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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역병의 아포칼립스-43화 (44/227)

43화 생존기 (43)

사람을 상대로 게임에서나 쓸 법한 ‘파밍’이라는 단어를 갖다 붙이는 건 조금 어떨까 싶지만, 막상 나 같은 상황에 처해 보면 그리 어렵지만은 않을 것이다.

나는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시신들 중 시스템적으로 파밍이 가능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분류했다. 시스템적 파밍이 가능하다는 것은 능력자였던 시신의 인벤토리를 내가 간섭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역시 능력자들답게 이것저것 가지고 있었군.’

능력자들의 시신을 뒤지면서 나온 것들은 대부분 경찰이나 군인으로부터 노획한 무기나 탄환, 전투 식량 따위였다.

돈이나 귀금속은 현 시점에서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한쪽으로 치워 두었다. 대신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화폐로 등극할 것이 틀림없는 DNA 샘플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탈탈 털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우르르 몰려온 것치곤 별 볼 일 없는 놈들이다 보니 소득이 대단하진 않았다.

내가 식량 사정이 궁핍한 것도 아니고, 거점 안에만 처박혀 있으면 신변의 위협도 느낄 필요가 없는데 이런 놈들의 주머니를 뒤져 봤자 얼마나 큰 이득을 보겠나?

그렇게 생각하며 마지막 덩치의 인벤토리를 뒤졌을 때, 족히 화물트럭 하나는 꽉 채울 것 같은 물량이 둑 터진 댐처럼 쏟아져 나왔다.

“……소득이 아주 없지는 않네.”

어째서 좀비와 달리 같은 능력자들 간의 파밍은 이렇게 직접 해야 하는지 궁금했는데, 추측상 개개인의 인벤토리 수용 한계 때문인 것 같다.

예를 들어, 내 인벤토리가 담을 수 있는 최대 중량이 1톤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상대가 10톤짜리 식량을 가지고 있다면 시스템상 파밍은 가능해도 모든 식량을 내가 가져갈 수는 없겠지. 그건 룰 위반이니까.

그래서 지금처럼 능력자의 시신을 파밍할 때는 반드시 직접 인벤토리를 확인하고, 내용물을 가져갈지 말지, 아니면 바깥에 쏟아 낼지 말지를 선택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언뜻 보면 시스템의 불편한 점처럼 보이겠지만, 관점을 조금만 비틀어도 정신 나간 짓이 가능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일단 능력자를 죽인 뒤, 해당 능력자의 시신에서 파밍을 하지 않고 시신만 들고 다니면 움직이는 인벤토리가 탄생하는 것이니까. 도저히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생각이 아니지만 실제로 가능하니까 소름이 돋는 거다.

‘이런 생각이 바로 떠오르는 걸 보니 내 정신도 너무 썩었군.’

능력자가 아닌 일반인 시신은 거점 복구 현상에 의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즉, 시스템상으로도 좀비나 일반인 시체는 거점 내에 보관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나는 힘깨나 쓸 것 같은 덩치에게서 와르르 쏟아져 나온 각종 물자를 내 인벤토리에 담았다가, 다시 내보내는 형식으로 깔끔하게 정돈했다.

식량, 식수, 생필품, 무기, 탄약, 의약품. 일단 이 정도로 분류만 해두고 다시 필요한 만큼 챙겼다.

침입자들도 처리했겠다, 주변을 감시하는 귀찮은 눈도 사라졌으니 슬슬 ‘내 사람들’과 한번 회의를 가져야 할 것 같았다.

내가 그들을 믿든 안 믿든 신뢰의 여부는 잠시 제쳐 두고, 일단 함께하기로 한 이상 정기적인 소통이 빠지면 안 된다. 최전방에서 총질하는 병사들도 자기들이 뭘 하고 있는지는 알아야 하는 것처럼.

“아, 그 전에.”

나는 아직 활용 가치가 남은 능력자 시체(내용물은 다 비웠다)들을 엘리베이터에 실어서 내려보낸 뒤, 홈마트 건물 바깥 거리에 창대를 걸어 두고 못 박아 두었다. 건물 앞에 직접 걸어 두면 냄새가 나니 조금 멀찍이 떨어뜨려 놨다.

이들이 몸담고 있던 생존자 그룹이 일반인은 기억하지 못할지언정, 강인한 능력자는 똑똑히 기억할 것 아닌가? 만약 놈들이 복수를 위해 다시 이곳을 찾는다면, 너희가 믿고 있던 능력자 선봉대는 모두 몰살당했다는 메시지를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현대전에선 절대로 용납되지 않는 전쟁 범죄지만, 저항 의식이 강한 놈들 상대론 썩 잘 먹히는 기만 전술이었다.

