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 (54)화 (55/227)

54화 정착기 (4)

최초의 ‘사태’가 서울에서 발발했을 때, 대한민국 국군은 있으려야 있을 수 없는 뒤치기에 당해 뒤통수가 얼얼한 상황이었다.

전쟁, 점령, 그리고 전후 복구를 위해 대부분의 군대와 현장 기술자들이 북한 땅에서 한창 지지고 볶는 동안 서울이 뻥 터질 줄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차라리 잠재적 적국인 중국이나 러시아가 북한 땅을 갖지 못한 것에 대한 반발 심리로 무차별적인 공격을 가했다면 모를까,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질병 환자’들에 의해 천만 인구 도시가 날아갔다니. 처음에는 다들 그 소식을 전해 듣고 철 지난 만우절 농담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금세 전국적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질병 환자’, 인터넷에서 들려오는 말로는 소위 좀비라 불리는 것들이 급속도로 퍼져 나가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안 그래도 부족한 인구에 현역병과 예비군을 박박 긁어 전장에 밀어넣었던 국군은, 수만에서 수십만 단위로 몰려드는 좀비 군단을 막아 낼 방법이 없었다. 총을 미친 듯이 쏘고 포격을 갈겨 봤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보급로가 차단된 탓에 각 군부대는 강한 화력을 짧게 투사한 뒤 속수무책으로 밀리기만 했다. 반면 좀비들은 감염되지 않은 사람만 있다면 언제든지 동족을 늘릴 수 있었다.

수만이 죽고 나면 다음은 수십만, 수십만이 죽고 나면 다음은 수백만. 마치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국방군이 맞서야 했던 소련군의 인해 전술을 보는 듯했다.

애초에 수도방위사령부가 서울 통제와 좀비 진압에 실패한 시점에서 타 지역 군 부대에게 가망은 없었다. 보급은 둘째 치고 싸울 인원이 턱없이 모자랐으니까.

종전 선언을 한 뒤였기 때문에 뒤늦게 동원령을 다시 선포해서 강제 징집을 하는 것도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무질서하게 어디론가 도망쳐 가는 민간인들을 최대한 보호하는 것뿐.

“식수 사정이 좋지 않다고?”

“최대한 아끼고는 있습니다만, 정수 처리 시설의 가동 중지와 수도 시설 파괴 문제가 겹치면서 더 이상 외부에서 식수를 끌어올 방법이 없습니다. 현재는 보급 부대에서 미리 비축해 둔 식수를 쓰고 있습니다만, 그마저도 일주일을 가지 못할 것이라고…….”

“내가 알기로 부산에 담수화 처리 시설이 있었던 것 같은데…….”

“예, 바닷물을 정수하는 시설이 있기는 합니다만, 안타깝게도 그쪽은 작전 수행 불가 지역이 되었습니다. 현장에서 몇 번이고 그 괴물놈들을 밀어내려고 해 봤는데, 총성이나 폭음이 울려 퍼지면 더 많은 수가 모이는 것을 확인하고 포기했습니다.”

“후우…….”

김해 공항에 마련된 한 사무실을 자신의 임시 집무실로 삼은 사내가 한숨을 토해 냈다.

그의 어깨에 부착된 계급장은 별 2개인 소장, 부산 해운대 쪽에 자리 잡고 있는 53보병사단을 지휘하는 김학렬 사단장이었다.

다만, 사단장이라는 직책이 무색하게 그가 현재 지휘하고 있는 군 부대의 규모는 잘 쳐 줘도 1개 연대 수준이었다.

어떻게 단(團)급 지휘관이 졸지에 대(隊)급 지휘관으로 격하되었느냐고 한다면, 경상남도 일대를 초토화시킨 결정적인 사태에 가장 먼저 휘말린 군 부대가 바로 53사단이었기 때문이다.

족히 1만이 넘는 감염자들을 일본에서부터 싣고 온 대형 크루즈선이 부산항의 정지 신호를 무시하고 그대로 항구에 선체를 꼴아박았다. 그리고 좁은 크루즈선에 갇혀 있던 좀비들이 일제히 부산에 발을 디디면서 재앙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멋모르고 사고를 해결하기 위해 나섰던 항구 관계자와 신고를 받고 출동한 소방관들이 어찌할 새도 없이 휩쓸렸다.

순식간에 머릿수를 불린 좀비들은 그대로 부산항을 벗어나 핵심 번화가와 해운대로 몰려들었다. 당연히 이렇다 할 만한 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민간인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고, 뒤늦게 출동한 경찰도 전멸을 피하지 못했다.

53사단…… 53사단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한다. 전국적으로 크고 작은 소요 사태가 일어나면서 각 군부대는 상시 경계 태세를 유지 중이었으니까.

부산이 공격받고 있다는 소식을 포착하자마자 즉시 출격했으나 좀비들은 압도적인 머릿수로 군 부대의 화력을 찍어눌렀다. 보통은 그 반대가 되어야 정상인데, 고기방패를 내세워 가며 악착같이 밀려드는 좀비 군단의 저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최대한 쏴 죽이고, 터뜨려 죽이고, 짓뭉개 죽이면서 민간인들의 피난을 도왔다. 그리고 5공중비행단과 합류하여 사상구를 필사적으로 지키다가 결국 김해공항으로 물러났다.

