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생존기 (32)
엘리베이터와 RC카의 기동음은 모두 좀비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엔 충분했지만, 정작 그곳에 적인 나는 없었기 때문에 좀비들은 허탕만 쳤다.
다만 시스템의 감시 아래 거점을 두고 전쟁을 벌이는 중이라 좀비들 역시 꽤 적극적으로 나를 찾아다녔다.
나와 좀비 모두 서로 거점 내에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정확한 위치나 움직임은 모르기 때문에 직접 찾아내서 조져야 하는 상황. 바로 그렇기 때문에 좀비는 절대로 나를 찾을 수 없다.
‘놈들은 시각과 청각 기관만 살아 있지, 후각은 완전히 죽어 버렸으니까.’
후각이 없는 놈들을 상대로 나는 그냥 으슥한 곳에 숨어서 조용히 있기만 하면 된다. 내 체향을 맡을 수 없는 좀비들은 눈뜬 장님 신세로 마트 이곳저곳을 부질없이 돌아다니기만 하겠지.
게다가 내가 엘리베이터에 딸려 보낸 RC카는 따로 연결된 캠코더가 없어도 조종하는 데 무리가 없었다. 조종기 대신 거점창의 특정 위치를 클릭만 해 주면 RC카가 최적의 루트로 알아서 움직였다.
좀비가 가장 많이 몰려 있는 1층, 그 한복판에 폭탄을 얹은 RC카를 밀어 넣고 ‘폭파’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저 아래에서 울려 퍼지는 익숙한 폭음과 함께 옅은 진동이 건물 전체를 부르르 떨게 만들었다.
‘역시 거점 방위 무기로 거점의 내구도가 손상되는 일은 없군.’
사실 활천초에 배치된 발칸포를 볼 때마다 긴가민가했는데, 마트 1층 홀 한복판에서 폭탄이 터졌음에도 거점 내구도에 변화가 없는 것을 확인했다.
조용한 공간에서 울려 퍼지는 사람의 비명, 총성, 그리고 폭음만큼 청각 기관을 강렬하게 자극하는 것도 없다.
마치 고막을 지나 뇌를 관통하는 것처럼 찌르르한 감각이 순간적으로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좀비들 또한 비슷한 감각을 느꼈는지, 나를 찾아 서서히 6층으로 올라오고 있던 놈들이 갑자기 기괴한 비명을 내지르며 앞다투어 1층으로 뛰어 내려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카아아아아아!”
“으으! 으아아아아아!!”
“키에에에에엑!!”
저들끼리 엎치락뒤치락하는 탓에 살이 찢어지든 뼈가 부러지든 개의치 않는 좀비들이 기어코 1층에 집결한 순간, 나 역시 좀비들을 따라 조금씩 아래로 내려갔다.
중간중간 좀비들끼리 얽힌 탓에 움직이지 못하게 된 놈들은 일일이 뚝배기를 깨주거나 목덜미를 강타해서 무력화시켰다. 이 기가 막힌 작전이 성공하려면 모든 좀비를 1층으로 긁어모으는 것은 물론, 내 위치가 발각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마침내 폭연과 먼지가 한창 피어오르는 1층을 내려다보게 되었을 때, 나는 2층의 로비 난간마다 직접 지정해서 방위 무기를 배치했다.
적성체에 대한 요격 설정을 일시적으로 OFF 해뒀기 때문에 설치된 기관총과 머신피스톨이 다짜고짜 총을 쏴갈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2천 마리나 되는 좀비들을 머리 위에서 내려다보며 소리 없이 총구를 겨눴을 뿐.
그렇게 난간마다 12.7mm 자동포탑과 9mm 머신피스톨 터렛, 그리고 계단마다 부비트랩을 모두 설치한 나는 마지막 준비에 들어갔다.
“거점 경계 강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사용한 적 없는 거점 경계 강화 스킬을 시전하자 모든 방위 무기에 옅은 빛이 깃들었다.
-[거점 경계 강화(E) : 거점에 존재하는 모든 경계 시스템 및 거점 방위자의 경계 레벨을 일시적으로 상승시킨다. 적대적 존재를 10% 빨리 감지할 수 있다. 숙련도에 따라 감지 능력이 향상된다.]
‘이거라면 좀비들이 아무리 많이 깔려 있어도, 그림자나 엄폐물 뒤에 숨어있어도 좀 더 빨리, 정확하게 감지해서 쏘겠지.’
