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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역병의 아포칼립스-45화 (46/227)

45화 생존기 (45)

날이 밝자마자 나는 여행 동아리 회원들을 이끌고 총기에 대한 교육 및 훈련을 진행했다.

원래 이런 건 하기로 마음 먹었을 때 바로바로 해야 의욕이 떨어지지 않는 법이고, 또 앞으로 이곳에 몰려들 사람들을 생각하면 여행 동아리 회원들이 자기 방어 수단을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게 나았다.

내가 회사의 최고 책임자라면 이들은 중간 관리자다. 세상 어느 회사의 책임자가 신입들을 하나하나 직접 가르치고 자질구레한 일까지 한단 말인가? 답은 아랫사람들에게 떠넘기는 거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했는데 벌써 점심시간이네.”

시간을 확인한 나는 체육관 한복판에 엎드려 있는 여행 동아리 회원들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총기 구조와 부품에 대한 이론을 가르치는 것부터 애를 먹었지만, 끈덕지게 들러붙어서 가르쳐 보니 아주 맹탕은 아니었다.

아직 실사격 훈련을 진행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오늘은 일단 총기에 대한 각종 지식과 주의 사항, 그리고 파지법과 사격 자세 등을 가르친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이를 토대로 꾸준히 반복 연습과 훈련을 시킨다면 논산 훈련병들보단 쓸 만해질 것이다. 평시 군대의 조교가 아니라 내가 직접 가르치는 건데 그 정도는 돼야지.

“항상 총기를 들고 다니면 자칫 사고가 발생할 우려가 있으니 교무실 캐비닛을 무기함으로 개조해서 보관해 둬. 그리고 정기적으로 꺼내서 분해 및 조립을 연습해. 실사격 훈련은 내가 봐줄 때만 진행하되, 긴급 상황이라면 일단 실탄 꺼내서 써.”

“긴급 상황이라면 주로 어떤 상황을 말하는 건가요?”

“기본적으로 좀비가 침투할 경우엔 거점 방위 무기들이 알아서 때려잡겠지만, 생존자들은 외부인 취급이기 때문에 선제 공격을 하지 않게끔 설정해 뒀어. 외부인이 거점 내부에서 너희를 공격하지 않는 이상 거점 방위 무기가 자동적으로 공격할 일은 없다는 거야. 그러니까 사람에 대한 접근은 너희가 직접 담당해야 하는데, 이런 시국이니까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지?”

한마디로, 내가 보장해 준 ‘거점 일원’이 아니면 기본적으로 외부에서 접근하는 모든 인간은 잠재적 적성체일 확률이 높다는 뜻. 그런 사람들의 거점 내 침입을 허용한 순간이 바로 긴급 상황이다.

사람도 충분히 좀비처럼 위협적인 적성체로 돌아설 수 있다는 경고에 네 사람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때는 말귀가 밝은 애들이라 편하다.

워낙 해야 할 일이 많았던 터라 나는 간단하게 식사만 하고 곧장 활천초를 빠져나왔다.

짚라인을 이용하면 건물과 건물 사이를 날아다니듯 쉽게 오갈 수 있어서 편했지만, 그래도 운반 겸 이동수단이 있는 편이 더 이득이었기 때문에 부득불 바이크를 끌었다.

바이크는 자전거에 비하면 몸이 편하지만, 소음이 심하고 주기적으로 연료도 채우고 정비도 해 줘야 한다. 아무래도 이런 시국에선 오래 버티기 힘든 물건이다.

만약 내가 각성하지 못하고 평범한 퇴역 군인으로 남아 있었다면 이렇게 집 바깥을 미친 듯이 쏘다니는 미친 짓은 때려죽여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남들이 어떻게 되든, 세상이 망하든, 그냥 죽은 듯이 집구석에 처박혀서 내 인생의 끝을 받아들였으리라.

하지만 가만히 있으면 너무나도 쌉손해인 개사기 능력을 얻어 버렸기 때문에, 넷플러스를 복구하고자 이렇게 들고 일어났다.