저 반대편에선 함안군이 터진 탓에 김해로 건너온 39보병사단이 있었으나, 운 나쁘게도 그쪽은 김해 번화가 한복판에서 터진 감염 폭발과 맞딱뜨려 지휘부가 궤멸, 잔존 병력만이 간신히 김해 공항으로 합류했다.

그렇게 5공중비행단을 제외하면 김학렬 소장이 이끌고 있는 육군의 실질적인 머릿수는 2개 연대. 이마저도 김해와 부산을 잇는 모든 다리를 폭파시켜서 간신히 지켜 낸 숫자였다.

그런데 이제는 식수가 부족하다고 한다.

‘진짜 부족한 건 싸울 수 있는 군인과 총알인데…… 돌아 버리겠군.’

53보병사단은 그렇다 치자, 39보병사단은 대체 왜 함안군에서 김해로 건너오려 했는지 모르겠다. 그냥 주요 통행로만 차단하고 알 박기에 들어갔어도 꽤 많은 군인과 민간인을 살릴 수 있었을 텐데.

그냥 다 모르겠다. 김학렬은 얼마 남지 않은 머리털을 쥐어뜯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으며, 자신 앞에 서 있는 중령 계급의 작전참모와 군수참모를 바라보았다.

그들도 언젠가는 별을 달 수 있을 거라는 희미한 희망을 품은 채 염병할 군 생활을 아득바득 버텨 온 사람들이겠지만, 현재 상황이 답이 없어 보이는 것은 김학렬과 똑같았다.

“공군 쪽은 어떤가?”

“비행단장님께선 당장 이번 겨울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도 모르겠다며 난감해하셨습니다. 식수도 식수지만 곧 본격적인 겨울이 다가오면 해안 도시인 김해는 난방시설 없이 버티기 힘들 거라고…….”

“되는 게 하나도 없군.”

그들이 군인들만 책임지고 있었다면 이것보다는 사정이 좋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책임지고 김해와 부산에서 민간인 소개 작전을 벌이면서 꽤 많은 민간인들을 김해 공항에 수용하게 되었고, 덕분에 매일 소모되는 식수와 식량이 어마어마했다.

보급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면 모를까, 군 부대와 공항의 대피소에 비축되어 있는 모든 비축물자를 풀어도 등골이 휠 지경이었다.

씻을 물도 없는 마당에 마실 물을 구하려면 다시 좀비들이 득시글거리는 김해나 부산의 시내로 기어들어가서 직접 물자를 징발해 와야 한다.

누가? 군인들이.

어떻게? 목숨 걸고 어떻게든.

언제? 지금이라도 당장.

왜? 그럴 의무가 있으니까.

“그…… 외람되지만 바깥에서 물자만 구해 오는 전문적인 자원수집팀을 따로 꾸리는 건 어떠십니까?”

군수참모가 빠듯한 물자 상황에 더는 참을 수 없었는지 조심스레 진언했다. 휘하의 장교나 보급관들이 죽겠다고 아우성을 쳐대니 결국 그런 소리를 하게 된 것이리라.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자면 김학렬은 그 말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휘관 입장에서 대놓고 누군가를 희생시키자는 말을 직접 꺼내는 건 굉장히 힘들었으니까.

“좋은 방법이 있겠나? 자네도 봐서 알겠지만 우리 애들 대부분은 겁을 먹은 상태야. 이런 마당에 누가 섣불리 나서서 그런 위험한 임무를 맡으려 하겠나?”

“사태 초기에 유독 생존율이 높았던 부대나 피난민 행렬 사이에 섞여 있던…… 그, 자신들을 각성자라고 부르는 이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니 그런 사람들이 있었지. 민심이 어수선해질까 봐 따로 격리해 뒀다고 했었나?”

“예, 갑자기 괴력을 발휘하거나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움직이거나, 신비한 재주를 부리는 사람들은 모두 격리해 두었습니다. 그들에게 무기와 수송차량을 주고 내보내면 물자를 구해 오지 않겠습니까?”

“복종하기 싫어서 도망칠 가능성은?”

“이 피난처에 가족이나 연인이 있는 사람들만 뽑으면 됩니다.”

“인질을 잡겠다는 건가?”

“물론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그들에게 국방의 의무를 강조하면서 가족이나 연인을 보호하고 먹여살려야만 다시 사회를 복구할 가능성이 생긴다는 제스처를 취하면 됩니다. 그리고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면 남들보다 조금 더 나은 대우를 해 주면서 차근차근 다른 각성자들에게도 임무에 자원하게끔 동기를 부여해 주는 겁니다.”

