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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역병의 아포칼립스-46화 (47/227)

46화 생존기 (46)

채성아는 자신이 충분히 컨디션을 되찾았음을 보여 주듯, 슬렌더한 몸을 쭉쭉 뻗으면서 가볍게 스트레칭을 해 보였다.

그녀도 지난 며칠간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능력자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어떤 점에서 일반인보다 더 나은지 이것저것 실험해 봤다고 한다.

예를 들어 능력자는 각성을 한 시점에서 ‘스텟창’을 얻게 되는데, 스텟창에 표시된 스테이터스 수치에 따라 보정 효과를 받는다고 한다.

나이 80 먹은 노인네가 각성을 하면 스텟창의 스테이터스 수치는 대부분 굉장히 낮겠지만, 그래도 같은 신체 조건을 가진 일반 노인보다는 강해지는 것이다.

‘어쩐지, 각성을 한 뒤로 움직임이 한결 나아진 것 같더니만.’

전쟁을 끝내고 일반 사회로 복귀한 퇴역병인 나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집에 처박혀서 먹고 자고 싸기만 했다.

게다가 하루가 멀다 하고 배달 음식만 시켜 먹으면서 몸을 축냈는데, 아무리 내 몸이 실전으로 다져진 강철 같은 육체라고 해도 관리가 되지 않으면 멀쩡하게 유지될 리 없었다.

즉, 각성을 한 시점에서 내 몸은 폐인 생활을 하던 시절보다 훨씬 더 나아진 셈이다. 느낌상으로 알고는 있었지만, 다른 능력자가 직접 확인해 주니 조금 묘한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이 스테이터스라는 건 고정 수치라서 절대로 하락하지 않는 것 같아요.”

“하락하지 않는다?”

“음, 게임에 비유를 하면 레벨 100만큼 키워 둔 캐릭터의 경험치가 이유 없이 깎이거나 하진 않잖아요? 그거랑 같다고 생각해요. 스텟이나 스킬에 투자를 해서 어떤 변화가 생길지언정, 그 외적 요소로 수치가 하락할 일은 어지간해선 없다고 생각해요. 상태창이나 스텟창, 스킬창에 기록된 수치는 게임의 세이브 포인트 같은 개념 아닐까요?”

채성아의 말은 꽤 그럴싸했다.

가령 내가 각성한 상태로 죽어라 운동을 해서 몸을 가꾼다면 아주 조금이지만 수치가 상승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각성을 했다는 건 일반인의 범주를 벗어났다는 걸 의미하니까, 바꿔 말하면 시스템의 보호 아래 놓여 있음을 의미한다. 즉, 진보는 하되 퇴보는 하지 않는 것이다.

운동을 쉬어도 딱히 근손실이 일어나지 않는다, 라는 말도 안 되는 개념이 정말로 적용되는 거라면 능력자가 가진 잠재력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다.

‘시스템이 어째서 선발대와 후발대를 차별하는 것처럼 느껴졌는지 알겠어.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적극적으로 좀비를 때려잡고 성장해 나가면 그에 걸맞는 보상으로 남보다 앞서 나갈 수 있기 때문이야.’

극한의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승자 독식 구조.

나는 어째서 인류가 대응할 틈도 없이 전 세계에 좀비 떼를 풀어 놨는지 알 것 같았다.

만약 평범한 전염병처럼 천천히 진행되는 판데믹이었다면 인류는 어느 시점에서 격리 구역을 정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했겠지. 도시 하나가 통째로 좀비들에게 넘어갔다고 해도 군대만 투입하면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다.

하지만 무차별적으로 사방팔방에서 좀비들이 쏟아져 나온다면? 인류는 대응할 틈도 없이 자신들의 영역을 잃어버리고 스마트폰을 든 원시인으로 전락해 버리는 것이다.

다시 생각해 봐도 이 사태는 지극히 인위적인 소행으로 느껴진다. 한때 세계를 휩쓸었다던 유명한 자연 발생 전염병들도 이렇지는 않았으니까.

“작금의 사태를 놓고 보면 가장 우선시되어야 할 목표는 당연히 생존이겠지만, 저는 오히려 반대라고 생각해요. 혼자서도 쉽게 생존할 수 있는 승권 씨 같은 사람들은 정말 드물 거예요. 저처럼 간신히 홀로 살아남아 도망치는 사람도 그리 많지는 않겠죠. 결국 핵심은 협력이에요. 능력자가 이 사태와 정면으로 맞붙을 힘이 있다면, 비능력자는 능력자들이 계속 싸울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는 거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사태는 절대로 소수 집단이 이겨 낼 수 없어요.”

“뭐, 그렇겠죠. 당장 제가 활천초에 받아 준 비능력자 대학생들만 해도 제가 보호해 주지 않았다면 오래 못 버텼을 테니까요.”