막말로 세상 사람들이 다 죽더라도 넷플러스만 복구된다면 상관없다. 나 혼자서라도 살아남아서 죽을 때까지 넷플러스만 보다가 죽을 생각이니까.

‘거기까지 가는 길이 매우 험난하고 쓸데없이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는 게 문제지.’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의 싸늘한 바람을 맞으며 익숙한 도로를 타고 자택으로 복귀했다.

내가 왜 이 짓거리를 해야 하나 싶으면서도, 내가 하지 않으면 내 인생을 달래 줄 유흥거리를 영영 되찾지 못한다는 생각에 다시 움직이게 된다.

지금 내 집에서 몸을 추스리고 있는 채성아를 데리러 가는 것도 그 일환이다.

그녀를 먹여 주고 재워 준 만큼 그에 걸맞는 일을 시켜야 한다. 활천초에 자리 잡은 대학생 넷은 특별한 재주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 데다 비각성자였지만, 채성아는 간호사라는 직업과 함께 각성자라는 대단한 포지션을 가지고 있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그 사태로부터 생존하며, 시스템에게 생존할 자격이 있음을 증명해 보인 인재다. 슬슬 필드에서 굴려도 되겠지.

모든 것에 지쳐 버린 나의 남은 인생을 보내기 위해 구입한 별장은 언제나처럼 야트막한 동산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솔직히 나는 자신의 장례식장에 쓰일 사진이나 관짝을 준비해 둘 생각도 없었다. 처음 저 별장을 본 그 순간부터 퇴역 군인의 무덤에 딱 맞는다고 생각했으니까.

“아, 오셨어요? 며칠 동안 돌아오지 않으셔서 걱정했어요.”

바깥의 거점 방위 무기들이 작동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현관문이 열리자, 당연히 내가 돌아온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채성아가 마중을 나왔다.

처음 이곳으로 피신 왔을 때 꾀죄죄하고 상처 입은 짐승처럼 보였던 그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이제는 어느 정도 심신의 안정을 되찾은 건강한 모습만이 남아 있었다.

간호사라서 자신의 몸을 잘 관리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언제라도 내가 마음이 바뀌어 자신을 내쫓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어느 쪽일진 모르겠지만 그녀는 최대한 빨리 몸을 추스르려 노력한 듯했다.

“바깥에서 일이 좀 있었어요. 미처 얘기하지 않았었는데 활천초에 만들어 둔 거점에 채성아 씨 같은 사람을 네 명이나 뒀고, 대량의 물자가 보관된 홈마트도 하나 확보했거든요. 그것 때문에 쓸데없이 주의를 끌어서 다른 생존자 그룹과 마찰을 빚기도 했고요.”

“세상에…… 다친 곳은 없나요? 제가 봐드릴게요.”

“다친 곳은 없어요. ‘그날’ 이후로 어디 가서 다친 적은 한 번도 없거든요.”

짤막하게 대답을 한 나는 그녀를 지나쳐 부엌으로 갔다.

내 스킬 효과가 정상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모든 거점은 생활 인프라가 무제한 공급되기 때문에, 이렇게 냉장고 문을 열면 서늘한 냉기에 차갑게 식은 음료를 언제든지 꺼내 마실 수 있었다.

지금은 겨울에 가까운 가을이니까 차가운 음식이나 음료는 언제든지 마실 수 있는 거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원래 난방이 빵빵하게 돌아가고 있는 따뜻한 집에선 시원한 것을 마셔야 하는 법이다.

부엌에 있는 물자 사용표를 보니 채성아는 착실하게도 자신이 사용한 물자를 하나하나, 어느 정도의 양을 며칠에 몇 번 사용했는지까지 다 적어 놨다. 간호사 일을 할 때도 꼼꼼한 성격이 한몫했을 것 같다.

