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생존기 (28)
“형님, 애들 돌아왔습니다!”
“벌써 돌아왔다고? 오늘은 좀 많이 빠른데 혹시 애들 레벨이라도 올랐나?”
“그게 아니라…… 아무래도 문제가 좀 있었던 모양입니다.”
문제가 생겼다는 깍두기의 보고에 험상궂은 인상의 사내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문제라니?”
“한번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애들 꼴이 말이 아니라…….”
“쓰읍!”
깍두기를 밀치고 나선 사내는 학교 본관을 빠져나와 넓직한 부지 뒤편으로 돌아갔다.
학교라고 해서 그렇게 클 것 같지 않지만, 이곳은 김해에서도 부지가 가장 넓은 학교에 속했다.
놀랍게도 김해유치원부터 영운초, 영운중, 영운고까지 에스컬레이터식 진학이 준비된 곳이라 부지가 넓은 것은 물론이요 시설 규모도 남다른 축에 속했다.
자신들을 제외하고도 꽤 많은 생존자들이 이곳에 숨어 있었는데, 각성이라는 시스템이 등장하면서 각 학교마다 서로 다른 생존자 그룹으로 파벌이 나뉜 상태였다.
현재 영운중 생존자 그룹을 담당하고 있는 최상두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각성자들에게 한 가지 지령을 내려 두었다.
좀비들이 바퀴벌레처럼 득시글거리는 홈마트 털어야 하니, 우선 인근에 몰려든 좀비들부터 유인해서 최대한 먼 곳에 떨어뜨려 놓으라는 심플한 지령이었다.
갑작스러운 서울 폭동 사태와 전국적인 대혼란, 그리고 영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좀비들의 침공.
사람들은 시내에서 다급히 도망쳐 와 주택가로 숨어들었고, 자연스럽게 홈마트 같은 대형 마트에 엄청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결과는 모두 좀비행이었지만.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물자가 차고 넘치는데, 정작 그곳의 주인이 인간이 아니라 좀비라는 사실에 수많은 생존자가 분노했다.
때문에 생존자 그룹 전체의 대의명분에 따라 자전거를 탈 줄 아는 게 전부인 ‘바이커’ 각성자들에게 좀비 유인 작전을 맡겼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쉬운 일을 실패하고 돌아왔다고 하니 화가 나지 않고 배기겠나.
“형님 오셨습니까!”
학교 뒤편에서 연장을 들고 피 묻은 자전거를 손보고 있던 부하 한 명이 최상두를 보자마자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기름이나 전기 충전이 어려운 지금, 자전거는 중요한 이동수단 중 하나였다. 바이커 각성자 몇 명이 길거리에서 나자빠 뒤진 것보다 자전거 한 대를 잃는 게 더 아까울 정도였다.
“쯧. 돌아온 게 고작 이것들뿐이야?”
“지들 말로는 자기들이 사고가 있었다고 하는데 솔직히 영 믿기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주로 사용하는 루트에 좀비들이 없다는 걸 미리 확인하고 움직였는데, 오늘 갑자기 예상치 못한 좀비 떼가 우르르 튀어나왔답니다. 그 결과 셋이 죽고 자전거도 4대나 잃었습니다.”
“염병할 새끼들. 그 와중에 한 놈은 자전거만 버려 두고 용케 살아 돌아왔네?”
“흐흐, 죽기 살기로 달렸나 봅니다.”
“이게 웃기냐 새끼야?”
부하의 뒤통수를 가볍게 후려친 최상두는 흙먼지와 핏물로 더러워진 바이커 각성자들을 스윽 훑었다.
각성 시스템을 알고 있는 생존자 그룹 사이에서도 바이커나 프로 운전수 같은 직업을 가진 놈들은 그리 환영받지 못했다.
반드시 무언가에 탑승해야 한다는 점, 잘 지치지 않거나 피곤해지지 않고 오랫동안 운전할 수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없기 때문이다.
기름이나 전기가 없는 건 제쳐 두고서라도 사방천지에 좀비와 버려진 차량들이 있어서 차량 운용은 당연히 불가능.
그래서 비교적 움직이기 편한 오토바이나 자전거를 이용해야 하는데,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기껏해야 정찰이나 좀비 유인이 전부였으니까.
그런데 이젠 그것마저도 제대로 못해서 귀중한 자전거를 날려먹고 돌아와서 패잔병처럼 축 쳐져 있다.
주기적으로 자전거를 빡세게 타려면 힘 좀 써야 하니까 쓸모없는 놈들이라도 꼬박꼬박 음식과 물을 나눠줬는데, 모두의 기대를 헌신짝처럼 저버린 것이다.
“인생에서 자랑할 거리가 자전거나 트럭타고 뺑뺑이 도는 것밖에 없는 새끼들 불쌍해서 먹여 주고 재워 줬더니만, 몇 대 없는 귀한 자전거를 고철로 만들어 놔? 대체 무슨 낯짝으로 돌아온 거냐?”