여행 동아리 회원들은 사태 초기에 총도 없이 조잡한 무기들을 쥐고서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게다가 그 근방은 자전거 동호회 놈들이 수시로 좀비 떼를 이끌고 다니면서 분탕질을 쳐댔다.

자신을 보호할 힘이 없는 일반인은 수가 아무리 많아도 좀비 떼를 이겨 내기 힘들고(실제로 군대도 그렇게 무너졌다), 반대로 인력이 부족한 소수 정예 능력자 집단은 발전 없이 허송세월만 보내다 약탈이나 일삼는 양아치 패거리로 전락했을 것이다.

‘내가 점거한 홈마트를 습격한 놈들도 대부분 소수의 능력자를 따르는 양아치 패거리들이었다. 능력자와 비능력자가 연계했지만 조직의 생존 방향성을 ‘발전’이 아니라 ‘약탈’로 삼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거다.

“승권 씨는 생존자들을 모아서 더 큰 집단을 형성하고, 작은 사회부터 차근차근 복구하고, 최종적으로는 그 사람들이 직접 이 사태를 이겨 낼 수 있게끔 돕는 게 목적이라고 하셨죠.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승권 씨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현 시점에서 모든 생존자 집단이 가장 크게 걱정하고 있는 인프라 문제를 손쉽게 해결할 수 있으니까요.”

“그게 말처럼 쉬우면 참 좋을 텐데요.”

한숨을 푹 쉬면서 바이크에 다시 올라탔다. 집에서 자기 장비를 챙겨 나온 채성아는 자연스럽게 내 뒷자리에 올라탔다.

혹시 사이드카가 달려 있는 2인승 바이크를 구할 수 없을까 이곳저곳 둘러봤지만, 한국에서 2인승 사이드카는 고급 외제차보다 훨씬 더 구경하기 힘들었다

“저는 직업이 직업인지라 도울 수 있는 분야가 한정적이지만, 그래도 힘 닿는 데까지는 도와드릴게요.”

말만이라도 고맙다고 대답한 뒤 다시 바이크의 스로틀을 감았다.

나는 체스로 치면 킹이다. 각성한 직업 특성상 절대 함부로 바깥을 돌아다니면 안 되지만, 지금 당장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들이 너무 많았다.

당장 급한 것은 물자를 얻기 위해 홈마트로 모여드는 생존자들의 선별 작업, 그리고 나를 급습했던 패거리의 본거지와 배후 세력 파악이었다.

이런 세상이 되자마자 곧바로 범죄를 저지르겠다고 마음 먹는 놈들은 근본부터 틀려먹었으니 일말의 재고도 없이 뿌리를 뽑아 버려야 할 독초이다.

오히려 그런 자들에게 억압과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구한다면, 정치질을 하지 않아도 손쉽게 내 사람으로 만들 수 있으리라.

“저는 논밭과 산을 타넘느라 번화가의 상황은 잘 몰랐는데, 김해 한복판은 제가 있던 곳보다 훨씬 더 상황이 심각했었군요.”

달리는 바이크 위라서 그녀는 목소리를 살짝 높여 말했다.

“사태 초기엔 지옥도 그 자체였죠. 놀랍게도 좀비들이 터져 나온 건 지상이 아니라 지하에서부터였거든요.”

군대와 경찰은 혼란스러운 거리를 진정시키기 위해 도로 통제를 하고 있었는데, 정작 좀비들은 지하철역에서 우르르 튀어나와 사방팔방에서 인간을 덮쳤다.

뒤늦게 나선 군대와 경찰은 순식간에 곱절로 늘어난 좀비 떼를 이겨 내지 못하고 대부분 궤멸,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소수만이 김해 공항에 모여서 농성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김해도 김해지만 부산이 장난 아니었어요. 직접 본 건 아니지만 들려오는 소식으로는 부산항을 덮친 일본의 대형 크루즈선에서 좀비 떼가 쏟아져 나와 삽시간에 도시를 집어삼켰다고 했으니까요.”

“세상에…….”

채성아는 내 말에 경악하면서도 컴파운드보우를 들고 주변을 면밀히 살폈다. 간혹 거리를 배회하는 소수의 좀비들이 이쪽을 발견하고 달려들었으나, 바이크의 속도를 따라잡지는 못했다.

정신없이 쫓기는 상황이 아닌 지금, 채성아는 좀 더 차분하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거리를 뛰어다니는 좀비들을 살폈다.

“역시 의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말도 안 되는 신체 구조네요. 살아 있는 상태가 아니라면 진즉에 부패하고 찬 공기 때문에 딱딱하게 굳어서 움직이지 못해야 정상인데, 오히려 살아 있는 사람보다 더 잘 움직이는 것 같아요.”

