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31화 (32/227)

31화 생존기 (31)

“몇 번 쓰다 보니 금방 익숙해지네.”

후크를 거둬들인 나는 모텔 건물 옥상에서 아래를 살폈다. 확실히 높은 곳에서 주변을 보는 만큼 시야가 확 넓어졌다.

군대에서도 보통 고지대를 먼저 점령해서 가능한 넓은 반경을 관측하고 적들의 움직임을 사전에 포착하려고 노력하는데, 막상 좀비들 상대로 그런 짓을 하고 있으니 조금 색다른 감각이었다.

밝은 햇살 아래에서 눈가에 손을 올린 채 이곳저곳을 확인한 결과, 유독 이 근방에 좀비들이 이상할 정도로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지상에 있을 때 잠깐 멀리서 봤던 것만으로도 좀비가 바글거린다는 예상 정도는 하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거라고는 예상 못 했다.

다소 극단적으로 말하면, 행복한 화이트 크리스마스 저녁에 서울 도심 한복판을 돌아다니는 인파와 비슷한 규모였다.

예상했던 대로 근방 건물은 여느 아파트 단지처럼 좀비들에게 완전히 점령당한 상태였다.

군데군데 유리창이 깨져 있는 곳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핏자국과 인간의 살점으로 범벅이 되어 있고, 그 주변에선 피 칠갑을 한 좀비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아마도 처음 좀비들이 시내 한복판 지하철역에서 쏟아져 나오자마자 도망친 사람들이 이곳에 몰린 탓에, 자연스럽게 좀비들 역시 이곳으로 몰린 게 아닐까 생각된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시내는 비교적 한산했으니, 죽어라 도망친 사람들이 결과적으로 훌륭한 미끼 역할을 했던 셈이다.

아니, 훌륭한 건 아닌가? 하필 좀비들을 끌어와도 이런 곳으로 끌고 왔으니까.

서울역 러시아워 시간대처럼 몰린 사람들과 좀비들이 잡탕죽처럼 뒤섞였으니 이런 혼돈의 거리가 탄생하는 거다.

전차를 끌고 와서 싹 밀어 버리려고 해도 중간에 궤도가 먼저 나가거나, 엔진이 퍼져 버릴 거다.

나는 가을 특유의 맑은 공기는커녕 피와 시체 썩은 내로 진동하는 거리를 내려다보며 코를 싸쥐었다.

좀비 바이러스가 공기중으로 감염될 리는 없겠지만, 왠지 이곳에선 평범하게 호흡을 하는 것만으로도 전신이 썩어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본래 우리의 땅이었던 이곳에 더 이상 산 자의 생기는 느껴지지 않고, 사실상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괴물들이 인간의 형태를 가진 채 돌아다니고 있다.

전장 한복판도 이렇지는 않았는데.

‘홈마트 주변은 특히 심한데. 사태 당일에 사람이 얼마나 몰렸던 거야?’

뭔가 일이 터지면 작은 편의점부터 큼지막한 마트까지 가서 사재기를 하는 건 만국 공통이다.

아마 좀비의 존재를 인지하고 대한민국이 좆됐음을 눈치챈 사람들이 가장 먼저 달려온 곳이 저 홈마트였을 것이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좀비들에게 쫓기던 사람, 그 뒤를 쫓아오던 좀비들과 엮이면서 마트를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대로 전멸.

층마다 대규모 매장이 자리 잡고 있는 6층짜리 건물에 좀비가 얼마나 가득 차 있을지는 상상하기도 싫다.

일단 거점 지정에 성공하면 영역 내의 모든 공간이 개조되면서 깔끔하게 청소도 되니까 청결 문제는 딱히 걱정되지 않는다. 중요한 건 저렇게 좀비가 가득한 건물도 과연 거점 지정이 가능하냐는 것이었다.

짚 라인을 이용해 시가지라는 이름의 정글을 누비는 타잔처럼 날렵하게 건물을 타 넘었다.

도로를 꽉 메우고 있는 좀비들이 간혹 나를 발견하고 우우 소리를 지르기도 했지만, 정작 저들끼리 뭉쳐 있는 탓에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러다 내가 시선에서 사라지면 다시 집단 무지성에 빠져 조금씩 몸을 흔들거나, 기괴한 비명을 지르는 등 온순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마침내 홈마트 건물의 깨진 창문에 후크를 걸어 내부에 진입한 나는 즉시 거점 지정 스킬을 시전했다.

하지만 반쯤 예상했던 대로 일은 순탄하게 풀리지 않았다.

-현재 거점을 점령 중인 적성체가 너무 많습니다!

-‘강제 거점 탈취’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였습니다!

-강제 거점 탈취 조건 : 거점 지정 스킬 숙련 레벨 B- 이상.

-강제 거점 탈취 실패 시 거점 전쟁을 벌여야 합니다.

-거점 전쟁 실패 시 해당 거점 영구 탈취 불가

“쓰읍……!”

주방용품 코너 뒤에 바짝 숨어서 상태창을 쭉 살펴보고 있던 나는 입맛이 쓰게 느껴졌다.

