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생존기 (27)
감은 머리를 일단 헤어드라이기로 말리기만 해서 어깨 아래까지 내려오는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은 그녀는 쭈뼛거리며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위험천만한 바깥을 혼자 돌아다니다 가까스로 이곳에 도달해서 위대한 생활 인프라의 맛을 봐 버렸는데, 이제 와서 볼일 다 끝났으니 혹시라도 내쫓기진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나도 정보만 받고 매몰차게 그녀를 내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적당히 마음에 드는 방 하나 골라잡고 알아서 자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아직 말하지 않은 게 있으면 지금 다 말하라고 덧붙였다.
한 지붕 아래에서 같이 자게 됐다면 서로 간에 신뢰가 필요하다. 최소한 집주인인 나는 숨기는 게 있더라도 숙박객은 숨기는 게 있으면 안 된다.
“그…… 일부러 숨긴 건 아니고, 말하고 싶어도 말하기 난감한 게 하나 있긴 해요.”
“남녀 간에 얼굴이 붉어질 만큼 민감한 얘기라면 안 해도 되는데요.”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간호사인 제가 생각하기에도 좀 정신병자 같은 얘기라서요.”
“예를 들면 눈에서 이상한 창이 보인다던가?”
“맞아요. 눈에서 이상한 창이 보인…… 어?”
그녀가 손가락을 꼼질대다가 갑자기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마치 이 뼈다귀 장난감의 멋짐을 너도 알고 있냐고 묻는 듯한 골든리트리버 같아서 조금 귀여웠다.
“당신은 살아남을 자격이 있다면서 인생 경험과 성향을 토대로 생존자 직업을 정해 준다고 하지 않던가요?”
“어? 그게 뭔지 알고 계세요?!”
“저도 똑같은 경험을 했거든요. 미친 게 아니니까 일단 배에 힘 빡주고 ‘상태창’이라고 크게 외쳐 보세요.”
“밤에 시끄럽게 떠들면 고성방가…… 아, 이제 사람 없죠.”
그녀는 멋쩍은 얼굴로 헤헤 웃어 보이더니, 곧 주변 눈치 볼 필요 없이 내 말대로 배에 힘을 빡주고 크게 외쳤다.
“사, 상태창!!!!!!”
“사실 그냥 상태창이라고 말하기만 해도 돼요.”
“……?!”
실실 웃으며 잠시 그녀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감상하다가, 곧 상태창에 대해 본격적인 설명을 시작했다.
아무래도 RPG 게임에 익숙치 않은 사람이면 시스템에 대해 이해하기 힘들 것 같아서 이런저런 예시를 들어 주며 설명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처음에는 이해시키는 게 조금 어려웠지만, 머리가 제법 잘 돌아가는 사람답게 금방 적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니까 승권 씨 말대로라면 제가 특별한 시스템에 의해 각성을 했고, 간호사라는 직업을 가진 생존자가 됐다는 건가요?”
“본인의 상태창에 적혀 있는 내용을 그대로 말하시는 거라면 그런 셈이죠.”
“……신기하네요. 눈앞에 홀로그램 같은 창이 떴을 때도 놀랐지만, 이게 단순한 스트레스 과다로 인한 환각이나 망상이 아니라 상호작용이 되는 진짜 현실이라니.”
“민간인인 제가 왜 집 마당에 기관총을 두고 있는지 이해가 되시죠? 성아 씨처럼 특수한 직업과 스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그녀는 내가 처음 그랬던 것처럼 살짝 흐리멍텅한 표정으로 자신의 상태창을 조작했다.
정작 채성아의 상태창은 내 눈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가 허공에 손가락을 이리저리 갖다 대는 이상한 모양새가 됐지만, 오히려 그런 행동이 내게 안도감을 주었다.
다소 어처구니없는 상황이긴 하지만, 그녀가 나처럼 시스템의 존재를 제대로 인지하고 이 망해 버린 세상에서 적응하고자 하는 의지를 품길 바란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나라는 인물의 가치를 알아주고 알아서 조심할 테니까.
그도 그럴 것이, 당장 눈앞에 있는 내가 안락한 주거 공간과 외부로부터 몸을 지켜 줄 수 있는 방어 수단까지 두루 갖추고 있다. 이것을 은연중에 ‘특별한 직업 때문이다’라는 뉘앙스를 흘리면서 설명했으니 신경 쓰이겠지.
현대인이라면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것 3개가 있는데, 바로 부족함 없는 생활 인프라와 안락한 집, 그리고 빵빵한 인터넷이다. 그중 2개를 내가 지원해 줄 수 있다.
사실상 떠돌이 생존자나 다름없는 그녀는 안전한 정착지를, 나는 그녀 같은 전문직 종사자에 유능한 인재를 원한다.
박성호 일행을 거점 일원으로 받아들였던 것처럼, 해당 인물의 성향이 계산적이든 이상적이든 딱히 상관없다. 그저 내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면,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받아들일 뿐이다.
‘채성아가 거절한다고 해도 딱히 아쉬운 건 없다.’
