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35화 (36/227)

35화 생존기 (35)

“이, 이이 빌어쳐먹을 새끼가?!”

나의 곧게 솟은 쌍중지, 두 개의 높은 산봉우리(山)를 의미하는 수화 표현 방식에 어지간히도 열이 받은 모양이다. 가장 먼저 욕설을 내뱉은 사람이 분을 참지 못하고 먼저 돌아갔다.

지금 참지 못하고 나서 봤자 가장 먼저 머리통에 총알이 박힌다는 것을 알고서, 나중에 동료들과 함께 다시 찾아오겠다는 뉘앙스를 팍팍 풍겼다.

멀어져 가는 양아치들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어 준 나는 아직도 남아 있는 떨거지들을 돌아보았다.

“불만 있으면 저분들 따라가시고, 불만 없는 사람은 제 말에 따르시고. 쉽죠?”

다들 나잇살을 그렇게나 쳐먹었는데 설마 오늘 점심은 짜장면인지 짬뽕인지 선택 못 하는 사람처럼 낑낑대고 있는 건 아닐 것이다.

내가 일부러 도발조로 말하니 예상대로 몇 명이 더 걸려들었고, 그들 역시 씩씩 콧김을 내뿜으며 홈마트 입구 앞을 떠나갔다. 가는 길에 내게 협박성 고함을 내지르는 건 덤이었다.

죽여서 배를 갈라놓겠다느니, 살아도 산 게 아닌 것처럼 만들어 주겠다느니, 차라리 죽여 달라고 빌게 만들겠다느니. 어쩜 다들 그렇게 레퍼토리가 똑같은지.

내가 리뷰를 개판으로 써놓은 삼류 드라마도 요즘 저런 대사는 잘 안 쓴다. 장모가 막 담근 김장김치로 사위의 뺨을 후려갈기는 것만큼이나 진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예상을 벗어난 이들도 있었다.

일말의 정보라도 얻길 원하는지 먼저 떠나간 이들을 흘겨보면서도 꿋꿋하게 남아 있는 사람들. 그중에서도 주의 깊게 나를 살피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처음부터 내게 강하게 나오며 주변 사람들을 선동했던 가장 뒷자리의 남자였다.

생긴 대로 논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천성이 그렇게 돼먹은 양반이라 저렇게 생겼다고 해야 하나.

그의 뱀 같은 눈동자에는 내 어깨 너머로 보이는 깨끗한 매장 내부와 밝은 전등 불빛이 비춰지고 있었다.

“여기 남으신 분들은 제 말에 동의하신다고 봐도 무방하겠죠?”

“뭐…… 일단은 임자 있는 곳 같으니까.”

“사실 우리도 그 많은 좀비가 골칫거리였거든. 그걸 직접 처리했다는데 그 정도 조건쯤은 존중해 줄 수 있지, 암.”

“그건 그렇고, 그 조건에 따르기만 한다면 우리도 손님이나 동료로 받아 줄 수 있다는 건가?”

“조건에 따르기만 한다면 어렵지 않죠.”

“그럼 내가 먼저 볼일 좀 보지. 식료품을 좀 사고 싶은데…….”

가장 뒤에 서 있던 남자가 마침내 다른 사람들을 제치며 먼저 앞으로 나섰다.

내가 분위기상 심사를 통해 동료로 받아 주지 않을 것을 알고 일찌감치 심사를 거절한 대신, 식료품을 구입하겠다는 명목하에 내부를 살피려는 속셈이었다.

당연하지만 안 될 것은 없었다. 실제로 나는 이자를 동료로 받아들일 생각은 없지만, 합당한 대가만 지불한다면 어느 정도 물건을 팔아 줄 의향은 있었으니까.

나는 미리 거점창을 이용해 배치된 자동포탑과 머신피스톨터렛을 교묘한 사각지대에 꼼꼼히 숨겼다.

처음 이곳을 방문하는 자는 절대로 쉽게 눈치챌 수 없지만, 모든 포탑과 터렛은 쥐새끼 하나 빠져나갈 수 없을 만큼 철저하게 내부를 감시하는 구조였다.

부비트랩은 거점 일원이 아니면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요격 기능을 잠시 OFF로 바꿔 두었다.

물론 쉽사리 이 남자를 안으로 들여보낼 생각은 없었기에, 그자가 현관 앞으로 다가왔을 즈음 권총을 겨눴다.

그는 자신의 가슴팍에 겨눠진 권총을 보고서 살짝 신경질적인 어조로 되물었다.

