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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역병의 아포칼립스-44화 (45/227)

44화 생존기 (44)

그래서 나는 내가 생각해 둔 계획을 이들에게 밝혔다.

“이곳에 일정 수 이상의 사람이 모일 때마다 식량과 생필품의 공급량을 늘려 주겠어. 대신 너희는 이 무기를 들고 나 대신 거점을 관리하면서, 거점 인원들이 자급자족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도록 돕는 거야. 사태가 발발한 지 일주일도 넘은 지금, 정부가 도탄에 빠진 대한민국을 구해 줄 가능성은 사실상 사라졌잖아? 그러니 이제 우리도 스스로 움직일 때가 된 거야.”

“…형님 말이 맞아요.”

여행 동아리 회원들을 이끄는 회장답게 박성호가 가장 먼저 결단을 내린 듯, 소총을 집어 들었다.

“이 넓은 학교에 저희 넷만 있어 봤자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많지 않고, 더 강한 무법자나 좀비 떼가 들이닥치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겠죠. 그러니 지금이라도 작은 공동체 사회부터 복구해야 해요.”

나의 사람 보는 안목이 아주 맛이 가진 않았던 모양이다.

“저는…… 조금 무서워요.”

최연희와 함께 여성 동아리 부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정선혜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평소에도 왜소한 체구와 조용한 성격 때문에 소동물처럼 보이는 그녀가 어렵사리 말하자 일동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이 공동체에 소속되기로 한 이상 각자 주어진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는 건 알겠어요. 받은 게 있으니까 당연히 그만큼 해야겠죠. 하지만 저는, 아니…… 저를 포함해서 이 자리에 있는 동아리 부원 누구도 사람에게 해를 끼친 적이 없어요.”

그 말은 사실이었다.

남자 두 명은 아직 미필이었고, 여자들은 태생적으로 육체적 다툼을 통한 생존 경쟁으로부터 거리가 멀었으니까 불안한 것도 당연하다. 남녀 차별적인 발언을 하는 게 아니라 사실을 얘기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정선혜가 어떤 의도로 그런 말을 꺼냈는지 바로 이해했다.

“사람에겐 각자 어울리는 일이 있는 법이지. 나도 굳이 할 수 없는 일을 강요할 생각은 없어. 다만 대비는 해 두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사람 인생이라는 게 어디로 튈지 모르거든.”

“그건…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싫어도, 무서워도, 언젠가는 해야만 하는 일이란 걸요. 다만 이렇게 갑작스럽게는 조금…….”

“우선은 손에 익혀 두기만 해도 돼. 사람이든 좀비든 총구를 겨눌 수 있게 되는 건 그다음 문제야.”

본인의 신념이나 가치관 때문에 무기를 다루지 않는 것과, 단순히 기술과 경험이 부족해서 무기를 다룰 수 없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었다.

사람은 결국 적응의 동물인지라 아무리 싫고 괴로운 일이라도 한계까지 내몰리면 자발적으로 해내기 마련이다.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북한 땅으로 떠밀린 우리들이 그랬다.

“그래, 선혜야. 오빠 말대로 무기를 손에 쥐는 법이라도 익혀 두는 게 좋을 것 같아. 나도 총은 한 번도 다뤄 본 적이 없어서 조금 무섭지만…… 너도 알다시피 세상이 변했잖아.”

“……언니 말이 맞아요.”

정선혜보다 한 살 많은 최연희가 좋게 타이르자 마침내 그녀도 결심한 듯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전현석은 말할 것도 없이 내 방침에 동의했기 때문에 더 시간을 잡아먹지는 않았다.

“그럼 다들 동의한 걸로 알고 계속 얘기할게. 우선 무기 다루는 법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 없어. 무기 손질부터 관리법, 각종 안전사고에 대한 교육, 사격 훈련은 모두 내가 가르쳐 줄 수 있으니까. 그 과정에서 소모되는 탄약도 내가 공급해 줄 거야.”

다만 탄약 공급을 무한정 책임질 수는 없기 때문에 추후 무기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인원을 따로 구분 짓고, 그들이 얼마나 조직에 크게 기여하는지에 따라 각종 물자 보급량을 늘릴 생각이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아는 사람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솔직히 처음 총기를 획득했을 때만 해도 부족한 탄약을 어떻게 수급하나 걱정했었는데, 지금은 다소 품이 들어가더라도 재료만 구하면 얼마든지 탄약을 제작할 수 있다. 조직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기 전까지는 지출을 감안해야 해.’

탄약 보급에 대해서 당장은 걱정이 없으니, 약간의 시간과 노력만 들이면 미필 4명 정도는 금방 1인분을 할 수 있게끔 만들 자신이 있다.

