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생존기 (29)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풍겨 오는 좋은 냄새에 나도 모르게 코를 킁킁거렸다. 어머니가 하나뿐인 아들이 걱정되어서 된장찌개라도 끓여 주러 오신 건가?
“엄마한테 자취한다고 말한 적이 없는…… 아.”
부스스한 몰골로 방 문을 열고 나오자 거실과 연결된 오픈형 부엌에서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는 여성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 이 별장에 입주했을 때 사 놓고 정작 한 번도 착용하지 않았던 앞치마를 그녀가 걸치고 있었다. 자취하는 20대 남자가 부엌에 설 일은 라면을 끓일 때와 전자레인지를 돌릴 때뿐이었는데 나더러 뭐 어쩌란 말인가.
“아, 일어나셨어요?”
식기를 세팅하던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어색한 미소를 띠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어제 워낙 경황이 없어서 서로 통성명을 생략했던 단계가 많았기 때문일까.
자연스럽게 일찍 일어나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그녀와, 평소처럼 부스스한 몰골로 늦게 일어나 식탁에 앉은 나 사이의 괴리감은 엄청났다.
어제는 분위기상 서로 그냥 넘어가야 했던 것들을 떠올리면서, 나는 식탁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구수한 된장찌개를 들여다보았다. 배달시키지 않고 누군가가 직접 만든 집밥을 밥상 앞에서 본 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
활천초에서 최연희가 인스턴트 식품으로 즉석에서 조리해 준 요리와는 확실히 느낌부터 달랐다.
따뜻하고, 안정적이고, 어딘가 그립기까지 한 감성적인 식사.
하지만 나는 버섯과 가지볶음만큼은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과감하게 반찬 그릇을 멀리 밀어냈다.
쌀 한 톨도 귀중한 아포칼립스 시대에 반찬 투정이 웬 말이냐고? 그건 버섯과 가지 특유의 식감과 밍밍한 비릿함을 모르는 인간들이나 할 수 있는 말이다.
방금 된장찌개 때문에 굉장히 분위기가 좋았는데, 버섯과 가지볶음 때문에 기분이 급다운되었다. 무슨 롤러코스터도 아니고.
버섯과 가지. 너희들은 존재해서는 안 되는 식물이다.
“아! 혹시 버섯과 가지는 못 드시나요?”
“버섯과 가지를 먹으면 욕이 나오는 알레르기가 있어서요.”
“그…… 어떡하죠? 된장찌개에도 조금 넣었는데…….”
“곁들인 건 상관없어요. 버섯과 가지가 메인인 음식만 아니면 돼요.”
암, 그렇고 말고. 된장찌개에는 죄가 없지.
태초의 선악과를 따먹고 원죄를 범한 것은 오직 버섯과 가지뿐이니까. 하나님께서 너희를 에덴 농원에서 내쫓으셨음에도 아직 정신을 못 차렸더냐.
‘진짜 버섯과 가지를 개량해서 현대까지 유지시킨 식물학자는 타임머신 타고 과거로 돌아가서라도 뚝배기를 깨야 한다.’
아니, 그보다 우리 집은 버섯과 가지에 한해서 절대 금역인데 대체 어디서 이 괴물들이 튀어나온 거지?
내가 의아한 시선을 보내자 채성아가 뒤늦게 내 시선의 의미를 알아차렸는지 손사래를 치며 싱크대 한 구석을 가리켰다. 노브랜드 통조림이 몇 개 따여진 상태였다.
“산에서 따온 게 아니라 통조림 안에 들어있던 걸 썼어요! 통조림 종류가 워낙 많아서 요리에 쓸 만한 걸 찾고 있었는데 마침 저런 게 보였거든요.”
“인터넷에 재난 대비 얼티밋 통조림 팩이라고 해서 랜덤한 메뉴를 싼 가격에 많이 파는 놈으로 주문했던 건데, 설마 버섯과 가지도 섞여 있을 줄은 몰랐네요.”
배달된 통조림 산을 받자마자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모조리 지하 창고에 밀어넣었던 내 실수였다.
‘아니, 보통 누가 버섯과 가지 통조림을 생각하냐고. 제정신 박힌 인간이면 절대 그런 통조림은 안 만들지.’
하다못해 장어젤리 통조림이 내 집 지하실에서 튀어나왔다고 해도 이렇게 놀라지는 않았을 거다.
부디 저 미친 통조림을 만들 생각을 했던 놈은 좀비에게 고통스럽게 뜯어먹혔길 바라면서, 나는 천천히 수저를 들었다.
상차림을 끝낸 채성아도 자연스럽게 내 맞은편에 앉아 수저를 들었다.
고슬고슬한 쌀밥에서 올라오는 고소한 냄새는 간밤에 텅 비어 버렸던 위장을 사정없이 자극했다. 왜 조상님들이 한국인은 밥심으로 일 한다고 떠들어 댔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자극적인 조미료로 범벅된 배달 음식에 더럽혀진 내 혀는 구수한 된장찌개와 쌀밥, 김치와 고기 반찬에 의해 순식간에 정화되었다.
