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39화 (40/227)

39화 생존기 (39)

꽤 충실한 하루를 보내고서 다시 한번 종말의 아침 햇살을 맞이했을 때, 나는 홈마트를 지켜보는 눈들이 더 늘어난 것을 눈치챘다.

‘첫날 밤은 내가 자지 않고 버틸 거라 생각해서 몰래 움직이던 몇 놈을 제외하면 침입자가 없었지.’

전장에서 무려 5년이나 보낸 탓에 불면증을 달고 사는 내게 밤을 새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이 상태로 며칠을 자지 않아도 몸이 조금 무거워질 뿐, 끝까지 자지 않고 버틸 수도 있다.

물론, 그렇게까지 자지 않고 버티면 어느 순간 배터리가 방전된 스마트폰처럼 나도 모르는 사이에 픽 쓰러져 잠들지만, 지금의 나는 그것조차 능가할 힘이 있었다.

-야간 경계(B++) : 최대 7일간 수면을 취하지 않아도 75%의 컨디션을 고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습니다.

“정말 이기적으로 생존하기 좋은 직업이라니까.”

배고프면 적당히 주변을 굴러다니는 음식을 집어먹고, 찝찝하면 콸콸 쏟아져 나오는 따뜻한 물로 씻고, 심심하면 거점창을 만지작거리면서 다양한 실험을 할 수도 있다.

그에 비해 꼬박 하루 동안 나를 감시하고 있는 생존자 그룹은 시간이 지날수록 손해만 보는 구조다. 결국 어느 시점에서 작정하고 쳐들어올 텐데, 제대로 자거나 먹지도 못한 놈들이 잘 싸우면 얼마나 잘 싸울까?

한술 더 떠서 지금은 한겨울에 가까운 늦가울이다. 주기적으로 숙면과 식사, 그리고 위생을 위한 세면을 못 하면 객사하기 딱 좋은 환경이라는 거다.

‘내 예상이 맞다면 오늘 밤에 치고 들어오겠군.’

나와 같은 생존자들이 있다면 그놈들에게도 현재 7일째 생존일이 적립되어 있을 터. 나처럼 좀비를 학살하진 못 했다고 해도 꾸준히 좀비를 잡았다면 상점창에서 쓸 만한 것들을 구매했을 것이다.

거기에 생존자들이 보유하고 있을 다양한 스킬들은 나도 예측하기 힘들다. 막말로 독가스를 내뿜는 놈이나 순간이동을 하는 놈이 튀어나온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나나 채성아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대부분 현실적인 직업들이겠지만, 그게 방심을 해도 된다는 이유는 아니다.

무엇보다 집구석에 틀어박혀서 방어만 하는 건 내 취향이 아니기도 하다. 놀랍게도 나는 항상 벙커에 기어들어가서 다 조지는 입장이었으니까.

‘지금은 해가 중천에 떴으니까 다들 방심하고 있겠지.’

지금 이 시기라면 아침 7시에 뜬 해가 고작 오후 5시 쯤에 저물어 버린다. 특히 동해와 가까운 김해 특성상 일출이 더 빠르기 때문에 체감상 해가 금방 중천에 뜨는 느낌이다.

7일차 상점창에선 각종 총기류에 호환되는 탄약이나, 탄약 제조에 필요한 재료를 팔기 시작했다.

탄약 100발 제조에 필요한 재료를 구입하는 것이 탄약 50발을 사는 것과 비슷한 효율을 자랑하니, 도구 제작 스킬을 보유한 내겐 이쪽이 더 이득이었다.

특정 탄약 제조법을 구매해서 도구 제작 스킬에 등록시키고, 나머지는 대량으로 구매한 재료를 쏟아붓는 지루한 작업을 반복했다.

-5.56mm 탄약x30(E)

-5.56mm 탄약x30(E+)

-5.56mm 탄약x30(E)

“역시 이렇게 되는군.”

처음 소독된 붕대를 만들었을 때도 그렇지만 도구 제작으로 아이템을 제작하면 미미하지만 보정 효과가 붙었다.

E급 탄약은 가장 기본적인 품질에 아무런 보정도 붙지 않은 평범한 탄약이었지만, 간혹 +가 붙은 탄약은 추가 관통력과 탄속 증가 보정을 받았다.

남들이 군이나 경찰에게서 파밍한 머글 전용 탄약을 사용할 때, 나 혼자 인첸트 탄약을 사용하는 느낌은 한 마디로 말해서 죽여준다. 내 총에서 마법이 나간다고 미개한 머글놈들아!!