부하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묵직한 떡대를 자랑하는 최상두가 으르렁대자 바이커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최상두는 학창 시절부터 사채업자에 도달하기까지 줄창 누군가와 싸우기만 했던 인간이었다. 때문에 좀비의 머리통을 박살 내자마자 그는 ‘사채업자’로 각성했다.
콘크리트 벽을 때려 부술 만큼 대단한 괴력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상대가 인간형이라면 어지간한 타이틀 챔피언을 가진 격투기 선수조차 한수 접어줘야 할 만큼 폭군으로 돌변한다.
사채업자는 ‘인간’에게 강한 직업이니까.
일전에 그의 그룹 운영 방침에 이의를 제기하던 남성 한 명을 주먹 한 방에 으깨 버린 일이 그의 힘을 잘 증명해 주는 사례였다.
인간형 적이 상대라면 인간이든 좀비든 절대로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그런 분위기를 갑옷처럼 두르고 다니는 사내가 바로 최상두였다.
결국 압박감을 참다못한 바이커 한 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앞에 나섰다.
“뭐,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하지만 가는 길에 한 번, 돌아오는 길에 한 번씩 꼭 루트를 점검했는데도 사고가 터진 거라 저희도 어쩔 도리가……!”
퍼억!
부하가 쥐고 있던 연장이 날아가고, 떨리는 목소리로 변명하던 남자의 머리가 사라졌다.
뒤늦게 자신의 머리가 사라졌다는 것을 인지한 혈관이 허공으로 피 분수를 흩뿌리며 피날레를 장식했다. 꽤 몸이 좋아 보이는 바이커였음에도 그가 던진 연장을 보고 피하기는커녕 막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만약 그것이 ‘쿨타임’이라는 제약을 가진 스킬이 아니었더라면, 그는 진즉에 좀비 군단을 상대로 홀로 만인지적(萬人之敵)의 용맹을 뽐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새끼가 잘못한 줄 알았으면 그냥 찌그러져 있을 것이지, 꼭 주둥이를 털어서 매를 벌어요.”
“꼴에 운동 좀 했다고 음식도 제일 많이 쳐먹던 놈이었는데 입이 줄어서 다행입니다. 흐흐.”
“마음 같아선 너희 쓸모없는 새끼들까지 싸그리 족치고 싶은데…… 그래도 홈마트 털어야 하니까 이번 한 번만 봐준다. 자전거 다 고치면 다시 좀비들 끌어서 적당히 다른 곳에 풀어놔. 사람 한 명 줄었으니까 다시 자전거랑 사람 수 딱 맞지?”
사람 하나를 죽여 놓고도 태연하게 말을 이어 나가는 그의 흉흉한 기세에 바이커들이 서로 짜고친 것처럼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바이커 중에서 가장 허벅지 근육이 두꺼운 바이커의 우두머리도 무어라 항변하지 못했다.
쯧, 하고 다시 혀를 찬 최상두는 부하와 함께 피비린내 나는 자전거 보관소를 빠져나왔다.
사채업자로 일하던 시절에는 대한민국 짭새들이 워낙 기세등등해서 힘없는 민간인 상대로 큰 재미를 보지 못했는데, 세상이 이 지경이 된 이후부터 오히려 그의 인생은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말 안 듣는 놈은 아기 손목을 비트는 것처럼 손쉽게 고문하거나 죽이고, 가지고 싶은 게 있으면 얼마든지 빼앗고, 이 생존자 그룹의 왕으로 등극해 턱짓으로 사람들을 부려먹을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세상이 이 지경이 되었을지라도, 이게 제2의 전성기가 아니면 무엇일까.
자연스럽게 담배를 꺼내 입에 문 그는 부하가 정중하게 갖다 댄 라이터 불에 담배를 태웠다.
주로 생존자 그룹 내에서 도움이 안 되는 놈들을 위주로 바깥에 내보내서 음식이나 생필품을 찾아오게 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이 담배는 무척이나 귀했다.
사람이 밥은 좀 굶고 살 수 있지만 담배는 단 하루도 참을 수 없었다. 그런데 하필 다른 생존자 그룹도 가까운 편의점이나 소형 마트를 털 때 담배부터 먼저 챙기는 경향이 있어, 유독 담배 확보 경쟁이 치열했다.
“쓰읍. 이거 다 태우면 두 보루밖에 안 남는데.”
“애들보고 좀 더 멀리까지 나갔다 오라고 할까요?”
“그건 주변 정리가 얼추 끝나면 해라. 손발이 다 죽어 버리면 우리 같은 착한 사람들은 뭐 등쳐먹고 사냐~”
“크! 역시 형님이십니다. 밥버러지 새끼들 편의를 다 봐주시고…….”
“이게 인망이라는 거야 인마. 너도 보고 배워. 그리고 말 나온 김에 묻는 건데 다른 생존자 그룹은 분위기가 좀 어떤 것 같냐?”