나는 버섯과 가지 특유의 식감을 싫어하는 것이지 향까지 싫어하지는 않았다. 제철 달래 된장찌개처럼 이 비건 된장찌개도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
수저를 들다 말고 문득 이런 밥을 먹어 본 게 얼마 만인지 떠올렸다.
부모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그것도 또래 여성이 만들어 준 ‘진짜 집밥’을 근 6년 만에 먹어 본 나는 갑자기 어휘력이 급격하게 하락한 것을 느꼈다.
“생각보다 요리를 잘하시네요.”
병신 새끼. 거기선 요리에 대해 극찬하면서 이런 요리는 태어나고 털 나서 처음 먹어 봤다고 호들갑을 떨었어야지.
정신 차려 이승권! 넌 6년 전까지만 해도 인싸 중의 인싸였다고! 선배들에게 넉살 좋게 밥 얻어먹고, 새내기들에겐 자연스럽게 밥과 술을 사주던 그때의 너는 대체 어디 갔느냔 말이야!
“아, 간호사 일을 하다 보니 몸 건강은 직접 챙겨야 할 것 같아서 영양햑을 따로 공부했었는데, 그러다 자연스럽게 요리가 늘더라고요.”
똑부러진 성격답게 자기관리도 철저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몇 마디 가벼운 대화를 나눈 우리는 빠르게 식사를 해치웠다.
나는 오늘도 해야 할 일이 많았고, 채성아 역시 내 거점 일원으로 생활하려면 앞으로의 방침부터 정해야 했으니까.
식사는 채성아가 차렸으니 설거지는 내가 한 다음, 거실에서 서로 믹스 커피 한잔씩 마시며 본격적인 논의에 들어갔다.
일단 채성아를 거점 일원으로 받아 두긴 했지만, 그녀는 박성호가 이끄는 여행 동아리 회원들과는 ‘쓰임새’가 많이 달랐다.
박성호가 이끄는 여행 동아리 회원들은 거점 관리, 물자 관리 같은 잡일에 가까운 일들을 도맡아 하지만, 채성아처럼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 거기에 스킬까지 가지고 있는 인물은 거점에 박아 두기만 하는 건 너무 아까웠다.
거점에서 철저하게 보호받아야 하는 중요 인재인 건 맞지만, 나는 그녀가 장기적인 관점에서 나처럼 안락하고 편한 삶을 누리기 위해 조금 더 고생해 주길 원하고 있다.
“우선 저도 오늘 해야 할 일이 있고, 성아 씨도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게 많을 텐데, 이거다 싶은 부분은 서로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죠.”
어제는 내가 손님으로서 그녀를 맞아 줬다면 오늘부터는 그녀를 동료로 맞이해야 한다. 정확히는 영입과 관리다.
그녀가 전기와 수도, 가스가 빵빵하게 나오는 안전한 거점에서의 삶을 원한다면 내게 협조할 수밖에 없으니, 약간 억지를 부리기로 했다.
“성아 씨는 간호사라는 실제 직업을 가지고 계시고, 또 그에 걸맞는 각성자 스킬을 가지고 계시죠. 굳이 역할군을 나누자면 거점을 지키는 앵커(anchor) 쪽에 해당하는데, 문제는 성아 씨의 직업적 지식이나 기술, 스킬을 제대로 활용하려면 거점에 있기만 해선 안 된다는 거예요.”
“음, 제가 생각해도 그런 것 같아요. 안전한 거점에서 환자를 보살피는 게 간호사의 일이긴 하지만, 바깥에 저런 것들이 돌아다니고 있는 세상이라면 안에서 환자를 돌봐야 할 일은 적겠죠.”
필연적으로 환자의 절대다수는 바깥에서 발생할 것이고, 간호사인 그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환자는 안이 아니라 바깥에 널려 있게 될 것이다.
그래. 그녀는 사람이 다치면 즉각 응급처치를 하거나, 타이밍 맞춰서 오염 예방 스킬을 써 줘야 하는 야전의료인이 되어 줘야 한다. 거기에 현장에서 구하거나 쓸 의약품 구분을 위해서 그녀의 지식도 필요하다.
의료인은 가장 귀중한 인재 중 하나인 만큼 안전한 거점 내에서 보호하는 게 맞지만, 나는 그녀를 필드요원으로 키우고 싶었다.
그녀를 필드요원으로 키우고자 하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그녀의 대담함 때문이다.
여자 혼자 컴파운드 보우 하나 들고 좀비 떼를 헤쳐나왔다는 점, 의료인이기 때문에 피를 많이 봐서 심적으로 위축되지 않는다는 점 등이 그녀가 대범하다는 증거였다.
둘째는 장기적으로 나를 보조해 줄 필드요원이 필요하다는 이유다.
아무리 혼자 움직이는 게 편하다고 한들, 나는 기본적으로 거점을 지키는데 특화되어 있는 직업인 퇴역병이다.
