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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역병의 아포칼립스-26화 (27/227)

26화 생존기 (26)

우리 집 근처에 대책 없이 숨어 있던 사람을 갑자기 집에 들여놓고 이런 말 하는 것도 뭣하지만, 나는 딱히 그녀가 여자라서 집에 들여준 것은 절대 아니다.

행색이 워낙 남루해 보이기도 했고, 고생깨나 한 것 같은 기색이 다분해서 약간의 선의를 베풀 겸 호기심이 일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저런 모습을 보고도 ‘여긴 내 집이니까 이제 갈 길 가세요’라고 말했다면 괜히 찝찝했을 거다.

내가 친절을 베풀지 않아서 찝찝한 게 아닌, 저런 사람이 내 집 근처에 죽치고 눌러앉을까 봐 찝찝함을 느꼈겠지.

‘사실 진짜 중요한 건 정보니까.’

우선 보일러를 틀고 그녀를 2층 욕실로 올려 보낸 나는 느긋하게 짐을 정리했다.

이런 세상에서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은 저렇게 외로운 늑대처럼 홀로 떠도는 사람이지만, 그런 타입일수록 알고 있는 정보도 많다.

기본적으로 뒤를 봐주는 동료가 없기 때문에 닥치는 대로 주변 정보를 습득해서 살아남으려는 경향이 짙기 때문이다.

그러니 가진 게 많은 내가 약간의 리스크를 감수하고서라도 먼저 선의를 베풀어서 정보를 얻는 것이 합리적이다.

거점에 처박혀 있어야 제몫을 다할 수 있는 내게 이리저리 떠돌면서 여러 정보를 습득한 사람은 반드시 대접해야 하는 손님이었다.

“편의점에서 챙겨온 음식들 중 보관기한이 길고 상온 보관이 가능한 것들은 지하 창고에, 짧은 것들은 냉장고에 넣어 두고 빨리 해치워야겠어.”

인벤토리가 워낙 편리해서 무게 제한만 없다면 모든 개인 물품과 식량을 보관해 두고 싶지만, 아쉽게도 레벨에 따른 무게 제한이 있는 탓에 주기적으로 이렇게 배출(?)시켜 줘야 했다.

그래도 레벨 5 인벤토리라 그런지 참 잘 먹고 잘 싼다.

내 짐 정리가 끝나자 이번에는 위에서 목욕하고 있는 여성, 채성아가 가져온 짐이 문제였다.

나는 조심성 없게 그녀가 거실에 두고 간 짐 가방을 가만히 살펴보았다. 곳곳에 눌러붙은 핏자국과 낙엽, 먼지 때문에 깨끗하게 세탁해도 두 번 쓰기는 힘들 것 같았다.

짐작컨대 도로를 통해 움직인 것이 아니라 산이나 들판을 마구 헤집고 다녀서 이렇게 더러워진 것이리라.

‘하기야 그렇게나 피칠갑을 하고 있었는데 도로고 산이고 따질 겨를이 어디 있었겠느냐마는.’

짧게 통성명을 나눴을 때 그녀는 김해 북부 진영읍에서 왔다고 했다.

서울에서부터 시작된 미지의 폭동 사태가 곧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자 자연스럽게 김해 내부에서도 무법자들이 활보하기 시작했고, 당시 간호사로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던 그녀는 밀려들어오는 환자, 그리고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상 증세에 빠져 발광하는 환자들을 보고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껴 서둘러 탈출했다고 한다.

일단 씻고 오라고 했기 때문에 아직 뒷내용을 다 듣지 못했지만, 아마도 그녀는 여자 혼자 움직이느라 온갖 일을 다 겪었을 것이다.

세상이 망했으니 나도 막 살아 보겠다는 마인드를 가진 무법자들의 습격, 지하철 역에서 둑 터진 댐처럼 쏟아져 나온 좀비들의 습격은 아무리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라고 해도 혼을 쏙 빼놓는 경험이었겠지.

