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36화 (37/227)

36화 생존기 (36)

-스킬창

[직업 고유 스킬 : 거점 지정(D-), 거점 경계 강화(E), 거점 방어 강화(E), 최후의 보루(A+)]

[개인 고유 스킬 : 사격(A), 체술(B), 야간 경계(B++), 통증억제(D)]

[획득 및 특전 스킬 : 도구 제작(E), 짚라인(D-), 암행(D)]

“여기에 10포인트를 투자해서 당장 효과를 볼 수 있는 스킬은…… 거점 지정과 짚라인, 그리고 암행이군.”

거점 경계 강화나 방어 강화, 도구 제작 같은 건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있지도 않았다. 도구 제작은 상황에 따라서 재료와 여건이 준비된다면 투자를 고려해 봄 직하지만, 거점 방위와 관련된 스킬은 E급으로도 충분했다.

더 강한 적, 더 골치 아픈 적이 튀어나온다고 해도 궁극적으로는 거점의 규모와 지리적 이점, 그리고 내가 운용할 수 있는 병력과 물자가 승패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시적으로 거점 방위 무기의 성능이나 내구도를 조금 올려 주는 스킬에 급하게 투자할 필요는 없다. 지금의 나는 거점을 지키는 것보다 거점을 확보하는 것에 더 열을 올려야 하는 상황이니까.

D급 스킬이나 스텟부터는 숙련포인트를 3씩 지불해야 + 수치를 하나씩 높일 수 있다.

똑같은 D- 등급인 거점 지정이나 짚라인은 9포인트를 투자하면 D++로 향상되는데, 거기서 한 번 더 투자하면 C- 등급으로 향상을 꾀할 수 있다.

‘+ 수치가 붙은 스킬과 그렇지 않은 스킬의 차이는 이미 확인해 본 적 있지.’

처음 내가 거점 지정 스킬을 강화했을 때를 떠올리면 + 수치 하나가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알 수 있다.

마침 B등급 스텟 중에 반사신경(B+)이 있으니 여기에 10포인트를 때려박으면 반사신경(A-)으로 바꿀 수도 있으니 꼭 스킬 투자가 정답인 건 아니다.

하지만 뭐든 초기 투자에 실패하면 똥캐나 잡캐가 되는 것은 확정이기에, 나는 이미 인간적으로 완벽한 이승권의 스텟창을 건드릴 생각은 없었다. 여기서 내가 인간적으로 더 대단해지면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 미안하지 않은가.

“거점 지정에 6포인트 분배하고 4포인트는 킵해 두자.’

E급 스킬 하나, D급 스킬 하나에 1회씩 투자할 수 있는 4포인트를 남겨두고 스킬창을 닫았다.

-거점 지정(D-) > 거점 지정(D+)

-거점창에 ‘CCTV’ 기능이 추가되었습니다.

-CCTV(E) : 각 거점의 규모나 구조에 관계없이 5개의 CCTV가 설치됩니다. 거점창을 이용해 CCTV의 위치를 임의 변경하거나 최근 일주일간 녹화한 영상을 돌려보기가 가능합니다. 또한 실시간으로 각 거점을 감시할 수 있으며 등급이 낮을수록 화질이 좋지 않습니다.

-모든 거점에 ‘공기정화장치’가 추가되었습니다.

-공기정화장치(E) : 공기정화장치가 가동되는 동안 거점 내 생존자는 각종 유해 가스 및 미세먼지로 인한 피해를 받지 않습니다. 공기중으로 전염되는 바이러스는 제외. 또한 공기정화장치의 등급이 낮을수록 과부하 및 기능 고장이 자주 발생합니다.

-거점창에 ‘거점 장비 업그레이드’ 기능이 추가되었습니다.

-숙련 포인트와는 별개인 거점 포인트 기능이 개방되었습니다.

-거점 포인트는 각 거점 내에 생존자가 많이, 오래 생존하며 생산적인 활동을 할 경우 자동 축적됩니다. 거점 지정 취소, 혹은 거점 파괴 시 해당 거점에서 생산된 모든 거점 포인트를 잃게 됩니다.

“휘유!”

+ 수치가 2개나 붙어서 내심 거점에 또 한 번 커다란 변화가 오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큰 변화가 찾아왔다.

우선 퇴역병인 내가 외부에서 활동할 때도 언제든지 멀리 떨어진 거점 내부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 파격적이었다.

