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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역병의 아포칼립스-48화 (49/227)

48화 생존기 (48)

“형! 애들 돌아왔어요!!”

아래쪽에서 뛰어올라온 한 청년의 외침에 원탁 앞에 모여 앉아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리로 향했다.

가장 상석에 있는 남자는 중간에 회의의 흐름이 끊긴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는지 인상을 살짝 찡그렸지만, 이내 자신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정보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먼저 들어 보기로 했다.

인제대학교 본관 입구를 지키고 있던 초병들과 함께 올라온 세 명의 청년은, 각기 다른 과에서 한 명씩 투표로 뽑아 차출했던 정찰꾼이었다.

그들은 처음엔 자신들이 저 위험천만한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영 못 내켜 했지만, 절대다수가 휘두르는 민주주의의 폭력은 극소수가 당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의외로 빨리 다녀왔네? 적어도 며칠은 걸릴 줄 알았는데.”

“처음 마트 앞에 도착했을 때는 저희 말고도 모여 있는 사람들이 제법 많길래 세력 다툼을 우려해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몇 시간 정도 지켜보니까 대부분 평범한 피난민들인 것 같더라고요. 때마침 마트를 점거한 사람이 나타나서 안쪽을 살펴볼 수 있었어요.”

“내부는 어땠는데? 몇 명이나 지키고 있었고? 건물의 안전성이나 물자의 수량은?”

“천천히 물어. 얘가 지금 말하려고 하잖아.”

평소에 운동을 많이 한 듯, 근육질이 남달라 보이는 청년이 기관총처럼 다다다 캐묻자 상석에 있던 남자가 부드럽게 제지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그의 말만큼은 무시할 수 없었는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들이 사람을 바깥으로 내보내고, 보고를 받는 입장이 된 것은 현재 캠퍼스 내에서 교수나 외부인을 제외하면 최연장자라는 점도 있지만, 그들이 권력을 꿰찬 진짜 이유는 갑작스럽게 얻게 된 신묘한 힘 때문이었다.

사태 당일. 거리에서부터 온갖 외부인과 인간의 형태를 한 괴물들이, 그나마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인제대 부지 내부로 몰려들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대학생 몇 명이 괴물들을 처리하고 모종의 힘을 얻게 된 것이다.

“거짓말을 하는 거라면 티가 날 테고, 보고 내용이 부실하면 그에 맞는 벌을 주면 돼. 급할 거 없잖아?”

마치 대놓고 들으라는 듯 쉽게 말하는 그의 태도에 정찰꾼 세 명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일단 건물 외부적으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였어요. 한바탕 소란이 있었다는 것치곤 주변 도로 타일이나 아스팔트가 조금 깨져 있을 뿐, 건물은 흠집 하나 없이 멀쩡하더라고요.”

“특이사항으로는 건물에서 조금 떨어진 장소에 시체를 몇 구 걸어 놨다는 것 정도? 그건 딱 봐도 약탈자들에 대한 경고용인 것 같았어요.”

“마트 출입문은 거대한 유리벽으로 철저하게 막혀 있어서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어요. 슬쩍 밀거나 발로 차 봤는데 꿈쩍도 안 하더라고요. 지하 주차장도 한 번 둘러봤는데 마찬가지로 셔터가 내려가 있었고요.”

이어지는 세 명의 보고에 ‘힘’을 가진 사람들은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인상을 쓰는 등 다양한 반응을 보여 주었다.

“어떻게 생각해 정수야?”

근육질 남성의 질문에 상석에 앉아 있던 남자, 최정수가 안경을 손가락 끝으로 살짝 밀어올리며 대답했다.

“아직 말 안 한 게 있는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빨리 돌아온 거야? 혹시 외부에서 대충 훑어보고 돌아온 거라면…….”

“그, 그건 절대 아니에요! 저희도 다른 피난민들이랑 같이 섞여서 안으로 들어가긴 했는데…….”

“했는데?”

“다른 피난민들한테처럼 저희의 인적사항을 캐묻고 안쪽으로 들여보내더니 물자 조금 나눠주고 바로 내쫓더라니까요? 덕분에 1층도 제대로 못 둘러보고 그대로 쫓겨나왔어요.”

“나가란다고 얌전히 쫓겨나왔어?”

“마트를 점거하고 있는 사람은 저희보다 몇 살 많아 보이는 남녀 두 명뿐인 것 같았는데, 도저히 일반인 같지가 않았어요. 들고 있는 무기 하며, 분위기도 그렇고…….”

하기야 좀비들을 싹 쓸어서 마트 하나를 통으로 점거하고, 거기에 약탈자들까지 역으로 털어 버리면서 거점을 사수한 인물들이다. 오히려 비무장 상태의 평범한 민간인이었다면 정찰꾼 세 명이 먼저 달려들어서 뭐라도 해 봤으리라.

“그런데 좀 이상하네. 얘기를 들어 보니 너희들만 쫓겨난 것 같은데.”

“예, 그건 저희도 모르겠어요. 평범하게 보이려고 우리들끼리 서로 모르는 척 하면서 피난민 연기를 했거든요. 근데 다른 사람은 그냥 두고 저희만 내쫓더라니까요?”