잡화점에서 미리 골라온 귀마개로 강하게 압박하듯 귀를 눌러 막은 타이밍과 거의 동시에 적성체 요격 설정을 다시 ON으로 바꿨다.
그러자 폭력적인 음파가 내 전신을 두들겼다. 기관총과 머신피스톨 터렛이 일시에 발포를 시작하면서 탄환 세례의 축제를 벌이기 시작한 결과였다.
기우제를 열심히 지낸 인디언들에게 원하는 만큼 물벼락을 내려주겠다는 비의 신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벼락이 연이어 치는 듯한 아찔한 음파와 총연 속에서 무수히 튀어 오르는 탄피, 저 아래에서 원인도 모른 채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좀비들. 붉은색 페인트와 살점으로 도배된 1층의 광경은 직접 보지 않아도 예상이 됐다.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지독한 총성과 열기 때문에 가까이 가서 구경하지 못하는 게 참 아쉬웠지만, 일단 버튼 하나만 눌러 두면 알아서 바닥을 청소하는 로봇청소기 같은 감각으로 잠시 내버려 두었다.
귀마개를 한 채 거점창만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2천 마리가 넘었던 좀비들의 숫자가 어느새 수백 마리 단위까지 줄었다.
내가 직접 기관총을 잡고 방아쇠에서 손을 떼지 않아도 이것보다 더 빠르게 처리하는 건 힘들었을 거다.
총구가 닿지 않는 사각지대에 숨어 있던 좀비들도 소음에 이끌려 계단을 올라오다 부비트랩을 밟고 동료와 함께 폭사했다.
시체들의 산에 갈려서 물리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놈은 내가 직접 RC카를 보내서 폭★발 엔딩으로 마무리해 주었다.
좀비들이 뭘 어떻게 발버둥을 치든, 이쪽에는 흠집 하나 낼 수 없었다. 기껏해야 발악하듯 마트 내벽을 할퀴거나 두들겨서 거점 내구도를 깎아내는 게 전부였다. 물론 간에 기별도 안 가는 수준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따지면 교전 비율은 압도적이었다. 이쪽은 RC카나 부비트랩, 그리고 거점 내구도 일부를 제외한 손실은 전무했고, 저쪽은 이제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의 머릿수만 남았다.
나 역시 몸소 현대전을 치러 본 전직 군인으로서 이런 말도 안 되는 교전 비율에는 적잖이 당황했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여기가 내 거점으로 인정받은 이상-그게 임시라고 해도- 내 홈그라운드인데.
오히려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대처하는 같은 인간도 아니고, 그냥 멍청하게 물량만 믿고 1차원적으로 움직이는 좀비들이 거점 전쟁에서 퇴역병을 이기는 게 더 이상하지.
마지막 좀비는 남자 화장실에 숨어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38 구경 리볼버를 들고 직접 가서 체포했다. 죄목은 인간 남성 화장실 몰카를 찍으려 했던 이상성욕죄.
“차기 김해 시장 선거에 출마하려면 실적 하나쯤은 있어야지.”
마을 이장에서 지역 군주, 지역 군주에서 시장에 이르는 나의 정치 대서사시는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다.
노끈에 꽁꽁 묶인 놈을 곤죽으로 변한 살덩어리 중심부에 끌고 와 본보기 처형을 했다.
탕!
아직 다 썩지도 못한 좀비가 검붉은 피와 뇌수를 흩뿌리며 볼품없이 널브러졌다. 제 동료였을지도 모르는 곤죽 위로.
-거점 내의 모든 적성체를 말살했습니다.
-거점 전쟁 승리자 : 퇴역병
-모든 보상 및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무야호!”
2천 마리가 넘는 좀비들을 총화기와 폭탄으로 죄다 갈아 버렸기 때문일까. 정확히 그 2배에 달하는 DNA 샘플과 함께 막대한 양의 경험치, 그리고 홈마트에 대한 합법적인 주권 행사력을 손에 넣었다.
신이 나서 레벨이 몇 개나 올랐을지 확인하기 위해 상태창을 외치려던 그 순간, 이번에야말로 진짜 대지진이 일어나며 엉망진창이 된 홈마트 내부를 개수하기 시작했다.