엄청난 폐활량으로 순식간에 장초를 꽁초로 만들어 버린 최상두가 묻자 부하가 잠시 주변을 살폈다. 일단은 같은 학교 부지에서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훔쳐 듣는 놈들을 조심해야 했다.
특히 각성 시스템으로 인해, 비록 극소수이긴 하지만 온갖 기괴한 직업이나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했다. 개중에 남의 말을 몰래 훔쳐 듣는 능력자가 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예상대로 모두 홈마트를 노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쪽 애들이 주기적으로 인근 좀비를 빼낼 때마다 다른 생존자 그룹에서 꼭 사람을 보내 확인합니다. 아마 이쯤 되면 먼저 홈마트에 진입할 수 있겠다, 같은 걸 노리고 있는 게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지. 개중에 총을 가진 놈도 있으니까.”
현직 경찰이나 군인, 혹은 노획한 무기를 이용해 스스로 무장한 대한민국 예비역 아저씨들.
죄다 짬뽕처럼 뒤섞여 있지만 이 지역에서 모여서 숨 죽이고 있는 생존자 그룹 대부분이 홈마트를 노리고 있는 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김해 삼안동과 삼방동 내부에 존재하는 여러 세력들은 각자의 생존 구역을 지정해서 좀비와 피난민을 통제하고 있었다.
서쪽으로는 인제대학교, 동쪽으로는 김해대학교, 그리고 북쪽으로는 현재 자신들이 자리잡고 있는 영운초~고등학교. 서로 일정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데다 사람들이 많이 도망쳐 오면서 좀비들 또한 많이 몰려들었다.
학교에 접근하는 좀비들을 막기 위해 겨울철 제설 작업을 하는 것처럼 일부 구역을 정리했지만, 그럼에도 좀비들의 숫자는 좀처럼 줄지 않았다.
특히 중앙에 떡하니 자리잡고 있는 삼방공원과 삼방초등학교에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좀비가 득시글거리고 있었다. 사태 초기에 제대로 된 피난처를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던 피난민들이 죄다 감염된 것이다.
홈마트 주변도 만만치 않지만, 홈마트로 가기 위한 중앙 길목도 난이도가 높아서 정공법으로는 돌파하기 힘들다. 설령 홈마트를 확보한다고 해도 중앙 길목을 정리하지 못하면 물자 수송은 난항을 겪으리라.
‘그걸 뻔히 알면서도 저 새끼들은 협력하기를 거부한단 말이지…….’
바닥에 침을 탁 뱉은 최상두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김해대학교를 바라보았다.
인제대학교는 커다란 하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거리가 있어서 괜찮았으나, 김해대학교측 생존자 그룹은 사사건건 이쪽과 마찰을 빚었다.
고작 편의점 하나를 두고 분위기가 험악해지거나 물자 회수조끼리 패싸움을 벌이는 건 다반사요, 고의적으로 좀비를 끌어와서 똥물을 끼얹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형님, 어제 정찰조가 우리 구역 편의점을 건드리는 남녀 4인조를 봤다고 합니다.”
“어디 새끼들인데?”
“인제대학교 과잠을 입고 있는 연놈들이라고 했으니 인제대학교 쪽일 겁니다.”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구만. 그 새끼들 어딨어?”
“좀비들한테 쫓기다 아래쪽으로 쭉 도망쳐서 김해활천초등학교 방향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총성이 터져 나와서 일단 우리 애들은 후퇴했다고 합니다.”
“군인이나 경찰이 거기에 자리잡고 있는 모양인데. 애들 보내서 싹 털어오면 무기 보급도 할 수 있겠어.”
군인이나 경찰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한들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이쪽은 인간을 아득히 초월하는 힘을 가진 각성자들이 있다. 그들도 인간인 만큼 방심할 수밖에 없는 밤에 허를 찌르면 그만이다. 쪽수도 후달리고 보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경찰이나 군인 따윈 가볍게 멱을 따버릴 수 있었다.
“혹시 모르니까 꾸준히 정찰조 보내면서 그쪽 전력을 알아봐, 그렇게 한 1, 2주쯤 관찰해 보고 괜찮겠다 싶으면 네가 직접 습격조 꾸려서 밤에 몰래 한탕 하고 와도 된다. 준비 안 된 놈들은 시간이 지나면 점점 더 약해지기 마련이니 쉽게 털어먹을 수 있을 거다.”
“흐흐, 그럼 약탈하는 김에 재미 좀 봐도 됩니까?”
“우리가 필요한 건 무기랑 물자야. 그 건방진 연놈들은 씹어먹든 삶아먹든 알아서들 해.”
“역시 형님이십니다!”
벌써부터 약탈이 기대되어 몸이 달아오르는지 실실 쪼개는 부하를 뒤로 한 최상두는 다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어차피 법치국가에서 사채업자로 오래 살아 봤자 말년이 좋지 않을 게 뻔했으니, 차라리 세상이 이 지경이 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소한 죽기 전까지 짭새에게 잡힐 걱정 없이 마음껏 즐길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