장비 등급이 낮으면 CCTV의 개수 제한이나 화질이 구리다는 부차적인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내부 배신이나 거점 일원들 간의 범죄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내가 축지법을 쓰는 장군님도 아닌데 족히 수 킬로미터씩 떨어진 거점을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오가며 전부 살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걸 거점창 하나로 관리할 수 있다면 투자한 숙련 포인트가 아깝지 않았다.

혹시 몰라 즉시 거점창을 열어 활천초와 자택의 CCTV를 확인해 보았다. 활천초는 각 층 복도마다 1대씩 임의로 설치되어 있었으며, 자택은 거실과 안방, 지하 창고, 그리고 2층과 3층 복도에 하나씩 설치된 상태였다.

‘내가 없어도 다들 알아서 잘하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다들 빠릿빠릿했다.

여행 동아리 회장이자 천성적으로 모범생 타입인 박성호는 일행을 잘 이끌고 있었다. 공동 작업을 하기 위해 학교에서 모은 자재와 공구를 함께 운반하는 모습이 꽤 인상적이었다,

반면 채성아는 일단 편하게 쉬면서 몸조리를 하며 ‘다음’을 대비하라고 했던 내 말을 잊지 않았는지, 아침 식사를 끝내자마자 성실하게 사용 물품 장부를 쓰고서 맨몸 운동을 시작했다.

간호사답게 잘 먹고, 잘 쉬고, 주기적으로 적절한 운동을 해 주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건강 관리법이라는 걸 아는 것이다.

집에서 수상한 행동을 하기보단 오히려 지금 이 순간에 조금이라도 더 열심히 쉬는 것으로 체력을 비축해 두려는 의지가 엿보였다. 아마도 내가 나중에라도 자신을 쫓아낼까 봐 두려워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나중에 그녀는 필드에서 뛰는 야전의료인이 되어 줘야 하기 때문에 수상한 행동만 하지 않는다면 딱히 쫓아낼 생각은 없다.

다른 거점의 일원들이 각기 다른 아침을 보내는 것을 확인한 것을 끝으로, 나는 홈마트 옥상으로 올라갔다.

레저 스포츠 장비 상가에서 챙겨온 산악망원경을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으니, 무리를 짓고 무지성 행군을 하고 있는 좀비 무리나 소수로 움직이는 인간 생존자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밤에는 불빛으로 자칫 좀비를 자극할 수도 있으니 오히려 이른 아침이나 낮에 움직이는 건가?’

내가 처음 마을에서 좀비의 감각기관 체크를 했을 때 놈들은 청각과 시각, 그리고 촉각이 살아 있었다.

후각이 없다는 점이 조금 특이했지만, 만약 후각까지 살아 있었다면, 좀비들은 밤이고 낮이고 코를 킁킁대며 생존자들의 은신처까지 들이닥쳤을 것이다.

나는 저 멀리서 이미 다 털린 편의점에 들어섰다가 허탕 친 표정으로 걸어 나오는 한 생존자를 보고서 피식 웃었다.

아마 이 근방의 좀비들이 갑자기 사라져서 아침에 나를 찾아온 사람들처럼 급하게 뭐 챙길 것 없나 하고 접근한 모양인데, 편의점이나 작은 약국처럼 소규모 상가는 그다지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

비상 사태 시 가장 빠르게 털리는 곳의 대명사가 바로 편의점과 약국이니까. 만약 좀비들이 사태 초기부터 이곳을 점거하지 않았더라면 이 거대한 홈마트도 진작에 텅텅 비었을 것이다.

어지간한 주변 건물보다 높은 곳에서 삭막한 지방 도시의 풍경을 만끽하고 있을 즈음, 나는 낯이 익은 한 생존자 무리를 포착했다.

“저, 저, 저 씨발!!”

매끈하면서도 탄탄한 허벅지, 바람과 날벌레로부터 눈을 보호해 주는 광택 고글, 몸에 착 달라붙는 쫄쫄이 패션, 반쯤 등이 굽은 자세로 열심히 패달을 밟고 있는 남자들.

“자전거 동호회 새끼들!!”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놈들의 재등장에 나는 성난 원숭이처럼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며 놈들의 행적을 눈으로 좇았다.

무지성 행군을 하고 있는 수십 마리의 좀비들에게 바짝 붙은 자전거 동호회는 기가 막힌 속도 조절과 방향 감각으로 재빨리 우회했다.

놈들에게 어그로가 끌린 좀비들은 기괴한 비명을 내지르며 넝마 조각이 된 몸으로도 무시무시한 전력 질주를 감행, 자전거조차 쉽게 따돌릴 수 없는 속도로 맹추격을 이어 나갔다.