군대에서 구르고 구른 장교다운 발상이라고 할까. 아랫것들을 어떻게 부려 먹어야 잘 부려 먹었다고 소문이 나는지 훤히 꿰고 있는 듯한 악질적인 발상이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손가락질 받고 욕먹을지언정 지금 그들에겐 달리 방법이 없었다. 2개 연대와 지상에선 큰 도움도 안 되는 공군비행단을 가지고 뭘 하겠는가? 좀비 떼에게 다 같이 사이좋게 뜯어먹히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일단은 물자를 최대한 비축하면서 힘을 모을 때입니다. 반격도 힘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자를 비축하고, 저 괴물놈들의 정확한 규모와 습성을 파악하고,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을 정예군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실패하면 뒤가 없군.”

반대로 말하면 그것 외에 달리 선택지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좋아, 승인하지. 작전참모가 책임지고 자원수집팀을 따로 만들어서 운용해 봐. 1순위로 확보해야 하는 물자는 식수와 식료품, 그리고 의약품, 방한용품과 군수물자는 일단 2순위로 두지.”

아주 잠깐 양심의 가책을 느끼긴 했으나, 그도 결국 천생 대한민국 군인이었다. 아랫것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희생을 강요하기로 방침이 결정되었다면 그 뒤엔 일말의 주저함도 없었다.

오히려 나중에 자신을 물어뜯을 인권위원회나 군 감찰관이 사라진 게 천만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 * *

“재료와 인력만 있다면 하우스를 설치하고 텃밭을 가꾸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지.”

한 중년 농부의 말에 나는 일단 한시름 덜었다. 요즘은 쓸데없이 넓고 관리하기 힘든 논밭보다 하우스 농사가 대세였는데, 다행히 눈앞의 아저씨는 그걸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 원리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젊은 친구 주장대로라면 활천초등학교에서 물이랑 전기는 원없이 쓸 수 있다 이거 아닌가? 그럼 답 나왔지. 하우스 농사의 핵심은 일정한 온도 유지랑 충분한 농업용수인데, 그게 다 준비되어 있으니 벌써 문제의 반은 해결됐다는 거 아닌가? 이제 하우스를 만들 재료랑 키울 작물의 종자, 그리고 비료나 농약 정도만 있으면 되겠구만.”

나는 즉시 상점창을 열어 DNA 샘플로 구매할 수 있는 건설 자재 중에서 하우스 제작에 필요한 재료들을 구입했다. 최근에 겁없이 이곳을 노린 각성자들과 대량의 좀비 떼를 처치하면서 DNA 샘플을 꽤 획득해 두었다.

마지막으로 확인했던 DNA 샘플이 7690이었는데, 이것저것 구입하느라 사용했던 것을 다시 채워넣은 덕분에 8천 정도 남아 있었다.

“그 외에 필요한 가재도구나 작업 도구들은 마트에서 필요한 만큼 챙겨 가시면 되고, 하우스 제작에 필요한 건설 자재는 제가 따로 준비해 드릴 겁니다.”

거점창을 이용하면 각 거점 내에 존재하는 모든 자재나 재료들을 자동적으로 수거해서 사용할 수 있었는데, 이를 반대로 이용하면 내가 확보한 자재나 재료를 특정 거점으로 옮길 수도 있었다.

물론, 이 편리한 기능은 거점창이 ‘제작 아이템’으로 인정한 것들만 해당한다. 특정 사물이 제작 아이템으로 인정되는 조건은 꽤 까다로웠는데, 우선 기본적으로 사용된 적이 없는 완제품이거나, 제작 목적으로 가공된 제품이어야 했다.

해안가에 널려 있는 흔하디 흔한 모래를 퍼다 나른다고 제작 아이템이 되진 않지만, 공사판에 널려 있는 멀쩡한 시멘트 포대는 제작 아이템으로 인정이 되는 것처럼.

예외가 있다면 상점창에서 구입한 것, 혹은 내가 거점 지정 스킬로 확보한 거점이 리뉴얼 되면서 자동적으로 ‘완제품’이나 ‘가공품’으로 리뉴얼되는 제작 아이템들이었다.

바로 이것 때문에 가능한 많은 물자나 재료를 얻을 수 있는 특정 시설들을 다음 거점으로 삼고자 하는 거다. 거점 지정 스킬을 한 번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압도적인 이득을 취할 수 있으니까.

나는 근처에서 구해 온 차량에 사람과 물자를 실어서 활천초로 이동했다.

이 근방은 좀비가 떼거지로 몰려다니는 빈도가 적어서 생존자들끼리 이동해도 큰 문제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필드 요원인 나와 채성아가 호위하는 편이 안전했다.

그래야 우리 산하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우리를 ‘중요한 사람’으로 인식할 것 아닌가.

‘누가 보면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이라도 하는 줄 알겠군.’

사람을 모으고, 터전을 가꾸고, 각종 재료와 물자를 이용해서 집단을 성장시키고, 그렇게 이 구역 최강으로 거듭나 온갖 사이다 행위를 일삼는 것.

집구석에 처박혀서 평생 넷플러스나 보다 늙어 죽는 게 꿈인 이승권의 취향은 절대 아니었다. 싫고 귀찮아도 해야 한다는 게 문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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