현재 이만큼 좋은 거점은 김해 시내 동쪽 구역 기준으로 샅샅이 찾아봐도 없는데, 하필 이런 장애물이 발목을 잡을 줄이야.

거점 전쟁이란 건 따로 설명을 듣지 않아도 어떤 시스템인지 알 것 같았다. 거점 내에 존재하는 적성체와 시원하게 맞짱 떠서 이기면 거점을 가지고, 지면 큰 페널티를 입거나 죽는 거다.

인간들이 점령하고 있는 거점이라면 모를까,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을 것 같은 좀비 떼가 상대라면 나 역시 망설여진다.

그렇다면 포기해야 할까?

‘장기적인 관점에서 이 병신 같은 나라에서 살아남으려면 물자와 사람이 모두 필요하다.’

인프라는 내 능력으로 유지시킬 수 있지만, 내 몸은 하나니까 나를 도와줄 사람과 그들을 먹여 살릴 물자가 필요하다.

좀비들은 물자를 건드리지 않으니, 홈마트를 차지하면 그 안의 물자들이 온전히 내 것이 되는데 포기해라? 말도 안 되는 소리.

심지어 이건 우선순위를 따질 수도 없는 문제다. 좀비들을 전부 처리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군대나 능력자 집단을 모아오려면 교섭 수단이 필요한데, 그 교섭 수단이란 것이 결국 물자이기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 거점 전쟁에 패배해서 이 거점을 먹지 못해도 상관없다. 거점 전쟁에서 진다고 해서 건물이 파괴되는 건 아니니까. 여유가 되는 대로 인벤토리에 물자만 챙겨서 빠지면 돼.’

짚 라인 스킬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면 침투와 도주도 문제없으니 뺀질나게 홈마트를 들락날락하면 된다. 그렇게 빼낸 물자는 활천초에 쌓아 두고 관리하면 문제없다.

즉, 이건 충분히 한번 걸어 볼 만한 전쟁 각이었다.

“거점 전쟁을 하겠다.”

-거점 전쟁 참가자 : 적성체 2,776체, 퇴역병 1명.

-거점 전쟁이 진행되는 장소는 양측 모두에게 ‘공평한’ 전장으로 전환됩니다.

-일시적으로 ‘홈마트’가 퇴역병 이승권의 거점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거점 전쟁 승리 조건 : 적성체 전원 처치 or 6시간 동안 사망 및 전장 이탈 없이 거점 내구도 50% 방어.

-거점 전쟁 패배 조건 : 임시 거점 내구도 50% 미만으로 하락 or 퇴역병 사망 혹은 전장 이탈.

-거점 전쟁 승리 보상 : 5,552 DNA 샘플 및 그에 상응하는 경험치 (x2 보너스)

-거점 패배 페널티 : 해당 지점에 영구적으로 거점 지정 스킬 사용 불가능

나는 홈마트가 일시적이나마 내 거점이 되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다가올 거대한 지진에 대비했다.

하지만 기대했던 지진 대신 건물 내벽과 바닥, 천장마다 반투명한 벽이 생겼다. 임시 거점이니까 거점 형태도 미완성인 상태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시스템의 의도인 것 같았다.

-거점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모든 적성체가 임시 거점의 내구도를 공략하거나 퇴역병을 말살하려 할 것입니다.

“……거점창!”

거점창을 열어 보니 현재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방위 무기 목록과 거점 내부에 존재하는 적성체의 숫자가 보였다. 또한 각 층마다 ‘침입자’로 판정되는 적성체들의 대략적인 위치나 규모가 보였다.

숫자가 워낙 많아 점으로 표시되지 않고 거무스름한 붉은 안개처럼 보였다. 붉은 안개가 가장 짙은 장소는 1층이었고, 2층부터 6층까지는 엇비슷했다.

이곳이 아직 멀쩡했을 때, 탈출하려던 사람과 도망쳐 들어오려던 사람들이 서로 좀비들과 얽히고설키면서 1층에 대참사가 일어난 게 분명했다.

‘역시 거점의 용도나 규모가 달라서 그런지 사용할 수 있는 방위 무기가 다르네.’

활천초를 거점으로 지정했을 때처럼 내가 움직일 수 없는 고정 포탑이 옥상에 자동 배치되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이번에는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았다.

모두 건물 내부, 혹은 외부에 원격 배치할 수 있는 크고 작은 방위 무기들이었다.

‘12.7mm 자동포탑 3개, 9mm 머신피스톨 터렛 10개, RC카 폭탄 5개, 부비트랩 30개. 규모는 활천초가 더 큰데 무기 비중과 밸런스는 이쪽이 비교도 안 될 만큼 우월하군.’

시스템도 단순히 넓기만 해서 숨어 지내는 용도에 불과한 학교보다, 대량의 물자가 비축되어 있는 대규모 마트의 가치를 더 높게 측정한 것이 분명했다.

만약, 내가 김해공항을 거점으로 지정하면 어지간한 군대도 씹어먹을 수 있는 엄청난 방위 무기들을 손에 넣게 되는 건 아닐까?

