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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역병의 아포칼립스-37화 (38/227)

37화 생존기 (37)

생존 1일 차 기준 상점창과 생존 7일 차 기준 상점창의 내용물은 확연히 달랐다.

그 증거로 건설이나 제작에 사용할 수 있는 원자재는 목재나 콘크리트, 유리 정도가 전부였던 반면, 지금은 합금강판부터 방탄유리, 강화 철근 같은 품목이 확 늘었다.

원자재는 보통 종류와 수량, 그리고 크기에 따라 DNA 샘플 가격이 천차만별이었는데, 예를 들어 내가 손님들을 위해 특별히 구매한 대형 방탄유리는 1장당 100 DNA 샘플이었다.

이론상 좀비를 100마리나 잡아야 구매할 수 있는 이 두터운 방탄유리는 거점창을 이용해 자유롭게 설치와 해제, 보관이 가능했다.

그렇게 홈마트 입구 앞에 설치한 대형 방탄유리의 두께는 자그마치 30cm. 대통령 같은 VIP를 태우고 다니는 방탄차량의 유리창 두께가 보통 10~20cm 인걸 감안해 보면 확실히 오버스펙이긴 하다.

아마 이정도 두께면 대전차포나 미사일을 쏘지 않는 한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로 부술 수 없겠지. 기관포를 좀 갈기다 보면 지속적인 충격에 못 이겨 특정 부위가 파괴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두꺼운 방탄유리 앞에 의자를 끌고와 털썩 앉았다. 그리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턱을 괸 채 바깥을 보았다.

저 멀리서부터 나를 발견한 놈들이 허접한 권총 따위를 들고 내게 접근하고 있었다. 대물저격총을 가져와도 코웃음만 나올 것 같은데 기껏 힘 좀 써서 가져온 게 권총이라니.

‘내가 혼자라서 더욱 만만해 보이는 거겠지.’

아포칼립스든 국가 간의 전쟁이든 비상사태가 선포되면 사람들은 언제나 뭉치길 원한다. 그 사고방식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대신해서 고기방패가 되어 주길 바라거나, 편하게 남들 등에 업혀 가려는 속내가 있다.

사냥견도 고작 한 마리라면 야생 멧돼지를 어려워하지만, 동료 사냥견을 여럿 풀어놓으면 기세가 등등해져서 야생 멧돼지를 압박하는 것과 같다.

상대보다 자신들의 머릿수가 많다고 판단되면 일단 한 수 먹고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단순한 사고방식 덕분에, 저 근본도 없는 양아치들은 같잖게도 서열 정리를 하려 드는 것이다.

하기야 대한민국에선 유독 그런 방식이 잘 먹히니까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다.

우르르 몰려와서 무력시위를 한다든가, 동네방네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지르며 꼬장을 부려서 기어이 좁쌀만 한 이득을 얻는 사람들을 한두 번 봤어야지.

타앙! 퍽!

편하게 입구 중앙에 앉아 있는 나를 향해 누군가가 이때다 싶어 권총을 쐈지만 예상대로 탄환은 막혔다.

경찰들이 사용하는 .38 구경 리볼버든 군 장교들이 사용하는 9mm K5 권총이든 30cm 두께의 방탄유리 앞에선 어쩔 도리가 없다.

투명한 유리창에 아주 작은 흠집과 균열이 생기자 그제야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챈 놈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이 씨발! 이건 또 뭐야?!”

“대체 언제 이런 게 생긴 거지…… 야 이 개새끼야! 좋은 말로 할 때 튀어나와라!”

“이거 방탄유리 아냐? 권총으로는 씨알도 안 먹히겠는데?”

“그럼 때려 부숴야지! 오함마나 도끼로 두들기다 보면 결국 깨지지 않겠어?!”

놈들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있었지만 방탄유리 너머에 있는 내겐 먼 곳에서 소리치는 것처럼 작게 들렸다. 설치형 방탄유리가 입구를 완벽하게 틀어막은 탓에 외부 소음이 극단적으로 줄어든 것이다.

그것을 대비해 나는 입구 근처에 대형 스피커를 설치해 두었다. 덧붙여서 스피커와 마이크 세트 가격은 단돈 38 DNA 샘플이었다.

“아아, 마이크 테스트 하나둘 하나둘 하나둘셋 야!”

삐이이이 하고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 스피커음에 화들짝 놀란 양아치들이 다시 쌍소리를 퍼부어 댔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놈들 앞에서 식사 준비를 시작했다.

“다들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BJ승권의 생동감이 느껴지는 실시간 리얼 먹방 ASMR…… 즐겁게 감상해 주십시오.”

