승권 씨가 말했던 여행 동아리 회원분들이죠? 아까 가볍게 통성명을 했었는데 괜찮은 사람들인 것 같더라고요.”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채성아가 각종 의약품과 붕대, 처리 도구 등이 들어 있는 구급 키트를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아픈 사람이 있던가요? 보이는 대로 애들이 좀 순해서 어디 아파도 티를 낼 것 같지 않아서요.”
“통성명을 하면서 가볍게 살펴봤는데, 이 시국에 살아남은 생존자치곤 굉장히 컨디션이 좋아 보였어요. 영양 결핍이나 수면 장애도 없어 보이고 이 시기에 흔하게 걸리는 감기나 계절성 전염병인 독감 증상도 없었어요. 애초에 정말로 독감 환자가 있었다면 저렇게 멀쩡할 수 없었겠죠.”
타미플루와 리렌자(Relenza) 로타디스크도 구하기 힘든 이 시국에 2020년대까지 아득바득 살아남은 독감에 한 번 걸려 봐라.
일주일 내내 끙끙 앓다 간신히 기운이라도 되찾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까딱 잘못하면 골로 갈 수도 있다.
막말로 좀비야 물리지만 않으면 감염도 되지 않지만, 전염병은 위생 관리와 격리에 실패하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퍼져 나가기 마련이다. 특히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이런 장소일수록 더더욱.
“승권 씨가 미리 말을 해 둔 것도 있겠지만, 세상이 이렇게 되기 전까지만 해도 다들 중국발 전염병에 시달려서 그런지 위생 관념 하나는 철저한 것 같더라고요. 식료품이나 의약품을 다루는 것도 조심스럽고, 넓은 건물인데도 꼼꼼하게 청소하는 걸 보니 거주 공간의 청결도 유지를 신경 쓰는 것 같았어요. 확실히 거점 하나를 맡겨 둘 만하네요.”
“다른 건 몰라도 사람 보는 눈 하나는 뛰어나다고 자부하거든요.”
사람을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다 보면 싫어도 익히게 되는 것이 바로 안목이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새로운 사회를 재건할 역량과 의지가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을 거점 인원으로 받아들일 생각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하나부터 열까지 그들을 다 챙겨 주는 베이비시터가 되고 싶다는 건 아니다.
자급자족, 더 나아가서 자력갱생, 최후에 이르러서는 자주생존. 내 역할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생존자 모두가 그 길로 향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발판을 마련해 주는 것뿐이다.
정말 귀찮고,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도 알 수 없으며, 거기에 필요한 물자나 인력 요구량은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에 비례해 기하급수적으로 치솟는다. 그럼에도 해야 하는 일이라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거다.
‘그러니 이 판국에 효율을 안 따질 수가 없지.’
사람이 기본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의식주는 누군가가 요술지팡이를 뿅 휘두른다고 갑자기 생기는 게 아니다.
막말로 비바람 막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살 수 있다고 해도 식과 주를 확보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많은 품이 든다.
원자재, 생산시설, 생산자, 유통자, 판매처, 자잘하게는 집 앞까지 배송해 주는 쿠팡맨과 그런 서비스까지 이용할 수 있는 통화가 있어야 해결 가능하다.
한데 지금 주위를 둘러보면 어떤가?
피난을 떠나기 위해 거리로 뛰쳐나왔던 사람들이 1차로 휩쓸고, 좀비 떼가 2차로 휩쓸고, 그 사태로부터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3차까지 알뜰살뜰하게 털어먹고 남은 것들뿐이다.
작은 편의점이나 약국, 동네 마트 같은 건 이미 판매대가 텅 비었다. 미처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어느 정도 물자가 남아 있는 곳은 좀비들 때문에 접근할 수 없다.
진짜 다 때려치우고 싶다. 이승권은 원래 이렇게 바보같이 성실하고 정직하게 일만 하는 남자가 아닌데.
“난방 시스템과 공기정화장치도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으니까 다들 건강 관리만 잘 한다면 갑자기 거점 내에서 계절성 전염병이 퍼질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다만…….”
