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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역병의 아포칼립스-41화 (42/227)

41화 생존기 (41)

인간은 감수성이 풍부한 동물이라 그런지 낮과 밤이 뒤바뀔 때마다 크고 작은 심신의 변화를 느낀다.

누구나 한 번쯤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깊은 밤, 갑자기 울적해지는 기분에 취해 온갖 잡념과 망상으로 머리가 지끈거리는 경험 말이다.

평소라면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내일의 일은 내일의 나에게 맡기자며 곤히 잠들어야 할 시간에 깨어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생각이 많아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런 증상이 심해지면 가볍게는 불안 장애를 겪다가, 크게는 불면증을 앓는 것이다.

물론 그건 개개인의 불안한 심리 상태 때문에 그러는 것이고, 전혀 다른 이유로 비슷한 밤을 보내고, 비슷한 병을 얻는 경우도 있다.

여느 때처럼 한밤중에 깨어 있게 된 나는 커피 믹스를 2개나 넣어서 아주 진하게 탄 커피를 홀짝였다.

달고, 조금 씁쓸하고, 부드러운 감칠맛이 입안을 감돈다.

텁텁한 단맛을 통해 흘러들어온 카페인이 빠르게 흡수되어, 고장 난 기계처럼 덜컥덜컥 걸리고 있던 뇌에 기름칠을 해 주었다.

오늘 낮에 한바탕 일을 벌린 참이다. 겁 없이 내 거점에 눈독 들인 놈들 중 하나를 콕 집어서 인생의 쓴맛을 보여 줬고, 그걸 만천하에 공개했다.

내 거점에 눈독을 들이는 놈, 조금 더 나아가서 나를 건드리려는 놈들은 이렇게 뒤질 각오 하고 들어오라는 경고 메시지를 남기는 것이 목적이었다.

사람은 원래 직접 당해 보지 않으면 상대의 무서움에 대해 잘 모르고 지나치거나, 그냥 무시해 버리는 경향이 있어서 반드시 본보기를 보여 줘야 한다.

본보기라고 해서 미친 독재자처럼 반란군의 목을 광장에 내걸고, 그들을 총살하거나 산 채로 태워 죽이는 광경을 생중계한다는 건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내 힘으로 너희를 배제할 수 있다, 최소한의 선을 지켜라, 정도의 의미만 전달하면 충분하니 사람 몇 명만 족치면 대부분 해결된다.

실제로 내가 현역이던 시절에 그 ‘본보기’란 걸 꽤 잘 써먹었는데, 주로 악질적인 북한군들을 겁줘서 회유하려는 목적이 다분했다.

예를 들어, 여자나 노약자에게 폭탄 조끼를 입혀서 보내는 놈들은 반드시 추적해서 처절하게 응징했다.

내가 속한 부대 내에서도 그런 놈들을 추적할 때는 투항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으로 암묵적 동의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항상 놈들 중 ‘일부’를 도망치게 해서, 또 다른 잔당 사이에서 소문이 돌도록 종용했다.

악질적으로 국제법을 어기는 놈들에겐 이쪽에서도 똑같이 국제법 무시와 처절한 응징으로 대응할 것이라는 강경파 인식을 심어 준 것이다.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

최소한의 인간적 대우를 받길 원하는 놈들은 나름대로 국제법을 준수했고, 반대로 붕괴한 김씨 정권 및 북한이라는 괴뢰국에 심취한 광신도들은 더 악랄하게 변했으니까.

어느 쪽이든 참 많이도 쏴 죽였던 것 같다.

특히 오늘처럼 고요한 밤에.

바깥에 숨죽인 채 홈마트를 포위하고 있는 놈들은 내가 낮에 한 방 터뜨렸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정확히 어떤 수단을 사용했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총성이 들리긴 했지만 총격전은 건물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일어났으니까.

그렇다면 내가 홈마트에서 스스로 빠져나왔다는 건데, 하루 종일 지하 주차장과 정문 입구를 살피고 있던 감시자들은 날 보지 못했다.

상황이 점점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한다는 걸 다들 눈치챘을 터.

감시의 틈을 뚫고 어느 샌가 홈마트에서 빠져나온 내가 자신들을 공격할 수단이 있다면, 어느 누가 당황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여기까지 와서 홈마트라는 거대한 먹이를 두고 빈손으로 돌아갈 수도 없으니까, 마지못해 놈들끼리 작당모의를 해서 다 같이 치자는 결론이 나왔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지만, 의외로 내 추측은 잘 맞았다. 추측도 결국 경험에서 우러 나오는 것이기 때문일까?

“거점창.”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며 거점창을 열어 CCTV를 확인했다. 건물 외벽, 평범한 인간이라면 좀처럼 찾기 힘든 구석에 숨겨 둔 CCTV는 주변 거리와 건물의 풍경을 모두 담고 있었다.