북한군들이 잘 보이는 곳에 일부러 북한군 시체를 적당히 방치해 두고 시간 좀 죽이고 있다 보면 놈들이 발끈해서 먼저 달려들거나, 반대로 지레 겁먹어서 항복하는 경우가 제법 있었던 것이다.

‘적대 세력에 대한 경고는 이 정도면 충분하고, 이제 나와 함께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도 메시지를 남겨야지.’

나는 상품을 담아 두는 커다란 플라스틱 상자 하나를 홈마트 입구 앞에 배치해 두었다.

그리고 수첩과 필기도구, 마지막으로 ‘식량과 식수가 필요하다면 예약 접수하세요. 매일 정오(12시)와 저녁(7시)에 확인하고 선별 배급합니다.’ 라고 작은 표지판까지 설치했다.

나와 적대하는 세력은 내가 이 정도 여유를 부릴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힘이 있다는 걸 알게 되는 한편, 나와 적대하지 않는 세력은 반신반의하는 느낌으로 일단 ‘예약’할 것이다.

지금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 이후에는 내가 직접 사람을 선별하면 된다.

“8일차 하루가 또 이렇게 지나가는군.”

야간 경계 스킬 덕분인지, 아니면 불면증에 너무나도 익숙해졌기 때문인지, 나는 다시 들어가서 잠을 잔다는 선택지를 과감하게 포기하고 자전거에 올라탔다. 홈마트를 습격한 양아치 놈들 중 배달 자전거를 타고 온 녀석이 있었던 것이다.

이승권 Mk.2에 비하면 보잘것없었으나, 그래도 뛰는 것보단 나았다.

목적지는 활천초. 거점창의 CCTV로 확인해 본 결과 여행 동아리 회원들은 이제 막 저녁 식사를 끝마치고 각자 자유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자유 시간이라고 해 봤자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읽거나 교사용 휴게실에서 뒹굴거리는 게 전부였지만, 이 시국에 자유 시간을 즐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마음 같아선 나도 하루 종일 넷플러스만 보면서 쉴 틈 없이 입에 간식과 음료수를 쳐넣고 싶다.

“훅, 훅, 훅! 야간 라이딩이 그렇게나 위험하다던데, 그 자전거 동호회 새끼들도 밤에 돌아다니다 나자빠졌으면 좋겠네.”

전국적으로 인프라 공급이 끊기면서 가로등은커녕 건물 비상등조차 불이 들어오지 않는 상황. 아무리 암순응이 됐다지만 달밤 아래 헤드라이트도 없이 라이딩을 하는 건 꽤 고역이었다.

차라리 바이크였다면 다소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헤드라이트를 켠 채 달릴 수 있었을 텐데, 이것도 양아치 놈들이 구닥다리 자전거를 끌고온 게 문제다.

나는 활천초에 들어가기 전, 주변을 한 바퀴 크게 돌면서 혹시 모를 위험 요소가 없는지 살폈다.

활천초 주변은 조용하긴 했지만 어둠 속에서 은은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는 유일한 건물이기 때문에, 꼭 좀비가 아니더라도 이곳을 노릴 세력은 얼마든지 있었다.

만약 거점을 자체적으로 지켜 주는 거점 방위 무기가 없었다면 나는 여행 동아리 회원들에게 무조건 오후 6시가 넘으면 소등을 하라고 명령했을 것이다.

‘부비트랩도 그대로고, 머신 피스톨도 주요 진입로를 잘 지키고 있군.’

학교 본관 옥상에서 조용히 회전하고 있는 20mm 발칸포도 정상 운행 중이었다. 다만 저 발칸포는 대지용이 아니라 대공용이라서 거점 방위에 큰 도움이 되진 않았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던데, 저 발칸포만큼은 보기만 좋은 그림의 떡이었다. 난데없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플라잉 좀비가 등장하지 않는 이상 쓸 일은 거의 없을 테니까.

‘활천초는 부지가 넓은 만큼 수용할 수 있는 인원도 많고, 땅을 개간하면 농지로 활용할 수도 있다.’

식수나 전기는 거점 내에서 무제한이니 걱정할 필요가 없고, 자급자족이 가능해질 때까지는 모든 식량과 생필품을 내가 대줄 수도 있다. 즉, 먼저 사람을 모아서 타이쿤을 하기엔 활천초만큼 적격인 곳도 없다는 뜻.

그래서 나는 활천초에 자리 잡은 여행 동아리 회원들에게 본격적으로 이곳의 성장을 맡길 생각이었다.