유능한 인재를 영입하지 못하는 건 분명 뼈아픈 사실이지만, 그것이 내게 직접적으로 피해가 되는 일이 아니라면 굳이 매달릴 이유는 없다고 본다. 이 좁아터진 한반도에 인재가 그녀 혼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정말로 스킬이란 것도 있네요. 스킬 이름 같은 걸 외치면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거겠죠?”
“그렇죠. 예를 들면 저도 이렇게 ‘그랩훅’이라고 말하면 진짜 그랩훅이 나오거든요.”
그녀는 내 팔목에서 갑자기 나타난 그랩훅 장비를 보고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비현실이 현실의 경계를 깜빡이 없이 넘어 버렸으니 깜짝 놀랄 수밖에.
사실은 그녀가 어떤 스킬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서 일부러 자극한 감도 없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볼에 한 손을 괸 채 고민하는 표정으로 자신의 스킬을 설명했다.
“음, 제가 가진 스킬은 총 5개예요. 응급처치, 수면 간호, 영양수액 투여, 오염 예방, 야간 당직. 전부 익숙한 것들이라서 조금 놀랐어요.”
“당장 사용해 볼 수 있는 스킬이 있나요?”
“음, 응급처치나 수면 간호, 영양수액 투여는 환자를 지정해야만 사용할 수 있다네요. 당장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은 오염 예방과 야간 당직뿐인데, 야간 당직은 오랫동안 잠들지 않고도 정신상태를 멀쩡하게 유지시켜 주는 스킬이라고 하니 보여 드리기 힘들 것 같아요.”
“오염 예방은요?”
“이건 특정 대상을 지정하면 6시간 동안 모든 감염성 질병에 대한 면역력을 50%만큼 상승시켜 준다고 해요. 스킬 레벨에 따라 면역력과 유지 시간, 그리고 한 번에 지정할 수 있는 대상이 늘어난다네요.”
오직 환자를 대상으로 한 치료 스킬 3개를 제외하고서라도 오염 예방은 썩 나쁘지 않은 스킬이었다. 모든 감염성 질병에 대한 면역력이라면 필시 좀비 바이러스도 포함될 테니까.
게다가 성장의 여지가 있다고 하니 스킬에 투자를 좀 한다면 한정적인 시간 동안 좀비 바이러스에서 완전에 가까운 면역력을 확보할 수도 있다.
야간 당직은 내가 가진 야간 경계(B++) 스킬과 동일한 효과인 것 같으니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다. 굳이 짚고 넘어가자면 서로 돌아가면서 불침번 서기 딱 좋은 스킬 조합이라는 것 정도?
“일단 오염 예방이라도 한 번 사용해 볼까요?”
“그럼 좋죠. 딱히 위험해 보이지도 않으니까 부담 없이 사용해 보세요.”
내가 선뜻 권하자 그녀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결국 나를 가리키며 손바닥을 펼친 채 ‘오염 예방’이라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내 시야에 자연스럽게 변화가 나타났다.
-생존자 ‘채성아’에 의해 오염 예방(B) 스킬의 혜택을 받습니다.
-오염 예방(B) : 6시간 동안 모든 감염성 질병에 대한 면역력을 50%만큼 상승.
-주의 : 효과가 중첩되지 않음
-주의 : 감염성 질병 환자에 대한 치료 효과는 없음
“오오, 진짜 스킬 효과가 나타났네요.”
“정말요?!”
자신이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증명에 성공했기 때문일까, 조금 과하다 싶을 만큼 펄쩍 뛰어오른 그녀는 근육통도 잊고 좋아라 했다.
그러다 뒤늦게 근육통에 인상을 찡그리며 다시 주저앉았을 때는 역시 사람이 좀 달라 보였다.
피칠갑을 한 채 처절해 보이는 얼굴로 내게 말을 걸어올 때만 해도 냉혹한 살인마 내지 역전의 용사처럼 보였는데, 지금은 심신의 안정을 되찾기가 무섭게 순진무구한 여성처럼 보였으니까.
나는 흐뭇하게 웃는 척 하며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의 표정이나 눈빛을 주의 깊게 살폈다.
인간은 세상에서 가장 변화무쌍한 동물이라 마음만 먹는다면 어떤 타입이라도 될 수 있었다. 온화하고 다정다감한 사람에서 냉혹하고 잔악무도한 짐승으로 탈바꿈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어쩌면 그녀가 초면인 남자를 상대로 순진무구하게 웃어 보이는 것도, 보호받아야 하는 여성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도 사실은 계산된 연기일 가능성이 있다.
‘눈웃음이 자연스럽고 목소리에 떨림이 없다. 거짓 연기를 하는 데 망설임이 없는 타입이 아닌 이상 있는 그대로를 솔직하게 표현한 것이겠지.’
내 빈틈을 노리고 있다면 곁눈질이든 가짜 눈웃음이든 어떤 식으로든 계속 나를 관찰하기 위해 시선이 바쁘게 움직였을 터.
하지만 채성아는 따뜻한 물로 깨끗하게 씻고, 피 냄새가 나지 않는 뻣뻣한 새옷을 걸친 것 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는 눈치였다. 거기에 맛있는 쿠키와 따뜻한 코코아 한 잔까지 했으니 흐리멍텅하게 눈이 풀린 건 덤이었다.