“개소리하지 말고 얼른 나와 개새끼야!”

“네가 여기서 혼자 버티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우린 밤이고 낮이고 여기 조질 수 있어!!”

“지금이라도 나오면 네 몫은 보장해 준다!”

놈들이 온갖 둔기로 두터운 방탄유리를 두들기며 원숭이처럼 울부짖어도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라면부터 끓였다.

캠핑용 가스버너에 코펠을 올리고 생수를 콸콸 부어서 라면 2개 끓일 만큼 물을 맞춘다. 최후의 보루(A+) 효과 때문에 거점 내에서 보관되는 동안 영구적으로 싱싱한 상태를 유지하는 파와 고추도 준비했다.

“자 여러분, 라면을 끓일 때 스프부터 넣냐 면부터 넣냐 싸우는 건 바보 같은 짓입니다. 당연히 스프부터 넣어야죠.”

면부터 넣어서 끓이면 스프가 온전히 국물의 MSG 틱한 맛을 형성하기도 전에 조리를 끝내야 한다. 국물을 우려내기 위해 오래 끓이면 면이 붇기 때문이다.

스프 2개를 투하한 탓에 시뻘겋게 물든 국물을 조금 더 끓이다가, 파와 고추를 송송 썰어서 차례대로 흩뿌리듯이 던져 넣었다. 이 단계까지 오면 라면의 핵심인 국물이 80%쯤 완성된다.

마지막으로 반씩 쪼갠 2인분 면사리를 넣으면 끝. 매콤하면서도 얼큰한 국물이 반으로 쪼갠 면사리에 순식간에 스며들면서 황홀한 냄새를 방출했다.

뜨거운 열기를 타고 올라오는 깊은 풍미에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전장을 누비던 시절에는 뜨거운 물이 항상 부족해서 물에 오랫동안 불려둔 라면이나 먹어야 했었는데.

‘생각해 보니 좀 빡치네. 전장에서 식사 추진이 안 돼서 맨날 짜요밥이나 라면만 쳐먹었잖아.’

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대한민국 군대가 어떻게 자력으로 북한 전역을 점령하고 치안을 유지하면서 복구 작업까지 했는지 이해가 안 될 지경이다.

과거의 일은 잠시 제쳐두고, 나는 라면의 키포인트이자 화룡점정이라고 할 수 있는 완벽한 노른자 까기를 선보였다. 흰자가 들어가면 금세 국물 맛을 변하게 하니까 노른자만 완벽하게 까서 넣어야 한다.

그렇게 노른자가 터질 듯 말 듯한 상태로 반쯤 굳었다 싶은 순간이 바로 젓가락을 들어야 할 타이밍.

나는 마이크를 근처에 두고 버너의 코펠 접시에 면을 한가득 집어 올렸다.

슬쩍 시선을 들어 올리니 양아치들이 방탄유리에 헛손질을 하다말고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후르르르르르르르르릅!!”

“으아아아아아악! 씨발 새끼! 넌 나오면 진짜 뒤졌다!!”

“너 이 새끼 상생이라는 말도 모르는 거냐?! 새파랗게 젊은 새끼가!!”

“부숴! 오늘 중으로 무조건 부숴! 이 새끼 사흘 밤낮으로 못 자게 해!”

“야! 너희들은 다른 입구도 한번 찾아봐!”

대형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면치기 사운드에 시청자들이 극찬을 하며 한층 더 난리 법석을 떨었다.

“후르르르릅! 김치 다 뒤졌다. 딱대.”

“그만 쳐먹어 개새끼야!!”

쾅쾅쾅!

쓸데없이 두껍고 쓸데없이 튼튼한 방탄유리는 상대가 무엇을 하든 그저 굳건하게 버티고 서서 그들과 나의 격차를 알려 주었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무방비한 상태로 동물원 속에 갇혀 있는 맹수들을 바라보는 게 이런 느낌일까. 맹수 입장에선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어린아이를 덮치고 싶겠지만 두꺼운 유리와 철창이 맹수를 무력하게 만든다.

놈들도 동물원 속에 갇힌 맹수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름대로 쪽수와 권총을 믿고 몰려들었건만, 대형마트를 점거한 내가 보란 듯이 현장 먹방을 찍고 있으니 울화통이 터질 것이다.

아삭아삭.

꼬들꼬들한 면발 사이로 씹히는 매콤상큼한 김치가 뜨겁게 달아오른 입 안을 조금 식혀 주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라면을 먹어치우다 보니 어느덧 젓가락에 집히는 게 없었다.

‘여기서 라면 먹방을 끝낸다면 이류에 불과하다. 진정한 일류는 탄단지 비율 따윈 신경 쓰지 않아!’