물론, 방위 무기의 수준이나 수량이 늘어난 건 거점 지정 스킬을 D- 등급까지 끌어올린 덕도 있다. 거점 지정 스킬에 포인트를 집중적으로 투자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난 셈이다.

“쓰읍. 이러고 있을 게 아니지.”

거점 전쟁이 시작되기가 무섭게, 좀비들은 자신들의 입장에서 침입자인 나를 열심히 찾아다니거나, 반투명한 벽을 닥치는 대로 부수기 시작했다.

거점이 공격받고 있다는 메시지가 좌르륵 뜨면서 시야를 어지럽게 했기에, 일단 모든 알림창을 닫아 두고 빠르게 움직였다.

활천초에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방위 무기에도 엄연히 내구도가 존재한다. 그러니까 무턱대고 좀비들 사이에 방위 무기를 배치했다간 쪽도 못 쓰고 파괴당할 터.

나는 좀비들의 손이 닿지 않으면서도 설치 각이 나오는 장소를 찾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매장 내부를 살폈다.

“아아아아아아!”

“그래. 6층까지 어거지로 올라온 놈들도 있겠지.”

보통 이런 마트는 옥상 문을 잠가 두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도망치고 도망친 사람들은 6층까지 내몰린 끝에 좀비들에게 뜯어먹히거나, 깨진 창문 아래로 몸을 던져 조금이라도 덜 고통스럽게 죽는 방법을 택했을 것이다.

탄약을 가득 채워 둔 소총이 있었지만 아직 사용하고 싶진 않았다.

방위 무기를 설치하지도 못했는데 벌써부터 건물 내에 존재하는 모든 좀비의 어그로를 끌었다간 거점 전쟁이고 뭐고 다 끝나는 거다.

때마침 판매대에 걸려 있는 두툼한 반죽 밀대를 집어 든 나는 그대로 좀비 옆을 스쳐 지나가듯 몸을 던져 정강이뼈를 힘껏 두들겼다.

통짜 나무로 만든 반죽 밀대에 그대로 정강이뼈가 박살 난 좀비는 볼품없이 고꾸라지며 바닥에 안면을 처박았다. 바닥에 넘어져 허우적대는 놈의 뒤통수를 다시 한번 내려찍어 확실하게 침묵시켰다.

그러고 보니 건물 내부가 밝아졌다. 햇살이 들어와서 그런 건가 싶었는데, 임시 거점으로 지정되면서 끊어진 전력이 다시 공급되기 시작한 모양이다.

매장 특유의 밝은 백열등이 환한 빛을 발하자 그늘에 가려져 있던 참상이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판매대나 물건 사이에서 눈빛을 빛내고 있는 좀비들도.

마트에 전력이 공급되면서 전등이 하나둘씩 켜지는 것이 무언가의 시작을 알리는 총성이나 다름없었다.

지금까지 멍청하게 반투명한 벽이나 바닥을 손톱으로 박박 긁어 대고 있던 좀비들이 거의 동시에 내게 달려들었다. 나 역시 무기로 쓸 만한 것들을 집어 들었다.

야구방망이처럼 두껍고 튼튼한 반죽 밀대를 던져서 달려오던 좀비의 꼴통을 깨 버리고, 큼지막한 사각 정육도를 양손에 하나씩 쥐었다.

“캬하아아아!”

“사냥감을 덮칠 땐 조용히 덮쳐야지 이 빡대가리 새끼야!”

우당탕탕!

판매대를 뒤엎으며 헌신적으로 몸을 던진 좀비는 안타깝게도 내 몸에 닿지 못하고 목이 반쯤 썰려 나갔다. 아무리 정육도라고 해도 인간의 목을 단숨에 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척추뼈와 이어진 ‘신경’만 끊어 내는 것에 집중했다.

좀비의 신체 구조는 인간과 완벽하게 똑같으니까, 한 방에 확실하게 죽일 수 없다면 신경을 끊어서 전신 마비 상태로 만들어 버리는 게 가장 낫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내 예상은 보기 좋게 적중했다.

뒷목에 커다란 상처가 생긴 좀비는 살지도, 죽지도 못한 몸이 되어 눈알만 요리조리 굴릴 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나는 멍청하게 내 손으로 직접 2776마리나 되는 좀비들을 잡아 족칠 생각이 없었다. 그런 건 방위 무기들에게 맡기면 된다.

다행히 6층까지 올라와 있던 좀비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혼자서 처리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총을 사용하지 않고도 혼자서 좀비들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은 역시 체술 스킬 덕분이었다.

‘미묘하지만 상대방의 공격 궤도나 움직이는 경로가 예상이 돼.’

새삼 시스템의 힘을 다시 한번 느끼면서, 6층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전력이 공급되자 엘리베이터 역시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의외로 엘리베이터에는 좀비들이 들어 있지 않았는데, 비상사태가 벌어지면 엘리베이터 사용이 자동으로 정지되기 때문이다.

나는 텅 빈 엘리베이터에 폭탄이 부착된 RC카를 배치한 다음 1층으로 퀵 배송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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