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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역병의 아포칼립스-40화 (41/227)

40화 생존기 (40)

내가 뭐 적지 깊숙히 침투해서 요인 암살하고 폭파 공작이나 하는 특수부대 출신은 아니지만, 나름 전장에서 구른 짬밥이 있는지라 민간인에 대한 안목이 좀 있다.

첫째, 적지에서 만나는 모든 민간인은 잠재적 적군이다.

둘째, 혼자 있는 민간인은 위험하지 않다. 하지만 우르르 몰려다니는 민간인은 위험하다.

셋째, 민간인 그룹에 남성 비율이 높으면 위험하다.

넷째, 야전에 익숙해 보이는 민간인은 위험하다.

다섯째, 눈에 독기가 서린 민간인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위험하다.

‘크게 당황했으면서도 독기가 죽지 않았어. 일반인은 이만큼 압박당하면 눈물콧물 다 흘리면서 살려달라고 빌어야 하는데 뭔가를 노리는 눈치다.’

특히 내가 ‘이상한 능력’에 대해 언급했을 때 잠깐이지만 놈의 눈빛이 바뀌는 것을 똑똑히 봤다.

하기야 생존자 그룹에 반드시 우두머리 한 명만 능력이 있다는 법은 없고, 무엇보다 이놈은 따로 무기를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영화 속 좀비들이 거리를 배회하는 위험천만한 시대가 도래했음에도, 심지어 야외에서 노숙을 하는 마당에도 별도의 무기를 챙기지 않았다는 건 본신의 능력에 자신이 있다는 증거.

나는 직감적으로 뇌내 타이머를 1분 앞당겼다. 이제 1분 남았다.

“그, 그게 그러니까…… 저희 그룹엔 능력자가 세 명이 있습니다.”

“한 명은 보나마나 너희 두목이겠지. 두목이 가진 능력은?”

“공사 연장을 들고 있으면 힘이 대폭 증강하고 연장의 내구도가 상승하는 능력입니다. 형님 말로는 자기가 ‘노역자’라는 직업을 얻으셨다고…….”

“연장을 들고 있지 않으면 능력이 발동하지 않겠지?”

“그렇습니다…… 그리고 또 한 명은 창식이라는 놈인데, 그냥 남들보다 더 많은 물건을 들고, 더 오래 돌아다닐 수 있는 능력입니다. 직업은 ‘운반자’라고 말했던 걸 들었습니다.”

20초 남았다.

“그럼 네 능력은?”

“……!”

그 순간 놈의 몸이 기형적으로 비틀리며 총구 중심에서 탈출했다.

기계체조나 발레, 요가를 극한까지 배워도 인간의 몸으로는 절대로 뒤틀릴 수 없는 영역까지 뒤틀렸기에, 찰나이긴 해도 도저히 총구가 놈의 신형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물론, 사격 스킬 덕분에 무지성으로 방아쇠를 당기기만 하면 보정을 받아서 쏘는 족족 맞겠지만, 나는 섣부르게 총을 쏘는 대신 재빨리 총신을 거꾸로 돌려잡고 몸을 회전시켰다.

까앙!

회전력을 실은 소총의 단단한 개머리판 끝이 화장실의 타일 벽을 두들긴 것을 보니 공격이 빗나간 모양이다. 그래도 딱히 상관은 없었다.

‘내가 공격에 실패한 순간 치고 들어오면 전투에 특화된 능력이고, 도주를 시도한다면 비전투 능력이다.’

이미 공격이 실패로 돌아간 순간부터 반대쪽 손이 대검을 뽑아 들고 있었기 때문에 반격을 역으로 쳐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놈은 정말로 시시하게도 한계까지 비틀고 고무처럼 늘어뜨린 몸을 이용해 도주를 선택했다. 길게 내뻗은 손으로 단숨에 화장실 문고리를 잡아 열고 빠져나가려 한 것이다.

어떤 삶을 살아왔으면 이런 능력을 손에 넣을까 싶다가도, 저렇게 상대의 허를 찌를 수 있는 기막힌 능력을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하는 꼴이 퍽 우스웠다.

‘허를 찌르는 기습은 처음 한 번으로 성공시켜야 의미가 있는 법인데, 그걸 낭비하는 것도 모자라서 적에게 등을 내보이다니.’

러시아에서 들여온 구식 SVD 소총으로 저격을 시도한 북한군도 이렇게 어설프지는 않았다.

꽈배기처럼 한계까지 비틀린 놈의 몸을 잘못 건드렸다간 압착 사고가 일어날 것 같아서 칼날부터 박아넣었다. 의외로 칼날이 쉽게 박혔는데 기대했던 출혈쇼는 일어나지 않았다.

‘능력 덕분에 몸의 탄성과 압착력이 늘어나서 칼날이 제대로 박히지 않았군.’