일반인이 가지고 있는 리미트가 완전히 풀려 버린 좀비들은 몸이 꺾이든 터지든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전력을 다해 움직였다. 저 노력으로 운동했으면 올림픽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씹어먹었을 만큼.

“제발 잡혀라 제발 잡혀라 제발 잡혀라 제발 잡혀라 제발 잡혀라!”

자전거 동호회를 잡는 좀비는 내 특별히 따로 목을 베서 제삿상을 거하게 차려 줄 것이다. 거기에 유골함 따위가 아니라 휘황찬란한 대리석 관에 시신을 안치시켜 줄 의향도 있다!

“1번 좀비, 1번 좀비 빠르게 치고 나갑니다! 저 무시무시한 각력을 좀 보십시오! 그야말로 도심을 질주하는 한 마리의 폭주기관차나 다름없습니다!!”

이런 진귀한 광경을 볼 줄 알았다면 팝콘이라도 좀 가져올걸!

왕창 벌어들인 DNA 샘플로 상점창에서 뭔가를 산다는 계획은 뒤로 제쳐둔 지 오래고, 지금 나는 인간이면서도 좀비를 적극적으로 응원하는 간첩으로 변절했다.

하지만 나의 열과 성을 다한 영혼 보내기에도 불구하고 좀비들은 끝끝내 자전거 동호회를 잡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놈들이 사거리에서 각기 다른 방향으로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이다.

“새끼들 머리 좀 쓰네.”

홈마트를 향해 무지성 행군을 하던 좀비들을 이곳저곳에 마구 흩뿌려 준 것은 고맙지만, 그와 별개로 한 놈도 잡히지 않았다는 사실이 많이 띠꺼웠다.

넷플러스가 없는 지금, 몇 안 되는 리얼감 100% 문화 콘텐츠였을 텐데.

망원경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자 좀비들이 대로에서 사라진 것을 확인한 몇몇 생존자 무리가 건물 사이 골목이나 코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수가 적지만 군인이나 경찰에게서 노획한 것으로 추정되는 총기를 든 인원이 몇 명인가 있으며, 그 외 대다수는 덕테이프로 칼이나 몽둥이 따위를 칭칭 감아서 만든 무기를 들고 있었다.

자전거 동호회가 좀비들을 치워 내기가 무섭게 등장한 걸 보니 저놈들도 자전거 동호회와 한패, 혹은 홈마트를 공략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동맹을 맺은 타 구역 떨거지들임이 분명했다.

설마 아침부터 소박을 맞고 돌아간 놈들이 이렇게나 빨리 고자질을 하고, 또 고자질을 전해 들었다고 이렇게나 빨리 집단행동을 나설 거라곤 예상 못 했다.

내가 대한민국 예비군들을 너무 얕본 건가?

‘하지만 저 중에 나와 같은 최전선 출신은 없겠지.’

꼴에 좀 배웠답시고 나름 군대식으로 체계적인 움직임을 보여 주는 건 노력이 가상한데, 이미 방어하는 입장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는 나는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시선을 완전히 반대로 돌려보니 이번에는 활천로 대교를 조심스럽게 건너오는 수상쩍은 생존자 무리가 있었다. 슬슬 본격적인 가을이라 찬 바람이 제법 매서워서 그런지 강을 통해 몰래 건너오지는 않는 듯했다.

동과 서에서 대략 2~30명 규모의 생존자 무리가 다수 무장한 채 접근 중이며, 내 대신 방패막이가 되어 줄 좀비들도 자전거 동호회 놈들이 열심히 흩뿌려 놓은 상황.

넷플러스의 B급 감성 드라마였다면 지금쯤 두둥! 하는 BGM과 함께 다음 회차 예고편으로 주인공의 긴박한 상황을 연출했겠지만, 나는 안에서 밀린 잠이나 더 잘지 말지 고민 중이었다.

‘이참에 그냥 팝콘 갖다 놓고 특등석에서 저놈들 갈려 나가는 모습이나 관람할까?’

그 또한 하나의 묘미겠지만 그러면 너무 재미가 없다.

방해가 될 놈들은 확실하게 쳐내는 게 정신 건강상 이롭겠지만, 이왕 쳐낼 거라면 좀 더 재미있게 쳐내고 싶다.

구체적으로는 놈들을 엉망진창으로 능욕해 주고 싶다.

“상점창.”

마침내 상점창을 열어젖힌 나는 양아치 능욕을 위해 필수 소품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구입 > 대형 방탄유리(설치형)

-구입 > 방송용 마이크

-구입 > 대형 스피커(설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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