“스으으으으으읍…… 하아.”

소총의 총신을 코로 훑으며 진한 화약과 금속 냄새를 맡으니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만 같다. 총은 자신의 애인처럼 다루라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는데, 이 정도면 나도 임자 있는 인싸 아닐까?

자신의 여자친구에게 인첸트 탄약도 못 넣어 주는 저 능력 없는 놈들 좀 보라지.

‘이래서 돈 많고 잘생긴 놈들이 외제차에 여자친구를 태우고 도로에 꾸역꾸역 기어나오는 거구나.’

이 모자란 후배가 선배님들께 한 수 배웠습니다.

내가 누구? M16 소총(인첸트 탄약) 오-우너!!

인고의 시간은 이 시간부로 끝났다. 당장이라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으면 욕구불만으로 미쳐 버릴 것 같으니 태평하게 자고 있을 늦잠꾸러기들이나 족치러 가 볼까.

그대로 홈마트 옥상으로 올라간 나는 주변에 있는 건물 중 가장 높아 보이는 건물을 향해 짚라인 훅을 쐈다.

아슬아슬하게 건녀펀 옥상에 닿은 짚라인 훅이 확 당겨지면서 자연스럽게 내 몸도 이끌려 갔다.

이 추위에 대견하게도 옥상에서 망을 보는 놈은 없었는지, 옥상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얼리버드가 벌레를 다 먹어치운다는 격언도 못 들어 본 걸까. 아니면 고작 이 추위가 싫어서 홈마트라는 귀중한 물자 수급처의 감시를 대충 하는 걸까.

어느 쪽이든 참 팔자 좋은 놈들이라고 생각하면서 조심스럽게 옥상 문을 비틀어 열었다. 다행히 오래된 금속문 특유의 끼기긱 하는 불쾌한 마찰음은 없었다.

옥상 입구 안쪽에 떨어져 있는 담배 꽁초나 다 타고 재만 남은 불쏘시개를 보니, 간밤에 누가 이곳에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어차피 보는 눈이 많은 낮은 안전할 거라 생각하고 일찌감치 따뜻한 건물 안으로 들어간 거겠지.

너희처럼 안전불감증에 걸린 놈들이 개인 호를 대충 파서 머리통이 날아가거나, 부주의하게 민간인의 접근을 허용했다가 자폭 공격에 당하는 거라고.

신발을 신고 단단한 석재 바닥을 걸어다니면 필연적으로 발자국 소리가 울려 퍼지기에, 일부러 신발을 벗고 살금살금 계단을 내려갔다.

냉기가 양말을 뚫고 맨살을 쿡쿡 찔러 댔지만 개의치 않고 견착 자세를 유지한 채 움직였다. 밤이든 낮이든 소음만 내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기습을 가할 수 있다.

막말로 나무 한 그루 없는 민둥산에서 대뜸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갑자기 지상으로 튀어나오는 북한군도 있었으니까.

소음으로 적의 존재 유무를 파악하고, 눈으로 증거가 될 만한 흔적을 찾는다. 그러다 냄새로 인간이 내뿜는 특유의 체취를 맡으면 비로소 자신이 좆됐다는 걸 실감하는 것이다.

아, 여기에 누가 있구나.

“어흐 시원하다.”

몇 층을 내려왔을까, 복도 구석에 위치한 공용 화장실에서 바지를 추스리며 걸어나오는 한 남자가 있었다.

얼굴이나 손에 물이 묻지 않은 것으로 보아 예상대로 씻지 않았으며, 이 시간에 혼자 화장실을 이용하고 있다는 건 자다가 깨서 화장실이 급해졌음을 의미한다.

망보는 놈이 화장실을 이용할 생각이었다면 처음부터 망보는 곳 근처에서 대충 용무를 봤을 테니까. 아니면 최소한 옥상과 가까운 화장실을 이용하든가. 굳이 이 층까지 내려와서 화장실을 사용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는 건 이 층에 생존자 그룹이 머무르고 있다는 거군.’

계단 구석에 잠시 몸을 숨기고 있으니, 곧 용무를 끝낸 남자가 털레털레 걸어 반대편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방음문을 열자마자 안쪽에서 코고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야, 슬슬 애들 깨워라. 아침이나 먹자.”

“어흐으으음…… 어제 늦게까지 망보던 애들도 깨웁니까?”

