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생존기 (38)
적들이 고생하는 사이 나는 매우 즐거운 개인정비 시간을 가졌다.
“상점창에 생각보다 유용한 것들이 많네.”
생존 일수가 1일씩 늘어날수록 상점창의 상품도 추가 입고되는 특이한 시스템이라 그런지, 생존 6일째에 다다른 지금은 상품 가짓수만 해도 벌써 수십 종류나 늘어나 있었다.
내가 아침에 구입한 방탄유리도 생존 첫날에는 건설자재, 원자재 품목에는 없었던 것이니 나중에는 더 대단한 상품이 추가될 것이다.
예를 들어, 방탄유리보다 훨씬 더 얇으면서 가벼운 신소재 보호막이라든가, 핵폭발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튼튼한 벙커라든가.
‘건설자재나 원자재, 전자장비 같은 것은 생존에 필수적이지 않기 때문에 비교적 값이 싸네.’
아무리 비싼 품목이라도 500 DNA 샘플을 넘어가지 않는 상품들이 대다수인 반면,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무기나 보호구, 의약품이나 식량은 굉장히 높은 가격으로 책정되어 있었다.
특히 초반에 쉽게 구매할 수 있는 방망이나 칼 따위가 수십 DNA라면, 전투력을 대폭 높여주는 총기류나 폭발물은 기본이 1천 단위를 넘어갔다.
좀비 한 마리당 1 DNA 샘플을 드랍한다는 점에서 평범한 생존자든 비범한 생존자든 상점창으로 전력을 강화하는 건 굉장히 힘든 것이다.
만약, 그런 대단한 생존자가 있었다면 나처럼 좀비를 싸그리 잡아 족쳐서 DNA 샘플로 상점창 FLEX를 해 버렸을 테니까.
물론 나처럼 필요이상으로 주목을 받지 않기 위해 일부러 힘을 숨긴 채, 적당한 생존자 그룹에 몸을 의탁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평범한 민간인들을 고기방패 삼아 조금씩 좀비들을 잡아 가며 DNA 샘플을 모으고 경험치를 획득하는 건 누구나 할 법한 발상 아닌가?
실제로 내가 사람을 충성심과 능력만으로 판단하는 놈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생존자 집단에 적극적으로 접선해서 그들과 함께 행동했을 것이다.
하지만 보다시피 바깥은 저런 상황이다.
누가 그 많던 좀비를 청소했는지 의문을 품지도 않고, 홈마트 하나를 독차지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의심하지도 않고, 그저 자신의 사리사욕만 챙기기 위해 벌떼처럼 몰려든 머저리들.
이러니 내가 선입견을 가지지 않고는 못 배기는 거다.
‘아직도 1만 DNA 샘플이나 남았어. 필요하다면 거점을 강화하는 데 필요한 추가 원자재나 무기를 구입하는 것도 나쁘지 않고…… 아니면 좀 더 존버 타서 더 좋은 물건을 구입하는 것도 괜찮겠지.’
안정적인 거점을 확보하고, 그 거점을 관리하는 것은 제법 까다롭지만 그만큼 들어오는 이익이 크다.
현재를 위해서든 미래를 위해서든 나 자신은 물론이고 거점 수용인원 전원을 안전하게 성장시켜야 한다. 그런 점에서 내 스킬은 최고의 효율을 자랑한다.
거점의 내구도가 조금 줄어드는 것만으로도 거점이 공격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으며, CCTV 스킬이 추가된 지금은 내가 원하는 장소를 원격 감시도 할 수 있다.
‘지하주차장 셔터를 뜯어내려 하는 놈들이 다섯, 배관을 타고 올라오는 놈들이 둘, 철제 사다리를 가져와 창문으로 진입하려는 놈들이 셋.’
그외에도 건물 외벽에 설치한 CCTV로 주변을 살펴보면, 다른 생존자그룹의 행태를 감시하는 듯한 제2, 제3의 그룹들이 눈에 들어왔다.
‘적극적으로 진입을 시도하는 A그룹을 그냥 지켜만 보는 건가? 지금 후방을 기습하면 그들이 가진 물건을 약탈하고 홈마트의 우선 약탈권을 가질 수 있는데?’
원래 뭐든 먼저 줍는 놈이 임자다. 일반적으로 생각해 보면 뒤늦게 도착한 후발그룹이 A그룹을 방해하거나, 반대로 그들과 적극 협력해서 홈마트를 공략하는 게 맞다.
하지만 놈들은 뒤통수를 때리지도, 협력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으슥한 골목이나 건물 옥상에서 지켜보며 관찰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생존자가 있는 집단이군.’
나는 직감적으로 다른 그룹들을 지휘하고 있는 우두머리가 생존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홈마트를 혼자서 독차지하고 있는 내가 괜히 똥배짱을 부리고 있다는 게 아닌 것을 눈치채고, 나의 능력을 밝혀내기 위해 A그룹을 고기방패로 써먹을 심산인 거다.