“새끼들이…… 너희가 어설프게 연기하니까 딱 봐도 티 나서 그런 거 아냐?!”

근육질 남자가 윽박지르자 그들은 진짜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숙였다. 이유야 어찌 됐든 마트 내부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돌아온 건 실책이 맞았으니까.

“아, 그래도 한 가지 수확은 있었어요. 여기랑 다르게 거기는 전기가 들어오던데요?”

쭈뼛쭈뼛 서 있던 또 다른 정찰군의 말에 일순간 주변이 조용해졌다. 고작 사람 두 명이 거점 하나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보다 이게 더 충격적이었나 싶을 만큼.

“전기가 들어온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 전국적으로 전기, 가스, 수도, 통신 다 안 되는 거 몰라? 당장 우리도 비상 발전기 돌릴 기름이 다 떨어져서 책이나 목재 가구 태우고 있는 마당인데.”

“거짓말 아닙니다! 1층 식료품 코너 냉장 설비도 제대로 돌아가고 있었고, 히터에서 따뜻한 바람도 나왔습니다.”

“1층부터 꼭대기층까지 불도 다 켜져 있었고요.”

“저희가 받아 온 물자들, 그거 냉장고에 보관 안 하면 3, 4일 만에 다 상하는 것들이잖아요.”

생각해 보니 그랬다.

저들이 비닐 봉투에 싸 들고 온 소량의 물자들은 모두 신기하리만치 신선했다. 초겨울을 앞두고 있는 시기라 쌀쌀한 기온의 도움을 받았다고 해도 인프라가 죄다 끊긴 마당에 이토록 신선한 건 말이 안 된다.

식품이 신선도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일정 수준의 온도를 변화 없이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 냉장, 냉동 설비 때문이지, 시시각각 바뀌는 날씨 때문일 리가 없다.

최정수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신선한 식료품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만한 규모의 건물 전체에 장시간 전력을 공급하고 있다면 고작 비상 발전기 따위로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가만, 그 근처에 혹시 주유소가 있었나?”

“예,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야 하긴 하는데 마트에서 5분 거리도 안 되는 곳에 하나 있더라고요.”

“역시. 거기서 기름을 가져와 비상 발전기를 돌리고 있는 게 분명해.”

좀비들을 처치하면서 신묘한 힘을 얻은 최정수와 그 일동이었지만, 막상 그 힘으로 반영구적으로 유지되는 인프라 능력 같은 것이 있을 리 없다고 제멋대로 단정 지었다.

그 결과, 마트에서 가장 가까운 곳의 주인 없는 유류창고를 털어 대량의 연료를 마트 유지에 사용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앞뒤 다 제쳐 놓고 합리성만 따지면 꽤 그럴싸한 추측이었지만, 사실은 반쯤 어거지로 끼워 맞춘 얘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마트를 점거한 일당이 트럭을 운용하며 주유소에서 바쁘게 기름을 실어 날랐다는 소식은 지금껏 단 한 번도 들린 적이 없으니까.

더군다나 약탈자 무리가 그들을 습격할 당시에 포위 작전을 펼쳤다고 했는데, 그런 상황에서 마트 측 일당이 기름을 챙길 수 있었을 리가 없다. 즉, 비상 발전기를 뼈 빠지게 돌려서 어찌어찌 마트를 유지 중이라는 말은 ‘희망사항’에 불과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최정수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그는 이 인제대 김해 캠퍼스를 쥐락펴락하는 리더였고, 그가 가진 능력도 리더라는 직책에 어울리는 능력이었으니까. 괜히 대들거나 토 달아 봤자 좋을 게 없었다.

“그럼 이제 어떡하지? 우린 대학교 바로 근처에 번화가가 있어도 함부로 못 나가잖아.”

테이블 앞에 앉아 있는 또 다른 능력자 동료의 질문에 최정수는 프린트해서 가져온 김해 일대의 지도를 손가락 끝으로 톡톡 가리켰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인제대 구조상 여기에 다수의 인간들이 계속 머무르는 건 하책이야.”

인제대 남쪽으로는 좀비들이 썩어 넘칠 만큼 득시글거리는 번화가, 서쪽으로는 야트막한 산 위에 자리 잡은 김해가야 테마파크가 위치해 있다.

문제는 좀비들의 숫자가 아니다. 좀비들의 포지션이다.

“사태 당일에 민간인들이 거리에서부터 도망쳐서 도달한 곳이 하필 우리 학교 근처라는 거야. 위험한 거리에서 최대한 멀어지기 위해 북상한 사람들이 많은데, 좀비들도 그 사람들을 쫓아서 여기까지 올라왔지. 차라리 그 사람들이 도망쳐 오기도 전에 다 당해 버렸다면 이 주변은 훨씬 더 깨끗했겠지만, 일단 그건 제쳐 두고.”