거점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건 같은 거점 인원뿐이기 때문에, 내가 당당하게 학교로 걸어들어오는 건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이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이냐는 의문이 더 짙어 보였다.

나는 여행 동아리 회원들을 도서실로 모은 뒤, 대뜸 그들 앞에서 무기들을 꺼내 주었다.

언제까지고 급조한 식칼창이나 쇠몽둥이 같은 걸 들고 다니게 할 수 없을뿐더러, 본격적으로 이곳에 사람이 모이기 시작하면 강력한 힘으로 통제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총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남자인 박성호와 전현석이었다. 특히 평소에도 장난끼가 많은 전현석은 실물 총을 보자마자 표정이 확 굳었다. 이 거점의 주인인 내가 어째서 무기를 꺼낸 건지 어렴풋이 짐작한 것이리라.

“승권 형님, 갑자기 총을 왜……?”

“여기 생활도 어느 정도 안정된 것 같고, 이제 슬슬 제대로 된 생존자 그룹을 만들어야겠다 싶어서.”

다들 졸음이 확 깬 얼굴로 넓은 테이블 위에 놓인 총과 탄약들을 바라보았다.

총. 일반적인 국민이라면 TV나 게임에서 보는 것 외엔 평생 실물을 구경할 일이 거의 없는 살상 무기.

대한민국은 공식적으로 종전 선언이 되기 전까지 전쟁 국가였으니, 대다수의 남자들은 실물을 직접 다뤄 봤을 것이다.

그래서 총이란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큰 책임감을 요구하는 무기인지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박성호와 전현석은 아직 미필이라 이런 식으로 실물을 보게 된 것을 조금 씁쓸하게 여기는 눈치였다.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 되지 않았더라면, 두 사람은 누군가에게 총구를 겨눌 일 없이 조용히 빡센 군 생활만 하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을 테니까.

하필 세상이 이렇게 돼 버렸기 때문에, 총을 든 이상 반드시 누군가에게 겨눌 일이 생긴다는 걸 눈치챘을 터. 그 말은 곧, 언젠가는 자신과 동료를 위해 살인까지도 감수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아직 군 생활도 해 본 적 없는 녀석들이라 쉽사리 총을 들기 어렵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예외를 둘 생각은 없었다.

나와 함께하기로 한 이상, 내 거점에서 비호를 받는 이상, 책임 없는 권리와 혜택만 쏙 빼먹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용납하지 않을 생각이니까.

내가 국가에서 부여해 준 무한한 책임 때문에 짓눌려 죽을 뻔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갑자기 총을 꺼내서 의아하게 느끼겠지만, 너희도 언젠가는 자신의 몸과 생활 터전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무장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을 거야. 세상이 이 지경이 됐는데 저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준법 의식이 투철한 모범 시민들일까? 아냐, 그런 사람들이 가장 먼저 범죄자와 좀비들에게 죽어. 어쩌면 이미 상당수는 죽었을지도 모르지.”

왜냐하면 더 이상 눈치 볼 필요가 없으니까.

정부와 군대, 공권력은 완전히 제 기능을 상실해 버렸고, 사회가 보장하는 제도나 시스템은 더 이상 성실 납세자들의 밥을 먹여 주지 않게 되었다.

물론 몇몇 정의롭고 선한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하겠지.

하지만 그들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현실을 깨닫게 될 거다. 지켜야 할 것은 많은데 식량과 식수를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워지고, 자신들을 위협하는 세력들은 나날이 커져 간다는 것을.

세상에 종말이 도래한 지 8일이 흐른 지금, 나는 어느 정도 현실을 깨달은 사람들부터 거점에 받아들이기로 했다.

세상은 더 이상 돈과 권력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하고, 힘과 재주, 그리고 성실한 노동력만이 자신들의 목숨을 보전해 줄 구명줄이란 걸 눈치챘을 때, 비로소 동료로 받아들일 가치가 있다.

여전히 현실을 깨닫지 못하고 이상만 좇으며 헛된 망상을 부르짖는 멍청이들, 너무나도 빨리 타락하고 주변을 마구 파괴하는 무법자들, 그들에게서 여과되어 흘러나온 깨끗한 물만 받아들여야 조직을 오래 유지할 수 있다.

나는 딱히 광신도처럼 충성심을 강요할 생각은 없다.

도움이 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발목이라도 잡지 않는 사람들을 원하는 것뿐이다.

그런 사람들이라도 거점에 모아서 생산적인 일을 시키면 결과적으로 나는 대량의 거점 포인트를 얻을 수 있고, 그들이 언젠간 무너진 사회를 다시 재건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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