“물리거나 할퀴는 걸로 감염이 되는 바이러스를 품고 있으니, 엄밀히 말하면 살아 있는 숙주 상태 아닌가요?”

“물론 특정 바이러스들은 극한의 환경 속에서도 살아 있을 수 있어요. 가령 지구 온난화가 심해지면 시베리아 영구동토층 밑에 잠들어 있던 고대 바이러스가 깨어날 수도 있다고 하잖아요? 하지만 그런 바이러스들도 죽어 버린 생명체의 몸을 움직이게 할 힘은 없어요.”

신체 활동의 기본은 뇌와 신경계다. 둘 중 하나만 망가져도 신체가 움직일 일은 없으며, 둘 다 멀쩡해도 신체가 망가져 있으면 움직이지 못한다.

인간의 몸은 그토록 불편한데, 저 좀비 놈들은 여기저기 찢어지고 터진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신기할 정도로 팔팔했다. 아마 저놈들을 장거리 마라톤 선수로 뛰게 하면 모두 신기록을 달성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머리를 파괴하거나 불태우면 무력화된다는 게 또 아이러니하네요. 그렇게 해야 무력화된다는 건 살아 있는 생물이라는 증거니까요.”

채성아는 액정이 깨진 스마트 폰으로 주변 풍경을 녹화하며 촬영했다.

주변 환경 같은 건 미리 영상 기록물로 남겨 두면 나중에 써먹을 곳이 많다나 어쨌다나, 나는 기본적으로 눈으로 직접 보고 머리로 외우는 타입이라 그러려니 했다.

바이크를 몰아 향한 곳은 내가 거점으로 삼은 홈마트였다.

자전거 동호회는 활동을 중단했는지 특정 구역에만 좀비들이 득시글거리는 이상 현상은 보이지 않았는데, 그 대신 어딜 가든 크고 작은 좀비 무리가 목적 없이 배회하고 있었다.

특정 구역에 몰려 있던 놈들이 발길이 닿는 대로 아무렇게나 배회한 끝에 주택단지나 상점가로 마구 퍼져 나간 듯했다. 일부러 큰길만 골라서 움직이지 않았더라면 중간에 놈들에게 포위당했을지도 모르겠다.

“저기가 승권 씨가 말한 홈마트인가요? 그런데 주변에 왜 시체가…….”

“단체로 우르르 몰려와서 절 죽이고 약탈하려다 역으로 털린 놈들이죠 뭐.”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대답하니 채성아는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의료인으로서 사람이 죽는 걸 꺼려하는 마음과, 망해 버린 세상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로서 공과 사는 확실하게 해야 한다는 마음이 충돌한 감정일 테지.

일부러 입구로 들어가지 않고 지하 주차장으로 돌아 들어가서 바이크를 세워 두고 마트로 들어온 우리는 곧장 1층 입구로 향했다.

예상대로 그곳에는 약탈자들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불안한 얼굴로 연신 주변을 살피며 기다리고 있었다.

“저들은 약탈자가 아닌 것 같네요.”

“제가 미리 입구 앞에 물자 선별 배급을 하겠다고 써놨거든요. 아마 주변에서 홈마트가 아직 멀쩡하다는 소식을 듣고 혹시나 해서 온 거겠죠.”

입구는 내가 직접 조작하지 않으면 중장비를 동원해야 간신히 치울 수 있는 거대한 방탄유리벽으로 막혀 있고, 안쪽에는 사각지대마다 거점 방위 무기들이 배치되어 있다.

능력자들이라면 일단 때려 부수거나 몰래 침입할 방법부터 찾고 있었겠지만, 그저 입구 앞에 모여 있는 걸 보니 정말로 물자가 필요한 생존자들인 것 같았다.

‘예약을 하면 된다고 써뒀는데 굳이 입구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걸 보니 꽤나 급한 모양이군.’

나는 채성아에게 컴파운드보우를 들고 뒤에서 엄호를 부탁했다.

“제가 선별해서 들여보낸 사람을 2차로 맡아서 필요로 하는 물자를 나눠주세요. 어지간한 식료품이나 생필품은 1, 2층에 다 있어요.”

“간호사인 제가 옆에서 같이 선별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사람 선별은 질리도록 해봐서요. 그리고 수틀리면 유혈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으니 조금 뒤에서 지켜봐 주시는 게 더 나아요.”

나는 전장에서 무려 5년간 무해한 민간인과 잠재적 위협 요소를 가진 민간인, 그리고 명백히 적군인 사람들을 진득하게 선별해 왔다. 베테랑 입국심사관보다 사람 보는 눈이 더 뛰어나다고 자부할 수 있을 만큼.

“홈마트 개장합니다!”

내가 거점창을 열어 방탄유리벽을 치워 내자 생존자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바로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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