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생존기 (47)
“지, 진짜 사람이 있었어?!”
“이 커다란 마트를 혼자서 점거하고 있었다고?”
“그럼 길거리에 널려 있던 그 시체들도……?”
내가 마트 입구를 개방하자마자 앞에 몰려 있던 사람들이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들 중 대다수는 좀비에 대응하기 위해 조잡하게 만든 무기를 꼬나쥐고 있었다. 나처럼 각성한 능력자는 조잡한 무기 따윈 사용하지 않으니 저들이 평범한 생존자임을 의미했다.
‘어쩌면 일부러 그런 모습을 보이기 위해 연기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일단 그 부분은 차치하고.’
내가 점거하고 있는 홈마트는 크든 작든 주변 생존자 그룹에 소문이 났을 것이다. 당연히 이곳을 털기 위해 원정을 나섰다가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이 상당수 있다는 소식도 퍼졌을 테고.
그렇기 때문에 이곳을 찾아온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 부류라고 봐야 했다.
1. 대체 누가, 어떻게 그 많은 좀비 떼와 원정대를 역으로 격퇴하고 이곳을 점거하고 있는지 살피러 온 정찰꾼.
2. 힘깨나 쓰면서 주변 생존자들을 억압하고 있던 양아치들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물자를 얻기 위해 나온 일반인.
나는 이곳까지 찾아온 사람들의 외관을 하나하나 뜯어 보며, 그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짐작했다.
세상이 갑작스럽게 망한 지 10일도 채 되지 않았건만, 벌써부터 행색이 초라해진 사람들을 보니 정말 심각한 물자난을 겪고 있다고 봐야 한다.
아마 당장 숨어 있던 곳에서 물도 나오지 않아서 씻을 물은커녕 마실 물도 없으니 참다못해 뛰쳐나온 것이겠지. 그렇다고 좀비들을 피해 물자를 구할 정도로 용감하지는 않을 터.
나는 당장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 애절한 사람들부터 먼저 받아들였다. 심정이 절박한 사람과 속에 흑심을 품고 연기를 하는 사람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데, 바로 공포다.
흑심을 품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계획이 성공하기만 하면 뒷일을 도모할 수 있을 거라는 묘한 자신감 때문에 상대적으로 공포가 옅은데, 정말로 뒤가 없는 사람들은 작은 쥐새끼처럼 움츠러들어 있다.
“어떤 물자가 필요해서 오셨죠, 어르신?”
“어, 어어…… 그게…… 그러니까…… 물이랑, 식량을 좀…….”
“그렇군요. 혹시 세상이 이렇게 되기 전에 어떤 일을 하고 계셨나요?”
“나는 그냥 쩌어기…… 밑에서 농사나 짓던 사람인데, 하필 시내에 장 보러 나왔다가 웬 괴물들이…….”
“그렇군요. 들어가 보세요.”
김해는 창원과 부산 사이에 위치한 어중간한 베드 타운이라 공단 출퇴근자 외에도 농부가 제법 많았다. 공단만큼이나 넓은 논밭과 산을 끼고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행색이 추레한 40대 중년 남성을 안쪽으로 들여보낸 나는 곧바로 다가온 30대 여성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
그녀는 인근 유치원 교사였는데 사태가 터진 날에 유치원에서 당직 근무를 서고 있다가 고립되었다고 한다.
“사태가 터지기 전에 전국적으로 폭동이다 뭐다 흉흉한 말이 나돌았잖아요. 실제로 거리에서 폭력 사태가 종종 일어나기도 했고요. 그래서 원생들은 모두 자택 대기였고 원장님과 저만 유치원에서 당직 근무를 서고 있었는데…… 일이 터진 거예요.”
“유치원 교사 경력이 제법 되시네요. 좋아요, 들어가 보세요.”
“감사합니다!”
조직 내에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어른을 이끌어 줄 어른과 아이를 이끌어줄 어른이 각각 분리되어야 한다. 특히 이런 위험한 시대인 만큼 어린아이들을 인솔할 사람이 꼭 필요할 테니 일단 안쪽으로 들였다.
어차피 물자를 쥔 사람은 나고, 당장 아쉬운 건 저들이다.
내가 마치 대기업 면접관이라도 된 것처럼, 이곳에 온 사람들의 인적사항을 좀 캐묻는다고 해서 전혀 이상할 건 없었다.