“후우, 역시 추운 바깥보단 따뜻한 집 안이 훨씬 낫네요. 마음 같아선 진짜 365일 집에 틀어박혀 있고 싶을 정도인데…….”

“하하…… 하지만 식량이나 식수가 무한정 솟아나는 건 아니니까요. 물론 승권 씨 집에는 혼자 다 먹기도 힘들 만큼 상당량의 식료품이 있지만, 그것도 한계가 올 거라고 생각해요.”

“사실 식량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나는 순식간에 내용물을 비워 버린 음료수 병을 재활용 봉투에 던져 넣으며 말했다.

“사람이야 언젠가는 죽을 텐데, 그럼에도 다들 마지막까지 아등바등 살아가는 이유는 그 과정이 순탄하느냐 순탄치 않느냐의 차이 때문이잖아요.”

음식이나 물이 없으면 굶어 죽는다. 그리고 굶어 죽기까지의 과정은 굉장히 고통스럽다. 그래서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돈을 벌고, 항상 든든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매일을 충실하게 살아간다.

나는 그 치열함과 충실함을 잊어버린 지 오래다. 이승권이라는 젊은 청년이 평생에 걸쳐 활활 태워야 할 삶의 연료는 진즉에 다 타 버리고 재밖에 남지 않은 상태다.

그저 따스한 온기만이 남아 있는 잔불 정도가 내 부질없는 삶을 꾸역꾸역 이어 나가게 만들고 있을 뿐.

그래서 유일한 낙이 하루 종일 집 안에 틀어박혀서 넷플러스를 보고, 배달 음식을 시켜 먹는 것이었는데…… 이 빌어먹을 세상이 내 마지막 낙을 앗아가 버렸다.

멀쩡하고 맛있는 음식이나 물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넷플러스만 있으면 된다.

“솔직히 말하면 채성아 씨가 적당히 자기 몫을 챙겨서 여길 떠났다고 해도 크게 신경 쓰진 않을 생각이었어요.”

물론 배신에 대한 생각이나 대비를 해 두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떠나겠다는 사람을 강제로 붙들어 둘 권리는 없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는 그녀가 떠나도 뒤쫓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세상이 돼 버렸는데 마음에 여유가 없는 사람이 식량 좀 가져갔다고 해서 불평불만을 할 이유가 없죠. 애초에 그걸 다 감안하고 채성아 씨를 집에 들인 거니까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조금은 고민했었어요. 그때는 워낙 힘들고 급한 상황이라 무턱대고 집에 들어오긴 했지만, 막상 남자 혼자 사는 집에 들어온다는 게 조금 무서웠거든요. 하지만 승권 씨가 정말로 뭔가를 할 생각이었다면 진즉에 그렇게 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마치 자기 집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듯이 절 두고 외출을 하셨잖아요. 그런 상황을 겪고 나니 오히려 안심이 되더라고요. 참 계산적이죠……?”

“이런 세상에서 계산적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중요한 건 이제 서로가 음험한 마음을 품었거나, 계산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는 부분이죠. 결론은, 이제 같이 일을 할 수 있겠다는 거예요.”

일이라는 말에 채성아는 결연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언제까지고 내 집에서 편하게 먹고 마시며 쉴 수만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내가 성욕에 눈이 멀어서 뭐든 다 퍼주기만 하는 호구였다면 그녀는 ‘음험한 마음’을 느끼고 도망쳤을지도 모른다.

나는 활천초 교무실 프린터기에서 뽑아 온 김해 일대의 지도를 식탁 위에 펼쳤다.

기본적으로 활천초를 담당하는 네 명은 활천초에서 벗어날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나와 함께 필드에서 뛰어 줘야 하는 그녀는 주변 환경과 현 상황을 자세히 알아야 한다.

“현재 제가 거점으로 삼고 있는 곳은 앞서 말했다시피 이 집과 활천초등학교, 그리고 인제대학교 인근 삼안로에 강을 끼고 있는 홈마트예요.”