“어차피 낮에 움직일 놈들 없어. 밥 먹고 다시 한숨 잔 다음에 저녁부터 다 같이 움직이면 돼. 지금쯤 마트에 있는 새끼 혼자서 밤 새느라 졸려 죽을걸?”

“흐흐, 그건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일단 깨워. 밥을 먹어야 힘을 쓰지.”

한국인은 밥심이야 밥심, 같은 그의 진부한 대사를 끝으로 방음문이 닫혔다.

잠깐 안쪽을 들여다봤을 때 캠핑용 텐트와 침낭 같은 것이 보였는데, 홈마트 주변의 좀비들이 싹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작정하고 준비해 온 모양이다.

‘자잘한 편의점이나 소형 마트는 진즉에 털리고 없으니 홈마트에서 아주 뽕을 뽑을 생각이군.’

기존에 김해에서 살던 주민들은 물론이고, 밀양, 부산, 양산에서 건너온 사람들까지 합치면 제법 많은 피난민들이 유입되었을 터.

그중 상당수는 김해국제공항으로 몰려들었겠지만, 이놈들처럼 웃대가리의 통제를 거부하고 스스로 약탈자로 전락한 케이스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학교, 아파트, 상가건물, 좀비가 없는 곳이라면 닥치는 대로 기어들어가서 약탈하거나 거점으로 삼았겠지. 바로 지금처럼.

“화장실은 순번대로 쓰기로 했으니까 다음은 내가 다녀온다. 너희들도 얼른 일어나서 형님 식사부터 준비해. 새끼들이 빠져가지고…….”

그렇게 궁시렁대며 문을 열고 나온 인물은 조금 전 피곤한 기색으로 대화를 나눈 생존자 그룹의 2인자(추정).

나는 다시 방음문이 닫히기를 기다렸다가 살금살금 놈의 뒤를 밟았다.

어제부터 저놈들이 사용했을 화장실은 특유의 암모니아향이 휭휭 새어들어온 찬바람을 타고 복도까지 퍼져 나왔다.

“에이씨…… 물은 왜 이렇게 빨리 끊어지고 지랄이야. 한국이 언제부터 물 부족 국가였다고 썩을!”

암모니아향이 짜증 나는 건 놈도 매한가지인지, 한층 더 크게 궁시렁대며 공용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때, 화장실 문이 닫히려는 찰나의 순간에 문고리를 잡아 닫히지 않게 하고 조심스럽게 놈의 뒤에 따라붙었다.

어느 동물이든 예외 없이 가장 약해지는 순간은 막을 수 없는 생리 현상을 해소하고 있을 때다.

“아, 쓰읍…… 더럽게 춥…… 크으으으읍?!”

놈이 소변을 보기 시작했을 때 재빨리 입을 막고 옆구리에 주먹을 박아넣어 헛숨을 들이켜게 했다. 하필 용무를 보는 중에 불의의 기습을 당했는지라 놈은 꺽꺽대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 큰 사내새끼가 오줌싸개가 된 건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그대로 놈의 목덜미를 잡고 화장실 벽까지 밀어붙여 머리부터 박아넣었다.

쿵! 하고 벽에 머리를 찧은 놈은 고통스러워 하면서도 더 급한 것이 있다는 양 허둥지둥대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벽 앞에 축 늘어져서 허우적대는 놈의 가슴팍을 발로 콱 눌렀다.

“머리에 쏘면 한 방으로 깔끔하게 끝나지만 고간에 쏘면 한 방으로는 안 끝나지. 나랑 깔끔한 관계가 되고 싶은지, 더러운 관계가 되고 싶은지 정해.”

가벼운 뇌진탕에 혼란스러워하던 놈은 총구를 보자마자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총구가 머리통이 아니라 아래를 향하고 있었으니 정신이 번쩍 들지 않고는 못 배기지.

“까, 깔끔한 관계! 깔끔한 관계가 좋습니다!”

“내가 땀내 나는 사내새끼랑 왜 깔끔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데?”

“……?”

“농담이니까 인상 풀어라. 확 쏘고 싶어지잖아.”

놈은 서둘러 양손으로 자신의 고간을 가렸다. 화장실에서 큰일 보는 놈도 보통 3분이면 나오는 법이니 짧고 굵게 끝내야 한다.

“너희 그룹 중에 이상한 능력 가진 놈 있으면 말해. 얼마나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또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얼버무리든 묵비권을 행사하든 상관없다. 2분 11초 뒤에 날아가는 건 내 고간이 아니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