내 짐작이 맞다면 처음에는 부산과 가장 가까운 김해를 벗어나기 위해 밀양시로 향했을 것이다. 그러다 밀양으로 이어지는 다리가 막힌 것을 봤거나, 도저히 여자 혼자서는 뚫고 나갈 수 없을 것 같은 위협과 마주쳤고, 결국 발걸음을 돌렸을 게 분명하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살아남고자 움직이다 보니 부득이하게 손에 피도 묻혔을 것이고, 짧은 시간에 온갖 죽음의 위협을 넘나들면서 마침내 내가 통치하는 마을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녀 나름대로 양산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목인 수관교를 떠올렸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수관교는 그녀가 오기 전에 폭파되었다.

마을은 이미 내가 싹 청소했기 때문에 좀비도 없었겠지만, 식량도 없는 건 매한가지라 결국 우리 집까지 흘러들어왔지 싶다.

텅 빈 유령 마을에서 유일하게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는 집을 발견했으니 끌리지 않고는 못 배겼을 터. 마치 운명처럼 이 집에 이끌리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나는 운명 따위 믿지 않지만, 사람 사는 인생이라는 게 참 기구하다는 것만은 동의한다.

나도 설마 6년 전까지는 자신이 2차 한반도 남북전쟁의 주역이 될 줄은 몰랐으니까.

‘돈 안 내고 공짜로 백두산 구경했으니 운 좋은 줄 알라고 지껄이던 똥별 새끼 밑에서 명령받던 것도 참 기구한 일이었지.’

어찌나 그 새끼를 조지고 싶었던지. 오죽했으면 남몰래 그 새끼 막사에 북한군 수류탄 까넣고 적습이라고 외치고 싶었을까.

싫은 생각은 달콤쌉싸름한 레모네이드 한 모금으로 가볍게 흘려넘기면서, 그녀가 들고 왔던 컴파운드 보우를 살폈다.

컴파운드 보우는 크게 스포츠용과 수렵용으로 나뉘는데, 스포츠용은 굉장히 비싸고 관리도 어려워서 어지간한 전문가가 아니라면 대부분 수렵용을 많이 구매한다고 들었다.

사냥 다큐멘터리 같은 것을 보면 만반의 준비를 갖춘 듬직한 아재가 나와서, 비장함이 서린 눈빛으로 숲속에 몸을 숨겨 사냥감을 몰색하는 장면이 단골처럼 등장한다.

그런 사람들이 가지고 다니는 장비가 바로 이 컴파운드 보우였다.

시끄러운 총과 달리 조용하고, 다루기 쉽고, 무엇보다 낚시 같은 짜릿한 손맛이 느껴진다고 한다.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총포, 도검류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대한민국이 컴파운드 보우는 아무런 법적 규제를 걸어 두지 않았다는 점이다. 덕분에 석궁과 맞먹는 위력을 가진 수렵용 컴파운드 보우도 일반인이 쉽게 소지할 수 있다.

채성아가 가지고 온 컴파운드 보우는 전체적으로 사이즈가 조금 컸고, 사용하는 화살도 제법 두꺼웠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수렵용 컴파운드 보우였다. 아마 본래 주인도 그녀가 아니라 듬직한 인상을 가진 아재일 것이다.

사람을 치료하느라 바쁜 여성 간호사가 수렵 매니아인 것도, 이렇게 하드한 수렵용 컴파운드 보우를 가지고 다니는 것도 말이 안 되니까.

“아.”

컴파운드 보우를 한창 살피고 있던 그때, 등 뒤에서 들려오는 짤막한 탄성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따뜻한 물로 깨끗하게 씻고 나온 그녀는 죽음을 뚫고 온 역전의 용사 같은 분위기는 온데간데없고, 화사한 꽃이 만개하는 듯한 포근한 기운을 내뿜으며 서 있었다.