가끔 흐르는 강물처럼 자연스럽게 흘러들어오는 몇몇 좀비 무리를 제외하면, CCTV에 잡히는 건 대부분 탐욕으로 눈이 번들거리는 인간들뿐이었다.

역시나 홈마트를 포기하지 못한 모양이다.

‘참을성도 없고, 기획력도 없고, 그렇다고 서로 단합이 잘 되는 것도 아니고.’

마치 프로 축구 선수를 상대로 초등학교 축구 팀이 머릿수만 믿고 우르르 몰려드는 광경을 보는 기분이다.

딱히 내가 대단해서 자만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내 일신의 능력과는 별개로, 내가 압도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자리 잡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상대가 짊어져야 할 리스크가 커졌을 뿐이다.

자신과 상대를 비교하기 이전에, 먼저 상대가 어떤 위치를 점했는지, 어떤 대비를 했는지 정도는 파악하는 게 기본 중의 기본 아닌가?

당장 쳐먹을 식량도 없는 북한군들이 잘 싸워 봤자 얼마나 잘 싸우겠어, 하고 비웃으며 무방비하게 행동하던 아군의 머리통이 날아가는 걸 옆에서 본 적이 있다.

‘기본’을 지키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삐끗하는 순간 죽는 거다.

‘대략 스무명이 넘는군. 빠질 놈은 일찌감치 빠지고, 합류할 놈들만 합류한 게 저 정도인가?’

좀비들이 거리를 배회하는 마당에, 계속해서 바깥에 나와 있을 수 없겠다고 판단한 이들은 한발 먼저 철수했을 것이다.

반면 끝까지 홈마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놈들은, 당장이라도 뛰쳐나올 것처럼 달아오른 몸을 주체하지 못하는 듯했다.

눈앞의 이득에 눈이 돌아가서 발정난 개새끼처럼 헥헥 대는 꼴을 보고 있자니, 기가 막혀서 웃음조차 나오지 않는다.

저런 놈들은 살살 긁어 주기만 해도 급발진을 박는 놈들이라 오히려 처리하기가 쉽다.

나는 즉시 홈마트 지하 기계실로 내려가, 건물 내부에 공급되고 있는 모든 전력을 수동으로 차단했다. 남들 눈에는 자연적으로 예비 발전기의 전력이 끊어진 것처럼 보이게끔.

타이밍을 맞춰 거점창을 조작해서 방탄유리로 만들어진 임시 방벽을 치워 내자, 놈들은 전력이 끊어져서 건물의 방범 시스템이 무력화되었다고 판단했는지 즉시 뛰쳐나왔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뭔가 의심스럽다는 걸 알 텐데, 제멋대로 하늘이 내려 주신 절호의 기회라고 해석한 것이 분명했다. 저렇게 꽃밭 같은 뇌 구조를 가지고 어떻게 아직도 살아남았는지 의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방탄유리로 만들어진 임시 방벽이 사라진 현관을 뚫고 빠르게 양아치 서넛이 먼저 침투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방해하는 요소가 없음을 동료들에게 몸소 확인시켜 준 뒤, 다른 이들까지 모조리 불러들였다.

주변 거리에서 좀비들이 소리를 듣고 몰려들든 말든, 그들은 호기롭게 고함과 욕설을 내뱉으며 홈마트 1층 매장으로 몰려들었다.

물론 나는 CCTV를 통해 그 광경을 낱낱이 지켜보고 있었다.

저들은 지금쯤 건물 어딘가에 숨어 있을 날 족치고, 이곳에 한가득 쌓여 있는 물자로 재미 좀 볼 생각에 두근두근하겠지만, 사실 진짜 재미를 볼 생각인 건 이쪽이다.

놈들에게 야간투시경 같은 고급 군용 장비가 있을 리가 만무한 만큼, 나는 1층 매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각도에 설치된 자동포탑 하나의 요격 설정을 건드렸다.

적성체에 대한 요격 설정은 현재 모두 OFF로 되어 있으나, 포탑 하나만 다시 ON으로 바꾸자 귀신같이 적을 포착하고 발포했다.

타타타타!

그리고 다시 재빠르게 OFF.

갑작스러운 총성과 함께 앞에서 나대고 있던 놈이 분쇄되자 놈들의 기세가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울려 퍼진 총성, 누군가가 비명도 내지르지 못하고 쓰러지는 소리, 그리고 따스한 내부 공기 사이로 희미하게 퍼지는 피비린내.

십중팔구, 아니, 누굴 데려와도 어둠 속에서 자동포탑이 자신들을 요격했다 같은 SF적인 상상은 하지 못할 것이다.