좀비들의 시체와 오물은 싹 사라지고, 때 묻거나 헤진 건물 내벽 인테리어는 완전히 새것으로 바뀌었다. 좀비와 사람들 때문에 망가져 버린 공공기물과 매장도 전부 원상 복구된 것은 물론, 기존의 형태에서 상당히 개조되었다.
가령 중요한 물자를 팔고 있는 매장은 모든 카운터마다 점원을 보호하는 철창과 방탄 유리벽이 생성되었고, 각 코너마다 CCTV가 주르륵 배치되었다.
또 매장 입구에는 지하철 개찰구처럼 특정 인간은 지나갈 수 있고, 특정 인간은 지나갈 수 없게 하는 특이한 구조물도 생겼다.
모든 것이 낡은 것에서 새것으로, 새것을 넘어서 최신식으로 바뀌고 있었다.
좁아터지고 낡아 빠진 에스컬레이터는 크게 확장되었으며, 엘리베이터 역시 숫자가 늘었다. 특히 화장실이나 내부 취사장까지 개수된 건 굉장한 이득이었다.
이 모든 변화를 두 눈으로 생생하게 지켜본 결과, 나는 퇴역병의 거점 지정 스킬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생존’에 포커싱을 맞췄다는 걸 눈치챘다.
거점이란 건 단순히 방어하거나 역으로 공략해서 빼앗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거점이란 건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전략적 가치를 지니는 만큼, 뛰어난 거점일수록 이렇게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는 것이 확실했다.
아포칼립스 시대에서 학교나 자택 같은 곳은 거점으로서의 가치가 크게 떨어진다. 왜냐하면 숨어 지내기 용이하다는 것 빼면 전략적 가치가 크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청난 양의 물자와 넓직한 공간, 인프라를 적극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기반이 갖춰진 대형 마트라면? 시스템은 바로 이런 곳이야말로 전략적 가치가 엄청나다고 판단한 것이다.
쉽게 말하면 이곳은 단순한 마트가 아니라 마트 형태의 거점이라는 얘기다.
‘판매대에 쌓여 있던 물자들까지 모두 개수 작업을 거치면서 재생성 됐지만, 다시 한번 더 소비하면 더 이상 재생성은 안 되겠지.’
시험 삼아 개조된 냉장고의 유통기한 보정 효과를 받는 우유 한 팩을 까서 마셔 봤더니, 역시나 일정 시간마다 재생산된다는 표시 문구는 나타나지 않았다.
하기야 인프라가 무한정 공급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인데, 거기에 물자 자동 생성까지 바라는 건 정말 양심이 없는 거다. 나도 안다.
그러다 문득 내 뇌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마트는 어디까지나 물자의 유통 판매를 담당하는 곳이다. 그러니까 엄밀하게 말하자면 ‘생산 시설’이 아니다.
하지만 공장이나 논밭, 축사, 양식장이라면 어떨까? 모두 생산과 관련된 시설인 만큼, 내가 거점으로 삼는다면 원자재의 자동 재생산이 가능하지 않을까?
가능성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실제로 지금까지 내가 먹은 거점 3개 모두 생산 시설이 아니었음에도 방위 무기 탄약이나 내구도를 재생산하고 있으니까.
즉 거점의 목적과 용도만 일치한다면, 그 거점을 유지한다는 명목하에 특정 물자 재생산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거다.
나는 식품 코너 앞에 멍하니 선 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만약…….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내가 영화관이나 영상 제작 관련 거점을 먹기만 해도 기존에 만들어져 있던 영화와 드라마가 재생산된다는 거잖아!!”
밀린 영화와 드라마를 보고! 배고프면 과자나 라면을 까먹고! 목이 타면 탄산음료를 물처럼 들이켜고! 졸리면 감촉이 예사롭지 않은 소파 위에서 한가롭게 잘 수 있는 그런 노후 생활!
믿겨지는가?
모든 거점이 내 스킬에 의해 반영구적으로, 완전 자동화로 굴러간다면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이 종말 속에서 순수하게 인생을 즐길 수 있다.
내 노후 생활 콘텐츠가 복사가 된다고!!!!!!!!!!!!!
거점 지정 스킬 코인 풀매수 간다. 아직 탑승 안 한 코린이 없제?
비트코인 깝치지 마 시발.
퇴역병은 무적이고, 거점 지정 스킬은 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