머리를 제법 굴릴 줄 아는 신중한 타입인 것은 인정하겠으나, 그것과는 별개로 결단력이 부족하다고밖에 볼 수 없다.
나였다면 차라리 노골적으로 다른 그룹을 자극해서 일부러 소란을 키운 다음, 홈마트에 콕 틀어박힌 녀석이 부주의하게 능력을 선보이게끔 유도했을 것이다.
그리고 냉정하게 자기 그룹의 힘만으로 돌파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가늠한 다음 손절각을 쟀겠지.
이미 망해 버린 세상에선 중요한 인력들이 한번 밖으로 나왔다면 절대 빈손으로 돌아가선 안 된다. 부득이하게 빈손으로 돌아가야 한다면 최소한 유용한 정보라도 챙겨야 수지타산이 맞는다.
그런 당연한 사실도 모르면서 그저 상황을 주시하고 있는 자신들이 이렇게나 ‘이성적이다’ 라며 자화자찬하고 있겠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살짝 교란시켜 줄까?’
폭탄이 부착된 RC카를 배관에 재배치한다음 자연스럽게 떨어뜨려서 지상으로 내보냈다. 투박한 디자인을 자랑하지만 내구도 하나는 일품인 RC카가 웅웅 기동음을 내며 재빠르게 움직였다.
최근에서야 알게 된 사실인데, 내 거점 지정 스킬은 굉장히 특이한 판정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활천초등학교의 내구도 변화는 건물과 교문, 담장에만 피해를 입었을 때만 적용된다. 운동장 한복판에서 폭탄이 터진다고 한들 실질적인 내구도 변화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거점에 포함되면서 거점의 내구도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 그레이존을 찾으려 꽤나 애를 썼다. 예를 들어, 우리 집은 넓은 정원이 그레이존이다.
그리고 홈마트는 주변을 둘러싼 사각형 도로까지 그레이존으로 지정되어 있다.
누가 걸어다니거나 도로를 파괴한다고 해서 내구도에 유의미한 변화를 줄 수는 없지만, 건물 바깥에 CCTV를 배치한 것처럼 RC카를 밖으로 내보내는 것도 가능했다.
RC카의 활동 범위는 홈마트 주변에 국한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레이존 바깥에서 거점 방위 무기 배치나 특정 스킬을 사용 할 수 없다 싶을 뿐이지, 어떠한 힘에 의해서 그레이존 바깥으로 나가게 된 물건이나 스킬의 위력이 뿅 하고 사라지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내보낸 RC카가 대표적인 예였다.
거점 바깥을 나간 순간부터 거점창과 연결되어 있던 신호가 사라지고 더 이상 내가 원격 조작할 수 없게 되었지만, 자연스럽게 무언가에 충돌하고 제멋대로 폭발했다.
콰아아아아앙!
나는 홈마트 맞은편에 위치한 작은 상가 건물의 현관이 통째로 날아가는 광경을 보며 팝콘을 씹었다. 아직 RC카는 많이 남아 있다. 심지어 재충전도 된다.
상가 건물 위에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던 다른 그룹은 크게 당황하더니, 허둥대며 피신하기 시작했다. 지금쯤이면 무언가를 폭발시키는 것이 내 능력이라고 단정 지었으리라.
‘그것도 판타지스러운 폭발이 아니라 꽤나 현대적인 폭발이지.’
방염 처리가 안 된 건물 일부에 불이 붙고 화재가 발생했다. 강력한 폭발이 건물 입구를 폭파시킨 탓에 건물의 내구도가 크게 깎인 상황.
나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RC카를 한 대 더 내보냈다. 이번에는 입구를 빙 돌아서 지하주차장으로 연결된 내리막길을 내달렸다.
때마침 지하주차장 입구에서 폭음을 듣고 뛰쳐나온 다섯 명의 양아치가 RC카의 맞은편에 있음이 확인되었다. 현재 그들은 ‘침입자 경보’에 감지된 적대 세력이었기에 거점창에 붉은 점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RC카를 부드럽게 드래그해서 침입자들 앞에 가져다 놓고, 거점창에서 손가락을 뗐다.
콰아아아아앙!!
또 한 번 이어진 폭발에 이번에는 건물 측면에서 작은 진동이 흘러들어왔다. 붉은 점 5개는 어느샌가 사라지고 없고, 대신 내 시야에는 적대 세력을 처치한 수에 비례해 경험치가 들어왔다는 심플한 메시지가 나타났다.
역시 좀비가 아니면 DNA 샘플을 얻을 수 없는 모양이다. 아니면 기존에 DNA 샘플을 가지고 있던 생존자를 죽여야만 얻을 수 있거나.