오히려 내가 질문을 몇 개 던지기만 하고 순순히 안으로 들여보내 준다는 사실에 내심 기뻐하고 있지 않을까?
‘그만큼 절박하다는 거겠지.’
각성을 한 것도 아니고, 이런 재난 상황에 익숙한 것도 아니고, 호기롭게 좀비들을 헤쳐나가며 자신의 앞가림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 결국 남의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나는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몇 가지 사소한 질문들을 던져 가며 안쪽에서 대기 중이던 채성아에게 그들을 넘겼다. 채성아는 미리 식료품 코너에서 박스째로 가져온 즉석 식품이나 생수를 뜯어 그들에게 나눠주었다.
처음 이곳을 찾았던 양아치들에게 거래를 요구하며 떠본 것과 달리, 저들에겐 그 어떤 대가도 받지 않았다. 애초에 내가 원하는 대가를 줄 수 있을 만큼 여유로운 사람들도 아니었다.
인터넷도 터지지 않는 스마트폰으로 일일이 명단을 작성하며 사람을 받고 있던 그때, 딱 봐도 뭔가 불만스러워 보이는 얼굴의 청년이 걸어나왔다.
처음부터 자신이 들고 올 수 있는 자질구레한 가재도구나 배낭 같은 걸 짊어지고 온 사람들과 달리, 눈앞의 청년은 비교적 단출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여행 동아리 회원들보다는 나이가 많고, 나보다는 어린 20대 중반 정도의 청년이 뭔가 아니꼽다는 표정으로 다가오니 신경을 쓰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다른 이들에 비해 비교적 깔끔한 외관을 하고 있다는 점, 먹지 못해서 살이 빠지거나 인상이 날카로워지지 않았다는 점 등이 특히 신경 쓰였다.
“이름은?”
“……강석주요.”
“나이는?”
“스물넷이요.”
“군대는 다녀왔나?”
“그건 왜요?”
“딱 봐도 안 다녀왔을 것 같아서.”
정말로 스물넷이라면 내가 한창 최전방에서 구르고 있을 때, 북한 전쟁 피해 복구 지역에 투입되었을 적정 연령인데, 아무리 봐도 전쟁을 겪은 군필의 자세는 아니었다.
‘북한을 한 번이라도 다녀온 사람이라면 이렇게 대놓고 티를 내진 않지.’
거긴 정말 한국군과 미군을 제외하면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에 군인들은 언제 어디서든지 극도로 감정 표현을 자제했다.
북한 주민이 불쌍하다며 동정을 표하거나 선심이라도 썼다가 된통 당한 사례가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대놓고 티를 내는 놈이었지만 이번에는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내가 당장 이놈을 수상하단 이유로 몸수색을 해 봤자 정말 아무것도 안 나올 테니까.
기껏해야 호신용 나이프 한 자루나 나오면 다행일 텐데, 날 기습할 목적이었다면 내 앞에 서자마자 뭔가 액션을 취했을 것이다. 그러니 일단은 정찰꾼이 정찰을 하게 내버려 뒀다.
“안으로 들어가.”
“…….”
의외로 내가 쉽게 들여보내 주자 녀석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일단 안으로 들어갔다.
대략 20명이 넘는 사람들과 일일이 대화하고, 그들의 인적사항을 기록한 다음 안으로 들여보내는 반복 작업을 한 결과, 마트를 방문한 생존자들은 대부분 만족하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딱히 뭔가를 요구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물자를 나눠주는 척 하면서 폭력을 행사해 억압하지도 않는데 만족하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만족이라는 감정보다 좀 더 다른 감정을 품고 있는 놈들이 몇 명인가 있었다.
겉으로는 채성아가 나눠주는 물자를 감사히 받으며 안도하는 척 했지만, 그들의 시선은 쉴 틈 없이 마트 내부를 훑고 있었다. 마치 내부는 어떤 구조인지, 또 우리 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곳을 지키고 있는지 알아내려는 것처럼.
급기야 그들 중 일부는 채성아가 주는 것 외에 달리 필요한 게 있다며 안쪽으로 들어가려 했다. 채성아가 재빨리 제지하지 않았더라면 주제도 모르고 날뛰었을 것이다.
나는 이곳을 방문한 생존자들이 어느 정도 쉴 시간을 충분히 주고, 명단에서 따로 분류한 사람들만 콕 집어서 도로 내보냈다. 그들은 다른 생존자들은 왜 남겨 두고 자신들만 내보내냐며 항의했지만, 내가 권총을 들이밀자 입을 다물었다.