“……방금 전에 대가만 지불하면 물건을 팔아 주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전에 교통정리부터 해야죠. 여기 주인인 내가 잠재적 범죄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는데, 상식적으로 안전 검사를 하는 건 당연하잖아요?”

덧붙여서 대가를 지불할 수 없는 거지를 쫓아낼 수도 있고.

“허…… 그래서 어떻게 할까? 여기서 팬티까지 싹 다 벗을까?”

“직접 배낭 열어서 내용물 보여 주시고, 점퍼나 바지 주머니에 든 것들도 빼서 보여 주기만 하면 돼요.”

“그냥 옷 안섬까지 다 찢어 보지 그래? 혹시 모르지. 내가 옷 안섬에 마취총을 숨기고 다닐 수도 있잖아? 푸흐흐!”

“배상 책임을 안 묻겠다면 찢어도 상관없고요.”

질 낮은 농담을 적당히 맞받아치자 그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배낭과 옷 주머니 내용물을 보여 주었다.

안에 든 것은 정말 별 볼 일 없었다. 어디서 주워 모은 잡동사니와 금은방에서 훔친 것으로 추정되는 각종 보석 장신구가 전부였다.

주머니 속에선 구겨진 담뱃갑과 일회용 라이터, 그리고 급하게 꺼내서 상대를 찌를 수 있는 스프링 나이프 한 자루가 나왔다. 저 스프링 나이프는 버튼 하나만 누르면 팅! 하고 칼날이 튀어나오는 구조라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그냥 막대기처럼 보인다.

“이거 봐 이거 봐. 아주 딱 걸렸네. 주머니에서 나이프가 나와 버리면 가게 주인 기분이 좋겠어요, 안 좋겠어요? 대답을 해 보세요 선생님.”

“요즘처럼 위험한 시국에 무기는 하나라도 더 많이 들고 다니는 게 당연한 상식 아닌가? 작정하고 그쪽을 습격할 생각이었다면 이런 날붙이가 아니라 경찰서를 털어서 총을 구해 왔겠지.”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또 할 말이 없는 부분이네요.”

내가 껄렁껄렁 총구를 돌리면서 비아냥대도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 다 봤으니까 됐지? 얼른 안이나 보여 주고 유용한 정보 좀 내놔 봐. 그렇게 노골적으로 말하는 눈빛이 나는 썩 마음에 들었다.

내 기수에서 눈을 저따위로 뜨는 놈은 바로 조인트를 갈겨 버렸기 때문에, 조인트를 갈기는 게 너무 좋아서 저런 눈빛도 좋아했다.

“안타깝지만 선생님은 저희와 함께하실 수 없습니다.”

쿠궁, 하고 커다란 바위가 떨어진 것 같은 효과음이 어디서 들린 것처럼 그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썩어들어갔다.

“왜지? 그쪽에서 제시한 조건도 지켰고 얌전히 필요한 것만 사가겠다고 했는데.”

“지불할 대가가 없으시잖아요.”

“네 눈엔 이 보석들이 안 보이나? 보석이 싫다면 스마트폰 보조 배터리나 휴대용 손전등은? 이 가스 주입식 점화기도……!”

“예, 전부 쓰레기네요. 그것도 내가 전부 새것으로 가지고 있는 쓰레기들.”

나는 이곳이 어디인지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게끔 입구 위의 커다란 간판을 가리켰다.

홈마트! 집에서 필요한 것이든 필요 없는 것이든 다 팔고 있는 곳!

“제가 왜 쓰레기를 웃돈 주고받아야 하죠? 이거 이상한 사람이네.”

차라리 홈마트에는 없는 전문의약품을 털어와서 거래를 시도했다면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었으련만, 그는 대충 이곳저곳에서 털어온 잡동사니로 겁없이 이 국경선을 넘으려 했다.

그 부분은 이 영지를 다스리고 있는 이승권 1세가 인정하지 못하는 부분이구요. 따라서 통행증을 발급해 드릴 수 없다 이 말입니다.

“거지는 안 받습니다. 꺼지시고, 다음!”

손을 휘휘 내저어서 그를 쫓아낸 나는 멀뚱멀뚱 서 있는 다음 대기자들을 큰 소리로 불렀다.

내 축객령에도 그는 한동안 허탈감 반, 황당함 반 섞인 얼굴로 나를 노려보다가, 곧 내 권총의 압박감에 못 이겨 조용히 자리를 벗어났다.

다른 양아치들과는 다르게 떠날 때의 대사도 조금 달랐다.

“계속 이곳에 머물 생각이라면 가능한 오랫동안 깨어 있는 게 좋을 거다. 한번 잠들면 영영 못 깨어날 테니까.”