‘적어도 그 다섯이 나와 같은 생존자가 아닌 건 확실해졌네.’
기껏해야 저들도 누군가의 명령을 받고 우르르 몰려온 잡놈들에 불과하지만, 어느 멍청이의 멍청한 명령만 따르다 허무하게 죽어 버린 것은 조금 불쌍하다고 생각한다.
삼가고인의 명복을 왼손으로 비비고 오른손으로 비비고.
나는 홈마트에 들러붙은 벌레들을 적당히 처리하는 한편, 이쪽의 상황을 주시하기 위해 몰려든 구경꾼들에게 적지 않은 혼란을 안겨 주었다.
편하게 드러누워서 그 짓거리를 하는 것만으로도 점심 시간을 훌쩍 넘길 정도였으니, 이 정도면 하루 종일 홈마트나 보던 과거의 나에 비해 훨씬 더 생산적인 일을 한 게 아닐까?
“오늘 저녁은 만두에 공화춘으로 조진다.”
* * *
“뭐냐! 씨발! 대체 뭐냐고 저 폭발은!!”
콜록콜록!
여기저기서 울려 퍼지는 기침 소리에 괜히 짜증만 더 치솟는다.
하지만 자신들도 대책 없이 갑작스럽게 당한 상태라 제대로 반격도 해보지 못하고 건물을 빠져나온 게 고작이었다. 설마, 아무런 전조도 없이 강력한 폭발을 일으켜 건물에 화재를 일으킬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쿨럭! 흐음! 일단 인원 수습해서 조금 더 물러서서 상황을 지켜본다!”
“다른 패거리가 우릴 봤습니다! 우리가 역으로 기습을 당할 수도…….”
“야 이 띨빵한 새끼야! 다른 패거리가 우리와 싸울 생각이었다면 진작에 그랬겠지!”
이런 상황에 실없는 소리나 하는 부하의 머리통을 가볍게 후려친 남자는 복합상가 아파트인 ‘백송’에 거점을 둔 지상철이었다.
좀비들이 김해 시내에서부터 쏟아져 나와 사람들을 미친 듯이 습격하기 시작하자 그는 화물트럭을 몰고 도망치던 와중에 좀비 하나를 치여 죽이고 능력을 각성했다.
생존자 직업은 ‘배달기사’. 일반 각성자에 비해 처음부터 인벤토리가 2배 이상 크며 물건을 많이 옮기는 상황일수록 신체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하는 심플한 효과다.
다만 생존에 부적합한 물건은 인벤토리에 소지할 수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기에, 그는 닥치는 대로 생존물자를 수집해서 필요할 때 신체 능력을 향상시켰다.
자연스럽게 생존자 그룹에서 가장 강한 인간이 되었으며, 또한 능력 특성상 모든 물자를 관리하는 절대적인 지위까지 맡게 되었다.
그가 많은 생존 물자를 확보할수록 부하들에게 떨어지는 콩고물도 많기 때문에, 지금은 지상철 한 명이 그룹 전체의 물자를 소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상대가 어떤 놈이든, 설령 총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무난하게 잡아 찢을 자신이 있어 홈마트 인근까지 왔다.
좀비 떼와 싸우는 건 역시 감염 문제 때문에 위험하지만, 같은 인간이라면 헐크 같은 신체 능력으로 개박살을 낼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폭발이라니!’
지상철은 그제야 홈마트 인근을 가득 메우고 있던 좀비 군단이 사라진 이유를 짐작했다.
아마 상대방은 폭발로 좀비들을 특정 위치까지 유도한 다음 융단폭격을 때려서 단번에 몰살시킨 것이 분명했다. 그 증거로 어제는 유독 폭음 같은 것이 심하게 울려 퍼졌으니까.
아직 살아남은 군대가 아니라 능력자의 소행이라는 걸 알게 되자마자 지상철은 상대의 시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우선시했다.
“어차피 놈도 인간이다. 혼자라는 사실은 확실하니 밤이고 낮이고 기다렸다가 적당한 때에 쳐들어가면 그만이야. 아마 다른 패거리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다.”
그리고 다른 패거리는 지상철과 맞붙기 싫어서라도 홈마트에 한가득 쌓여 있을 물자의 일부를 양도해야 할 것이다. 지상철이 인벤토리를 물자로 가득 채우면 차량도 번쩍 들어서 던질 수 있으니까.
“일단은 밤이 되기까지 안전한 곳에서 기다린다. 어두워지면 혼자인 저놈이 모든 범위를 감시할 수 없어. 폭발은…… 조금 위험하지만 권총탄 정도는 튕겨 낼 수 있어.”
“역시 형님이십니다!”
참새 떼처럼 무지성으로 자신을 찬양하는 부하들의 모습이 싫지만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이 띨빵한 놈들을 손수 먹여 살려야 한다는 책임감이 무겁게 느껴지는 지상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