지금 그녀는 순수하게 기쁘고 행복해서, 남자 앞인데도 조심성 없이 흐트러져 있는 상태였다.
그런 확신이 들었을 때 나는 식탁 아래에 숨겨 둔 식칼을 조심스럽게 갈무리했다.
앞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당장 집주인인 나를 처리하고 집을 빼앗으려는 기색은 없어 보이니 경계심을 낮추기로 했다.
그리고 흘러가는 분위기로 보건대 그녀도 이 안락함이 싫지만은 않은 듯했다. 하기야 그 고생을 하고서 이 안전지대에 들어왔으니 그 반동이 어마어마하겠지.
이런 걸 흔들다리 효과라고 하던가?
예상대로 채성아는 자신의 스킬이 성공적으로 시전되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간호사라는 생존자 직업과 실제 의료 지식 및 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는 모습이었다.
그 어떤 동물보다 집단에 소속되길 원하는 인간은 항상 자신의 쓰임새와 용도를 남들에게 증명하고 싶어 하는 성향이 있다.
쓸모없는 사람일수록 금세 도태된다는 이 사회의 냉혹한 현실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가 뭔가 기대하는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이는 반대로 말하면 성실하게 일하고 제 몫을 다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이라는 뜻이에요. 원한다면 필요한 만큼 저와 함께하셔도 되고, 따로 목적지나 목표가 있다면 원할 때 떠나도 상관없어요.”
내가 그녀에게 매달리는 형태로 말해선 안 된다.
나는 언제나 그녀를 떠나보내도 손해 볼 것이 없다는 식으로, 하지만 너무 공격적으로 들리지 않게끔 그녀의 자유의사를 존중하는 어조로 말하는 게 중요하다.
이로써 그녀는 부담을 느끼지 않고 나와 함께할 수 있다는 안정감과 동시에, 원한다면 언제든지 내게서 식량을 조금 얻어 자신만의 길을 떠날 수 있다는 소소한 보험까지 들게 했다.
물론 그녀가 여자이고 내가 남자인 이상 상대적으로 불편하거나 불안해하는 부분이 있겠지.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녀를 비지니스적으로만 대해야 한다.
원래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에서 빠르게 신뢰가 쌓이려면 좋은 이미지가 지속되는 것 외엔 달리 없으니까.
“그, 그럼…… 당분간 신세질게요.”
“그러세요. 아, 자기 전에 선반에 있는 방 열쇠 중 아무거나 하나 들고 올라가세요. 여긴 원래 별장을 개인 주택으로 개조한 거라서 게스트룸마다 열쇠가 따로 있거든요. 방 열쇠를 본인이 가지고 있는 게 더 낫겠죠?”
“아,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순순히 열쇠 하나를 챙겨 들었다. 말로 표현하지는 않아도 사실 초면인 남자와 한 지붕 아래에서 지낸다는 게 조금 불편했을 것이다.
나도 무려 6년 만에 또래 여성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라 살짝 쑥스럽긴 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현대 사회에서 희귀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전쟁의 참사를 겪고 돌아온 입장에서 더 이상 누군가와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은 힘들었다.
딱히 생리적으로 거부감이 든다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그녀와 어렵지 않게 대화를 나눴으니까. 그냥 내가 이 사회와 사람들에게 질려 버렸을 뿐이다.
‘도움이 된다면,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어느 정도 선을 지킨다는 전제하에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는 게 최선이겠지.’
정으로 호소받아 누군가를 대신해서 희생하는 짓은 이제 지쳤다.
나는 지금 한반도 북부 점령군 겸 치안유지군 소속 소총병 이승권이 아니라 그냥 ‘퇴역병’ 이승권에 불과하니까.
“오늘은 늦었으니 서로 정리하고 이만 자죠.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가져다 써도 상관없지만 자기가 쓴 만큼 목록을 따로 적어 두세요.”
“주의할게요.”
그녀에게 쿠키 한 접시를 더 내준 나는 먼저 방으로 돌아갔다.
방으로 돌아가기 전, 그녀가 내게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싶어 한다는 분위기를 엿보았기에 일단 거점 일원으로 지정해 두었다. 이러는 편이 서로에게 더 안정적일 것 같았다.
믿을 수 있을 만한 사람을 거점 방위자, 혹은 거점 일원으로 지정해 둬서 미연에 배신을 방지하는 시스템은 참 괜찮은 것 같다.
‘내일은 못다한 정찰이나 마저 해야겠네.’
정찰하는 김에 총이나 탄약도 좀 더 확보해 둬야겠다.
근 몇 년 만에 누군가와 편하게 대화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지금껏 자의로 타인을 들인 적 없었던 집에 귀한 손님을 들였기 때문일까.
평소라면 불면증 때문에 말똥말똥했을 눈이 침대에 눕자마자 스르륵 감겼다.
혹시 나는 내일을 기대하는 것인가? 이렇게나 망가져 버린 세상에서?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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