“홈마트는 물자가 많이 비축된 곳이니까 거점으로 삼은 건 이해할 수 있겠는데, 활천초등학교를 거점으로 삼은 이유가 있나요?”

“처음에는 일단 위기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거점으로 삼았지만, 막상 위치와 구조를 보니까 사람들이 거쳐 가는 중간 거점으로 나쁘지 않더라고요.”

“중간 거점이라면… 적응 기간을 가지는 임시 거처 같은 개념인가요?”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 듣는 그녀를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해는 바로 옆에 위치한 부산이라는 대도시 때문에 상대적으로 베드타운이라는 느낌이 강하죠. 남쪽에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공단이, 서쪽으로 공업 도시로 유명한 창원이 자리 잡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사태가 터진 당일은 교통망이 거의 막힌 탓에 베드타운에 머물고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외부로 빠져나가지 못했을 거예요. 그럼 그 수많은 사람이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요?”

“아…….”

그녀는 김해시 지도를 살피다가 내동과 외동, 그리고 대성동과 서상동, 봉황동이 위치한 주요 번화가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 위로는 구산동과 삼계동이 있고 외부와 연결된 기차역까지 있다.

“이 근방이 상대적으로 안전한 이유는 베드타운 인구 대부분이 저쪽에 몰려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활천초등학교는 사람들이 임시로 자리를 잡고 제대로 된 거점으로 내보내기 좋은 위치에 있죠.”

첫째, 상대적으로 안전하다.

둘째, 부지가 넓다.

셋째, 주변이 탁 트여 있어서 이동하기 편하다.

물론 활천초의 상위 호환에 해당하는 김해대학교나 인제대학교도 있지만 거긴 너무 안쪽이고 등 뒤에 산을 끼고 있기 때문에 조금 위험하다.

당장 채성아만 해도 죽어라 산을 타넘어서 내 집까지 도달했는데, 체력이나 생채기 같은 건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좀비들이 고작 산 하나를 타넘어오지 못할까?

지나치게 넓은 장소를 거점으로 지정하면 그만큼 지켜야 할 장소도 많아지고 투입해야 할 인원도 늘어난다. 당장의 여유조차 없는 생존자 집단 입장에선 꿈도 꾸지 못할 일이기 때문에, 나도 저런 곳을 거점으로 삼는 건 자제하고 있다.

나는 채성아에게 생존자를 어떻게 모아서 어떻게 취급할지 설명했다.

“안정적인 물자 공급과 신변의 안전을 보장한다면 꽤 많은 생존자가 몰리겠죠. 반신반의하면서도 일단 찔러나 볼 테고, 그 과정에서 우리에게 호의적인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을 구분할 수 있을 거예요.”

“호의적이지 않은 집단과 접촉하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어떻게 하냐니. 너무나도 뻔한 걸 물어봐서 나는 무심코 피식 웃어 버렸다.

“이런 시국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방해만 하는 족속들이라면 처리해야죠. 그게 저랑 채성아 씨 같은 사람들이 필드에서 뛰어야 하는 이유거든요.”

물론 간호사인 그녀에게 무턱대고 저놈들은 도움도 안 되고 심성이 막돼먹은 놈들이니까 다 죽여 버려야 해요, 같은 억지를 부릴 생각은 없다. 그런 건 내가 전문이니까 내가 알아서 하면 된다.

“사람들은 원래 급한 상황일수록 어중이떠중이보다 특정 분야의 전문가를 따르는 경향이 있거든요. 쉽게 말하자면 제가 채찍이고 채성아 씨가 당근인 셈이죠.”

아니면 착한 경찰과 나쁜 경찰 컨셉도 괜찮고.

중요한 건 우리 같은 각성자들이 직접 나서서 주변 청소도 하고 사람도 모으고, 세력 정리도 해야 한다는 거다. 그래야 일이 전체적으로 쉽게 돌아갈 테니까.

“그러니까 이제 짐 챙겨요.”

슬슬 나가서 일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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