김해가야 테마파크, 인제대 부지 남쪽, 이 주변은 피난민과 좀비들이 마구 뒤섞여 짬통을 만든 탓에 생지옥이 만들어지기까지 단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덕분에 캠퍼스 내에 있던 교수와 학생을 비롯해 바깥에서 도망쳐 들어온 사람들은 졸지에 이곳에 갇히고 말았는데, 이 고립 상태가 일주일이 넘어가면서 크고 작은 문제들이 여럿 발생했다.

우선 각종 사고와 화재 때문에 도시 인프라가 빠르게 단절되었다. 사태가 발생한 이후부터 이틀까지는 괜찮았지만 그 이후에는 더 이상 문명의 이기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인프라 문제에 이어 외부인 유입 및 좀비들의 포위망 때문에 물자 수급이 어려워지면서 자연스럽게 물자난이 발생했다.

지금처럼 극소수의 날랜 사람 몇을 뒷길로 내보내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으나, 본격적으로 십수 명 이상의 무리를 내보내게 되면 거리에 산재해 있는 좀비들의 어그로를 끌 가능성이 높았다.

안 그래도 빠져나갈 뒷길이 적은 마당에 좀비들의 포위망이 점점 더 촘촘해진다? 이 자리에서 그걸 용납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물자보다 안전한 거점이야. 인제대는 언제 말라 죽거나 좀비 떼가 들이닥쳐서 무너질지 알 수 없는 모래성 같은 상태야. 너희도 며칠 전에 기숙사 쪽 소식 들었지?”

“…….”

“…….”

“…….”

기숙사라는 키워드가 언급되자마자 찬물을 끼얹은 듯 모두가 침묵했다. 단순히 분위기가 조용해진 것을 넘어서서 경직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기숙사는 얼마 전에 물자를 구하겠다고 자신들끼리 어설프게 나섰다가 좀비 떼를 이끌고 들어와서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으니까.

그리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장소에서 한때 같이 청춘을 구가하던 남녀가 세상이 떠나가라 비명을 내지르며 처절하게 죽어 가는 광경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

아직도 그쪽 방향에서 바람에 섞인 피비린내가 불어오는 듯했고, 밤에 자다가도 그들의 공허한 비명 소리가 귓가를 맴돌 지경이었다.

인제대 부지는 애초에 사방이 탁 트여 있기 때문에 어쭙잖은 담장이나 울타리 정도로 좀비 떼의 침투를 막을 수 없었다. 애초에 외부로 통하는 출입로가 뻥 뚫려 있기도 했고.

“더 늦기 전에 여기서 탈출해서, 비교적 안전한 삼안동 쪽으로 넘어가야 해.”

“저기, 아예 북쪽으로 쭉 올라가는 건?”

“나진리? 거긴 안 돼. 거길 지나가는 순환고속도로만 셋이야. 사태 당일에 거기서 빠져나가려던 사람들이 도로에서 다 뭘 하고 있었을 것 같아?”

“아.”

다행히 나진리 방면에서 아래쪽으로 내려온 피난민들이 적어서 망정이지, 만약 그쪽 사람들까지 좀비와 함께 우르르 아래로 내려왔다면 인제대는 물 샐 틈 하나 없이 포위되었을 것이다.

차라리 생존자 그룹의 소식이 어느 정도 들려오는 동쪽 삼안동 방면이 그나마 낫다. 완전히 터져 버린 부산과 가깝다는 단점이 있지만, 일단은 당장 살고 봐야 할 것 아닌가?

“그리고 여차하면 군 부대가 있는 안전한 김해공항으로 도망칠 수 있는 쪽이 더 낫지 않겠어?”

“그건 그렇지.”

“정수 말이 맞아. 다른 곳으로는 죽어도 못 가.”

“근데 아무리 조심히 빠져나가도 이렇게 많은 인원이 움직이면 좀비 놈들한테 들킬 것 같은데…… 그 부분은 어떡하게?”

“어떡하긴. 지금까지 우리 인제대 학생들의 귀중한 물자를 축낸 밥버러지들을 써야지.”

무고한 사람들을 미끼로 쓰자는 충격적인 발언에도 불구하고 ‘시민대표’로 각성한 최정수가 비난받거나 손가락질 당하는 일은 없었다.

그가 소속된 집단을 구성하는 인원들 중 60% 이상이 ‘시민’일 경우, 자동 과반수 지지에 의해 그의 발언권에 막대한 힘이 실리기 때문이다.

대놓고 ‘너 마음에 안 드니까 자살해’ 라는 부당한 명령을 할 수는 없었지만, ‘집단 전체를 위해 우리가 먼저 움직이는 동안 당신들은 여기서 좀비 떼를 막아 주십시오’ 같은 교묘한 명령은 내릴 수 있었다.

정치인이었던 자신의 아버지를 따라 자신도 정치계에 입문하겠다고 마음 먹은 교활한 언변가에게 ‘시민대표’라는 직업만큼 어울리는 능력도 없었다.

그리고 그 흉흉한 얘기를, 건물 밖 창가에 매달려 있던 한 남자가 전부 듣고 있었다.

낮말과 밤말을 엿듣는 쥐와 새는 더 이상 없지만, 짚라인을 타고 건물 사이를 오가는 이승권은 있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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