거점이라는 홈그라운드를 벗어나면 상대적으로 전투력이 많이 떨어지게 되는데, 채성아 같은 인재가 현장에서 나를 보조해 주면 전투력 손실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내가 다치거나 하면 현장에서 즉시 손 써 줄 수 있으니까.’
북한군을 때려잡을 때도 현장에 의무병을 필수적으로 대동했는데, 운 나쁘게 부상을 입기라도 하면 의무병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운명이 갈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 흔한 지혈조차 하지 못하면 현장에서 사람이 죽어 나자빠지는 건 일도 아니었으니까.
내가 그녀에게도 함께 현장에 동행해 줄 이유로 앞의 두 가지를 설명하자 채성아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곧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이런 시대에 편한 삶을 누리고 싶다면 그에 걸맞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당연히 승권 씨가 필요로 하신다면 도와드려야죠.”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다행이네요.”
그녀가 정말로 현장에서 뛸 수 없겠다고 한다면 협박까지 해가며 억지로 끌고 나갈 생각은 없다.
오히려 어제까지의 일이 그녀에게 있어서 커다란 트라우마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채성아는 내게 적극 협조하는 방향을 선택했다.
“그런데 미리 알아두셔야 할 게 있어요. 어제 제 모습이 조금 그래서 잘 싸울 것 같은 이미지로 오해 하실까 봐 미리 말씀드리는데, 저는 잘 못 싸워요. 컴파운드 보우도 아버지께 배워서 취미로나마 조금 쏠 줄 알았던 것뿐이고, 시내에서 도망쳐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운이 컸어요.”
“현장에서 해야 하는 일들은 제가 가르쳐 드릴 수 있으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그녀에게 컴파운드 보우 사용법이나 호신술 정도는 가볍게 가르칠 능력은 있었다.
사격 스킬과 체술 스킬 덕분에 그런 분야는 내 주특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부터 당장 저를 도와 달라고 말할 생각은 없어요. 성아 씨는 크게 지쳐 있기도 하니까 아직 요양이 좀 필요하겠죠. 무엇보다 필드로 나가려면 이것저것 준비할 것도 많고.”
“예, 그래서 시간을 조금 주신다면 좋을 것 같아요. 그래도 그 외에 달리 맡길 일이 있다면 뭐든 말씀해 주세요. 의약품 분류나 물자 정리 정도는 할 수 있어요. 간호사 일 하면서 질리도록 했던 일이거든요.”
그러고 보니 간호사는 환자를 돌보는 일만큼이나 잡일도 엄청나게 하는 고된 직업이라고 했었지.
간호조무사라는 직업도 엄밀히 말하자면 간호사가 제 시간에 전부 할 수 없는 간단한 잡일을 대신하기 위해 만들어진 직업이라고 할 정도니까.
“그럼 오늘은 지하실에 있는 물자 정리나 집 지키기 정도만 부탁드릴게요. 이후에 시간 나는 대로 필드에서 뛸 준비들을 해 보죠.”
“열심히 할게요!”
주먹을 꽉 쥐어 보이면서 열심히 하겠다는 말을 할 때, 제발 거점에서 내쫓지 말아달라는 의지가 다분히 느껴졌다. 내가 그렇게 박정해 보이는 타입인가?
당연하지만 이런 인재를 굳이 내쫓을 이유는 없다. 정말로 배신이라도 한다면 모를까.
물론 내가 집을 비운다고 해서 그녀가 나를 배신할 것 같지는 않다. 내 거점 일원이 된 순간부터 그녀는 나를 배신할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나를 배신하고 거점 일원이길 포기하면 시스템상 즉시 외부인으로 취급되는데, 이때 거점창 관리로 방위 무기의 요격 범위 설정을 ‘외부인’으로 바꾸면 된다.
배신했다는 걸 알아차리는 순간 거점 방위 무기로 손쉽게 배신자를 처리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배신당할 수 없는 구조라는 걸 안다. 그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인간불신 정신병자에게나 어울리는 시스템이다.
나 인간 이승권은 누구보다도 이웃사촌과의 상생을 중시 여기는 모범시민이건만.
채성아에게 잠시 집을 맡긴 나는 남아있는 모든 탄약을 챙겨서 다시 바이크에 올라탔다.
어제 이승권 Mk 2를 아파트 단지 앞에 버려 두고 온 것이 너무 아까워서 돌아오는 길에 정비소에서 새로운 바이크를 찾았다. 그게 이 이승권 Mk 3이다.
오늘은 기어이 삼안동까지는 전부 둘러보고 올 작정이었다.
‘가능하다면 거점도 하나 더 만들어 두고.’
어제보다 조금 더 쌀쌀해진 것 같은 가을 공기가 따끈하게 축 늘어져 있던 폐를 바짝 굳혔다.
이번 가을이 분수령이다.
겨울이 오기 전에 준비를 끝마친 자는 살 것이요, 그렇지 못한 자는 좀비든 자연 환경이든 둘 중 하나에겐 반드시 죽임당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