물론 사격 훈련의 경우 시끄러운 총성 때문에 광역 어그로를 끌 위험이 있으니, 방음 처리가 된 체육관이나 학교 본관 지하 같은 실내에서 제한적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실전 훈련 같은 건 주기적으로 근방을 떼 지어 돌아다니는 좀비 떼를 사냥하게 하면 되겠지.

“그럼 사격 훈련은 그렇게 진행한다 치고, 생존자가 모이기 시작하면 정확히 어떻게 공동체를 발전시킬 건가요?”

최연희의 물음에 나는 대략적으로 생각해 둔 마인드맵을 제시했다.

“우선 수도, 전기, 가스 같은 기본적인 생활 인프라 자체는 걱정할 필요 없어. 생존자 집단이 형성되면 이곳을 기준으로 큼지막한 거점들을 차례차례 확보할 생각이야. 각 거점들의 주요 목적은 거주, 생산, 그리고 방위야.”

인간이 살아감에 있어서 가장 필수적인 것은 의식주. 거기서 나는 생활 전용 거점의 인프라와 대량의 물자를 이용해 단숨에 의식주 문제를 해결할 생각이다.

그다음으로는 사람들의 생존 의지와 삶의 목표가 사라지는 일이 없도록, 노동이라는 합당한 이유를 제시할 것이다.

노동은 삶의 이유가 될 수 있고, 같은 집단의 인원들끼리 결속력을 다지는 협동 행위에 속하기도 한다.

또 조직 내 불평등을 없애기 위해, 역으로 각자의 역할에 맞는 차등 대우를 주려면 노동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했다. 남들은 일하는데 누구만 띵까띵까 놀게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생산 거점에서 생산하게 될 것은 기본적으로 식료품과 건설 자재를 생각하고 있다. 언제까지고 내게 빌붙어 살게만 할 수 없으니 자급자족 능력을 키워 줘야 한다.

단 나를 배신하지 못하도록 적당히 목줄을 잡아 둬야 한다. 모든 거점에서 흘러나오는 인프라는 내 스킬에 의해서 유지될 테니, 나를 배신하는 이가 나오면 그 즉시 스킬의 지원을 끊어서 자급자족을 불가능하게 만들면 된다.

마지막으로 방위 거점.

이건 사실 거점이라기보단 땅따먹기에 필요한 전진 기지 개념에 가깝다.

생존자들이 어느 정도 모여서 조직의 규모가 커지면 그들에게 무기를 쥐여 주고 훈련을 시켜서 전장으로 내보낼 것이다.

그렇게 내보낸 아군 세력이 적대 세력을 깨부수고 거리에 넘치는 좀비들을 청소하면서 하나씩 안전지대를 확보하면, 마침내 사회 복구의 첫발을 내딛는 것이다.

거기까지 설명해 주니 여행 동아리 부원들은 조금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계획이 절대 허술하다고 말하려는 건 아닌데, 이런 시국에 이런 칼 같은 계획이 잘 먹힐까요? 오빠도 아시다시피 세상이 너무 많이 변해 버렸잖아요. 세상에 좀비 떼가 창궐하고, 사람들끼리 서로 반목하면서 싸우거나 배척하고 있잖아요.”

“확실히 이 계획이 너무 좋은 쪽으로만 결과를 보고 세운 계획이긴 해. 그래서 자잘한 부분들은 내가 직접 조정할 생각이야.”

내가 무턱대고 끌어모은 생존자를, 거점 일원이라는 명분 하나만으로 절대 끊어지지 않는 목줄을 채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사람이란 동물이 그렇게 이성적이라면 세상이 이 모양 이 꼴로 돌아가지도 않을 테고, 범죄자들이 교도소를 한가득 채우는 일도 없을 테니까.

때로는 감정에 휘말려서, 혹은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해 너무나도 쉽게 타인을 배신하고 폐를 끼치는 족속들도 존재한다.

그런 놈들을 ‘당신도 우리와 같은 거점 일원이니까 우리를 배신하면 안 돼요’ 같은 순진한 말로 설득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간단하다.

“그러니까 공포 정치를 할 생각이야.”

“““…….”””

“왜? 내 말이 이상하게 들려? 하지만 듣고 보면 너희도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될걸. 인류 역사상 공포 정치만큼 인간을 잘 통제한 시스템은 없거든.”

물론 공포 정치가 과하면 내부에서 불만이 싹트고, 결국 배신자와 반란자를 낳게 된다.

하지만 그건 선의 기준이 들쭉날쭉한 공포 정치였기 때문에 결과가 하나같이 안 좋았을 뿐이다. 선이 명확하지 않은 공포 정치는 으레 그러하듯, 독재자들이 자신이 꼴리는 대로 마음에 안 드는 놈만 처형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확하게 선을 그어 놓은 공포 정치는 사람을 생각 없는 기계처럼 만드는 힘이 있었다. 정확히는 생각을 못 하지만 공포만큼은 확실히 느끼는 기계들로 만드는 힘이다. 대표적으로는 2차 세계대전의 양축을 담당하고 있었던 나치와 소련이 있다.