놈은 자신의 몸에 대검이 박힌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화장실 문을 열어 얼굴부터 내뺐다. 방음문 때문에 어차피 크게 소리쳐도 동료들이 듣지 못하겠지만, 그 방음문을 직접 열어젖힌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나는 세면대를 발판 삼아 뛰어올라, 지금도 실시간으로 뱀처럼 늘어나고 있는 놈의 몸에 발을 내려찍었다. 대검 손잡이가 콱! 하고 박혀들어가면서 마침내 핏물을 내뿜었다.

몸을 한계까지 비튼 탓에 걸레를 쥐어짜내는 것처럼 핏물이 격하게 터져 나왔다.

바깥에서 ‘크악!’ 하고 새된 비명소리가 들려왔지만 개의치 않고 대검의 손잡이를 잡아 래버처럼 힘껏 아래로 당겼다.

상처가 더욱 벌어지면서 자연스레 몸의 압착력도 약해졌다. 기껏 열심히 늘린 몸이 다시 빙글빙글 돌면서 원래대로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끝내 동료에게 도움을 구하지 못한 놈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옆구리에 대검이 깊이 박힌 상태였다.

양아치 그룹에 몸을 담은 것치곤 칼침이 영 익숙치 않은 듯, 놈은 숨을 헐떡이면서 덜덜 떨었다. 이해한다. 사지 어딘가에 칼이나 총알이 박히면 찢어져라 비명을 지를 수 있지만, 상체에 박히면 비명도 안 나온다.

통증이 너무 심해서 안면 근육이 수축되고, 쇼크라도 온 것처럼 호흡을 제대로 할 수 없다. 비명을 지를 수 있을 정도라면 차라리 다행인 거다. 덜 아프게 다쳤다는 의미니까.

옆구리를 칼날로 마구 헤집었으니 짐작컨대 내장이 갈기갈기 찢겨지고 내출혈이 심각한 상황. 국내의 저명한 외과의가 만전의 준비를 갖추고 수술대로 올리지 않으면 절대로 살릴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가능하지.

“이게 뭔 줄 알아?”

나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우유처럼 새하얀 액체가 들어 있는 작은 유리병 하나를 흔들어 보였다. 이놈도 상점창을 열었다면 모를 리가 없다.

“너 같은 놈들은 꿈도 못 꾸는 치료제야. 좀비를 최소 100 단위로 잡아야 하거든.”

그런 능력을 가지고 맞서싸우기는커녕 도망부터 치는 놈이 좀비를 잡았으면 얼마나 잡아 봤을까. 아랫것들이 양념해놓은 걸 막타쳤다고 해도 기껏해야 두 자릿수를 넘기지 않을 터.

“너, 너도…… 너도 능력자…… 였군!”

“너 같은 놈이랑 같은 취급을 받는 게 참 아니꼽지만, 맞아.”

문자 그대로 재난 상황에서 운 좋게 살아남았을 뿐인 사람들과, 생존하기 위해 사투를 벌인 사람들은 같은 생존자라고 불릴지언정 능력적인 면에선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다.

이놈도 분명 어쩌다 좀비와 사투를 벌이고 능력을 얻었을 텐데, 겁쟁이처럼 사람을 고기방패 삼아 안전하게 성장하는 것을 택한 것이 큰 실책이었다.

나는 인재나 충성심 높은 사람을 받아들일지언정 타인의 도움 따윈 일절 받지 않았으니까. 물론, 그건 꽤 오래된 습관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건 결국 마음가짐이다.

“부주의하게 총을 쏘지 않아도 너 하나쯤은 조질 수 있는 나, 그런 능력을 가지고도 도망치기에 급급한 너. 그런 주제에 무슨 깜냥으로 홈마트 쟁탈전에 발을 들인 거냐?”

“씨발…… 우리도 먹고는…… 살아야 할 거 아냐!”

“남에게 편하게 업혀 가려는 썩어 빠진 근성과 남의 것을 약탈하지 않으면 자신의 삶을 정당화할 수 없는 낡아 빠진 사상을 가지고 아득바득 살아가겠다고?”

“퉤! 그래! 사람이 살고 싶은데 이유가 어딨…… 어!”

“무지성 무논리가 아니라 합리적인 이유를 대야지 병신아.”

빠악!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놈의 옆구리를 가볍게 걷어차 주자 놈이 떠나가라 비명을 지른다.

하지만 화장실 문은 굳게 닫혀 있고, 바깥에서 누가 돌아다니는 낌새는 느껴지지 않는다.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해. 그 많던 좀비들이 과연 하룻밤 사이에 자연적으로 사라졌을까? 당연히 아니지. 너희처럼 눈치 없고 멍청한 놈들을 위해 내가 맛보기로 폭발쇼까지 보여 줬잖아. 그럼 적당히 고개 숙이고 들어와서 으쌰으쌰할 생각을 했어야지.”