“만일에 대비해서 전문적인 의학 지식과 기술을 보유한 사람, 그리고 전문의약품과 의료도구가 필요하다는 거죠?”
“……그렇죠. 제가 각성을 한 것과는 별개로 직업이 간호사이다 보니 이 분야에서 전문의를 대체할 수는 없어요. 영화 같은 거 보면 수의사가 의사 역할을 대신 하는 경우도 있다지만, 실제로 간호사의 업무는 응급 처치와 환자 간호, 수술 보조 정도거든요.”
진료, 수술 집도, 처방까지. 의사는 간호사와 약사 모두를 대체할 수 있지만, 간호사와 약사는 의사를 대체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확실히 바깥이랑 안은 다르네요. 내가 군에 있을 때는 어디 아프면 무조건 진통제나 감기약, 다치면 빨간약만 발랐는데.”
“하하…… 농담이죠?”
“진짠데요.”
순간적으로 ‘대한민국 군대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아쎄이!’를 외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아무튼 거점 다음은 물자, 물자 다음은 사람, 사람 다음은 이제 의약품 차례다. 물론 물자와 사람을 더 구할 수 있으면 좋고, 쓸 만한 거점까지 손에 넣는다면 더더욱 좋다.
세상 일이 그렇게 쉽게 안 풀려서 문제지.
“이런 구급 키트가 아니라 빠방한 전문의약품과 의료도구를 구하려면 역시 번화가까지 나가야겠죠?”
“김해는 특이하게 옆동네인 창원이나 부산과 달리 이상할 정도로 대형종합병원이 없으니까요. 그나마 규모가 제일 큰 병원이 경희대학교 교육협력 중앙병원인데…….”
채성아는 말끝을 흐리며 난색을 표했다. 그 이유인즉슨 경희대 중앙병원은 지금 좀비들이 너무 많아서 발 디딜 틈도 없다는 김해 외동 분성로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었다.
사태가 터지자마자 내가 절대로 그쪽으로는 가지 말자고 스스로 못 박아 둔 거리였다.
그 주변에 몇 개의 지하철역과 버스터미널, 그리고 아파트와 대형 마트, 백화점, 기타 고층 건물이 있을까?
정답을 알아도 굳이 손들 필요는 없다. 나도 대충 알고 있다. 인생 조지기 딱 좋은 곳이란걸.
심지어 그걸 다 제쳐 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바로 인제대학교 아래쪽에 위치한 또 다른 번화가와 주택가가 나란히 붙어서 거대한 장벽을 형성하고 있었으니까. 거기도 좀비 대가리 숫자 세는 데만 한세월은 걸릴 거다.
멍청한 이승권. 이 척박하고 팍팍한 김해가 아니라 차라리 저 위에 있는 울산이나 포항 쪽에 자리를 잡았어야지!
나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애써 억누르면서, 어떻게든 활천초에서 병원까지 이동할 수 있는 루트와 성공 확률을 계산했다.
‘혼자서 움직인다면 아주 못할 것도 없지만, 나는 의료업계 종사자가 아니다. 관련 분야의 전문가를 최소 1명 이상 대동해야 돼.’
현지에서 인재를 영입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건 확률이 너무 낮았다. 내가 알고 있는 게 맞다면 병원의 크기 유무와 관계 없이 그곳에 살아 있는 사람이 있을 가능성은 한없이 0에 수렴했기 때문이다.
즉, 좋든 싫든 채성아와 함께 움직여야 한다.
“차량을 사용하지 않고 좀비들이 우글거리는 도심 한복판에서 강행군, 할 수 있겠어요?”
“할 수 없어도 해야죠. 승권 씨 아니었으면 저도 오래 버티지 못했을 테니까요.”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어느 순간 그것을 자신의 의무라고 착각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럼 인벤토리에 최소한의 물자만 남겨 두고 싹 비워 둬요. 내일 새벽 일찍 출발해야 하니까요.”
나도 인벤토리에 가득 쌓아 둔 물자 대부분을 활천초에 쌓아 둘 생각이다. 병원에서 챙겨야 할 것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많고 무거울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