“난 자선사업가가 아니거든. 도움도 안 되는 사람들까지 맡아 줄 의리는 없어.”
“저 사람들보다 우리가 훨씬 더 일은 잘할 텐데요?”
“맞아. 저 비실비실한 사람들이 뭐가 도움이 된다고…….”
“사람 차별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다들 한마디씩 툭툭 던지면서도 결국 쫓겨났다. 애초에 정말로 갈 곳이 없어서 빌붙을 사람이 필요했다면 눈물이라도 펑펑 쏟으며 내 바짓가랑이를 붙들기라도 했겠지.
저들은 약간의 물자를 얻고 내부를 조금 살펴본 것 정도로 만족한 듯, 막상 물러날 때는 이곳에 크게 집착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저들이 거리 너머로 완전히 모습을 감췄을 때, 나는 채성아에게 이곳의 경비와 남기로 한 생존자들의 관리를 부탁했다.
마침 그녀는 간호사였기 때문에 의약품만 있으면 환자들의 가벼운 처치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또한 능력자였기 때문에 일반인이 흑심을 품고 그녀에게 달려든다고 한들, 그리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승권 씨는 어쩌시려고요?”
“앞서 말했듯이 전 자선사업가가 아니라서요. 저런 것들에게도 물자를 나눠줬으니 이제 그 대가를 받아 와야죠.”
“……이해했어요.”
내가 원하는 대가란 바로 저들이 몸담고 있는 인근의 생존자 그룹 거점 위치와 규모에 대한 정보였다.
한눈에 봐도 질 나쁘고 도움 안 되는 놈들은 처리하고, 어느 정도 협상의 여지가 있는 집단이라면 일단 보류하고 좀 더 지켜볼 생각이다.
마트의 입구를 방탄유리벽으로 다시 막아 둔 다음, 짚라인을 이용해 단숨에 고층 건물 벽을 타올랐다. 저 멀리, 희끄무레하지만 좀비 떼의 이동 경로를 피해 가는 몇몇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추려 낸 4명 중 1명은 북쪽으로, 나머지 셋은 서쪽으로 가는군.’
북쪽은 영운초, 중, 고등학교가 있는 방향이었고 서쪽은 인제대학교 김해캠퍼스가 있는 방향이었다.
영운학교가 있는 쪽은 비교적 외곽이라 좀비들의 숫자도 적을 테지만, 인제대학교 인근은 번화가였기 때문에 멀리서 봐도 한눈에 알 수 있을 만큼 좀비들이 득시글거렸다.
‘생각해 보니 자전거 동호회 새끼들도 북쪽에서 내려와 활천초 인근까지 한 바퀴 순회하고 돌아가기만 했지, 인제대학교 인근으로는 가지 않았어.’
마트에서 들고 나온 캠퍼용 망원경을 들고 쭉 살펴보니 삼안로와 인제로를 가르고 있는 강을 기준으로 위험도가 확연히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자전거 동호회 놈들이 아무리 재빠르고 숙련된 솜씨를 자랑한들, 저 위험천만한 곳을 가로지르고 싶지는 않겠지. 나 같아도 저길 장갑차가 아니라 자전거로 돌파하는 건 사양하고 싶다.
‘20대 중반에서 20대 후반, 인제대학교 재학생이거나 대학원생일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삼안동까지 넘어왔다는 건…… 내부 사정이 좋지 않다는 뜻인가?’
생존자는 많은데 물자가 부족한 상황일 수도 있고, 반대로 생존자는 적은데 좀비들에게 점거당한 장소가 너무 많아서 극도로 몸을 사리고 있는 상황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홈마트로 정찰을 보낸 의도는 명확해 보였다.
‘좀비가 없는 안전한 거점 확보, 혹은 대량의 물자 확보.’
나는 개인적으로 저들의 의도가 후자보단 전자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정찰꾼들의 반응을 미루어 보건대, 물자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마트의 내부 구조를 좀 더 자세히 살피려 했기 때문이다.
마치 둥지를 짓기 전의 새가 이 나무는 튼튼한지, 주변에 천적이 없는지 꼼꼼하게 살피는 것 같았다.
뭐, 확실한 건 따라가 보면 알겠지. 나는 재차 짚라인의 후크를 쏘아 내며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