일단 내 옷을 빌려주긴 했지만, 정작 옷 주인인 나보다 옷빨을 더 잘 소화하고 있었다.

‘옷은 날개에 불과하다’, ‘패션의 주인공은 결국 옷을 입는 자기 자신’이라고 말하는 패션스타들이 갑자기 미워졌다.

“그건…… 저희 아버지가 쓰시던 컴파운드 보우예요. 아버지가 수렵 매니아라 집에 남는 장비들이 좀 있었거든요.”

“그럴 것 같았어요. 여자가 쓰기엔 좀 하드한 모델이거든요.”

수렵용 컴파운드 보우는 기본적으로 크고 튼튼한 데다 화살도 카본 소재이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건장한 남성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완전 구식인 각궁이나 장궁에 비하면 훨씬 쏘기 쉽지만, 익숙하지 않은 일반인이 사용하기엔 많이 빡세다.

채성아는 생존 본능이 워낙 강해서 몸이 축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용했을 것 같은데, 팔뚝이나 손에는 자잘한 상처가 많았다.

그래도 위력이 석궁급인 수렵용 컴파운드 보우라 어찌어찌 적들을 처리할 수는 있었던 것 같다.

온갖 고생을 하다 낯선 남자의 집에서 오랜만에 온수 목욕을 했기 때문일까, 그녀는 긴장이 많이 풀린 얼굴로 식탁 앞에 앉았다.

시원하게 목욕 한판 조지고 나면 무조건 탄산음료나 맥주 한 캔을 까는 게 국룰이지만,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사람에게 그런 대접을 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마음이 진정되는 따뜻한 코코아에 우유를 섞어 내놨다. 겸사겸사 함께 즐길 수 있는 쿠키도 내놓으니 풀려 있던 그녀의 눈이 갑자기 또렷해졌다.

“머, 먹어도 되나요?”

“굶으라고 할 거였으면 집에 들이지도 않았겠죠. 편하게 드세요.”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 시국에 모르는 사람을 따라 집에 들어간다는 생각을 할 리가 없지만, 그녀는 온갖 고생을 하며 굶주린 탓에 뇌에 당분이 부족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따뜻한 코코아와 쿠키를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먹어치운 그녀는 뇌에 다량의 당분이 공급되는 쾌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 느낌 나도 알지.

목이 꽉꽉 막힐 때 까지 피자와 치킨을 흡입하다가 콜라 한 잔 들이켜면 비슷한 체험을 할 수 있다.

딱 봐도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 사람에게 다짜고짜 라면이나 고기 같은 기름진 음식을 대접할 수는 없었기에, 일단 먹기 편한 쿠키를 좀 더 내주었다.

그녀의 식욕이 어느 정도 돌기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너무 많은 양을 먹이면 탈이 날 수도 있으니, 적절하게 양을 조절해서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녀의 맞은편에 앉은 나는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를 것 같은 짐 가방을 사이에 두고 본격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이제 대접을 한 만큼 돌려받을 차례였다.

“그래서 조금 전에 진영읍 쪽에서 내려오셨다고 하셨는데, 밀양 바로 아래에 있던 그쪽은 어땠나요?”

“아, 이렇게 외진 곳에 살고 계셨다면 모를 수도 있겠네요. 사태가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대구 쪽에서 내려온 피난민이 제법 있었어요. 서울에서 무슨 일이 터진 것 같으니 일단 안전한 남부지방으로 내려왔다고 하더라고요.”

“피난민들은 계속 남하하던 추세였나요? 아니면 어느 지점에서 멈추고 사태가 끝나길 기다리는 눈치였나요?”

“일단 통제가 되질 않으니 전체적으로 질서가 없고 우왕좌왕하는 느낌이었어요. 제가 근무하던 병원에도 환자가 아닌데 대합실에 무단으로 들어와서 머무르던 사람들이 제법 있었거든요. 어딘가 급하게 떠나기보단 일단 한 지점에 머무르면서 분위기를 살피는 것 같았어요. 정 안 될 것 같다 싶으면 배를 타고서라도 도망치겠다 같은 느낌으로…….”