오늘 먹고 뒤진 귀신이 내일 때깔도 좋다는데 그놈의 탄단지 비율은 뭐하러 지킨단 말인가?

상남자답게 전자레인지에 돌려온 햇반 하나를 깔끔하게 털어 넣고 코펠 손잡이를 잡아 들었다. 식사 자리에서 자칫 상스러워 보일 수도 있지만 먹방이라면 얘기가 달라지는 환상적인 포즈.

사흘 굶은 거지처럼 숟가락을 이용해 입 안으로 국물과 밥알을 사레 들릴 것처럼 밀어 넣는다. 물론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한국의 전통 식문화인 ‘쩝쩝쩝’을 시전했다.

그러자 외부 스피커에서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하모니에 놈들이 발광을 하기 시작했다.

“끼에에에에에에에에에엑!”

“이 쩝쩝충! 당장 우리 마을에서 나가아아아아!!”

“정신나갈것같아정신나갈것같아정신나갈것같아정신나갈것같아정신나갈것같아정신나갈것같아정신나갈것같아정신나갈것같아!”

“당장 저 스피커부터 박살 내 버려!!”

탕탕!

몇 번의 총성이 울려 퍼지지만 건물 외벽에 달아 둔 스피커는 좀처럼 파괴되지 않았다. DNA 샘플을 주고 구입한 상점 물건이라 그런지 꽤 튼튼한 모양이다.

게다가 나는 여기서 그칠 생각이 없었다. 코스 요리도 에피타이저부터 시작하는데 먹방의 끝을 시시하게 끝내 버리는 건 너무 아쉽지 않은가.

“아아, 이것은 [요플레]라고 한다. 더 이상 너희는 맛볼 수 없는 기성품이지.”

나는 이 요플레를 단번에 까서 햇빛처럼 선명하게 뚜껑을 핥았다. 그리고 필요 없어진 내용물은 구석으로 대충 내던졌다.

요플레 뚜껑의 ‘진짜’만 핥아먹고 내용물은 깔끔하게 버리는 모습에, 방탄유리 너머에 있는 놈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미친 새끼 요플레를 뚜껑만 핥아 먹고 버렸어!!!”

“그만해그만해그만해그만해그만해그만해그만해그만해그만해그만해그만해그만해!”

“저 영롱한 딸기맛 요플레를 봐…… 바닥에 쏟아진 거라도 하루 종일 핥아먹을 수 있어……!”

“네놈은 꼭 죽인다. 처음부터 그 생각뿐이었다!”

놈들이 날뛰든 비명을 지르든 나는 이미 먹방을 끝마친 상태였고, 만족스럽게 배를 두들기고 있었다. 오히려 내 먹방 ASMR에 혼이 쏙 빠진 놈들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손해를 봤을 뿐.

“꺼-억.”

나는 캠핑용 간이의자를 길게 펼쳐서 간이침대로 만든 다음, 놈들이 보는 앞에서 벌렁 드러누웠다. 그리고 아기자기한 곰돌이 캐릭터가 그려진 귀마개와 눈가리개까지 착용했다.

이것이야말로 궁극에 달한 압도적인 여유.

결국, 열이 뻗친 놈들은 방탄유리를 두드리다 말고 어떻게든 다른 출입구를 찾기 위해 흩어졌다.

이미 정신적으로 한계까지 능욕을 당한 상태라, 일분일초라도 더 빨리 나를 잡아 조지지 못하면 이 평생의 상처로 남을 터.

이미 개인의 자존심이나 집단의 이익 따위를 논할 상황이 아니었다. 놈들이 내뿜는 것은 오직 나를 향한 처절한 분노였다.

건물의 외벽이나 유리창, 배관은 거점 지정 효과에 의해 어느 정도 강화되었다고는 하나, 일반인이 작정하고 두들긴다면 부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뻥 뚫린 입구로만 몰려드는 멍청한 좀비들과 다르게 인간은 생각할 줄 아는 동물이니까.

하지만 내 거점은 자동적으로 내구도를 회복하는 데다, 설령 파고들 틈이 있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이미 부비트랩과 자동포탑, 그리고 터렛까지 물샐 틈 없이 깔아 두었으니까.

‘이렇게 따사로운 햇살 아래에서 편하게 누워 있었던 게 얼마 만이더라.’

투명한 방탄유리 너머로 새어 들어오는 가을 햇살이 마치 어머니의 자애로운 손길처럼 느껴졌다.

“이게 인생이지 흐흐.”

꼬우면 너희도 ‘상태창’을 외쳤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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