꼴에 자신들이 강자라는 자존심에 취해서 고작 한 수 앞을 내다보지 못한 놈들이다. 당연히 홈마트 주변을 에워싼 놈들처럼 다 같이 몰려가서 약탈할 생각뿐이었겠지.

“강력한 능력을 가진 사람과 협력하면 리스크는 적지만 이득은 많잖아. 왜 그렇게 단순한 생각조차 못 해서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거야?”

얼른 무기버리고 벙커에서 기어나오라고 하면 말을 좀 들으라고 씨발.

민간인인 척 피난민 행렬 사이에 숨어서 자폭용 수류탄이나 권총 같은 거 숨기고 있지 말라고 제발.

죄없는 노약자나 여자에게 폭탄 조끼 둘러서 내보내지 말라고 좀.

항복하면 하면 어련히 국제법에 따라서 최소한의 대우를 약속해 주겠다는데 왜 그놈의 항복을 안 해서 사람을 피곤하게 하냐고.

“대가리를 숙이지 못하는 병이라도 걸린 거냐? 아니면 남들과 함께 짝짜쿵해서 좀 더 건설적인 계획을 세울 머리도 없어? 그딴 안일한 마음가짐으로 좀비와 약탈자들이 넘쳐나는 이 세상을 돌아다닌 거냐?”

“크흡…… 푸…… 미친 새끼. 별 시답잖은…….”

“시답잖은 건 여기서 칼침 맞고 죽어가는 네 인생이고.”

콰직!

마지막까지 같잖은 꼴통을 개선시킬 의지가 없어 보여, 나는 결국 개머리판으로 놈의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생산성도 없고, 건설적이지도 않고, 미래도 불분명하고, 그 모든 문제점을 개선하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는 쓰레기는 이 세상에 없느니만 못 하다.

분명 앞으로도 누군가를 고기방패 삼아 자신은 비교적 편하고 안전한 삶을 영위하고, 근본이 썩어 빠진 탓에 끝없이 남의 것을 탐하는 아귀처럼 변하겠지. 인간의 신선한 살점과 피를 찾아 휘적휘적 돌아다니는 좀비들과 하등 다를 것 없다.

대검을 쑤욱 뽑아 핏기름을 닦아 낸 다음 화장실을 나오자, 때마침 복도를 걸어오던 놈과 시선이 마주쳤다. 놈이 몸을 돌려 도망치기도 전에 대검을 던져 미간에 박아 넣었다.

대검 던지기라는 게 의외로 연습만 하다 보면 쉽게 터득하는 것이라, 정말 5년간 질리도록 던져 봤다.

하필 총알이 걸렸을 때, 탄약이 다 떨어졌을 때, 어떻게든 위험에 처한 아군을 구해야 할 때, 나도 모르게 휙휙 던지다 보니 10점 만점을 노리게 되더라.

방음문 앞에 털썩 쓰러진 놈을 대충 발로 밀어내고, 방음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사무실 안에서는 한창 식사를 준비하고 있던 양아치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쪽에 앉아서 먼저 컵라면을 받고 있는 놈이 가장 먼저 화장실을 이용했던 두목이었다.

더 말해 무엇할까.

나는 화장실에서 꽈배기 능력자를 죽여 경험치와 소소한 DNA 샘플을 챙겼던 것처럼, 놈들에게서도 응당 받아 내야 할 것을 수확했다.

“저새끼 뭐ㅇ……!”

타타타! 타타타! 타타타!

3점사로 갈긴 탄환이 가장 먼저 연장을 집어드는 두목의 가슴과 머리를 차례로 꿰뚫었고, 뒤이어 사시미나 서바이벌용 손도끼를 집어드는 놈들을 조졌다.

상대의 총구가 자신을 향한 순간부터 인간은 직감적으로 ‘죽는다’는 걸 알게 되는데, 상황이 워낙 급박하면 죽는다는 사실도 잊고 무작정 달려드는 일이 비일비재 하다.

자신들의 두목이 가장 먼저 죽은 것도 잊고 겁없이 달려드는 놈들을 향해 탄환을 흩뿌렸다. 가장 먼저 달려든 놈을 고기방패 삼아 밀어붙이는 놈도 있었지만 내 발길질에 함께 날아갔다.

능력을 각성한 생존자와 그저 살아남았을 뿐인 생존자는 이렇게나 다르다.

이놈들에게는 나름대로 훈훈한 아침 식사 시간이었을 텐데, 내게는 그저 거점을 갉아먹으려는 흰개미 청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나는 시체도, 놈들이 가지고 있는 물자도 무엇 하나 건드리지 않고 조용히 짚라인을 타고 홈마트로 복귀했다.

총성에 화들짝 놀란 다른 생존자 그룹이 이 참극을 보고 부디 깨닫는 바가 있기를 바라면서.

모두가 알다시피 나는 그냥 집에 처박혀서 아무것도 하기 싫은 평화주의 퇴역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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