총성이 제법 묵직하긴 했으나, 소음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실내에서 자동포탑과 소총의 총성을 구분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래도 대한민국 남성들 중 20대 이상의 대다수는 군필자니까 갑작스러운 총격에도 그러려니 할 것이다. 애초에 나 혼자 이 건물을 지키고 있는데 총 하나 들고 있지 않은 게 더 이상하다고 생각하겠지.

“위쪽이다! 위에서 쏜 거야!”

“흩어져서 움직여! 놈을 포위해!”

“어차피 혼자다! 어둠 속에서 운 좋게 맞춘 것뿐이야, 포위해서 다 같이 덮치면 그만이야!”

먼저 총 맞은 놈은 재수없게 앞에서 혼자 나서다 설쳤으니까, 그러다 운 나쁘게 총을 맞은 것뿐이라고 다들 생각했다.

나는 당연히 1층 매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위쪽에 있고, 총을 가지고는 있지만 혼자니까 충분히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리라.

그런데 이걸 어쩌나.

‘나는 지하에 있는데.’

자동포탑의 진짜 좋은 점은 인간과 달리 시계에 일절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요격 범위 내에 적이 있으면 안개가 잔뜩 껴 있든, 칠흑 같은 어둠으로 휩싸여 있든, 백발백중으로 상대에게 탄환을 박아 넣는다.

그래서 내가 자동포탑의 요격 기능을 ON, OFF로 적절하게 바꿔 주기만 하면, 마치 인간이 어둠 속을 돌아다니며 히트 앤 런을 하는 듯한 상황을 연출할 수 있다.

그것도 모르는 멍청한 놈들이 가상의 ‘나’를 쫓아서 무작정 위층으로 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몰래 식량을 챙겨서 빠지려는 놈들이 있었지만, 한 놈도 살려 보낼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출입구에 설치해 둔 부비트랩의 요격 기능을 ON으로 바꿨다.

이곳에 들어온 이상 죽어서 나가는 것 외에 방법은 없다.

누군가는 나더러 잔혹하다느니, 비인간적이라느니, 반사회적이라느니 원색적인 비난을 할 수도 있겠지만, 딱히 반박할 생각은 없다. 그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니까.

인간이 어디까지 추악해질 수 있는지, 또 인간이 생존을 위해서라면 동족상잔조차 마다하지 않는 가장 잔인한 동물이란 걸 지난 5년간의 경험으로 뼛속 깊이 교휸으로 새겼으니까.

아군이 아니라면 기본적으로 믿지 말아야 하고, 아군이라고 해도 꾸준하게 의심해야 한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사람 마음속은 모르는 법.

타타타타!

이번에는 조금 더 높은 층의 벽에 배치해 둔 자동포탑을 작동시키자 운 나쁜 누군가가 또 죽어 나갔다.

놈들은 자신 대신 다른 누군가가 당해 준 것에, 그리고 운 좋게 살아남은 자신에게 감사함을 느끼며, 가상의 내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 다시 계산을 한다.

당연하지만 가장 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매장 내부와 단절된 비상계단이었다. 다섯 명이나 되는 놈들이 일사불란하게 계단을 오르고 있었는데, 자신들은 안전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눈치였다.

총성은 매장 안쪽에서 들려오고 있고, 내가 혼자라는 걸 알고 있는 이상 비상계단에서 자신들을 덮칠 적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총성에 맞춰서…….’

부비트랩을 터뜨린다.

타타타타 콰앙!

묵직한 자동포탑의 총성이 다시 한번 울려 퍼지는 순간, 비상계단 안쪽에서 부비트랩이 터져 나갔다.

각각 단절된 공간 내부에서 터진 소음 때문에 매장에 남아 있는 약탈자들은 비상계단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애초에 총성이 울려 퍼진다고 해서 누가 죽었는지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다. 자동포탑에 요격당한 적은 비명 한번 내지르지 못하고 즉사하기 때문이다.

넓게 포진해 있는 약탈자들은 이미 익숙해진 피 냄새를 맡으면서, 내가 어둠 속 어딘가에서 되는 대로 총을 갈기고 있다고 착각할 게 뻔했다.

그럴수록 더욱 기세등등해져서, 결국 날 잡아 족치고 이 건물을 통째로 집어삼킬 생각에 입꼬리가 귀까지 올라갔겠지.

헛된 희망을 품게 하는 것 같아서 조금 미안해질 지경이다.

‘그렇다고 봐줄 생각은 없지만.’

나는 마침내 근처에 세워 둔 소총을 집어 들고 기계실을 빠져나왔다.

나 역시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건 똑같았지만, 놈들과 달리 어둠 속도 훤히 꿰뚫어 보는 CCTV와 침입자들의 위치를 나타내 주는 거점창이 있었다.

놈들은 가상의 적을 앞에 두고서 등 뒤를 따이는 게 어떤 기분인지 곧 알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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