나는 부산발 좀비가 유입되기 전 부터 대구에서 이미 피난민이 사방팔방으로 퍼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물론 경부선고속도로 때문에 서울과 대구는 직통으로 연결되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대구 정도나 되면 걱정해서 바깥으로 대피하기보단 일단 기다리는 게 합리적인 도시 아닌가?

군인과 경찰들이 나선다면 어떻게든 주요 도로를 봉쇄하고 산을 방패 삼아 무한 존버 모드에 들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

‘어쩌면 서울에서 터진 일이 생각보다 심각해서 민중이 크게 자극받았을 가능성도 있지.’

나야 집구석에 처박혀서 하루 종일 넷플러스나 시청하던 밑바닥 인생이라 서울 시민들이 북 치고 장구 치든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막상 대한민국 국민들은 서울을 일종의 재난 경보기처럼 생각했을 수도 있다.

2차 남북전쟁이 터진 것도 따지고 보면 서울이 먼저 북한의 ‘불벼락’ 스킬에 선빵을 맞았기 때문이니까.

서울에서 뭔가 일이 터지면 그것이 전국구 규모로 확대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던 것 아닐까?

“그럼 병원에서 근무하시다가 갑자기 탈출을 감행하게 된 이유는 뭔가요? 그래도 비상시국에 병원을 지켜 주는 경찰이나 군인이 있어서 나름 안전했을 텐데요.”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짐을 챙겨서 병원으로 옮겨 두고 아예 병원에서 숙직을 하자고 결심했는데…… 봐 버렸어요.”

“뭘요?”

“유행병 감염자가 갑자기 이상 증세를 보이는 것을요. 요 몇 년간 변이가 워낙 자주 일어나서 환자마다 증세가 조금씩 달라지는 건 익숙했지만, 그런 증세는 간호사 생활하면서 처음 봤어요.”

쿠키를 먹을 때만 해도 행복해 보였던 그녀의 표정이 다시금 어두워졌다.

“이성을 잃고, 공격성이 두드러지고, 마치 통증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자해하듯 몸부림치는 광증이 도졌어요. 처음엔 의료진들이 어떻게든 하려고 했는데, 약도 듣지 않아서 패닉이 일어났었어요.”

“그래서 병원을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한 건가요?”

“정확히는 환자들 중 일부가 몸의 구속을 해제하고 의료진을 습격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포기했어요. 병원장님 지시로 병동 전체를 폐쇄하고 군인과 경찰의 도움을 기다리자는 얘기가 나왔었는데, 그때부터 병원은 안 되겠다 싶었죠.”

나는 그녀가 굉장히 말을 순화했음을 눈치챘다.

날뛰던 환자들이 갑자기 의료진을 습격했다면 분명 끔찍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을 것이고, 아마도 좀비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환자들이 다른 멀쩡한 환자들까지 덮치면서 2차 감염이 빠르게 확산되었을 터.

끔찍한 비명과 살육이 난무하는 병동을 폐쇄하기 위해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해를 입었을지 생각해 보면 확실히 표현을 순화한 게 맞았다.

그렇게 병원을 빠져나온 채성아는 간단하게 짐을 챙겨서 혼란스러운 거리를 벗어나던 도중에 좀비 사태를 맞이했을 것이다.

부산발 좀비가 부산을 휩쓸면서 김해, 양산, 울산으로 퍼져 나간 것도 있지만, 그 이전에 국내에서 발생한 좀비들이 각 지역을 마구 들쑤시기 시작했다는 게 내 추측이다.

굳이 순번을 따지자면 국내에서 발생한 좀비가 부산발 유입 좀비보다 좀 더 빨랐다고 봐야겠지. 그 핵심이 서울이었고.

길면 길고 짧으면 짧다고 할 수 있는 그녀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나니 시간은 어느덧 저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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