어쨌든 집단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서, 역으로 나는 공포 정치를 도입할 것이다. 유능하고, 열심히 일하고, 어떻게든 집단을 ‘집단’ 형태로 유지시키려는 사람에게는 큰 혜택을,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최소한의 대우나 불이익을 주면 된다.

처음에는 작은 공동체 사회로 시작하겠지만, 점차 축소판 사회로 성장할 것이고, 규모가 커질수록 우리가 잊고 지냈던 거대한 사회의 본모습을 다시 우리 손으로 만들게 되겠지.

방식이야 어떻든, 결과만 좋다면 과정은 딱히 신경 쓰지 않는다. 내가 그런 것까지 신경 써 줘야 할 만큼 이 나라와 사회는 내게 상냥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단 그렇게 굴러가기 시작한 조직은 내가 남들에게 뒤처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내가 사회로부터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단체 속에서 나 자신이라는 개인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근심 걱정으로 혼을 쏙 빼놓는 게 핵심이다.

듣고만 있으면 상당히 익숙치 않은가? 바로 우리가 지겹도록 욕하고 한탄했던 초경쟁주의 사회다.

모든 인프라와 대부분의 물자를 손에 쥐게 될 내가 선을 긋고, 체계를 정하고, 사람과 사람을 분류하면 자연스럽게 그런 사회가 형성될 것이다.

그다음은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알아서 순응하는 사람과 남들에 의해 축출되는 사람으로 나뉘겠지.

“공포 정치라고 해서 무작정 힘으로 찍어누르거나 협박하겠다는 말이 아니야. 우리 집단에 소속되는 그 순간부터 스스로 겁 먹고, 스스로 조심하게 되는 분위기를 만들자는 거지.”

“이런 말 하면 조금 실례지만, 그건…… 조금 인간미가 없네요. 이런 세상인 만큼 서로 돕고 사는 것만으로도 힘들 것 같은데요.”

“오히려 이런 세상이니까 그런 거야. 같잖은 인간미 추구하다가 다 같이 망하고 싶어?”

“…….”

내가 그리 되묻자 최연희가 입을 다물었다.

사실 그녀도 아는 것이다. 사람이 많아질수록 서로 다른 가치관과 이념을 가진 사람들끼리 끝없이 대립하기 마련이고, 현 시점에서 그걸 반발 없이 원활하게 조율할 방법이 전무하다는 것을.

이미 정부고 사법 체계고 다 사라진 지 오래인데, 정장 입은 야만인들에게 어떻게 질서와 예의를 주입하겠는가?

힘의 논리를 내세워 상대를 압박하되, 실제로 힘을 휘두르지는 않고 다만 필요에 의해 집단 결속력을 요구하는 것이 가장 최선이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렇다.

‘내가 궁예처럼 관심법을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전에 배신자나 스파이를 걸러 주는 대단한 장치가 있는 것도 아닌 이상, 그렇게라도 개인을 단체에 구속시켜야지.’

결속이 아니라 구속. 아 다르고 어 다른 거다.

“회의는 이만하면 된 것 같네. 앞으로의 방침도 정했고, 너희에게 내 생각도 들려줬으니까. 이제 남은 건…….”

나는 인벤토리에서 휴대용 가스레인지와 커다란 냄비, 그리고 생수와 라면을 꺼냈다.

“즐거운 야식 타임이다.”

“밤에 라면 먹으면 살쪄요!”

“그래서 안 먹는다고?”

“큭……!”

최연희와 정선혜는 진지하게 야식으로 라면을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이미 불을 올렸고, 물을 끓이기 시작했는데. 박성호와 전현석도 나와 같은 마음인지 이미 젓가락을 들고 있었다.

“원래 머리 쓰고 나면 일단 먹고 봐야 하는 거야. 먹다 죽은 귀신은 때깔이 곱다는데, 결국 먹는 게 남는 거라니까?”

살이야 빼면 그만이지만, 야밤에 끓이는 라면은 먹지 못하면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 아닌가.

“이, 이번만이에요. 식사 담당인 저는 이런 일탈, 두 번은 용납 못 해요.”

“알았으니까 김치 좀 꺼내 와.”

수많은 사람이 피를 흘리고, 좀비 떼가 인간의 영역을 집어삼키고 있는 이 와중에도 우리는 한밤의 라면 파티를 벌였다.

전장에서 군인들이 죽어 나가도 일반인들은 평범한 삶을 살았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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