“치사하게 멋진 대사에 저작권 걸어 놓지는 맙시다. 나도 다음번에 써먹어 보고 싶으니까.”

멋진 거지를 떠나보낸 나는 다음 대기자들 역시 빈털터리라는 것을 알고, 그들도 차례차례 쫓아 보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힘들게 포탑과 터렛은 왜 옮겼는지 모르겠다.

곧 홈마트 앞에서 시위하던 거지들이 사라지고, 거리는 다시 정적으로 물들었다.

바깥은 여느 때처럼 맑고 청아한 날씨였지만, 따스한 햇살의 온기가 쌀쌀한 바람과 뒤섞여 미묘한 기온을 형성했다.

따뜻한 건지 쌀쌀한 건지 하나만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다시 방화벽을 닫았다. 또한 모든 거점 방위 무기의 요격 대상을 다시 ‘외부인’ 수준까지 격상시켰다.

씩씩대면서, 혹은 속으로 울분을 삼키면서 각자의 그룹으로 돌아간 떨거지들은 지금쯤 꿈 같은 미래를 상상하고 있을 것이다.

동료들을 우르르 이끌고 와서 무력으로 나를 조지고 풍부한 물자를 확보한다거나, 반대로 건물 주위를 에워싸고 24시간 철저하게 감시하면서 나를 말려 죽일 생각에 기세등등할 테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놈들의 상상은 망상에서 끝날 것이고, 오히려 놈들이 각자의 그룹으로 가져가게 될 정보가 독이 되어 서서히 퍼져 나갈 것이다.

우선 사람이 백 명이든 천 명이든 무력으로 날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차와 폭격기를 동원해서 건물을 통째로 조진다면 또 모를까, 순수하게 사람의 힘만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

자동 충전되는 부비트랩과 포탑, 그리고 터렛이 이곳을 철통같이 방어하고 있다. 내가 직접 조종할 수 있는 폭탄 RC카는 또 어떻고?

그 사실을 알게 몸소 겪게 되었다면 이미 어느 정도 쓴맛을 봤을 테니, 그들은 이제 내가 잠들었을 때를 노려 좀 더 은밀하게 침투하려 할 것이다.

건물 외벽을 타고 오른다거나, 환풍구로 숨어든다거나, 지하 주차장으로 접근한다거나. 당연히 모두 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소용없다.

그럼 말없이 내가 기어 나올 때까지 건물을 에워싼 채 기다리기만 해야 할까? 그건 다른 의미에서 불가능하다.

물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면서 외부가 절대적으로 위험한 이 시기에 그렇게나 많은 인원을 동원해 기약 없이 기다리기만 한다?

추위, 피로, 배고픔, 목마름, 좀비에 대한 위협까지 상정해야 할 문제가 한둘이 아닌데 어떤 멍청한 놈들이 동료를 총동원해서 그 미친 짓을 할까? 판옥선을 죄다 꼴아박은 원균도 ‘그건 좀…….’ 하고 고개를 가로저을 것이다.

‘며칠 정도는 활천초나 집에 돌아가지 않아도 큰 문제는 없겠지.’

활천초에 있는 박성호 일행을 위해 식량과 식수 일부를 양도해 주었고, 자택에는 채성아 혼자 있게 되겠지만 마찬가지로 걱정되지 않는다.

그들은 내가 단단히 채비를 갖추고 바깥을 돌아다니는 타입이란 걸 알기 때문에 내가 돌아오기까지 끈덕지게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기다릴 수 없다면 거점 일원이길 포기하고 알아서들 떠나겠지.

그동안 나는 이곳에 자리 잡고 주변 정세가 돌아가는 꼴을 좀 살펴야겠다.

우리 외에 얼마나 많은 생존자 그룹이 있는지, 그들은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그들 중에 내게 직간접적으로 도움이 될 인재들이 있는지.

겸사겸사 내가 사람으로부터 거점을 지키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한 실험도 진행할 수 있다. 좀비 아포칼립스라고 해서 꼭 적이 좀비인 것만은 아니니까.

“쉬는 김에 스킬 점검도 하고, 상점창도 훑어봐야겠네.”

파격적인 레벨업으로 숙련 포인트를 10이나 얻었으니 스킬이나 스텟에 투자도 좀 하고, 대량으로 벌어들인 DNA 샘플로 쇼핑도 해 볼 생각이다.

남들 눈엔 내가 할 짓 없는 백수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난 이렇게나 바쁜 사람이다.

자기관리, 거점관리, 사람관리, 환경관리…… 아무래도 나는 평생 관리만 하다 과로사할 운명인 모양이다.

“스킬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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